[성탄절] 진리의 성탄절
본문
한 기차를 타고 가는 두 장교가 있었습니다. 잉가솔이라는 대령과 루 월래스라는 장군이었습니다. 잉가솔 대령이 "예수라고 하는 친구 있는데 예수쟁이들이 그를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니,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미친 소리를 하는데 바로 그 예수를 소재로 하여 마리아와의 관계를 연애 소설로 꾸미면 큰 돈벌이가 될 것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월래스 장군도 "그렇겠다"고 응수했습니다. 그 후 이 월래스 장군은 제대를 하였는데 할 일을 찾다가 그 옛날 기차에서 잉거스 대령이 한 말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소재로 연애소설을 쓰기로 마음먹고 성경을 읽기 시작하였으며, 실제로 성지에 가서 자료까지 수집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예수를 비난하기 위하여, 예수를 팔아서 돈을 벌기 위하여 성경을 읽기 시작하였는데 그 성경이 그의 마음을 변화시키지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월래스는 성경을 읽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의자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고, "진실로, 진실로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라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소설을 썼는데 그것이 바로 유명한 벤허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반대자의 마음도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경북 영양군 일월사 주지의 아들인 김진규 스님이 있었는데, 하루는 시주를 받고 있는 중에 한 청년이이 나오더니 "스님! 제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책을 드릴 테니 이 책을 읽고 예수 믿고 구원받으세요!" 하면서 책을 시주 보따리 속에 넣어 주더라고 합니다. 김진규 스님은 화가 나기도 하고, 기가 막히기도 하고,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여서 어디에다 버릴까 생각을 하다가 왠지 호기심이 생겨서 집에 갔습니다. 그리고 예수쟁이들이 무엇을 믿나 알아보기 위하여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단숨에 다섯 번을 읽은 후에 불경의 가르침과 전혀 다른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특히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라는 사실을 깨닫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되고 후에 신학교를 졸업한 후에 절간에 가서 복음을 증거하는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중이 읽어도 그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오늘은 성서주일이자 대강절입니다. 그래서 진리 문제를 생각하여 대강절의 의미와 성서주일 문제를 함께 해결하려고 합니다.
다른 종교도 진리를 말하지만 기독교인들처럼 진리를 많이 말하는 종교는 없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진리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진리로 구원 받고, 진리를 배우고 진리를 깨닫고 진리를 체험함으로 신앙생활이 시작되고, 또 진리를 깨닫고 먹음으로 신앙생활이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에서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후13:8)고 하였습니다.
먼저, 성경은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을 모두 진리의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진리의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시편 31:5에서는 "진리의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구속하셨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아예 진리 자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세례요한이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한 것을 가리켜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였다'고(요 5:33)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스스로 자신을 진리라고 하였습니다(요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여호와 하나님이시니라"(1절)라고 하였고, 이어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14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말씀은 곧 진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말은 헬라적으로 하면 불가능한 말입니다. 헬라적으로 하면 말이 진리요, 어떤 원리가 진리라고 해야 맞습니다. 그러나 사람 자신을 진리라고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자신을 진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도 예수님도 진리라고 한 곳이 있지만, 성령을 진리의 영이라고 많은 곳은 너무나 많습니다. "저는 진리의 영이라"(요 14:17)고 했고,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 15:26)라고 했으며, 그리고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3)라고 했습니다.
또한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7:17에서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시 119:142에서는 "주의 의는 영원한 의요 주의 법은 진리로소이다"라고 했고, 151절에서는 "여호와여 주께서 가까이 계시오니 주의 모든 계명은 진리니이다"라고 했으며, 160절에서는 "주의 말씀의 강령은 진리오니 주의 의로운 모든 규례가 영원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을 인함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골 1:5)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대할 때 진리를 얻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든지, 예배를 드든지, 성경공부를 하든지, 또는 설교를 듣든지 진리를 얻어야 합니다. 진리가 남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내 속에 진리가 깊어져 가는 것을 느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앙생활을 했다기보다 도덕생활이나 수양생활을 했다고 해야 맞을 것입니다. 오늘 날 말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수양생활이나 도적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진리의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진리이십니다. 그리고 성령은 진리의 영입니다.
