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 말씀을 전하는 성탄
본문
성탄절의 최대 메시지는 임마누엘입니다. 임마누엘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7:14) 번역한즉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마1:23).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그 영광을 보니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과 함께 살려고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성탄의 신학이요 임마누엘의 구체적 증거입니다. 인류역사 이래 가장 고귀하게 불려지는 이름이 있습니다. 그 이름은 하늘이 준 예수의 이름입니다.
마리아는 천사로부터 음성을 들었습니다.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눅1:30-31) 예수님은 하늘에서 오셨기에 그 이름도 하늘에서 왔습니다. 그 이름은 자기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마1:20-21)을 의미합니다. 예수는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를 뜻하는 여호수아의 헬라식 이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위에 뛰어나게 하사 모든 자들로
그 이름에 꿇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빌2:9-11)
예수라는 이름이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는 뜻이요 곧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해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주님은 오직 하늘이 할 수 있는 곧 구원을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의 이름이 있는 곳에 구원이 있고 은혜가 넘칩니다. 소경 바디메오는 길가에 앉았다가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47절) 부르짖을 때 주 예수님은 그를 고치시고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를 부르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은 나의 구원자이십니다. 나를 구원하소서' 하는 신앙고백입니다. 십자가상의 강도는 예수님의 머리위에 있던 '이는 유대인의왕 예수'라는 패를 보았습니다. (마27:37) 그리고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할 때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만 구원을 받습니다. (행4:12)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날밤 그의 제자들에게 기도에 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요14:13-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우리의 기도가 여호와 하나님께 상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일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않는 것은 이단이요 미신입니다.
반드시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여야 합니다. "그날에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니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기쁨이 충만하리라"(요16:23-24)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았습니다. 인간의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로 난자들에게 주신 권세입니다. 이는 불가능을 가능케 한 하늘의 권세입니다. 일본의 빈민굴 성자 하천풍언은 기생의 아들로 태어나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최대의 영광으로 알고 살았습니다. 우리가 예수의 이름을 믿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가졌다면 이제부터는 그 권세를 활용하여야 합니다. 베드로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 받고서야 예수의 이름으로 되는 권세가 자기에게 있음을 알았고 그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고쳤고(행3:6) 그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막14:17) 복음을 전했습니다.
1,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임마누엘이 되셨습니다.
다윗도 젊었을 때는 온전히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고 여호와 하나님과 동역할 때 실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여호와 하나님을 멀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실수를 범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고 여호와 하나님과 동역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실 위대한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과 동역 했습니다. 우리는 영국의 글래드스톤이나 미국의 에이브라함 링컨같은 정치가들은 . 그들은 문자 그대로 여호와 하나님과 동역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법이 있는 것을 알고 여호와 하나님과 동역해야 합니다. 우리 민족이 축복 받는 민족이 되려고 할 것이면 이와 같은 정치인들을 보내 달라고 여호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겠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하실 때에는 적군을 능히 물리 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이 범죄 하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실 때 비참하게 패한 예가 한 두번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 40년을 지나서 이제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점령하게 되는데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대로 했더니 철철 흘러 넘치는 요단강이 갈라져 건너가는 감격스러운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난공불락의 도성 여리고성을 손 하나 대지 않고 매일 하루에 한바퀴씩 엿새 동안 돌고 일곱째 되는 날 일곱 바퀴 돌고 소리치니 그 성이 와르르 무너지는 감격을 체험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약해요.
