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 첫 번 성탄의 두 개의 극단
본문
미국 로스엔젤레스 근교에 ‘칼텍’(Caltech)이란 부르는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이 있습니다. 이 학교는 미국에서 가장 좋은 학교 가운데 하나입니다. 오래전 제가 그곳에 있을 때에 제가 섬기는 교회에 출석하던 스미스라는 수학교수가 있었습니다. 이 교수의 부인이 한국인이어서 교회에 나오게 되었고 좋은 교제를 가진 분입니다.
이 분이 한번은 저에게 “노벨상에 왜 수학상이 없는지 아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알 리가 없어서 “왜 없습니까”하고 되물었더니 “노벨의 부인이 수학자와 바람을 피워서 노벨이 절대로 수학상을 만들지 말라고 했고, 죽기 전에도 그 다짐을 받았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말이 사실인지 모르지만 노벨에게도 가정적인 어려움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가장 위대한 발명가에게도 가장 고통스러운 자신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노벨이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였습니다. 그는 평화에 사용할 목적이었고 개발에 사용할 목적이었지만 결국 파괴하고 살상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아무리 선한 동기와 목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죄를 지은 인간은 악한 동기와 목적으로 사용하게 됩니다. 이것이 죄를 지은 인간의 양극입니다. 평화와 개발이라는 목적과 파괴와 살상이라는 양 극단 속에서 노벨은 자신의 발명을 후회했다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에게 생명을 주었지만 사람은 생명이 아니라 사망을 택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생명과 사망을 우리 앞에 두었습니다. 생명나무의 열매와 선악과의 열매 사이에서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이런 선악과 놀음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칼은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평화의 목적보다 전쟁의 목적으로 더 많이 사용됩니다. 파울로 코엘료는 ‘순교자’란 책에서 “마법사의 검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곳은 세속적인 장소라는 것. 검은 신성한 장소에 있어야 합니다”라고 합니다. 칼의 양 극단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신명기 30:19에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언제나 복음은 극단입니다. 생명과 사망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하늘과 땅이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아십니까 천지차이입니다. 천당과 지옥의 차이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인류가 하나 되게 하려 하심입니다. 그러나 죄성을 가진 인간은 생명과 사망으로 나누어집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생명을 주려하심이었지만 동시에 예수님 탄생은 죽음의 소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삶이 생명과 사망으로 나누어지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보시면 잘 압니다. 요한복음 7:12에는 예수께 대해 수군거립니다. “어떤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무리를 미혹하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9:16에는 맹인을 고친 다음에 말합니다.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일을 하겠느냐”고 합니다. 요한복음 10:19에는 선한 목자의 비유에서 예수님께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가시는 곳마다 분쟁을 일으켰습니다. 생명과 사망이 나누어졌습니다. 찬양과 비난이 나누어졌습니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와 못하는 아이의 차이점은 하기 싫은 일을 해내는 아이와 하기 싫은 일을 포기해 버리는 아이라고 합니다. 시험을 쳐서 성적이 좋은 아이와 나쁜 아이를 비교해 보세요. 성적이 좋은 아이는 부모님이 빨리 오기를 기다릴 것입니다. 성적이 나쁜 아이는 부모님이 오시는 것이 달갑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심도 그렇습니다. 기쁨으로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시는 것이 즐겁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초림뿐만 아니라 재림도 마찬가지입니다. 재림 때가 되면 기쁨으로 기다리는 사람은 “주 예수여, 어서 오소서”라고 한다고 합니다. 오심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바위야, 산아, 나를 가리어라”라고 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두 극단이 생겼습니다. 기쁨과 슬픔입니다. 삶과 죽음입니다. 우리의 성탄은 기쁨입니까, 슬픔입니까 삶입니까, 죽음입니까
첫째, 첫 번 성탄은 기쁨의 소식이었습니다.
누가복음 2:10에는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크고, 기쁘고, 좋은 것이 예수님의 오심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큰 사건입니다. 기쁨의 사건입니다. 좋은 사건입니다.
성탄이 다가오면 “메리 크리스마스”(Merry Christmas)라고 인사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는 문자 그대로 세계어입니다. 누구나 기쁜 성탄을 축하합니다. 성탄을 기쁘게 선포합니다. “슬픈 크리스마스”가 있습니까 그런 말은 아예 없습니다.