기독교는 진리의 종교인데 그것도 풍성한 진리의 종교입니다. 우물가에서 목말라 죽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잔칫상 앞에서 배고파 굶어 죽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풍성한 은혜의 주님 앞에서 굶어죽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우리 동네 샛강에 진주가 가득 찼다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양복 입은 사람은 체면 때문에 절대로 들어가지 않겠지요 그리고 TV에 미친 사람은 오지 않겠지요 TV가 중요하지 그 따위 진주가 중요하겠습니까 아닐 것입니다. 온 동리 사람들이 강가로 모여 온 동리가 텅텅 빌 것입니다. 서울 사람들까지 다 이곳으로 모일까 걱정스럽습니다. 그렇다면 이 성경 속의 진주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기에 하늘의 진주가 가득 찼습니다.
미국 시카고의 대 화재는 유명한 화재였습니다. 시카고 전 시가지를 불바다로 만들었습니다. 그 때 무디 선생이 섬기는 교회도 불에 탔습니다. 그 때 한 기자가 무디에게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평소에 선생께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그 백성들을 사랑하시고 어떤 위험에서라도 구해 주신다 말씀하셨는데 교회가 불에 탄데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곰곰히 듣고 있던 무디는 "지금 우리 교회는 너무 성도가 많이 모여서 여호와 하나님께 더 큰 건물을 짓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중이었는데 이렇게 잿더미가 되었으니 이젠 교회를 더 크게 짓는 일만 남은 셈이지요"라고 마치 예배당을 지을 돈이 충분히 있는 것처럼 대답했습니다. 기자는 다시 "그러면 교회를 지을 돈은 무사하게 보관하셨다는 말입니까" 그러자 무디 목사님은 자신의 오른손에 꼭 잡고 있던 낡은 성경책을 보이며 "여기 이렇게 여호와 하나님의 금고가 있지 않소!"라는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그 후 무디는 영국교회 성도들의 헌금으로 불탄 교회 자리에 더 큰 예배당을 지어 여호와 하나님께 봉헌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에게 성경 말씀과 성령의 역사에 대하여 오해가 많습니다. 주님의 말씀도 진리요, 성경도 진리요, 여호와 하나님도 진리의 여호와 하나님이요, 성령은 진리의 영이요, 예수님은 진리라고 하니까, 성경 자체가 진리란 말인지, 성령이 역사할 때만 진리라는 말인지 혼돈스럽게 느낍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할 때 "성경을 통하여 은혜를 주시고, 말씀을 통하여 성령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이 말이 다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기도하는 것은 성령의 사역을 목적으로 하고 성경 말씀을 수단으로 하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 말 속에는 무의식적으로 직통계시를 믿는 신비주의적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좋은 기도는 "말씀과 더불어 역사해 주옵소서"라고 하고 또 "말씀 자체가 은혜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이 좋습니다. 성령 자체가 진리의 영입니다. 그리고 성경 자체가 구원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오늘 세례를 받은 분들이 있습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구원의 확신도 지식적으로 하느냐, 은사 면에서 하느냐, 기도 응답의 면에서 하느냐, 체험적으로 하느냐, 감정적으로 하느냐가 다 다르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최종적으로 불변하는 확신은 성경 말씀이라는 점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지식적으로, 은사 면에서, 심지어 기도 응답의 면에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도 말씀으로 확증되지 않았다면 불완전한 것이며, 자기 중심적 확신일 수 있으며, 그리고 거짓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말씀을 넘어서지 못하고 말씀을 앞서지 못하고 말씀을 떠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요한복음 3:16 하나만 바르게 고백하여도 그것으로 구원은 충분한 것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한 편지에서 이 점이 잘 나타납니다.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살후 2:13)라고 했습니다. 즉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얻은 구원'을 동일하게 취급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우리가 평소에는 성경을 읽고 들어도 성령이 역사하기 전에는 그 권위와 그 능력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성령이 역사한 후부터 성경의 바른 권위를 인정하게 됩니다. 