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 주님, 어디 계시오니이까?
본문
시인 김광섭씨가 "저녁에"라는 시를 썼습니다.
저렇게 많은 중에서 /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 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하나 나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
저녁에, 고향을 떠나기 전에, 또는 타국에서, 저 별을 쳐다보면서 친구들과 또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만났다가 헤어지면서 자, 이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겠나 하는 아쉬움, 그리고 다시 만날 것을 표현한 것이라 봅니다.
고향을 떠나 유학 오고 이민 온 우리들, 두고 온 친구들, 이웃들을 그리워하면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리 하는 우리 인생의 숙제를 생각합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에게 온 제자 중에 "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야 하나"를 궁금하게 생각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원래 세례 요한의 제자였지만 예수님의 첫 번째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하여 세례 요한을 떠난 제자 둘 중에 한 사람의 이름만 성경에 나타나는데 그가 바로 안드레, 앤드류라고 하는 제자입니다.
오늘 우리는 안드레라고 하는 제자를 통해 나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라는 물음을 생각해 봅니다.
먼저 우리는 그가 세례 요한으로부터 예수님에 관하여 무슨 말을 들었길래 예수님을 따랐을까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무슨 칭찬, 무슨 감동적인 말을 들었길래 자기 스승인 세례 요한을 떠나서 예수님께로 갔는가
오늘 요한복음 1:36절에 보니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소개할 때 "보라 여호와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말했습니다. "보라! 저분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 쓰여질 산 제물, 어린양이다!"라는 것인데 안드레는 그 말만 듣고는 예수님을 따라갔던 것입니다.
무슨 위대한 스승도 아니요, 무슨 칭찬 받는 사람도 아니고 무슨 영웅시되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저 여호와 하나님께 죽어서 바쳐질, "고난받는 어린양"이라는 말을 듣고는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두말없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도 교회 나온다는 것이 무슨 세상에서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분을 보기 위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를 위해 고난받으신 어린 양 예수님으로 소개받고 나온 것 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제자는, 진정한 크리스찬은, 진정한 예수그리스도의 사람들은 나를 위해 고난받고 죽으신 여호와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을 소개받고 어린 양 예수님 때문에 교회 나오고, 그 고난을 통한 구원을 감사 해서 교회 나와야 진정한 교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안드레가 예수님을 따랐을 때 그의 신앙의 자세는 어떠 했습니까
저는 네 가지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주여 어디 계시오니이까"하며 주님을 찾는 신앙입니다.
달리 말하면 (여호와 하나님) 중심 신앙입니다.
안드레와 다른 제자가 예수님을 쫓아오니까, "너희가 무엇을 구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무엇을 간구했습니까 (1:38) 바로 "주님 어디 계십니까" 라고 대답했습니다. "너의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말해보아라" 했을 때 안드레와 다른 한 제자는 다른 것 구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들이 간구하는 것은 "주님, 어디에 있습니까" 였습니다.
"무엇을 구하느냐" 했을 때 흔히 말하는 세상의 황금이나 재물이나 지위나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고, "주님은 어디에 계십니까"를 구한 것입니다. "아, 이럴 때 예수님은 어디에 계실까" 이것을 먼저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생이! "아, 예수님이 어디에 계신가" 아는 사람이! 바로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의 자기 인생의 길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안드레는 다른 것을 간구하지 않고 예수님 어디 계신지요 알려주십시오 라고 간청했던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어디 계신지만 알면 내 인생의 길이 해결되니까, 나도 그길을 가면 되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4:6에서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했습니다.
예수님은 "3-Wh" 입니다.
I am the way (where),
I am the truth (what),
and I am the life (why)
여러분도 안드레 처럼 그걸 찾으시고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이럴 때 예수님은 어디 계시지요 제일 먼저 예수님을 찾는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시골 영감님에게 아들이 여럿이 있었습니다. 해마다 생일 때면 여러 아들들이 돌아가면서 생일을 차려 드립니다. 그 중 말째가 자기 일곱 살 난 아들에게 "얘야 너 큰집에 가서 이번에는 어디서 할아버지 생신을 차리는지 알아보고 오너라"하고 보냈습니다. 큰집에 가니 큰 아버지가 뒷간에 있었습니다. 그래 그 아이가 뒷간에 가서 큰소리로 말합니다. "큰아부지 요, 할아버지 생일 어데서 해요"하니 "애, 재호야, 할아버지 생신 여기서 차려 잡수시게 되니, 모두 이리로 오라고 해라"고 합니다. 이 아이가 집으로 뛰어 가더니 "아부지요, 내일 할아버지 생신은 요. 큰 집 뒷간에서 차린다고 모두 그리로 오래요!" 했답니다.
