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 참 성도가 맞는 성탄
본문
키엘케골의 ‘왕과 시골처녀의 사랑’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왕이 시골을 순회하는 도중에 시골 처녀에게 한 눈에 반했습니다. 꼭 그 처녀를 자신의 아내로 삼고 싶은 생각이 들어 신하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저 처녀를 데리고 와서 결혼할까” 그러나 신하는 “그건 안됩니다. 폐하께서 신분이 없는 시골 처녀를 데리고 오는 것은 국법에 어긋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럼 내가 가서 결혼할까”라고 하였지만 신하는 역시 “폐하께서 가신다면 번거럽고 도저히 안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왕은 가장 좋은 방법을 택하였습니다. “내가 왕관을 포기하겠다. ” 이 이야기는 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이야기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되신 성육신 사건을 표현한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날이 성탄절입니다. 성탄은 여호와 하나님이 하늘을 포기하고 땅을 선택하신 날입니다. 성탄의 의미는 구원하신 날입니다. 아들을 주신 날입니다. 드디어 아들을 속죄의 대속물로 주신 날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는 쓸쓸한 날이고 고통이 시작된 날입니다. 그러나 사람 편에서는 기쁨의 날이며 축복의 날입니다.
연말이 되면 왠지 쓸쓸합니다. 추운 계절이고 나뭇잎도 다 떨어져 삭막하기 그지 없습니다. 벌써 한 해가 다 갔구나 하는 허탈감이 가득한 계절입니다. 또 한 살을 더 먹는구나 하는 애절함도 있습니다. 이런 계절에 기쁜 성탄이 있다는 것은 선물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는 고통이며 포기이며 죽음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기쁨과 소망 주신 것은 은총입니다. 필립 얀시는 현대의 의학적 표현으로 예수님의 탄생을 설명하였습니다. “만물을 만드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작아지시고 작아지시고 또 작아져서 마침내는 하나의 난세포가 되기까지 작아지는 형태로 오셨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작은 형태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성탄입니다.
신앙인에게는 네 가지 중요한 신앙의 기틀이 있습니다.
첫째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창조의 신앙입니다.
둘째는 임마누엘의 신앙입니다.
셋째는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신앙입니다.
넷째는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을 믿는 재림의 신앙입니다.
임마누엘은 중요한 신앙의 틀입니다. 임마누엘의 신앙이 없으면 현실적 평안은 있을 수 없습니다. 임마누엘은 성탄으로 말미암아 성취되었습니다. 마태복음 1:23에는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은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는 인간의 범죄로 얼룩졌습니다. 인간의 죄는 여호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벌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이 벌어진 사이를 다시 봉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신 것이 예수님이 오심으로 성취됩니다. 그래서 성경에 임마누엘은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인간이 되심 즉 성육신은 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일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되셨지만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해서는 여호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여호와 하나님이며 동시에 사람인 분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여호와 하나님께도, 사람에게도 통할 수가 있습니다. 그 분이 예수님입니다. 이 사건이 성육신입니다. 이 날이 성탄절입니다. 성탄의 날에 천사들이 등장합니다. 천사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메신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메신저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하지 자기들의 말을 말하지 않습니다. 천사들의 말을 들어보세요.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천사들의 찬송을 들어보세요.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천사들의 말, 천사들의 찬송, 이 모두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말은 왜곡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도 인간은 가감합니다. 천사의 말은 진실합니다. 가감없이 여호와 하나님을 대변합니다. 성탄에 주신 천사의 말은 가감이 없는 여호와 하나님의 성탄 메시지입니다. 이 속에는 성탄의 참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첫째, 성탄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누가복음 2:10에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천사가 전한다고 합니다.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무엇일까요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입니다. 구주가 나신 것이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그리스도가 기쁨이며 그리스도가 좋은 소식입니다. 기쁨의 소식이 복음이란 뜻입니다. 성경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란 복음서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즉 복음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기쁨이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평화가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행복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이 기쁜 소식인 것입니다. 이사야 9:1에는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라고 합니다. 예수님 없는 세상은 그 자체가 고통이며 흑암입니다. 성탄의 계절이 즐거운 이유가 무엇입니까 크리스마스 장식 때문입니까 카드 때문입니까 아니면 선물 때문입니까 이 모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때문에 성탄절이 즐거운 것입니다. 예수님이 없으면 성탄이 즐거울 이유가 없습니다. 크리스마스 캐롤을 보세요. 찬송이나 노래들은 다 감정이 있습니다. 찬송이나 노래들은 기쁨이 있습니다. 회개가 있습니다. 회상하게 합니다. 그래서 어떤 노래는 우울해지고, 어떤 찬송은 회개하게 합니다.
