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 하나님의 섭리와 성탄
본문
아담, 하와가 에덴에서 범죄했을 때, 여호와 하나님은 뱀과 하와와 아담을 저주하셨는데, 뱀을 저주하시면서,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 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창 3:14-15)
고 말씀하셨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뱀을 저주하실 때, 여자의 후손에 대한 이야기를 통하여 그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 보이고 계신다. 여자의 후손이란 남자의 피를 이어받지 아니한, 즉 처녀를 통하여 태어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여자의 후손이 뱀에게 발꿈치를 상함을 받는다는 사실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을 의미하고, 그가 뱀의 머리를 밟아 상하게 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여 근본적인 사단의 역사를 제어하고 깨뜨릴 사실을 뜻한다.
다시 말하자면, 여호와 하나님이 범죄한 인간을 심판하실 때 무언가 하나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에 새겨지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아담과 하와가 저지른 죄의 결과로 말미암아 죄에 물든 인간들을 구원하실 계획과 섭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에 있지 않았다면, 어쩌면 여호와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그렇게 저주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죄악과 접할 수 없었기 때문에 죄를 범한 인간을 이 땅에 남겨두는 것이 무익한 일이었다. 남겨둔다고 해서 인간 스스로의 어떤 노력이나 방법으로 죄를 벗어나 깨끗하게 되어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결국 언젠가 인간은 멸망을 당하고 말아야 할 위치에 놓여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범죄한 그 때에,
'네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신 말씀처럼, 영육간에 멸망을 시켜 인간들을 세상에서 없애 버리고 그 대신 다른 별을 창조해 거기에다가 죄에 물들지 않은 새로운 인간을 만드셔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그냥 에덴에서 쫓아내어 땅에 살게 하신 것은 바로 언젠가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어 범죄한 인간들을 죄에서 건져내실 것을 염두에 두셨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두고 아담을 심판하셨다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실 계획을 가지고 인간을 살려 두셨다. 물론, 범죄한 아담은 가인과 아벨을 낳았고, 또 셋을 낳았으며, 셋은 끊임없이 많은 자녀들을 낳아 그들이 사회를 형성하고 이 땅에 살게 되었다. 그들 가운데는 힘센 자도 많았고, 지혜로운 자도 많았으며,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도 많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한번도 인간들 속에 나타나는 부분에 기대를 거시거나 마음을 두신 적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성경 속에서 발견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똑똑하다고 해서 그 똑똑한 것이 그들을 새롭게 하거나 그들의 죄를 해결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능력 있는 자가 있었지만,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만큼 자기를 바꾸어 나갈 자가 없었고, 착한 자가 있었지만 그 착한 행실도 여호와 하나님 보실 때, '너는 그만하면 됐다' 할 정도로 살아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창세기 5장에서 아담의 족보를 살펴보면, 많은 인간들이 이 땅에 살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그 중에 노아나 아브라함 같은 사람들을 택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이루게 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그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야 하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은 그들을 부르셨고, 그들을 쓰셨던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어 가나안에 들어와 살게 하신 이유는 속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을 죄에서 구원해야 하는데,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도록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에 섭리를 두셨기 때문이다.
우리의 구세주
아브라함이 아들을 낳을 수 없는 위치에 있었지만, 그가 아들을 낳아야 거기서 그리스도가 태어나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은 백세나 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불가능한 가운데서 아들을 낳게 하셨던 사실을 우리는 기억할 수 있다. 그 외에도 다윗이나 다른 귀한 종들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태어나게 되었는데, 여호와 하나님은 한번도 그들 가운데서 선한 것이나 의로운 것을 발견해서 그들을 사용하신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가 오지 않아도, '이만하면 됐다'고 할 만한 사람을 여호와 하나님은 전혀 찾으실 수가 없었다. 그 어느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위한 하나의 준비과정에 불과했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야만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죄에서 구원하실 것을 여호와 하나님은 아셨기 때문에, 아무리 인간이 선하고 정직하고 의롭고 여호와 하나님을 부지런히 섬겨도 한 번도 인간에게 기대를 두신 적이 없었다.