현대 사람들을 가리켜 절망의 군상이니, 불안의 존재이니, 허무의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바로 주님이 어디에 계신지를 모르기 때문에 어느 길을 가야 하는지 모르는 길 잃은 미아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디로 가야하는지 무엇을 해야하는지는 주님이 어디에 계신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들째, "저희가 가서 계신 데를 보고" 주님 계신 데를 보는 신앙입니다.
주님 계신 데가 어디입니까 바로 성전 (교회)중심 신앙입니다.
예수님이 "와 보라" 했을 때 그들은 어디를 갔습니까 (1:39) 바로 주님 계신 데를 갔습니다. 주님 계신 데에 무슨 굉장한 것이 있어서 거길 갔습니까 가봐야 별거 없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나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에 의하면 예수님 계신 데라야 뭐가 있겠습니까 뭐 거기가 무슨 보석으로 장식되었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나 거기는 세상이 줄 수 없는 것, 사랑이 있고 평화가 있고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주님이 계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가 우리 집보다 편안 한가요 아름다운 장식으로 되었나요 아니에요 우리 집들보다 못해요. 그러나 여기에, 주님 계신 데에 오면 웬지 누구도 줄 수 없고 누구도 만들어 내지 못하는 평안과 아름다움과 축복이 있어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는 주님이 계신 곳 누추한 마구간으로 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안드레처럼 주님이 계신 데에 가면 뭔가 있다라고 믿고 간 것처럼 우리도 주님 계신 데에 가있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 중심 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기도할 때 밥할 때 직장 생활 할 때에도 교회중심으로 살아가 보세요 분명히 달라집니다.
어떤 죄수가 감옥에서 신문을 읽다가 자기 친구의 기사와 사진을 보고는 크게 탄식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 죄수는 30여 년 전의 일을 떠올렸습니다. 30여 년 전 그 죄수와 친구는 함께 술을 마시러 카페에 가던 중이었습니다. 가는 중에 교회 옆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마침 집회가 열렸습니다. 그 친구는 머뭇거리더니 "나는 예배를 드리러 들어가겠다. 너 혼자 가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실갱이를 하다가 그 친구는 집회를 참석하게 되었고 이 죄수된 자는 화를 내면서 술집으로 향했습니다. 그 뒤로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길로 가게 되고 서로 소식을 몰랐습니다. 그 죄수가 그날 아침 본 그 기사는 다름 아닌 자기 친구 클리브랜드가 대통령이 되었다는 기사였습니다.
30년이 되니까 그 차이가 얼마나 엄청난지 알게된 것입니다.
주님이 게신 곳 교회 중심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셋째, "그날 함께 거하니"라는 말씀으로부터 동거하는 신앙입니다.
안드레는 (체험)중심 신앙을 가졌다고 봅니다.
안드레는 가서 보는 것으로 끝내지 않았고 주님과 함께 먹고 자고 동행하고 동거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같이 잠을 자봐야 주님과 그 계신 곳을 확실히 알겠다는 것입니다. 주님과 동거하며 동행하며 주님을 체험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이 어디 계십니까 하고 그 주소를 찾아놓고는 주님을 체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또 주님을 잃어버립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주소는 영적인 주소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동거하지 못하는 사람, 주님을 체험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 영적인 주소를 잃어버려서 자기의 가는 인생의 길도 잃어버리고 마는 사람이 됩니다.
여러분 주님과 동거하십시오. 주와 함께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저는 가끔 하늘을 쳐다보고 Good morning Jesus! 예수님 안녕하세요
넷째,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하는 증거하는 신앙입니다.
즉 (증거) 중심 신앙입니다.
주님과 함께 동거하고 주님을 체험하고 난 후에 안드레는 베드로를 만나 무엇이라 고백하였습니까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그런데 가만히 성경본문을 보세요! 처음에는 주님을 선생님이라고 랍비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 비천한 곳에서라도 주님과 동거하고 난 뒤에 랍비가 메시야로 변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직도 교회 나오면서도 예수님을 랍비 선생님으로만 아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주님과 동거하지 못하고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같이 살며 동거하는 사람은 주님을 선생으로가 아니라 메시야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우리에게 예수님은 더 이상 랍비가 아닙니다. 메시야입니다. 사랑의 왕 메시야 이셨습니다.
그때부터 안드레는 어디서 무슨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사람들에게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라는 이 고백한 안드레는 뒤에 어떤 인물이 되었습니까
1) 베드로를 전도하여 국내 첫 전도자 (요한 1:42)
2) 헬라사람들을 예수님에게 인도하여 국외 첫 인도자 (요한 12:20-22)
3) 오병이어의 이적의 기초로서 어린 아이의 도시락을 제공한 제자(요한 6:8-9)
4) 에수님의 첫 번째 수제자(요한 1:37)였으나 수제자의 자리를 베드로에게 넘기고 자기는 늘 뒤에서 일하는 겸손한 제자였습니다.