무엇이 좀 되는 것 같으니까 자기가 한 것으로 착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함께 하셔서 요단강을 건너고, 어리고 성이 무너진 것은 생각도 안하고 자기들의 힘으로 한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도움이 필요 할 때는 주님을 찾지만 그 일이 성취되면 주님은 다 잊어버립니다. 자기가 해서 된줄로 압니다. 그래서 그 다음 성 아이성에서도 어떻게 되었습니까
여호수아가 사람을 보내서 한번보고 오라고 해서 가 보고 왔습니다. 그리고 보고하는 말이 '거기에 가 보았더니 여리고성 하고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작은 성입니다. 그러니 우리 이스라엘이 다가서 고생할 필요는 없고 그저 넉넉하게 이삼천 명만 보내면 거뜬히 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 이말 가운데는 "아, 우리가 그 난공불락의 도성 여리고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점령했는데 거기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아이성 쯤이야 문제 될 것이 있겠습니까" 하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여호수아는 그 보고를 듣고 삼천명의 군사를 아이성으로 보냈습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아이성으로 올라갔더니 이게 웬일입니까 아이성 사람들아 다 일어나 반격하는 바람에 쫓겨 내려오게 되었는데 후퇴하면서 서른 여섯명이 죽었습니다. 얼마나 혼이 났던지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군대의 마음이 물처럼 되었다고 했습니다. 완전히 녹아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왜 아이성 사람들에게 완패했습니까 여리고 성을 점령 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맥없이 졌습니까 원인은 하나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군대와 함께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여호와 하나님이 이슬엘 군대와 함께 하지 않았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사람이 이스라엘 백성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아간 이었습니다. 이것 보세요.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면 승리하는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아니하니까 비참하게 망하고 말았습니다. 싸움은 사람이 합니다.
그런데 승부는 여호와 하나님이 정하십니다. 그러므로 잠언 16장 3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고 했습니다. 시편 37편 5절에 보아도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리라"고 했습니다. 작은 일이나 큰 일이나, 교회 일이나 사회 일이나, 개인이나단체나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셔야 일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하늘에 홀로 계신분이 아닙니다. 이제 우리의 슬픔과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시는 분이 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베들레헴 말구유에 나신 것은 인간의 비천과 가난과 처참한 환경 속에 찾아오신 여호와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의미합니다. 임마누엘은 같은 입장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말구유는 여호와 하나님의 구체적인 사랑의 표현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는 이 사실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 여호와 하나님이시요 나를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구체적으로 함께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몸소 겪으심으로 우리의 사정을 다 아십니다. 유혹도 아십니다. 인간이 눈물도 고통도 아십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고난에 같이 하시려고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2,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것은 몸을 입으시고 여호와 하나님의 장막을 이루신 것입니다. 장막은 여호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처소입니다(출 25:8).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가 장막에 있었는데 장막 같은 인간의 몸에 머물러 계시는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을 입고 오시므로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오신 것입니다. 마리아 몸에 임재하신 성령은 우리 안에 성령으로 임재하시고 우리의 몸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거하게 되신 것입니다. 성전 있는 곳에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예수님은 자기 몸을 성전으로 삼고 아버지 뜻대로 살았습니다.
전도자들은 이고니온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을 피하여 루스드라에 도착하였습니다. 이고니온에서 루스드라는 약29km 떨어진 동남방에 위치한 로마의 식민지요, 군사적인 중요한 지점입니다. 두 사도에게 루스드라 전도에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자를 고치는 이적이 나타났습니다. 루스드라는 본래 퇴역한 로마 군인들의 집단 거주지로 조성된 곳으로 소수의 헬라인으로 구성된 엘리트 계층을 제외하고는 지적 수준이 낮고 미신적 경향이 짙은 도시입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의 세력이 미약하여 유일신 사상에 대해서는 전무합니다. 이곳에서 전도자들이 복음을 전하는데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되어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관심있게 그
를 보았고 그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자 큰 소리로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고 외칩니다. 바울의 말을 듣자마자 그는 일어서서 뛰며 걸었습니다. 믿음이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신유의 은사는 은사를 행하는 사람의 능력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확신과 믿음을 가질 때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루스드라 사람들은 앉은뱅이를 일으킨 ‘바울과 바나바’를 가리켜 그들이 섬기는 전설적인 신 ‘허메’와 ‘쓰스’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전도자들을 사람의 형상으로 이곳에 온 신으로 생각하고 경배하려고 할 때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의 행동을 옷을 찢으며 말렸습니다.