그렇다 보니까 성경은 성령을 체험하게 하는 수단이요 통로라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성경도 성령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성령의 가장 객관적 사역은 성경 기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이 역사하기 전에는 성경은 그냥 훌륭한 도덕서적이요, 역사서적이요, 법률서적은 될 수 있어도 구원의 서적은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사역과 성경의 사역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함께 더불어 역사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이 진리라는 것을 알게 된 것도, 예수님 자신을 진리라고 하고 있는 그것도, 성령이 진리의 성령이라는 점도, 그리고 성경이 진리라는 것마저도 성경을 통하여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진리가 아니면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1:13에서는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사랑하는 것이 진리를 사랑하는 최선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맛이 꿀보다 더 달아야 하고(시 119:103),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정금보다 더 사랑해야 하고(시 119:127), 재물의 즐거움보다 더 커야(시 119:14) 합니다. 아예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기업으로 삼아야 합니다. 성도는 진리를 얻는 기쁨, 진리를 배우는 기쁨, 진리를 따라 사는 기쁨, 그리고 진리를 증거하는 기쁨이 충만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이면 자식 자랑, 돈 자랑, 건강 자랑, 음식 자랑, 집 자랑, 보석 자랑, 지식 자랑, 미모 자랑, 힘 자랑, 가문 자랑 등을 일삼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깨달은 진리를 자랑하고 진리를 실천한 기쁨을 자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성도는 진리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진리로부터 나와서 진리로 말미암다가 진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상하게도 히브리말의 진리란 단어 '에메트'란 단어는 히브리어 첫 자음인 '알레프'와 중간 자음인 '민'과 끝 자음인 '타우'로 되어 있습니다. 마치 진리로 시작하고 진리를 따라야 하고 그리고 진리로 귀결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생각됩니다.
처음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도 진리의 맛을 알면 설교가 재미가 있어집니다. 병든 사람은 성경을 보면 수면제처럼 졸리게 되어 있습니다. 밥은 수도 없이 먹고 먹었어도 물리지 않는 것처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듣고 들어도 또 듣고 싶어야 건강한 사람입니다. 은혜를 받기 전에는 짧기를 바라던 설교가 은혜를 받으면 더 듣고 싶어집니다. 제 설교가 비교적 긴 편인데도, 어떤 분이 저보고 목사님 설교를 더 길게 해 달라고 하는 분도 있습니다. 은혜를 사모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교회 장로님은 몇 시간 걸려서 예배당에 와서 20분 짜리 설교 듣고 가려니 섭섭하다고 목사에게 항의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이왕에 믿는 예수라면 말씀을 달게 듣는 성도되기 바랍니다.
유대인들은 아이가 겨우 사물을 보며 구분하게 될 때, 구약 성서를 꺼내어 그 표지에 꿀을 발라서 빨아먹게 한 다음 "이 꿀이 달 듯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너희 영혼에 달고, 네 인생에 있어 모든 지혜를 주신다. 그러므로 너는 죽을 때까지 이 말씀을 읽고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친다고 합니다.
바른 신앙생활을 하는데 중요한 것은 성경을 바르게 깨닫고 아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없으면 참된 신앙생활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 신앙의 길을 물론 또 인생의 길까지 제시해 줍니다. 저는 촌스러워서 길이 곧게 난 강남에서 종종 길을 잃어버립니다. 어느 쪽이 동쪽이고 어느 쪽이 서쪽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럴 때 생각에는 왼쪽으로 가야 목적지가 나오는 것 같은데 표지판은 오른 쪽으로 가라고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내가 생각하는 방향을 포기하고 표지판이 지시하는 방향으로 갑니다. 그리고 가다보면 방향도 잡히고 길도 알게 됩니다. 성경은 바로 우리의 신앙의 길과 방향을 제시해 주고 또 인생의 길과 방향을 제시해 주는 것입니다. 내 생각, 내 감각을 버리고 성경이 지시하는 방향으로 가다 보면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김대중 대통령이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사형선고를 받고 감옥에서 견딜 수 있었던 힘은 성경에서 얻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우리에게 지혜와 힘을 줍니다.