그러나 크리스마스 캐롤은 한결같이 유쾌하고 즐겁습니다. 크리스마스 캐롤을 듣고 우는 사람 보셨어요 예수님은 기쁨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이 큰 기쁨입니다. 그래서 찬송가에는 “기쁨의 근원되시는 예수를 위해 삽시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기쁨의 근원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기쁨도 있습니다. 이사야 9:3에는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케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누는 때의 즐거움같이 그들이 즐거워 하오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은 그 자체가 즐거움입니다.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심으로 비로소 즐거움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기쁨이 있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웃을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가정에서도 아기가 생기면 웃을 일이 생깁니다. 아기 예수님은 우리에게 웃을 일을 제공하였습니다.
둘째, 성탄은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천사들의 찬양은 먼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이요”라고 합니다. 세상에 이런 영광이 어디 있습니까 아들이 죽는데 영광이 됩니까 아들을 사람으로 만들어 고생 길을 가게 하는데 영광이 됩니까 그런데 이게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를 구원하실 때 가능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은 인간이 평화할 때 가능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은 인간이 잘 되므로 되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는 끔찍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어떤 아버지가 딸과 아들 두 아이를 한강에 던져 죽인 사건입니다.
이 아버지는 18살에 결혼하여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아버지 자격이 전혀 없는 아버지입니다. 비정하기 짝이 없는 아버지입니다. 이제는 아버지도 면허를 주어야 할 것같습니다. 이 아버지로 말미암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짐승보다 못한 인간의 모습을 통하여 충격을 받았습니까 그런데 이 아버지가 아이를 한강에 던지고 영광을 받습니까 정반대입니다. 비난을 받고, 구속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아들을 세상에 던지고 영광을 받습니다. 이것이 인간과 여호와 하나님의 다른 점입니다.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자녀들이 잘 되면 부모가 영광을 받습니다. 자녀가 잘 되어서 이제 살 길이 열렸으므로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자녀가 잘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구원받는 것이 잘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이 잘 되는 것입니다. 생명을 얻는 것아 잘 되는 것입니다. 언제 여호와 하나님이 영광을 얻습니까 모두가 예수님을 알아야 영광이 됩니다. 모두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마지막 한 사람까지 다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2:4에는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라”. 마지막 한 사람까지 오신 예수님을 다 알게 하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목적이며 이렇게 해야 여호와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의 뜻은 그렇지 않습니다. 요나서의결론을 보세요. 요나서 4:11에는 말합니다. “니느웨에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여호와 하나님은 니느웨까지도 사랑하시고 돌이키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잘 부르는 복음성가의 가사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세상 모든 민족이 구원을 얻기까지 쉬지 않으시는 여호와 하나님”. 이게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모든 민족이 다 구원을 얻을 때까지 여호와 하나님은 절대로 쉬지 않으십니다. 쉴 수가 없습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안픈 손가락 없다”는 말이 있지요. 여호와 하나님의 손가락이 몇 개인지 아세요 60억개가 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습니다. 사담 후세인도, 빈 라덴도, 다 여호와 하나님의 손가락입니다. 다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물론 조지 W. 부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들을 다 구원하셔서 영광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루어진 우리의 착한 행실은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루어진 영광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입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영광의 대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늘에 평화, 땅에는 영광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천사는 이 둘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늘에 영광입니다. 그리고 땅에는 평화입니다.
셋째, 성탄은 사람들 중에 평화입니다.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천사는 노래합니다. 성탄은 평화의 선포입니다. 천사는 “무서워말라”고 합니다. 왜 사람들이 무서워합니까 평화가 없으니 무서워합니다. 무서움은 죄의 결과입니다.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에 무서워 숨기 시작하였습니다. 죄는 곧 평화를 상실한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불안의 시대입니다. 칼 야스퍼스는 이러한 것을 한계상황이라고 하였습니다. 신학자 폴 틸리히는 비존재화에 대한 공포가 지배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지금도 가장 필요한 것은 평화입니다. 우리 시대는 전쟁에 대한 두려움이있습니다. 환경파괴에 대한 공포가 있습니다.