기독교는 기쁨의 종교입니다. 성경은 전쟁에서 승리하였을 때 기뻐합니다. 역대하 20:27에는 “여호와께서 그들이 그 적군을 이김으로서 즐거워하게 하였음이라”고 합니다. 제사를 기쁘게 드리라고 합니다. 느헤미야 12:43에는 “이날에 무리가 큰 제사를 드리고 심히 즐거워하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고 합니다. 고통과 고난 속에서도 기뻐하라고 합니다. 욥기 6:10에는 “그칠 줄 모르는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하는 것은”이라고 합니다. 핍박가운데서도 기뻐하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5:11-12에는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합니다. 그 외에 죄를 회개할 때에 하늘에서 기뻐하십니다(눅 15:7). 환난을 당할 때도 기뻐하라고 하십니다(고후 7:4). 나아가서 항상 기뻐하라고 하십니다(빌 4:4). 왜 모든 일에 기뻐합니까 예수님 때문에 기뻐합니다. 예수님이 기쁨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이 기쁨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기쁨입니다. 예수님을 떠나서는 참 기쁨이 있을 수 없습니다.
구약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메시아 대망 사상이 전체에 흐르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언제 메시아가 오십니까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합니까”라고 부르짖습니다. 메시아를 대망하던 그들은 세례요한에게도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렇게 기다리던 메시아가 오셨는데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누가복음 2:11에는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고 합니다. 그렇게 대망하던 구주, 그리스도, 메시야가 다윗의 동네에 나셨다는데 이 어찌 기쁨이 아니겠습니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복음인 예수님이 오신 소식이 복음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말씀은 기쁨의 좋은 소식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한국전쟁 휴전일이 언제인지 아십니까 우리는 전쟁이 일어난 1950년 6월 25일은 잊지 않습니다. “잊지 말자 6. 25”라는 구호는 어릴 때 많이 외쳤습니다. 그러나 휴전일은 잘 기억하지 않습니다. 1953년 7월 27일입니다. 오래 전에 제가 영국에 갔을 때에 영국의 참전용사들이 한국전쟁 휴전 기념식을 하는 자리에 초대받았습니다. 저에게 기념식사를 5분 동안 해 달라고 해서 제가 감사의 말을 겸해서 기념식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 많은 피해자를 내고 3년 만에 휴전이 되었습니다. 한국전쟁 휴전 협정 서명은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모릅니다. 남북이 분단되었지만 긴 한숨 끝에 기쁨을 찾은 날입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날을 기억하십니까 독일 사람들의 감격과 환호에 전 세계가 기뻐하였습니다. 1994년 10월 21일에 성수대교 붕괴사고가 났습니다. 안타까운 생명들을 잃었습니다. 그 후 1997년 7월 3일 성수대교가 다시 복구되었습니다. 교통이 회복되고 다시 기쁨이 있었습니다. 성탄은 휴전입니다. 성탄은 중간에 막힌 담을 허는 일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붕괴는 다리를 다시 잇는 일입니다. 이 일이 왜 기쁘지 않겠습니까
요즘 청소년들은 춤을 잘 추는 것이 굉장한 자랑입니다. 춤을 잘 추는 아이들이 인기도 좋습니다. 춤을 못 추면 ‘춤치’라고 합니다. 최근의 ‘텔미’ 댄스 열풍을 아십니까 별로 어렵지 않은 춤인데 한번 배워보세요. 춤은 중요한 자기표현의 수단입니다. 성경에 보면 다윗은 법궤가 돌아올 때 너무 기뻐 바지가 벗겨지는 줄도 모르고 흥겹게 춤을 추었습니다. 그의 아내인 사울의 딸 미갈이 남편의 이런 모습을 보고 남편을 업신여겼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미갈을 저주하여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었다고 합니다. 기뻐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은총입니다. 이 기쁨을 표현할 줄 아는 것이 신앙의 순수성입니다.