사랑의 왕, 성탄의 구주를 다같이 부르시겠습니다.
저렇게 많은 중에서 /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 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하나 나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
저녁에, 고향을 떠나기 전에, 또는 타국에서, 저 별을 쳐다보면서 친구들과 또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만났다가 헤어지면서 자, 이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겠나 하는 아쉬움, 그리고 다시 만날 것을 표현한 것이라 봅니다.
고향을 떠나 유학 오고 이민 온 우리들, 두고 온 친구들, 이웃들을 그리워하면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리 하는 우리 인생의 숙제를 생각합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에게 온 제자 중에 "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야 하나"를 궁금하게 생각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원래 세례 요한의 제자였지만 예수님의 첫 번째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하여 세례 요한을 떠난 제자 둘 중에 한 사람의 이름만 성경에 나타나는데 그가 바로 안드레, 앤드류라고 하는 제자입니다.
오늘 우리는 안드레라고 하는 제자를 통해 나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라는 물음을 생각해 봅니다.
먼저 우리는 그가 세례 요한으로부터 예수님에 관하여 무슨 말을 들었길래 예수님을 따랐을까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무슨 칭찬, 무슨 감동적인 말을 들었길래 자기 스승인 세례 요한을 떠나서 예수님께로 갔는가
오늘 요한복음 1:36절에 보니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소개할 때 "보라 여호와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말했습니다. "보라! 저분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 쓰여질 산 제물, 어린양이다!"라는 것인데 안드레는 그 말만 듣고는 예수님을 따라갔던 것입니다.
무슨 위대한 스승도 아니요, 무슨 칭찬 받는 사람도 아니고 무슨 영웅시되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저 여호와 하나님께 죽어서 바쳐질, "고난받는 어린양"이라는 말을 듣고는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두말없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도 교회 나온다는 것이 무슨 세상에서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분을 보기 위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를 위해 고난받으신 어린 양 예수님으로 소개받고 나온 것 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제자는, 진정한 크리스찬은, 진정한 예수그리스도의 사람들은 나를 위해 고난받고 죽으신 여호와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을 소개받고 어린 양 예수님 때문에 교회 나오고, 그 고난을 통한 구원을 감사 해서 교회 나와야 진정한 교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안드레가 예수님을 따랐을 때 그의 신앙의 자세는 어떠 했습니까
저는 네 가지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주여 어디 계시오니이까"하며 주님을 찾는 신앙입니다.
달리 말하면 (여호와 하나님) 중심 신앙입니다.
안드레와 다른 제자가 예수님을 쫓아오니까, "너희가 무엇을 구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무엇을 간구했습니까 (1:38) 바로 "주님 어디 계십니까" 라고 대답했습니다. "너의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말해보아라" 했을 때 안드레와 다른 한 제자는 다른 것 구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들이 간구하는 것은 "주님, 어디에 있습니까" 였습니다.
"무엇을 구하느냐" 했을 때 흔히 말하는 세상의 황금이나 재물이나 지위나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고, "주님은 어디에 계십니까"를 구한 것입니다. "아, 이럴 때 예수님은 어디에 계실까" 이것을 먼저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생이! "아, 예수님이 어디에 계신가" 아는 사람이! 바로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의 자기 인생의 길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안드레는 다른 것을 간구하지 않고 예수님 어디 계신지요 알려주십시오 라고 간청했던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어디 계신지만 알면 내 인생의 길이 해결되니까, 나도 그길을 가면 되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4:6에서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했습니다.
예수님은 "3-Wh" 입니다.
I am the way (where),
I am the truth (what),
and I am the life (why)
여러분도 안드레 처럼 그걸 찾으시고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이럴 때 예수님은 어디 계시지요 제일 먼저 예수님을 찾는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시골 영감님에게 아들이 여럿이 있었습니다. 해마다 생일 때면 여러 아들들이 돌아가면서 생일을 차려 드립니다. 그 중 말째가 자기 일곱 살 난 아들에게 "얘야 너 큰집에 가서 이번에는 어디서 할아버지 생신을 차리는지 알아보고 오너라"하고 보냈습니다. 큰집에 가니 큰 아버지가 뒷간에 있었습니다. 그래 그 아이가 뒷간에 가서 큰소리로 말합니다. "큰아부지 요, 할아버지 생일 어데서 해요"하니 "애, 재호야, 할아버지 생신 여기서 차려 잡수시게 되니, 모두 이리로 오라고 해라"고 합니다. 이 아이가 집으로 뛰어 가더니 "아부지요, 내일 할아버지 생신은 요. 큰 집 뒷간에서 차린다고 모두 그리로 오래요!" 했답니다.