경제에 대한 불안감이 늘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막연한 공포도 있습니다. 아롱이란 사람은 평화를 ‘정치적 단위간의 대립적 폭력형태가 어느 정도 계속적으로 정지되고 있는 상태’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세상에는 완전한 평화는 없습니다. 현재 우리 나라의 휴전기간이 전시냐 평시냐는데 대하여 학설상으로는 대립이 됩니다. 그러나 전통적 국제법상으로는 전시로 봅니다. 지금도 우리는 전쟁중입니다. 인류 역사에 전쟁상태의 기간이 평화의 그것보다 길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평화기간은 전쟁준비 기간에 불과합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전쟁을 ‘도시국가의 생명력을 시험하는 건강한 시련’ 또는 ‘인간사회에서의 자연적 현상’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인류평화에 대한 요구를 최초로 강력하게 제기한 것은 그리스도교입니다. 절대평화주의 입장에서 전쟁 자체를 부인하였습니다. 지금도 이 입장을 양보하지 않는 퀘이커교도 등의 일파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교가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나 예수님의 오심이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에베소 2:14에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라고 합니다. 원수 된 우리의 죄를 용서받고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께 담대히 나아가게 되는 것은 예수님이 주신 평화입니다. 예수님은 둘이 하나되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땜쟁이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땜쟁이입니다. 이사야 9:4에는 “이는 그들의 무겁게 맨 멍에와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라고 합니다. 해방과 평화를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것이 성탄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을 누가복음 4:18에는 말합니다.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성탄은 그래서 전쟁을 그치게 합니다. 다툼을 물러가게 합니다. 두 사람이 하나가 되게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었습니다.
결론
1978년 로마 교황 요한 바오로1세가 취임한지 33일만에 서거하였습니다. 로마교회는 큰 충격 속에서 장례절차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준비하는 가운데 임종 직전에 교황이 남긴 일기문이 공개되었습니다. “부자들이여, 가난한 자들을 기억해 주십시오. 직장인들이여, 무직자들을 기억해 주십시오. 건강한 자들이여, 병든 자들을 기억해 주십시오. 남을 위해서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이 일기문이 공개되었을 때 제일 충격을 받은 것은 노벨평화상 위원회였습니다. 그들은 모여 다시 심사숙고한 끝에 테레사 수녀에게 수상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위원회에서는 본래 중동문제의 해결에 수고한 카터 대통령에게 수상하기로 내정하였지만 테레사 수녀에게 수여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 때 수녀는 “가장 큰 질병은 결핵이나 문둥병이 아닙니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고 아무도 위로하지 않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 이것이 가장 무서운 질병입니다. 세상에는 빵이 없어서 죽어 가는 사람도 많지만 작은 사랑이 없어서 죽어 가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참 성도의 참 크리스마스는 예수님과 함께(with Jesus), 거룩함과 함께(with Holiness), 조용함과 함께(with Silence) 가족과 함께(with Family), 이웃과 함께(with Neighbor) 맞이하는 크리스마스입니다. 모두와 함께 기쁘고,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평화로운 성탄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왕은 가장 좋은 방법을 택하였습니다. “내가 왕관을 포기하겠다. ” 이 이야기는 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이야기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되신 성육신 사건을 표현한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날이 성탄절입니다. 성탄은 여호와 하나님이 하늘을 포기하고 땅을 선택하신 날입니다. 성탄의 의미는 구원하신 날입니다. 아들을 주신 날입니다. 드디어 아들을 속죄의 대속물로 주신 날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는 쓸쓸한 날이고 고통이 시작된 날입니다. 그러나 사람 편에서는 기쁨의 날이며 축복의 날입니다.
연말이 되면 왠지 쓸쓸합니다. 추운 계절이고 나뭇잎도 다 떨어져 삭막하기 그지 없습니다. 벌써 한 해가 다 갔구나 하는 허탈감이 가득한 계절입니다. 또 한 살을 더 먹는구나 하는 애절함도 있습니다. 이런 계절에 기쁜 성탄이 있다는 것은 선물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는 고통이며 포기이며 죽음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기쁨과 소망 주신 것은 은총입니다. 필립 얀시는 현대의 의학적 표현으로 예수님의 탄생을 설명하였습니다. “만물을 만드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작아지시고 작아지시고 또 작아져서 마침내는 하나의 난세포가 되기까지 작아지는 형태로 오셨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작은 형태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성탄입니다.
신앙인에게는 네 가지 중요한 신앙의 기틀이 있습니다.
첫째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창조의 신앙입니다.
둘째는 임마누엘의 신앙입니다.
셋째는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신앙입니다.
넷째는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을 믿는 재림의 신앙입니다.