이제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 땅 베들레헴의 작은 말구유에 태어나셨다. 외형적으로 볼 때에 그는 이 땅에 수많은 사람의 태어남과 같이 한 아기로 태어났고, 별로 다른 것을 발견할 수 없었다. 아마 유대 땅 베들레헴에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를 당시 다른 어린아이들과 섞어 놓았을 때 외형적으로는 별다른 것을 발견할 수 없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죄악과 사망과 사단을 이긴 분으로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려고 오셨다.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여호와 하나님과 모든 사람 앞에서 죄악에 휘말려 들지 않은 것을 보여주셨고, 귀신을 쫓아내고, 풍랑을 잠잠케 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 그 안에 있음을 보여주셨으며,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이후에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바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분은 죄악을 이겨야 하고, 사단을 이겨야 하고, 죽음을 이기는 그 분이어야만 했던 것이다.
주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다 이루었다'는 한 마디를 하시고 운명하셨는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을 심판하실 때에 그리스도가 와서 아담을 죄에서 건질 것이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가 바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구주가 되셨고, 만인 위에 뛰어난 주가 되셨다.
우리가 하나 알아야 하는 것은 이 땅의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대신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어느 누구도 죄와 사단과 죽음을 이길 수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 많은 훌륭한 사람들, 위대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인간 보기에 위대했고 뛰어났던 것이지, 인류를 구원해주지는 못했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야만 했던 것이다.
마음의 방
그와 마찬가지로 작은 지구라고 일컫는 우리 마음도 역시 그렇다. 때때로 우리들의 마음은 악하고 더러운 생각으로 가득 찰 때가 있고, 때로는 깨끗하며 남을 돕고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는 생각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땅에 살았던 어떤 유명한 사람이라도 그 속에서 일어나는 착한 생각,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 남을 돕고자 하는 마음, 정직한 마음-그러한 것들이 절대로 자기 자신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땅에 그리스도가 오셔야 했듯이, 작은 지구인 내 마음속에도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와야 그 그리스도가 내 마음에서 사단을 이기고, 죄악을 이기고, 멸망을 이겨낼 수가 있다. 사람들은 자기가 좀 더 열심히 하면, 자기가 좀 더 노력하면 착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나, 외형적으로 볼 때 좀 착해지고 진실해지는 것처럼 보일 뿐 그것이 그들을 구원할 수는 없다. 어떤 사람들은 입으로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그리스도는 제쳐놓고 자기 스스로 애쓰며 착한 일을 하려고 하는데, 그 착한 행위가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별로 죄를 짓지 않고, 교회를 잘 다니며, 성실하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으로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임재하지 아니하면 마음에 있는 이런 착한 생각이 무익하며,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는 생각이 아무 소용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마음에 오셔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없는 심령들은 착해지려고 애쓰는 것으로 끝나버려, 결국 그는 죄와 사망과 심판을 이기지 못하고 영원한 멸망에 처할 수밖에 없다.
2,000년 전,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마리아와 요셉은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실 방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베들레헴에 수없이 많은 방이 있었지만, 그들의 방은 다른 손님들로 가득 차 있어서 어느 누구도 우리 주님이 태어날 방을 허락해 주지 않았던 것이다. 성경은,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하고 말씀하고 있다.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태어나기 위하여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주님 앞에 문을 열지 못하여 예수님을 말구유간으로 보내고, 자신에게 있는 착한 마음, 정직한 마음, 훌륭한 생각, 철학 그러한 것들을 간직하며 대접하고 섬기기에 여념이 없는지 모른다.
그리스도는 오늘 이 시간도 각 사람의 마음을 두드리고 계신다. 인간의 노력으로,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구원해 주기 위하여 사람들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
그런데 왜 열지 못하는가 그 당시 베들레헴의 집들이 집집마다 손님으로 가득 차 있었듯이, 그 마음속에 죄악과 정욕과 세상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어서 주님이 문을 두드려도 문을 열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을 찾아오신 예수님을 위하여 하나의 작은 방을 마련해 드려야겠다. 우리의 마음속에 추하고 가증된 것뿐 아니라, 내가 볼 때 좋고 아름답고 귀한 손님이라도 내어쫓아야 한다. 다만 그리스도를 모시기 위하여 나의 가장 귀히 여기는 것도 비우고, 내 모든 죄를 씻음 받고, 예수님을 영접할 작은 방을 마련하게 되기를 바란다. 그리스도가 그 마음에 태어나서, 그리스도가 다스리고 주관하셔서 이제 죄악을, 사단을, 죽음을 이기고 승리하게 되기를 바란다.