어머니와 아들이 길을 가는데 눈보라가 너무 몰아쳐서 어디가 길인지 어디가 수렁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경험 많은 어머니는 그것을 잘 알 수 있었지만 아이들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말합니다. "내가 걸어가는 발자국만 보고 그리로 따라오너라"고 하였습니다. 눈밭에 난 어머니의 발자국을 보고 아이들은 수렁에 빠지지 않고 목적지에 이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바로 어머니의 발자국 같은 것이 성경이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 인생 길에 예수만 보고 가야 합니다. 때로 우리 앞에 놓인 길은 우리가 지나가 보지 못한 길이기에 가야할 길인지 가지 말아야 할 길인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 앞에 가시는 주님을 따를 때 내가 가야할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오늘 당신의 앞 길이 어두워 보이고, 구름이 꽉 끼어 있습니까 어두운 그림자가 당신 주위를 휩싸고 있습니까 당신의 지도자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앞길을 알고 계십니다. 당신의 눈을 그 분께 고정시키고 그 분을 따르면 처음에는 당신이 알지 못하는 서투른 길도 곧 익숙한 길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욥은 "나의 가는 길은 오직 그가 아시나니"(욥 23:10)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경만 보고 성경이 가르치는 그 길로 가면 됩니다. 트루만은 미국의 33대 대통령을 지낸 뒤 고향 미주리주 인디펜던스에서 독서와 봉사로 말년을 보냈습니다. 어느 날 오래된 도서관에서 견학 왔던 한 초등학생이 "할아버지는 어렸을 때 공부도 잘했고 지도력도 있었죠"라고 물었습니다. "그 반대였지. 눈이 나빠 안경 없이는 사물을 분간하지 못할 정도였고 열등생이었으며 큰 소리에 벌벌 떠는 심약한 아이였어" "그런데 어떻게 대통령까지 되실 수 있으셨어요" "나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어. 그리고 성경말씀을 늘 읽었지"라고 했습니다. 미국의 클리브랜드 대통령은 그의 대통령 취임식장에서 "방탕한 청년이 오늘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은 오직 성경의 힘입니다. "라고 울먹였다고 합니다. 이처럼 성경은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에 대하여 우물안 개구리와 같은 존재들입니다. 우물 안에서 태어나 우물 만 보고 살던 우물 속에 밖에서 살던 개구리 한 마리가 빠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밖의 넓은 세상을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우물 안의 개구리가 "그 세상이 이렇게 넓더냐"라고 팔을 벌리자, "그보다 더 크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러면 이만큼 크냐"고 흉내를 내가다 그만 배가 터져서 죽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진리에 대한 개념도 같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전국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보듯 보고 다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내가 가른 길만 알고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경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능하면 넓게 알고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이 더 유리합니다. 그래야 위기를 대처할 능력이 생깁니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가야할 길만은 알고 가야합니다. 저는 집회를 갈 때마다 꼭 가야할 길만 알고 갑니다. 바르게 가르쳐 준 길이라면 그대로 가면 내가 갈 목적지에 이르게 됩니다.
성경은 이렇게 반대자의 마음도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경북 영양군 일월사 주지의 아들인 김진규 스님이 있었는데, 하루는 시주를 받고 있는 중에 한 청년이이 나오더니 "스님! 제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책을 드릴 테니 이 책을 읽고 예수 믿고 구원받으세요!" 하면서 책을 시주 보따리 속에 넣어 주더라고 합니다. 김진규 스님은 화가 나기도 하고, 기가 막히기도 하고,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여서 어디에다 버릴까 생각을 하다가 왠지 호기심이 생겨서 집에 갔습니다. 그리고 예수쟁이들이 무엇을 믿나 알아보기 위하여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단숨에 다섯 번을 읽은 후에 불경의 가르침과 전혀 다른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특히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라는 사실을 깨닫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되고 후에 신학교를 졸업한 후에 절간에 가서 복음을 증거하는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중이 읽어도 그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오늘은 성서주일이자 대강절입니다. 그래서 진리 문제를 생각하여 대강절의 의미와 성서주일 문제를 함께 해결하려고 합니다.
다른 종교도 진리를 말하지만 기독교인들처럼 진리를 많이 말하는 종교는 없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진리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진리로 구원 받고, 진리를 배우고 진리를 깨닫고 진리를 체험함으로 신앙생활이 시작되고, 또 진리를 깨닫고 먹음으로 신앙생활이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에서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후13:8)고 하였습니다.