그리고는 전도자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감당하기 위해 그들의 무지를 일깨워 주었습니다. 전도자들은 먼저 그들을 향하여 헛된 우상을 버리며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을 촉구하며, 이제껏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모든 족속이 우상을 섬기고 있음에도 참으시고 묵인해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복음이 들어오기 전 세대에는 자연 만물을 통해서 자신을 증거하셨노라고 했습니다. 전도자들의 증거는 우리가 경배하고 섬겨야 할 분은 오직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 한 분 뿐임을 가르쳐 준 것입니다.
앉은뱅이를 일으킨 바울은 이고니온과 안디옥에서 몰려 온 유대인 불량배들에 의하여 돌에 맞아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들은 바울을 성밖으로 내다 버렸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는 이러한 환란과 핍박이 수반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마5:11-12). 바울의 제자들이 그의 시체를 장례하기 위하여 모였을 때 그는 일어나서 다시 루스드라 성 안으로 들어갑니다. 비록 자신을 죽이려 했던 사람들이지만 생명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아픈 몸을 이끌고 대적들이 머물고 있는 성 안으로 다시 들어간 것입니다.
3,말씀이 육신이 되어 여호와 하나님 영광이 되었습니다.
구약에서는 특수한 사람만이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이시야가 성전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성막위에 임하시는 구름으로 여호와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영광은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나타나심)를 의미합니다. 말씀이 우리 가운데 거하시메 독생자는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삶의 전부가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시고 물위를 걸으시고 바람을 잠잠케 하고 오병이어와 기적을 보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으나 십자가의 죽으심에는 영광을 보지 못하고 도망을 쳤습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말구유에서 나신 예수에게서 영광을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전생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몸으로 여호와 하나님이 거하시는 장막이 되어 영광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주부가 있었습니다. 이 부인은 예수를 잘 믿는 분이었습니다. 이 부인은 얼마나 예수를 잘 믿었던지 설거지하는 시간도 도저히 낭비할 수 없다 하여 싱크대 앞에 성경구절을 붙여 놓고 암송하면서 설거지를 했습니다. 이 날도 설거지를 하면서 싱크대 앞에 붙인 성경 구절을 암송하고 있었습니다. 이 날의 성경 구절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부인이 설거지를 하면서 이 구절을 암송하다보니 갑자기 '내가 지금하고 있는 설거지도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신은 지금까지 성경 구절을 외우고, 심방 다니는 것만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은 무슨 일이든지 다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분명히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설거지도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되며, 그럴할 때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 부인은 너무 기뻤습니다. 집에서 빨래하고, 설거지하고, 밥을 하는 모든 허드렛일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고 생각하니 힘이 났습니다. 방바닥을 닦으면서
도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찬송을 부르며,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방을 닦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자연 만물 하나 하나에 모두 여호와 하나님의 신성이 담겨 있습니다. 인간이 만든 문명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만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달리 성스러운 것이 따로 있고, 속된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할 때 그 일은 성스러운 것이 되는 것이요, 그러지 않을 때는 속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고 있다는 마음만 가지면 무엇을 하든지 영광이요,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축구 선수가 되어 공을 차고 달려도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면 그것이 영광이 되는 것이요, 청소를 하더라도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면 거기에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헨델과 바하는 저 유명한 '메시아' 라는 찬양곡도 작곡했지만, 궁중 무도회에서 같이 춤을 추는 곡도 많이 작곡했으며, 일반 대중이 즐길 수 있는 곡도 많이 작곡했습니다. 왜 그러했겠습니까 헨델과 바하는 어느 것을 하든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면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복음송만 부른다고 하더라도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전혀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노래를 부르더라도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한다면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께 아름다운 노래가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여러분의 모든 생활 중에서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그 무엇을 하든지 다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기도 이번 성탄을 말씀을 전하는 성탄이 되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과 동역하여 기적을 일으키는 성탄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삼흥 식구들이 되게 하옵소서 주예 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마리아는 천사로부터 음성을 들었습니다.