고 말씀하셨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뱀을 저주하실 때, 여자의 후손에 대한 이야기를 통하여 그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 보이고 계신다. 여자의 후손이란 남자의 피를 이어받지 아니한, 즉 처녀를 통하여 태어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여자의 후손이 뱀에게 발꿈치를 상함을 받는다는 사실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을 의미하고, 그가 뱀의 머리를 밟아 상하게 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여 근본적인 사단의 역사를 제어하고 깨뜨릴 사실을 뜻한다.
다시 말하자면, 여호와 하나님이 범죄한 인간을 심판하실 때 무언가 하나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에 새겨지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아담과 하와가 저지른 죄의 결과로 말미암아 죄에 물든 인간들을 구원하실 계획과 섭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에 있지 않았다면, 어쩌면 여호와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그렇게 저주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죄악과 접할 수 없었기 때문에 죄를 범한 인간을 이 땅에 남겨두는 것이 무익한 일이었다. 남겨둔다고 해서 인간 스스로의 어떤 노력이나 방법으로 죄를 벗어나 깨끗하게 되어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결국 언젠가 인간은 멸망을 당하고 말아야 할 위치에 놓여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범죄한 그 때에,
'네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신 말씀처럼, 영육간에 멸망을 시켜 인간들을 세상에서 없애 버리고 그 대신 다른 별을 창조해 거기에다가 죄에 물들지 않은 새로운 인간을 만드셔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그냥 에덴에서 쫓아내어 땅에 살게 하신 것은 바로 언젠가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어 범죄한 인간들을 죄에서 건져내실 것을 염두에 두셨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두고 아담을 심판하셨다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실 계획을 가지고 인간을 살려 두셨다. 물론, 범죄한 아담은 가인과 아벨을 낳았고, 또 셋을 낳았으며, 셋은 끊임없이 많은 자녀들을 낳아 그들이 사회를 형성하고 이 땅에 살게 되었다. 그들 가운데는 힘센 자도 많았고, 지혜로운 자도 많았으며,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도 많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한번도 인간들 속에 나타나는 부분에 기대를 거시거나 마음을 두신 적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성경 속에서 발견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똑똑하다고 해서 그 똑똑한 것이 그들을 새롭게 하거나 그들의 죄를 해결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능력 있는 자가 있었지만,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만큼 자기를 바꾸어 나갈 자가 없었고, 착한 자가 있었지만 그 착한 행실도 여호와 하나님 보실 때, '너는 그만하면 됐다' 할 정도로 살아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창세기 5장에서 아담의 족보를 살펴보면, 많은 인간들이 이 땅에 살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그 중에 노아나 아브라함 같은 사람들을 택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이루게 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그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야 하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은 그들을 부르셨고, 그들을 쓰셨던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어 가나안에 들어와 살게 하신 이유는 속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을 죄에서 구원해야 하는데,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도록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에 섭리를 두셨기 때문이다.
우리의 구세주
아브라함이 아들을 낳을 수 없는 위치에 있었지만, 그가 아들을 낳아야 거기서 그리스도가 태어나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은 백세나 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불가능한 가운데서 아들을 낳게 하셨던 사실을 우리는 기억할 수 있다. 그 외에도 다윗이나 다른 귀한 종들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태어나게 되었는데, 여호와 하나님은 한번도 그들 가운데서 선한 것이나 의로운 것을 발견해서 그들을 사용하신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가 오지 않아도, '이만하면 됐다'고 할 만한 사람을 여호와 하나님은 전혀 찾으실 수가 없었다. 그 어느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위한 하나의 준비과정에 불과했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야만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죄에서 구원하실 것을 여호와 하나님은 아셨기 때문에, 아무리 인간이 선하고 정직하고 의롭고 여호와 하나님을 부지런히 섬겨도 한 번도 인간에게 기대를 두신 적이 없었다.