먼저, 성경은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을 모두 진리의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진리의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시편 31:5에서는 "진리의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구속하셨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아예 진리 자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세례요한이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한 것을 가리켜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였다'고(요 5:33)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스스로 자신을 진리라고 하였습니다(요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여호와 하나님이시니라"(1절)라고 하였고, 이어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14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말씀은 곧 진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말은 헬라적으로 하면 불가능한 말입니다. 헬라적으로 하면 말이 진리요, 어떤 원리가 진리라고 해야 맞습니다. 그러나 사람 자신을 진리라고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자신을 진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도 예수님도 진리라고 한 곳이 있지만, 성령을 진리의 영이라고 많은 곳은 너무나 많습니다. "저는 진리의 영이라"(요 14:17)고 했고,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 15:26)라고 했으며, 그리고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3)라고 했습니다.
또한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7:17에서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시 119:142에서는 "주의 의는 영원한 의요 주의 법은 진리로소이다"라고 했고, 151절에서는 "여호와여 주께서 가까이 계시오니 주의 모든 계명은 진리니이다"라고 했으며, 160절에서는 "주의 말씀의 강령은 진리오니 주의 의로운 모든 규례가 영원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을 인함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골 1:5)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대할 때 진리를 얻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든지, 예배를 드든지, 성경공부를 하든지, 또는 설교를 듣든지 진리를 얻어야 합니다. 진리가 남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내 속에 진리가 깊어져 가는 것을 느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앙생활을 했다기보다 도덕생활이나 수양생활을 했다고 해야 맞을 것입니다. 오늘 날 말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수양생활이나 도적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진리의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진리이십니다. 그리고 성령은 진리의 영입니다.
기독교는 진리의 종교인데 그것도 풍성한 진리의 종교입니다. 우물가에서 목말라 죽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잔칫상 앞에서 배고파 굶어 죽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풍성한 은혜의 주님 앞에서 굶어죽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우리 동네 샛강에 진주가 가득 찼다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양복 입은 사람은 체면 때문에 절대로 들어가지 않겠지요 그리고 TV에 미친 사람은 오지 않겠지요 TV가 중요하지 그 따위 진주가 중요하겠습니까 아닐 것입니다. 온 동리 사람들이 강가로 모여 온 동리가 텅텅 빌 것입니다. 서울 사람들까지 다 이곳으로 모일까 걱정스럽습니다. 그렇다면 이 성경 속의 진주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기에 하늘의 진주가 가득 찼습니다.
미국 시카고의 대 화재는 유명한 화재였습니다. 시카고 전 시가지를 불바다로 만들었습니다. 그 때 무디 선생이 섬기는 교회도 불에 탔습니다. 그 때 한 기자가 무디에게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평소에 선생께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그 백성들을 사랑하시고 어떤 위험에서라도 구해 주신다 말씀하셨는데 교회가 불에 탄데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곰곰히 듣고 있던 무디는 "지금 우리 교회는 너무 성도가 많이 모여서 여호와 하나님께 더 큰 건물을 짓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중이었는데 이렇게 잿더미가 되었으니 이젠 교회를 더 크게 짓는 일만 남은 셈이지요"라고 마치 예배당을 지을 돈이 충분히 있는 것처럼 대답했습니다. 기자는 다시 "그러면 교회를 지을 돈은 무사하게 보관하셨다는 말입니까" 그러자 무디 목사님은 자신의 오른손에 꼭 잡고 있던 낡은 성경책을 보이며 "여기 이렇게 여호와 하나님의 금고가 있지 않소!"라는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그 후 무디는 영국교회 성도들의 헌금으로 불탄 교회 자리에 더 큰 예배당을 지어 여호와 하나님께 봉헌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에게 성경 말씀과 성령의 역사에 대하여 오해가 많습니다. 