현대 사람들을 가리켜 절망의 군상이니, 불안의 존재이니, 허무의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바로 주님이 어디에 계신지를 모르기 때문에 어느 길을 가야 하는지 모르는 길 잃은 미아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디로 가야하는지 무엇을 해야하는지는 주님이 어디에 계신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들째, "저희가 가서 계신 데를 보고" 주님 계신 데를 보는 신앙입니다.
주님 계신 데가 어디입니까 바로 성전 (교회)중심 신앙입니다.
예수님이 "와 보라" 했을 때 그들은 어디를 갔습니까 (1:39) 바로 주님 계신 데를 갔습니다. 주님 계신 데에 무슨 굉장한 것이 있어서 거길 갔습니까 가봐야 별거 없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나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에 의하면 예수님 계신 데라야 뭐가 있겠습니까 뭐 거기가 무슨 보석으로 장식되었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나 거기는 세상이 줄 수 없는 것, 사랑이 있고 평화가 있고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주님이 계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가 우리 집보다 편안 한가요 아름다운 장식으로 되었나요 아니에요 우리 집들보다 못해요. 그러나 여기에, 주님 계신 데에 오면 웬지 누구도 줄 수 없고 누구도 만들어 내지 못하는 평안과 아름다움과 축복이 있어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는 주님이 계신 곳 누추한 마구간으로 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안드레처럼 주님이 계신 데에 가면 뭔가 있다라고 믿고 간 것처럼 우리도 주님 계신 데에 가있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 중심 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기도할 때 밥할 때 직장 생활 할 때에도 교회중심으로 살아가 보세요 분명히 달라집니다.
어떤 죄수가 감옥에서 신문을 읽다가 자기 친구의 기사와 사진을 보고는 크게 탄식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 죄수는 30여 년 전의 일을 떠올렸습니다. 30여 년 전 그 죄수와 친구는 함께 술을 마시러 카페에 가던 중이었습니다. 가는 중에 교회 옆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마침 집회가 열렸습니다. 그 친구는 머뭇거리더니 "나는 예배를 드리러 들어가겠다. 너 혼자 가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실갱이를 하다가 그 친구는 집회를 참석하게 되었고 이 죄수된 자는 화를 내면서 술집으로 향했습니다. 그 뒤로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길로 가게 되고 서로 소식을 몰랐습니다. 그 죄수가 그날 아침 본 그 기사는 다름 아닌 자기 친구 클리브랜드가 대통령이 되었다는 기사였습니다.
30년이 되니까 그 차이가 얼마나 엄청난지 알게된 것입니다.
주님이 게신 곳 교회 중심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셋째, "그날 함께 거하니"라는 말씀으로부터 동거하는 신앙입니다.
안드레는 (체험)중심 신앙을 가졌다고 봅니다.
안드레는 가서 보는 것으로 끝내지 않았고 주님과 함께 먹고 자고 동행하고 동거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같이 잠을 자봐야 주님과 그 계신 곳을 확실히 알겠다는 것입니다. 주님과 동거하며 동행하며 주님을 체험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이 어디 계십니까 하고 그 주소를 찾아놓고는 주님을 체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또 주님을 잃어버립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주소는 영적인 주소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동거하지 못하는 사람, 주님을 체험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 영적인 주소를 잃어버려서 자기의 가는 인생의 길도 잃어버리고 마는 사람이 됩니다.
여러분 주님과 동거하십시오. 주와 함께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저는 가끔 하늘을 쳐다보고 Good morning Jesus! 예수님 안녕하세요
넷째,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하는 증거하는 신앙입니다.
즉 (증거) 중심 신앙입니다.
주님과 함께 동거하고 주님을 체험하고 난 후에 안드레는 베드로를 만나 무엇이라 고백하였습니까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그런데 가만히 성경본문을 보세요! 처음에는 주님을 선생님이라고 랍비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 비천한 곳에서라도 주님과 동거하고 난 뒤에 랍비가 메시야로 변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직도 교회 나오면서도 예수님을 랍비 선생님으로만 아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주님과 동거하지 못하고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같이 살며 동거하는 사람은 주님을 선생으로가 아니라 메시야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우리에게 예수님은 더 이상 랍비가 아닙니다. 메시야입니다. 사랑의 왕 메시야 이셨습니다.
그때부터 안드레는 어디서 무슨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사람들에게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라는 이 고백한 안드레는 뒤에 어떤 인물이 되었습니까
1) 베드로를 전도하여 국내 첫 전도자 (요한 1:42)
2) 헬라사람들을 예수님에게 인도하여 국외 첫 인도자 (요한 12:20-22)
3) 오병이어의 이적의 기초로서 어린 아이의 도시락을 제공한 제자(요한 6:8-9)
4) 에수님의 첫 번째 수제자(요한 1:37)였으나 수제자의 자리를 베드로에게 넘기고 자기는 늘 뒤에서 일하는 겸손한 제자였습니다.
사랑의 왕, 성탄의 구주를 다같이 부르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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