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눅1:30-31) 예수님은 하늘에서 오셨기에 그 이름도 하늘에서 왔습니다. 그 이름은 자기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마1:20-21)을 의미합니다. 예수는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를 뜻하는 여호수아의 헬라식 이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위에 뛰어나게 하사 모든 자들로
그 이름에 꿇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빌2:9-11)
예수라는 이름이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는 뜻이요 곧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해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주님은 오직 하늘이 할 수 있는 곧 구원을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의 이름이 있는 곳에 구원이 있고 은혜가 넘칩니다. 소경 바디메오는 길가에 앉았다가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47절) 부르짖을 때 주 예수님은 그를 고치시고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를 부르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은 나의 구원자이십니다. 나를 구원하소서' 하는 신앙고백입니다. 십자가상의 강도는 예수님의 머리위에 있던 '이는 유대인의왕 예수'라는 패를 보았습니다. (마27:37) 그리고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할 때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만 구원을 받습니다. (행4:12)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날밤 그의 제자들에게 기도에 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요14:13-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우리의 기도가 여호와 하나님께 상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일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않는 것은 이단이요 미신입니다.
반드시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여야 합니다. "그날에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니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기쁨이 충만하리라"(요16:23-24)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았습니다. 인간의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로 난자들에게 주신 권세입니다. 이는 불가능을 가능케 한 하늘의 권세입니다. 일본의 빈민굴 성자 하천풍언은 기생의 아들로 태어나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최대의 영광으로 알고 살았습니다. 우리가 예수의 이름을 믿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가졌다면 이제부터는 그 권세를 활용하여야 합니다. 베드로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 받고서야 예수의 이름으로 되는 권세가 자기에게 있음을 알았고 그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고쳤고(행3:6) 그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막14:17) 복음을 전했습니다.
1,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임마누엘이 되셨습니다.
다윗도 젊었을 때는 온전히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고 여호와 하나님과 동역할 때 실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여호와 하나님을 멀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실수를 범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고 여호와 하나님과 동역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실 위대한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과 동역 했습니다. 우리는 영국의 글래드스톤이나 미국의 에이브라함 링컨같은 정치가들은 . 그들은 문자 그대로 여호와 하나님과 동역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법이 있는 것을 알고 여호와 하나님과 동역해야 합니다. 우리 민족이 축복 받는 민족이 되려고 할 것이면 이와 같은 정치인들을 보내 달라고 여호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겠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하실 때에는 적군을 능히 물리 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이 범죄 하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실 때 비참하게 패한 예가 한 두번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 40년을 지나서 이제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점령하게 되는데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대로 했더니 철철 흘러 넘치는 요단강이 갈라져 건너가는 감격스러운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난공불락의 도성 여리고성을 손 하나 대지 않고 매일 하루에 한바퀴씩 엿새 동안 돌고 일곱째 되는 날 일곱 바퀴 돌고 소리치니 그 성이 와르르 무너지는 감격을 체험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약해요.