주님의 말씀도 진리요, 성경도 진리요, 여호와 하나님도 진리의 여호와 하나님이요, 성령은 진리의 영이요, 예수님은 진리라고 하니까, 성경 자체가 진리란 말인지, 성령이 역사할 때만 진리라는 말인지 혼돈스럽게 느낍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할 때 "성경을 통하여 은혜를 주시고, 말씀을 통하여 성령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이 말이 다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기도하는 것은 성령의 사역을 목적으로 하고 성경 말씀을 수단으로 하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 말 속에는 무의식적으로 직통계시를 믿는 신비주의적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좋은 기도는 "말씀과 더불어 역사해 주옵소서"라고 하고 또 "말씀 자체가 은혜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이 좋습니다. 성령 자체가 진리의 영입니다. 그리고 성경 자체가 구원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오늘 세례를 받은 분들이 있습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구원의 확신도 지식적으로 하느냐, 은사 면에서 하느냐, 기도 응답의 면에서 하느냐, 체험적으로 하느냐, 감정적으로 하느냐가 다 다르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최종적으로 불변하는 확신은 성경 말씀이라는 점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지식적으로, 은사 면에서, 심지어 기도 응답의 면에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도 말씀으로 확증되지 않았다면 불완전한 것이며, 자기 중심적 확신일 수 있으며, 그리고 거짓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말씀을 넘어서지 못하고 말씀을 앞서지 못하고 말씀을 떠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요한복음 3:16 하나만 바르게 고백하여도 그것으로 구원은 충분한 것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한 편지에서 이 점이 잘 나타납니다.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살후 2:13)라고 했습니다. 즉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얻은 구원'을 동일하게 취급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우리가 평소에는 성경을 읽고 들어도 성령이 역사하기 전에는 그 권위와 그 능력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성령이 역사한 후부터 성경의 바른 권위를 인정하게 됩니다. 그렇다 보니까 성경은 성령을 체험하게 하는 수단이요 통로라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성경도 성령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성령의 가장 객관적 사역은 성경 기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이 역사하기 전에는 성경은 그냥 훌륭한 도덕서적이요, 역사서적이요, 법률서적은 될 수 있어도 구원의 서적은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사역과 성경의 사역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함께 더불어 역사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이 진리라는 것을 알게 된 것도, 예수님 자신을 진리라고 하고 있는 그것도, 성령이 진리의 성령이라는 점도, 그리고 성경이 진리라는 것마저도 성경을 통하여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진리가 아니면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1:13에서는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사랑하는 것이 진리를 사랑하는 최선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맛이 꿀보다 더 달아야 하고(시 119:103),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정금보다 더 사랑해야 하고(시 119:127), 재물의 즐거움보다 더 커야(시 119:14) 합니다. 아예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기업으로 삼아야 합니다. 성도는 진리를 얻는 기쁨, 진리를 배우는 기쁨, 진리를 따라 사는 기쁨, 그리고 진리를 증거하는 기쁨이 충만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이면 자식 자랑, 돈 자랑, 건강 자랑, 음식 자랑, 집 자랑, 보석 자랑, 지식 자랑, 미모 자랑, 힘 자랑, 가문 자랑 등을 일삼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깨달은 진리를 자랑하고 진리를 실천한 기쁨을 자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성도는 진리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진리로부터 나와서 진리로 말미암다가 진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상하게도 히브리말의 진리란 단어 '에메트'란 단어는 히브리어 첫 자음인 '알레프'와 중간 자음인 '민'과 끝 자음인 '타우'로 되어 있습니다. 마치 진리로 시작하고 진리를 따라야 하고 그리고 진리로 귀결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생각됩니다.
처음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도 진리의 맛을 알면 설교가 재미가 있어집니다. 병든 사람은 성경을 보면 수면제처럼 졸리게 되어 있습니다. 밥은 수도 없이 먹고 먹었어도 물리지 않는 것처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듣고 들어도 또 듣고 싶어야 건강한 사람입니다. 은혜를 받기 전에는 짧기를 바라던 설교가 은혜를 받으면 더 듣고 싶어집니다. 제 설교가 비교적 긴 편인데도, 어떤 분이 저보고 목사님 설교를 더 길게 해 달라고 하는 분도 있습니다. 은혜를 사모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교회 장로님은 몇 시간 걸려서 예배당에 와서 20분 짜리 설교 듣고 가려니 섭섭하다고 목사에게 항의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이왕에 믿는 예수라면 말씀을 달게 듣는 성도되기 바랍니다.
유대인들은 아이가 겨우 사물을 보며 구분하게 될 때, 구약 성서를 꺼내어 그 표지에 꿀을 발라서 빨아먹게 한 다음 "이 꿀이 달 듯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너희 영혼에 달고, 네 인생에 있어 모든 지혜를 주신다. 그러므로 너는 죽을 때까지 이 말씀을 읽고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친다고 합니다.