성자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했습니다. “춤추는 것을 배워라. 그렇지 않으면 하늘에 있는 천사는 너에게서 아무런 기쁨도 찾지 못하고 돌아갈 것이다”. 기쁨은 우리 안에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생명의 메아리입니다. 신앙생활 가운데 전혀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면 기독교에 어딘가 구멍이 났음에 틀림없습니다. 테스터튼은 말하기를 기쁨은 기독교의 거대한 비밀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모르면 기쁨도 모릅니다. 예수님께는 기쁨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에 태어나셔야 진정한 기쁨이 있습니다.
둘째, 첫 번 성탄은 죽음의 소식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16에는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모두에게 기쁜 것만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때어나심으로 수많은 애매한 아이들을 죽게 했습니다.
예레미야 31:15에는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 때문에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어져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라고 합니다. 성경은 이 말씀을 이루기 위하여 헤롯이 아이들을 죽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성경을 이루심이며 부모의 통곡을 동반하였습니다.
헤롯이 예레미야의 예언을 이루기 위하여 아이들을 죽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하는 일을 알지 못했지만 이 모든 것이 예언의 성취이며 여호와 하나님이 미리 계획하신 큰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라는 말입니다. 모든 사람 위해 희생제물 되실 예수님은 예수님 대신 희생제물이 된 어린이들 때문에 생존이 가능했습니다.
왜 예수님의 탄생이 베들레헴의 수많은 어린이들의 죽음으로 시작되었습니까 예수님의 탄생은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예고하는 죽음이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이미 죽음입니다.
마태복음 10:34-35을 보세요.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예수님의 오신 목적을 분명히 밝힙니다. 사람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의 분쟁은 오신 목적이라기보다 불가피한 결과입니다.
평화의 왕으로 오신 주님의 평화는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투쟁 가운데 얻어집니다. 전쟁 후에 얻어집니다. 가나안을 정복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시면 압니다. 그들이 이미 그들의 땅이라고 조상 대대로 약속하셨지만 그냥 차지한 것이 아니라 전쟁하고 투쟁하면서 얻은 것입니다.
신학의 종말론에 ‘실현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이 있습니다. 종말이 이미 실현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이미 종말적 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것이 어떤 이에게는 기쁨이며, 어떤 이에게는 슬픔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분쟁하게 하고, 나누어지게 합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미 종말적인 나누어짐이 시작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기쁨의 소식인데 죽음의 소리입니다. 오심으로 이미 생과 사, 기쁨과 슬픔이 교차합니다.
헤롯의 가문은 대대로 죽음이 있었으며 살인자의 집안입니다. 대 헤롯은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 두 살 이하의 남자 아이를 죽이라고 한 왕입니다. 그의 아들 헤롯 안티파스는 자신의 동생의 아내인 헤로디아를 취하여 비난을 받았고 세례요한이 이런 일이 부당하다고 하였다고 해서 목을 베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손자인 헤롯 아그립바 1세는 사도행전 12장에 보시면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를 죽여 제자 가운데 첫 순교자가 되게 한 왕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시작된 죽음의 잔치가 헤롯 가문 대대로 이어졌습니다. 온 집안에 ‘살인의 추억’이 있습니다.
이명박 장로님이 대통령에 당선되어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동시에 교회는 당선자가 역사에 남을 수 있는 좋은 대통령이 되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가 대통령에게 무엇을 바랄 것이 아니라 그분이 좋은 대통령이 되는 것만으로도 좋은 일입니다. 이명박 당선자가 현대건설에 근무할 때에 중동에 파견되어 이라크의 후세인과 아주 친하게 지냈답니다. 그런데 한번은 대통령궁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만나기로 하였는데 사령관이 에스코트를 잘 못하여 시간이 늦었고 후세인은 화가 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후세인이 그 사령관을 이명박 당선자가 보는 앞에서 총으로 쏴 죽였습니다. 이 때 이 장로님은 이 사람은 악한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했답니다. 악한 자의 악한 일에는 함께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후세인이 불러 지하 벙크를 만드는 엄청난 공사를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 이 장로님은 과감하게 그의 청을 거절하였습니다. 수주액으로 치면 엄청난 손실이지만 악한 자의 악한 일에 동참하지 않기고 기도하면서 결정한 것입니다. 이 일로 정주영회장에게 호되게 야단을 맞았습니다. 그 후에 그 공사를 독일 회사가 하게 되었습니다. 독일 회사는 이 공사로 많은 돈을 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일년 만에 그 회사가 망하고 말았습니다. 배후에서 미국이 독일 회사를 망하게 한 것입니다. 후에 그 사실을 안 정주영회장께서 “너 그걸 어떻게 알았어”라고 하셨답니다. 성경대로, 믿음으로 살려고 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지혜를 주십니다. 성경대로, 믿음으로 대통령직을 잘 수행하기를 바랍니다.