무엇이 좀 되는 것 같으니까 자기가 한 것으로 착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함께 하셔서 요단강을 건너고, 어리고 성이 무너진 것은 생각도 안하고 자기들의 힘으로 한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도움이 필요 할 때는 주님을 찾지만 그 일이 성취되면 주님은 다 잊어버립니다. 자기가 해서 된줄로 압니다. 그래서 그 다음 성 아이성에서도 어떻게 되었습니까
여호수아가 사람을 보내서 한번보고 오라고 해서 가 보고 왔습니다. 그리고 보고하는 말이 '거기에 가 보았더니 여리고성 하고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작은 성입니다. 그러니 우리 이스라엘이 다가서 고생할 필요는 없고 그저 넉넉하게 이삼천 명만 보내면 거뜬히 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 이말 가운데는 "아, 우리가 그 난공불락의 도성 여리고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점령했는데 거기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아이성 쯤이야 문제 될 것이 있겠습니까" 하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여호수아는 그 보고를 듣고 삼천명의 군사를 아이성으로 보냈습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아이성으로 올라갔더니 이게 웬일입니까 아이성 사람들아 다 일어나 반격하는 바람에 쫓겨 내려오게 되었는데 후퇴하면서 서른 여섯명이 죽었습니다. 얼마나 혼이 났던지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군대의 마음이 물처럼 되었다고 했습니다. 완전히 녹아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왜 아이성 사람들에게 완패했습니까 여리고 성을 점령 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맥없이 졌습니까 원인은 하나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군대와 함께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여호와 하나님이 이슬엘 군대와 함께 하지 않았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사람이 이스라엘 백성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아간 이었습니다. 이것 보세요.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면 승리하는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아니하니까 비참하게 망하고 말았습니다. 싸움은 사람이 합니다.
그런데 승부는 여호와 하나님이 정하십니다. 그러므로 잠언 16장 3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고 했습니다. 시편 37편 5절에 보아도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리라"고 했습니다. 작은 일이나 큰 일이나, 교회 일이나 사회 일이나, 개인이나단체나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셔야 일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하늘에 홀로 계신분이 아닙니다. 이제 우리의 슬픔과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시는 분이 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베들레헴 말구유에 나신 것은 인간의 비천과 가난과 처참한 환경 속에 찾아오신 여호와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의미합니다. 임마누엘은 같은 입장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말구유는 여호와 하나님의 구체적인 사랑의 표현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는 이 사실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 여호와 하나님이시요 나를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구체적으로 함께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몸소 겪으심으로 우리의 사정을 다 아십니다. 유혹도 아십니다. 인간이 눈물도 고통도 아십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고난에 같이 하시려고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2,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것은 몸을 입으시고 여호와 하나님의 장막을 이루신 것입니다. 장막은 여호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처소입니다(출 25:8).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가 장막에 있었는데 장막 같은 인간의 몸에 머물러 계시는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을 입고 오시므로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오신 것입니다. 마리아 몸에 임재하신 성령은 우리 안에 성령으로 임재하시고 우리의 몸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거하게 되신 것입니다. 성전 있는 곳에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예수님은 자기 몸을 성전으로 삼고 아버지 뜻대로 살았습니다.
전도자들은 이고니온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을 피하여 루스드라에 도착하였습니다. 이고니온에서 루스드라는 약29km 떨어진 동남방에 위치한 로마의 식민지요, 군사적인 중요한 지점입니다. 두 사도에게 루스드라 전도에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자를 고치는 이적이 나타났습니다. 루스드라는 본래 퇴역한 로마 군인들의 집단 거주지로 조성된 곳으로 소수의 헬라인으로 구성된 엘리트 계층을 제외하고는 지적 수준이 낮고 미신적 경향이 짙은 도시입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의 세력이 미약하여 유일신 사상에 대해서는 전무합니다. 이곳에서 전도자들이 복음을 전하는데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되어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관심있게 그
를 보았고 그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자 큰 소리로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고 외칩니다. 바울의 말을 듣자마자 그는 일어서서 뛰며 걸었습니다. 믿음이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신유의 은사는 은사를 행하는 사람의 능력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확신과 믿음을 가질 때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루스드라 사람들은 앉은뱅이를 일으킨 ‘바울과 바나바’를 가리켜 그들이 섬기는 전설적인 신 ‘허메’와 ‘쓰스’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전도자들을 사람의 형상으로 이곳에 온 신으로 생각하고 경배하려고 할 때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의 행동을 옷을 찢으며 말렸습니다.