임마누엘은 중요한 신앙의 틀입니다. 임마누엘의 신앙이 없으면 현실적 평안은 있을 수 없습니다. 임마누엘은 성탄으로 말미암아 성취되었습니다. 마태복음 1:23에는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은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는 인간의 범죄로 얼룩졌습니다. 인간의 죄는 여호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벌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이 벌어진 사이를 다시 봉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신 것이 예수님이 오심으로 성취됩니다. 그래서 성경에 임마누엘은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인간이 되심 즉 성육신은 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일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되셨지만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해서는 여호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여호와 하나님이며 동시에 사람인 분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여호와 하나님께도, 사람에게도 통할 수가 있습니다. 그 분이 예수님입니다. 이 사건이 성육신입니다. 이 날이 성탄절입니다. 성탄의 날에 천사들이 등장합니다. 천사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메신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메신저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하지 자기들의 말을 말하지 않습니다. 천사들의 말을 들어보세요.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천사들의 찬송을 들어보세요.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천사들의 말, 천사들의 찬송, 이 모두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말은 왜곡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도 인간은 가감합니다. 천사의 말은 진실합니다. 가감없이 여호와 하나님을 대변합니다. 성탄에 주신 천사의 말은 가감이 없는 여호와 하나님의 성탄 메시지입니다. 이 속에는 성탄의 참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첫째, 성탄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누가복음 2:10에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천사가 전한다고 합니다.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무엇일까요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입니다. 구주가 나신 것이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그리스도가 기쁨이며 그리스도가 좋은 소식입니다. 기쁨의 소식이 복음이란 뜻입니다. 성경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란 복음서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즉 복음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기쁨이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평화가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행복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이 기쁜 소식인 것입니다. 이사야 9:1에는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라고 합니다. 예수님 없는 세상은 그 자체가 고통이며 흑암입니다. 성탄의 계절이 즐거운 이유가 무엇입니까 크리스마스 장식 때문입니까 카드 때문입니까 아니면 선물 때문입니까 이 모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때문에 성탄절이 즐거운 것입니다. 예수님이 없으면 성탄이 즐거울 이유가 없습니다. 크리스마스 캐롤을 보세요. 찬송이나 노래들은 다 감정이 있습니다. 찬송이나 노래들은 기쁨이 있습니다. 회개가 있습니다. 회상하게 합니다. 그래서 어떤 노래는 우울해지고, 어떤 찬송은 회개하게 합니다.
그러나 크리스마스 캐롤은 한결같이 유쾌하고 즐겁습니다. 크리스마스 캐롤을 듣고 우는 사람 보셨어요 예수님은 기쁨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이 큰 기쁨입니다. 그래서 찬송가에는 “기쁨의 근원되시는 예수를 위해 삽시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기쁨의 근원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기쁨도 있습니다. 이사야 9:3에는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케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누는 때의 즐거움같이 그들이 즐거워 하오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은 그 자체가 즐거움입니다.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심으로 비로소 즐거움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기쁨이 있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웃을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가정에서도 아기가 생기면 웃을 일이 생깁니다. 아기 예수님은 우리에게 웃을 일을 제공하였습니다.
둘째, 성탄은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천사들의 찬양은 먼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이요”라고 합니다. 세상에 이런 영광이 어디 있습니까 아들이 죽는데 영광이 됩니까 아들을 사람으로 만들어 고생 길을 가게 하는데 영광이 됩니까 그런데 이게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를 구원하실 때 가능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은 인간이 평화할 때 가능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은 인간이 잘 되므로 되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는 끔찍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어떤 아버지가 딸과 아들 두 아이를 한강에 던져 죽인 사건입니다.
이 아버지는 18살에 결혼하여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아버지 자격이 전혀 없는 아버지입니다. 비정하기 짝이 없는 아버지입니다. 이제는 아버지도 면허를 주어야 할 것같습니다. 이 아버지로 말미암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짐승보다 못한 인간의 모습을 통하여 충격을 받았습니까 그런데 이 아버지가 아이를 한강에 던지고 영광을 받습니까 정반대입니다. 비난을 받고, 구속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아들을 세상에 던지고 영광을 받습니다. 이것이 인간과 여호와 하나님의 다른 점입니다.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자녀들이 잘 되면 부모가 영광을 받습니다. 자녀가 잘 되어서 이제 살 길이 열렸으므로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자녀가 잘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구원받는 것이 잘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이 잘 되는 것입니다. 생명을 얻는 것아 잘 되는 것입니다. 언제 여호와 하나님이 영광을 얻습니까 모두가 예수님을 알아야 영광이 됩니다. 모두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마지막 한 사람까지 다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2:4에는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라”. 마지막 한 사람까지 오신 예수님을 다 알게 하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목적이며 이렇게 해야 여호와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의 뜻은 그렇지 않습니다. 요나서의결론을 보세요. 요나서 4:11에는 말합니다. “니느웨에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여호와 하나님은 니느웨까지도 사랑하시고 돌이키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잘 부르는 복음성가의 가사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세상 모든 민족이 구원을 얻기까지 쉬지 않으시는 여호와 하나님”. 이게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모든 민족이 다 구원을 얻을 때까지 여호와 하나님은 절대로 쉬지 않으십니다. 쉴 수가 없습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안픈 손가락 없다”는 말이 있지요. 여호와 하나님의 손가락이 몇 개인지 아세요 60억개가 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습니다. 사담 후세인도, 빈 라덴도, 다 여호와 하나님의 손가락입니다. 다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물론 조지 W. 부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들을 다 구원하셔서 영광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루어진 우리의 착한 행실은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루어진 영광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입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영광의 대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늘에 평화, 땅에는 영광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천사는 이 둘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늘에 영광입니다. 그리고 땅에는 평화입니다.