한 사람의 비뚤어진 인격, 망가진 영혼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입니까 한 분의 인간이 되신 여호와 하나님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살립니까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오고,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구원이 들어옵니다.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과 사망이 엇갈리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 전의 해병대 총기 탈취범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홈피에는 자신의 정신적 혼란, 실연의 고통을 토로합니다. 자신이 말하기를 “아마도 나는 다중 인격”이라고 하였습니다. 헤어진 애인에게 고통을 주기 위하여 이런 일을 저질렀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더 많은 사람을 죽게 하고, 죽음을 선택하게 합니다.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가장 좋은 것을 두고 가장 나쁜 것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현실적으로 봐도 가장 기쁜 때에 가장 외롭고, 춥고, 배고픈 이웃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성탄은 결코 기쁨의 계절이 아닙니다.
결론
요셉이 마리아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아십니까 마리아가 임신한 것을 알았을 때 그는 얼마든지 최악의 경우를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곧장 대제사장에게 달려가서 마리아의 간음죄를 고발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요 너무나 사려 깊게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이 일을 가만히 해결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는 마리아에게 돌을 던지기보다 차라리 자기가 그 돌에 맞는 쪽을 택하였습니다. 사려깊은 사랑, 상호배려의 본보기입니다.
성탄은 삶과 죽음의 시작입니다. 이 것은 요셉의 집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사랑이 있으면 생명도 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생명도 없습니다. 사랑이 없는 성탄절은 그 자체가 죽음입니다. 지금도 성탄의 생명과 죽음, 두 극단은 존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이 모든 사람들 온 인류에게 생명의 복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쁨에서 소외되는 자가 없는 성탄이 되기를 바랍니다. 죽음에서 헤매는 가자 없는 성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기쁜 성탄의 소식이 모든 사람에게 참 복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 분이 한번은 저에게 “노벨상에 왜 수학상이 없는지 아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알 리가 없어서 “왜 없습니까”하고 되물었더니 “노벨의 부인이 수학자와 바람을 피워서 노벨이 절대로 수학상을 만들지 말라고 했고, 죽기 전에도 그 다짐을 받았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말이 사실인지 모르지만 노벨에게도 가정적인 어려움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가장 위대한 발명가에게도 가장 고통스러운 자신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노벨이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였습니다. 그는 평화에 사용할 목적이었고 개발에 사용할 목적이었지만 결국 파괴하고 살상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아무리 선한 동기와 목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죄를 지은 인간은 악한 동기와 목적으로 사용하게 됩니다. 이것이 죄를 지은 인간의 양극입니다. 평화와 개발이라는 목적과 파괴와 살상이라는 양 극단 속에서 노벨은 자신의 발명을 후회했다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에게 생명을 주었지만 사람은 생명이 아니라 사망을 택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생명과 사망을 우리 앞에 두었습니다. 생명나무의 열매와 선악과의 열매 사이에서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이런 선악과 놀음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칼은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평화의 목적보다 전쟁의 목적으로 더 많이 사용됩니다. 