이제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 땅 베들레헴의 작은 말구유에 태어나셨다. 외형적으로 볼 때에 그는 이 땅에 수많은 사람의 태어남과 같이 한 아기로 태어났고, 별로 다른 것을 발견할 수 없었다. 아마 유대 땅 베들레헴에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를 당시 다른 어린아이들과 섞어 놓았을 때 외형적으로는 별다른 것을 발견할 수 없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죄악과 사망과 사단을 이긴 분으로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려고 오셨다.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여호와 하나님과 모든 사람 앞에서 죄악에 휘말려 들지 않은 것을 보여주셨고, 귀신을 쫓아내고, 풍랑을 잠잠케 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 그 안에 있음을 보여주셨으며,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이후에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바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분은 죄악을 이겨야 하고, 사단을 이겨야 하고, 죽음을 이기는 그 분이어야만 했던 것이다.
주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다 이루었다'는 한 마디를 하시고 운명하셨는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을 심판하실 때에 그리스도가 와서 아담을 죄에서 건질 것이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가 바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구주가 되셨고, 만인 위에 뛰어난 주가 되셨다.
우리가 하나 알아야 하는 것은 이 땅의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대신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어느 누구도 죄와 사단과 죽음을 이길 수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 많은 훌륭한 사람들, 위대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인간 보기에 위대했고 뛰어났던 것이지, 인류를 구원해주지는 못했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야만 했던 것이다.
마음의 방
그와 마찬가지로 작은 지구라고 일컫는 우리 마음도 역시 그렇다. 때때로 우리들의 마음은 악하고 더러운 생각으로 가득 찰 때가 있고, 때로는 깨끗하며 남을 돕고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는 생각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땅에 살았던 어떤 유명한 사람이라도 그 속에서 일어나는 착한 생각,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 남을 돕고자 하는 마음, 정직한 마음-그러한 것들이 절대로 자기 자신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땅에 그리스도가 오셔야 했듯이, 작은 지구인 내 마음속에도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와야 그 그리스도가 내 마음에서 사단을 이기고, 죄악을 이기고, 멸망을 이겨낼 수가 있다. 사람들은 자기가 좀 더 열심히 하면, 자기가 좀 더 노력하면 착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나, 외형적으로 볼 때 좀 착해지고 진실해지는 것처럼 보일 뿐 그것이 그들을 구원할 수는 없다. 어떤 사람들은 입으로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그리스도는 제쳐놓고 자기 스스로 애쓰며 착한 일을 하려고 하는데, 그 착한 행위가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별로 죄를 짓지 않고, 교회를 잘 다니며, 성실하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으로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임재하지 아니하면 마음에 있는 이런 착한 생각이 무익하며,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는 생각이 아무 소용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마음에 오셔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없는 심령들은 착해지려고 애쓰는 것으로 끝나버려, 결국 그는 죄와 사망과 심판을 이기지 못하고 영원한 멸망에 처할 수밖에 없다.
2,000년 전,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마리아와 요셉은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실 방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베들레헴에 수없이 많은 방이 있었지만, 그들의 방은 다른 손님들로 가득 차 있어서 어느 누구도 우리 주님이 태어날 방을 허락해 주지 않았던 것이다. 성경은,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하고 말씀하고 있다.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태어나기 위하여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주님 앞에 문을 열지 못하여 예수님을 말구유간으로 보내고, 자신에게 있는 착한 마음, 정직한 마음, 훌륭한 생각, 철학 그러한 것들을 간직하며 대접하고 섬기기에 여념이 없는지 모른다.
그리스도는 오늘 이 시간도 각 사람의 마음을 두드리고 계신다. 인간의 노력으로,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구원해 주기 위하여 사람들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
그런데 왜 열지 못하는가 그 당시 베들레헴의 집들이 집집마다 손님으로 가득 차 있었듯이, 그 마음속에 죄악과 정욕과 세상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어서 주님이 문을 두드려도 문을 열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을 찾아오신 예수님을 위하여 하나의 작은 방을 마련해 드려야겠다. 우리의 마음속에 추하고 가증된 것뿐 아니라, 내가 볼 때 좋고 아름답고 귀한 손님이라도 내어쫓아야 한다. 다만 그리스도를 모시기 위하여 나의 가장 귀히 여기는 것도 비우고, 내 모든 죄를 씻음 받고, 예수님을 영접할 작은 방을 마련하게 되기를 바란다. 그리스도가 그 마음에 태어나서, 그리스도가 다스리고 주관하셔서 이제 죄악을, 사단을, 죽음을 이기고 승리하게 되기를 바란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