셋째, 성탄은 사람들 중에 평화입니다.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천사는 노래합니다. 성탄은 평화의 선포입니다. 천사는 “무서워말라”고 합니다. 왜 사람들이 무서워합니까 평화가 없으니 무서워합니다. 무서움은 죄의 결과입니다.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에 무서워 숨기 시작하였습니다. 죄는 곧 평화를 상실한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불안의 시대입니다. 칼 야스퍼스는 이러한 것을 한계상황이라고 하였습니다. 신학자 폴 틸리히는 비존재화에 대한 공포가 지배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지금도 가장 필요한 것은 평화입니다. 우리 시대는 전쟁에 대한 두려움이있습니다. 환경파괴에 대한 공포가 있습니다.
경제에 대한 불안감이 늘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막연한 공포도 있습니다. 아롱이란 사람은 평화를 ‘정치적 단위간의 대립적 폭력형태가 어느 정도 계속적으로 정지되고 있는 상태’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세상에는 완전한 평화는 없습니다. 현재 우리 나라의 휴전기간이 전시냐 평시냐는데 대하여 학설상으로는 대립이 됩니다. 그러나 전통적 국제법상으로는 전시로 봅니다. 지금도 우리는 전쟁중입니다. 인류 역사에 전쟁상태의 기간이 평화의 그것보다 길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평화기간은 전쟁준비 기간에 불과합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전쟁을 ‘도시국가의 생명력을 시험하는 건강한 시련’ 또는 ‘인간사회에서의 자연적 현상’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인류평화에 대한 요구를 최초로 강력하게 제기한 것은 그리스도교입니다. 절대평화주의 입장에서 전쟁 자체를 부인하였습니다. 지금도 이 입장을 양보하지 않는 퀘이커교도 등의 일파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교가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나 예수님의 오심이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에베소 2:14에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라고 합니다. 원수 된 우리의 죄를 용서받고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께 담대히 나아가게 되는 것은 예수님이 주신 평화입니다. 예수님은 둘이 하나되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땜쟁이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땜쟁이입니다. 이사야 9:4에는 “이는 그들의 무겁게 맨 멍에와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라고 합니다. 해방과 평화를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것이 성탄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을 누가복음 4:18에는 말합니다.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성탄은 그래서 전쟁을 그치게 합니다. 다툼을 물러가게 합니다. 두 사람이 하나가 되게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었습니다.
결론
1978년 로마 교황 요한 바오로1세가 취임한지 33일만에 서거하였습니다. 로마교회는 큰 충격 속에서 장례절차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준비하는 가운데 임종 직전에 교황이 남긴 일기문이 공개되었습니다. “부자들이여, 가난한 자들을 기억해 주십시오. 직장인들이여, 무직자들을 기억해 주십시오. 건강한 자들이여, 병든 자들을 기억해 주십시오. 남을 위해서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이 일기문이 공개되었을 때 제일 충격을 받은 것은 노벨평화상 위원회였습니다. 그들은 모여 다시 심사숙고한 끝에 테레사 수녀에게 수상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위원회에서는 본래 중동문제의 해결에 수고한 카터 대통령에게 수상하기로 내정하였지만 테레사 수녀에게 수여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 때 수녀는 “가장 큰 질병은 결핵이나 문둥병이 아닙니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고 아무도 위로하지 않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 이것이 가장 무서운 질병입니다. 세상에는 빵이 없어서 죽어 가는 사람도 많지만 작은 사랑이 없어서 죽어 가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참 성도의 참 크리스마스는 예수님과 함께(with Jesus), 거룩함과 함께(with Holiness), 조용함과 함께(with Silence) 가족과 함께(with Family), 이웃과 함께(with Neighbor) 맞이하는 크리스마스입니다. 모두와 함께 기쁘고,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평화로운 성탄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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