파울로 코엘료는 ‘순교자’란 책에서 “마법사의 검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곳은 세속적인 장소라는 것. 검은 신성한 장소에 있어야 합니다”라고 합니다. 칼의 양 극단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신명기 30:19에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언제나 복음은 극단입니다. 생명과 사망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하늘과 땅이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아십니까 천지차이입니다. 천당과 지옥의 차이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인류가 하나 되게 하려 하심입니다. 그러나 죄성을 가진 인간은 생명과 사망으로 나누어집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생명을 주려하심이었지만 동시에 예수님 탄생은 죽음의 소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삶이 생명과 사망으로 나누어지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보시면 잘 압니다. 요한복음 7:12에는 예수께 대해 수군거립니다. “어떤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무리를 미혹하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9:16에는 맹인을 고친 다음에 말합니다.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일을 하겠느냐”고 합니다. 요한복음 10:19에는 선한 목자의 비유에서 예수님께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가시는 곳마다 분쟁을 일으켰습니다. 생명과 사망이 나누어졌습니다. 찬양과 비난이 나누어졌습니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와 못하는 아이의 차이점은 하기 싫은 일을 해내는 아이와 하기 싫은 일을 포기해 버리는 아이라고 합니다. 시험을 쳐서 성적이 좋은 아이와 나쁜 아이를 비교해 보세요. 성적이 좋은 아이는 부모님이 빨리 오기를 기다릴 것입니다. 성적이 나쁜 아이는 부모님이 오시는 것이 달갑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심도 그렇습니다. 기쁨으로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시는 것이 즐겁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초림뿐만 아니라 재림도 마찬가지입니다. 재림 때가 되면 기쁨으로 기다리는 사람은 “주 예수여, 어서 오소서”라고 한다고 합니다. 오심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바위야, 산아, 나를 가리어라”라고 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두 극단이 생겼습니다. 기쁨과 슬픔입니다. 삶과 죽음입니다. 우리의 성탄은 기쁨입니까, 슬픔입니까 삶입니까, 죽음입니까
첫째, 첫 번 성탄은 기쁨의 소식이었습니다.
누가복음 2:10에는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크고, 기쁘고, 좋은 것이 예수님의 오심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큰 사건입니다. 기쁨의 사건입니다. 좋은 사건입니다.
성탄이 다가오면 “메리 크리스마스”(Merry Christmas)라고 인사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는 문자 그대로 세계어입니다. 누구나 기쁜 성탄을 축하합니다. 성탄을 기쁘게 선포합니다. “슬픈 크리스마스”가 있습니까 그런 말은 아예 없습니다.
기독교는 기쁨의 종교입니다. 성경은 전쟁에서 승리하였을 때 기뻐합니다. 역대하 20:27에는 “여호와께서 그들이 그 적군을 이김으로서 즐거워하게 하였음이라”고 합니다. 제사를 기쁘게 드리라고 합니다. 느헤미야 12:43에는 “이날에 무리가 큰 제사를 드리고 심히 즐거워하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고 합니다. 고통과 고난 속에서도 기뻐하라고 합니다. 욥기 6:10에는 “그칠 줄 모르는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하는 것은”이라고 합니다. 핍박가운데서도 기뻐하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5:11-12에는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합니다. 그 외에 죄를 회개할 때에 하늘에서 기뻐하십니다(눅 15:7). 환난을 당할 때도 기뻐하라고 하십니다(고후 7:4). 나아가서 항상 기뻐하라고 하십니다(빌 4:4). 왜 모든 일에 기뻐합니까 예수님 때문에 기뻐합니다. 예수님이 기쁨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이 기쁨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기쁨입니다. 예수님을 떠나서는 참 기쁨이 있을 수 없습니다.