바른 신앙생활을 하는데 중요한 것은 성경을 바르게 깨닫고 아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없으면 참된 신앙생활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 신앙의 길을 물론 또 인생의 길까지 제시해 줍니다. 저는 촌스러워서 길이 곧게 난 강남에서 종종 길을 잃어버립니다. 어느 쪽이 동쪽이고 어느 쪽이 서쪽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럴 때 생각에는 왼쪽으로 가야 목적지가 나오는 것 같은데 표지판은 오른 쪽으로 가라고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내가 생각하는 방향을 포기하고 표지판이 지시하는 방향으로 갑니다. 그리고 가다보면 방향도 잡히고 길도 알게 됩니다. 성경은 바로 우리의 신앙의 길과 방향을 제시해 주고 또 인생의 길과 방향을 제시해 주는 것입니다. 내 생각, 내 감각을 버리고 성경이 지시하는 방향으로 가다 보면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김대중 대통령이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사형선고를 받고 감옥에서 견딜 수 있었던 힘은 성경에서 얻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우리에게 지혜와 힘을 줍니다.
어머니와 아들이 길을 가는데 눈보라가 너무 몰아쳐서 어디가 길인지 어디가 수렁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경험 많은 어머니는 그것을 잘 알 수 있었지만 아이들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말합니다. "내가 걸어가는 발자국만 보고 그리로 따라오너라"고 하였습니다. 눈밭에 난 어머니의 발자국을 보고 아이들은 수렁에 빠지지 않고 목적지에 이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바로 어머니의 발자국 같은 것이 성경이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 인생 길에 예수만 보고 가야 합니다. 때로 우리 앞에 놓인 길은 우리가 지나가 보지 못한 길이기에 가야할 길인지 가지 말아야 할 길인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 앞에 가시는 주님을 따를 때 내가 가야할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오늘 당신의 앞 길이 어두워 보이고, 구름이 꽉 끼어 있습니까 어두운 그림자가 당신 주위를 휩싸고 있습니까 당신의 지도자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앞길을 알고 계십니다. 당신의 눈을 그 분께 고정시키고 그 분을 따르면 처음에는 당신이 알지 못하는 서투른 길도 곧 익숙한 길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욥은 "나의 가는 길은 오직 그가 아시나니"(욥 23:10)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경만 보고 성경이 가르치는 그 길로 가면 됩니다. 트루만은 미국의 33대 대통령을 지낸 뒤 고향 미주리주 인디펜던스에서 독서와 봉사로 말년을 보냈습니다. 어느 날 오래된 도서관에서 견학 왔던 한 초등학생이 "할아버지는 어렸을 때 공부도 잘했고 지도력도 있었죠"라고 물었습니다. "그 반대였지. 눈이 나빠 안경 없이는 사물을 분간하지 못할 정도였고 열등생이었으며 큰 소리에 벌벌 떠는 심약한 아이였어" "그런데 어떻게 대통령까지 되실 수 있으셨어요" "나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어. 그리고 성경말씀을 늘 읽었지"라고 했습니다. 미국의 클리브랜드 대통령은 그의 대통령 취임식장에서 "방탕한 청년이 오늘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은 오직 성경의 힘입니다. "라고 울먹였다고 합니다. 이처럼 성경은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에 대하여 우물안 개구리와 같은 존재들입니다. 우물 안에서 태어나 우물 만 보고 살던 우물 속에 밖에서 살던 개구리 한 마리가 빠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밖의 넓은 세상을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우물 안의 개구리가 "그 세상이 이렇게 넓더냐"라고 팔을 벌리자, "그보다 더 크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러면 이만큼 크냐"고 흉내를 내가다 그만 배가 터져서 죽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진리에 대한 개념도 같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전국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보듯 보고 다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내가 가른 길만 알고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경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능하면 넓게 알고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이 더 유리합니다. 그래야 위기를 대처할 능력이 생깁니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가야할 길만은 알고 가야합니다. 저는 집회를 갈 때마다 꼭 가야할 길만 알고 갑니다. 바르게 가르쳐 준 길이라면 그대로 가면 내가 갈 목적지에 이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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