그리고는 전도자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감당하기 위해 그들의 무지를 일깨워 주었습니다. 전도자들은 먼저 그들을 향하여 헛된 우상을 버리며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을 촉구하며, 이제껏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모든 족속이 우상을 섬기고 있음에도 참으시고 묵인해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복음이 들어오기 전 세대에는 자연 만물을 통해서 자신을 증거하셨노라고 했습니다. 전도자들의 증거는 우리가 경배하고 섬겨야 할 분은 오직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 한 분 뿐임을 가르쳐 준 것입니다.
앉은뱅이를 일으킨 바울은 이고니온과 안디옥에서 몰려 온 유대인 불량배들에 의하여 돌에 맞아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들은 바울을 성밖으로 내다 버렸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는 이러한 환란과 핍박이 수반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마5:11-12). 바울의 제자들이 그의 시체를 장례하기 위하여 모였을 때 그는 일어나서 다시 루스드라 성 안으로 들어갑니다. 비록 자신을 죽이려 했던 사람들이지만 생명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아픈 몸을 이끌고 대적들이 머물고 있는 성 안으로 다시 들어간 것입니다.
3,말씀이 육신이 되어 여호와 하나님 영광이 되었습니다.
구약에서는 특수한 사람만이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이시야가 성전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성막위에 임하시는 구름으로 여호와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영광은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나타나심)를 의미합니다. 말씀이 우리 가운데 거하시메 독생자는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삶의 전부가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시고 물위를 걸으시고 바람을 잠잠케 하고 오병이어와 기적을 보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으나 십자가의 죽으심에는 영광을 보지 못하고 도망을 쳤습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말구유에서 나신 예수에게서 영광을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전생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몸으로 여호와 하나님이 거하시는 장막이 되어 영광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주부가 있었습니다. 이 부인은 예수를 잘 믿는 분이었습니다. 이 부인은 얼마나 예수를 잘 믿었던지 설거지하는 시간도 도저히 낭비할 수 없다 하여 싱크대 앞에 성경구절을 붙여 놓고 암송하면서 설거지를 했습니다. 이 날도 설거지를 하면서 싱크대 앞에 붙인 성경 구절을 암송하고 있었습니다. 이 날의 성경 구절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부인이 설거지를 하면서 이 구절을 암송하다보니 갑자기 '내가 지금하고 있는 설거지도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신은 지금까지 성경 구절을 외우고, 심방 다니는 것만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은 무슨 일이든지 다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분명히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설거지도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되며, 그럴할 때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 부인은 너무 기뻤습니다. 집에서 빨래하고, 설거지하고, 밥을 하는 모든 허드렛일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고 생각하니 힘이 났습니다. 방바닥을 닦으면서
도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찬송을 부르며,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방을 닦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자연 만물 하나 하나에 모두 여호와 하나님의 신성이 담겨 있습니다. 인간이 만든 문명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만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달리 성스러운 것이 따로 있고, 속된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할 때 그 일은 성스러운 것이 되는 것이요, 그러지 않을 때는 속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고 있다는 마음만 가지면 무엇을 하든지 영광이요,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축구 선수가 되어 공을 차고 달려도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면 그것이 영광이 되는 것이요, 청소를 하더라도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면 거기에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헨델과 바하는 저 유명한 '메시아' 라는 찬양곡도 작곡했지만, 궁중 무도회에서 같이 춤을 추는 곡도 많이 작곡했으며, 일반 대중이 즐길 수 있는 곡도 많이 작곡했습니다. 왜 그러했겠습니까 헨델과 바하는 어느 것을 하든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면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복음송만 부른다고 하더라도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전혀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노래를 부르더라도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한다면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께 아름다운 노래가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여러분의 모든 생활 중에서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그 무엇을 하든지 다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기도 이번 성탄을 말씀을 전하는 성탄이 되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과 동역하여 기적을 일으키는 성탄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삼흥 식구들이 되게 하옵소서 주예 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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