구약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메시아 대망 사상이 전체에 흐르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언제 메시아가 오십니까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합니까”라고 부르짖습니다. 메시아를 대망하던 그들은 세례요한에게도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렇게 기다리던 메시아가 오셨는데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누가복음 2:11에는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고 합니다. 그렇게 대망하던 구주, 그리스도, 메시야가 다윗의 동네에 나셨다는데 이 어찌 기쁨이 아니겠습니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복음인 예수님이 오신 소식이 복음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말씀은 기쁨의 좋은 소식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한국전쟁 휴전일이 언제인지 아십니까 우리는 전쟁이 일어난 1950년 6월 25일은 잊지 않습니다. “잊지 말자 6. 25”라는 구호는 어릴 때 많이 외쳤습니다. 그러나 휴전일은 잘 기억하지 않습니다. 1953년 7월 27일입니다. 오래 전에 제가 영국에 갔을 때에 영국의 참전용사들이 한국전쟁 휴전 기념식을 하는 자리에 초대받았습니다. 저에게 기념식사를 5분 동안 해 달라고 해서 제가 감사의 말을 겸해서 기념식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 많은 피해자를 내고 3년 만에 휴전이 되었습니다. 한국전쟁 휴전 협정 서명은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모릅니다. 남북이 분단되었지만 긴 한숨 끝에 기쁨을 찾은 날입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날을 기억하십니까 독일 사람들의 감격과 환호에 전 세계가 기뻐하였습니다. 1994년 10월 21일에 성수대교 붕괴사고가 났습니다. 안타까운 생명들을 잃었습니다. 그 후 1997년 7월 3일 성수대교가 다시 복구되었습니다. 교통이 회복되고 다시 기쁨이 있었습니다. 성탄은 휴전입니다. 성탄은 중간에 막힌 담을 허는 일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붕괴는 다리를 다시 잇는 일입니다. 이 일이 왜 기쁘지 않겠습니까
요즘 청소년들은 춤을 잘 추는 것이 굉장한 자랑입니다. 춤을 잘 추는 아이들이 인기도 좋습니다. 춤을 못 추면 ‘춤치’라고 합니다. 최근의 ‘텔미’ 댄스 열풍을 아십니까 별로 어렵지 않은 춤인데 한번 배워보세요. 춤은 중요한 자기표현의 수단입니다. 성경에 보면 다윗은 법궤가 돌아올 때 너무 기뻐 바지가 벗겨지는 줄도 모르고 흥겹게 춤을 추었습니다. 그의 아내인 사울의 딸 미갈이 남편의 이런 모습을 보고 남편을 업신여겼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미갈을 저주하여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었다고 합니다. 기뻐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은총입니다. 이 기쁨을 표현할 줄 아는 것이 신앙의 순수성입니다.
성자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했습니다. “춤추는 것을 배워라. 그렇지 않으면 하늘에 있는 천사는 너에게서 아무런 기쁨도 찾지 못하고 돌아갈 것이다”. 기쁨은 우리 안에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생명의 메아리입니다. 신앙생활 가운데 전혀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면 기독교에 어딘가 구멍이 났음에 틀림없습니다. 테스터튼은 말하기를 기쁨은 기독교의 거대한 비밀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모르면 기쁨도 모릅니다. 예수님께는 기쁨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에 태어나셔야 진정한 기쁨이 있습니다.
둘째, 첫 번 성탄은 죽음의 소식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16에는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모두에게 기쁜 것만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때어나심으로 수많은 애매한 아이들을 죽게 했습니다.
예레미야 31:15에는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 때문에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어져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라고 합니다. 성경은 이 말씀을 이루기 위하여 헤롯이 아이들을 죽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성경을 이루심이며 부모의 통곡을 동반하였습니다.
헤롯이 예레미야의 예언을 이루기 위하여 아이들을 죽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하는 일을 알지 못했지만 이 모든 것이 예언의 성취이며 여호와 하나님이 미리 계획하신 큰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라는 말입니다. 모든 사람 위해 희생제물 되실 예수님은 예수님 대신 희생제물이 된 어린이들 때문에 생존이 가능했습니다.
왜 예수님의 탄생이 베들레헴의 수많은 어린이들의 죽음으로 시작되었습니까 예수님의 탄생은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예고하는 죽음이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이미 죽음입니다.
마태복음 10:34-35을 보세요.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예수님의 오신 목적을 분명히 밝힙니다. 사람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의 분쟁은 오신 목적이라기보다 불가피한 결과입니다.
평화의 왕으로 오신 주님의 평화는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투쟁 가운데 얻어집니다. 전쟁 후에 얻어집니다. 가나안을 정복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시면 압니다. 그들이 이미 그들의 땅이라고 조상 대대로 약속하셨지만 그냥 차지한 것이 아니라 전쟁하고 투쟁하면서 얻은 것입니다.
신학의 종말론에 ‘실현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이 있습니다. 종말이 이미 실현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이미 종말적 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것이 어떤 이에게는 기쁨이며, 어떤 이에게는 슬픔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분쟁하게 하고, 나누어지게 합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미 종말적인 나누어짐이 시작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기쁨의 소식인데 죽음의 소리입니다. 오심으로 이미 생과 사, 기쁨과 슬픔이 교차합니다.
헤롯의 가문은 대대로 죽음이 있었으며 살인자의 집안입니다. 대 헤롯은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 두 살 이하의 남자 아이를 죽이라고 한 왕입니다. 그의 아들 헤롯 안티파스는 자신의 동생의 아내인 헤로디아를 취하여 비난을 받았고 세례요한이 이런 일이 부당하다고 하였다고 해서 목을 베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손자인 헤롯 아그립바 1세는 사도행전 12장에 보시면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를 죽여 제자 가운데 첫 순교자가 되게 한 왕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시작된 죽음의 잔치가 헤롯 가문 대대로 이어졌습니다. 온 집안에 ‘살인의 추억’이 있습니다.
이명박 장로님이 대통령에 당선되어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동시에 교회는 당선자가 역사에 남을 수 있는 좋은 대통령이 되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가 대통령에게 무엇을 바랄 것이 아니라 그분이 좋은 대통령이 되는 것만으로도 좋은 일입니다. 이명박 당선자가 현대건설에 근무할 때에 중동에 파견되어 이라크의 후세인과 아주 친하게 지냈답니다. 그런데 한번은 대통령궁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만나기로 하였는데 사령관이 에스코트를 잘 못하여 시간이 늦었고 후세인은 화가 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후세인이 그 사령관을 이명박 당선자가 보는 앞에서 총으로 쏴 죽였습니다. 이 때 이 장로님은 이 사람은 악한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했답니다. 악한 자의 악한 일에는 함께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후세인이 불러 지하 벙크를 만드는 엄청난 공사를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 이 장로님은 과감하게 그의 청을 거절하였습니다. 수주액으로 치면 엄청난 손실이지만 악한 자의 악한 일에 동참하지 않기고 기도하면서 결정한 것입니다. 이 일로 정주영회장에게 호되게 야단을 맞았습니다. 그 후에 그 공사를 독일 회사가 하게 되었습니다. 독일 회사는 이 공사로 많은 돈을 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일년 만에 그 회사가 망하고 말았습니다. 배후에서 미국이 독일 회사를 망하게 한 것입니다. 후에 그 사실을 안 정주영회장께서 “너 그걸 어떻게 알았어”라고 하셨답니다. 성경대로, 믿음으로 살려고 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지혜를 주십니다. 성경대로, 믿음으로 대통령직을 잘 수행하기를 바랍니다.
한 사람의 비뚤어진 인격, 망가진 영혼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입니까 한 분의 인간이 되신 여호와 하나님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살립니까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오고,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구원이 들어옵니다.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과 사망이 엇갈리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 전의 해병대 총기 탈취범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홈피에는 자신의 정신적 혼란, 실연의 고통을 토로합니다. 자신이 말하기를 “아마도 나는 다중 인격”이라고 하였습니다. 헤어진 애인에게 고통을 주기 위하여 이런 일을 저질렀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더 많은 사람을 죽게 하고, 죽음을 선택하게 합니다.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가장 좋은 것을 두고 가장 나쁜 것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현실적으로 봐도 가장 기쁜 때에 가장 외롭고, 춥고, 배고픈 이웃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성탄은 결코 기쁨의 계절이 아닙니다.
결론
요셉이 마리아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아십니까 마리아가 임신한 것을 알았을 때 그는 얼마든지 최악의 경우를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곧장 대제사장에게 달려가서 마리아의 간음죄를 고발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요 너무나 사려 깊게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이 일을 가만히 해결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는 마리아에게 돌을 던지기보다 차라리 자기가 그 돌에 맞는 쪽을 택하였습니다. 사려깊은 사랑, 상호배려의 본보기입니다.
성탄은 삶과 죽음의 시작입니다. 이 것은 요셉의 집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사랑이 있으면 생명도 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생명도 없습니다. 사랑이 없는 성탄절은 그 자체가 죽음입니다. 지금도 성탄의 생명과 죽음, 두 극단은 존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이 모든 사람들 온 인류에게 생명의 복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쁨에서 소외되는 자가 없는 성탄이 되기를 바랍니다. 죽음에서 헤매는 가자 없는 성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기쁜 성탄의 소식이 모든 사람에게 참 복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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