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 임마누엘
본문
에르마 봄벡(Erma Bombeck)이라는 칼럼니스트가 어느 예배 시간에 참석하였습니다. 한 어린아이가 온 교회당을 웃으면서 돌아다니고 있는 것을 봅니다. 아이는 전혀 소리를 지르거나, 킥킥거리거나, 뛰어다니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웃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아이의 어머니가 노하기 시작합니다. 조용히, 그러나 주위 사람에게 들리도록 야단칩니다.
"여기는 교회야, 그렇게 웃으면서 돌아다니지마. "
엄마는 아이를 붙잡아 옆에 안칩니다. 아이의 뺨에는 눈물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엄마가 아이의 눈물을 보고 말합니다. "그게 더 낫다(That's better). " 그리고 다시 기도를 드립니다. 에르마는 이 장면을 보고 다음과 같은 글을 썼습니다.
"사실 우리는 '기뻐하며 경배하세 영광의 주 여호와 하나님' 찬송하지만 우리의 얼굴은 금방 가족의 장례식을 마친 사람의 얼굴을 갖고 있다. 우리는 '만일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꾕가리가 된다'고 외운다. 그리고 실로 울리는 꾕가리가 되어 예배당을 나온다. 나는 갑자기 화가 나기 시작했다. 마치 온 세계가 함께 우는 듯 싶었다. 나는 이 아이에게 우리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즐거워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웃으시는 여호와 하나님, 유머가 많아 우리 같은 사람을 만드신 재미있는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었다.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이해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예배 시간에 어린아이들이 지루해서 장난치시는 것을 이해하신다.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부인이 예배당에서 예배 드리는 동안 남편은 주차장에서 만화를 보고 있는 것을 이해하신다.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나의 다음과 같은 어리광섞인 기도를 받아 주신다.
"당신이 나를 날씬하게 만드실 수 없다면, 나의 친구들을 뚱뚱하게 만드세요. "
사실 오늘날 우리는 장례식에 다녀온 사람과 같은 표정을 지어야만 신앙이 있다고 한다. 얼마나 어리석은가, 이들에게 남아 있는 희망은, 기적은 하나밖에 없다. 죽음 후의 삶 밖에 없다. "
에르마는 웃음을 잃은 오늘날 현대교회의 아픈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한편 생각해 봅니다. '이 어린아이가 후에 어떻게 되었을까 그 다음주에는 어떤 마음으로 교회에 왔을까"
마틴 셀리그만(Martin Seligman)이란 학생이 펜실베니아 대학 실험실에서 다음과 같은 실험을 하였습니다. 실험제목은 '습득된 무기력증(Learned helplessness)'입니다.
개들을 방에 넣고는 전기 shock을 줍니다. 이 방 가운데는 작은 장애물, 곧 건너갈 수 있는 나무 판자로 만든 칸막이 장애물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 작은 칸막이를 건너면 전기 shock이 꺼집니다. 보통 개들을 이 방에 넣고 shock을 주면 개들이 놀라 왔다갔다하다가 이 작은 칸막이를 뛰어 넘습니다. 뛰어 넘으면 전기 shock이 꺼집니다. 그래서 언제나 shock이 오면 무조건 이 칸막이를 건넙니다.
한편 어떤 개들을 따로 실험을 합니다. 어느 방에 넣고 전기 shock을 줍니다. 아무리 날 뛰어도 전기 shock을 멈추질 않습니다. 이 개들은 자기들 힘으로는 전기 shock을 멈추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제 이 개들을 칸막이가 설치된 방에 넣고 실험을 또 합니다. 이 칸막이가 설치된 방에서는 칸막이만 뛰어 넘으면 shock이 멈추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될까요 이 개들은 shock을 받으면 뛰지 않고 포기한 채 가만히 있습니다. 칸막이만 넘으면 되는데... 개들은 'learned helplessness'를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처음 말씀드린 이 어린아이는 어떠했을까요 저는 감히 생각해 봅니다. 그 어린아이는 아마도 새로운 변화가 있지 않는 한 평생 장례식을 참여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렸을 것입니다. 예배 시간에는 눈물을 흘려도 되지만 웃으면 절대로 안된다는 교훈을 안고 한가지 희망, 곧 죽음 후의 삶을 기다리며 주일마다 예배당에 힘없이 걸어왔을 것입니다. '습득된 무기력증(learned helplessness)'를 안고 교회에 다녔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의 모습이 우리들의 모습은 아닙니까 우리도 인위적으로 만든 강단의 모양만을 안고 교회에 나오지 않습니까 이것이 참 기독교의 모습일까요 우리도 'learned helplessness'의 노예가 되어 있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성탄주일 예배를 드립니다. 이제 대강절 촛대(Advent Wreath)의 촛불 네 개가 다 켜졌습니다. 아기 예수가 베들레헴 마굿간에 탄생하심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감사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오늘 말구유에 태어나신 아기 예수를 바라보면서 우리 안에 누적된 'learned helplessness'가 무엇인지 발견하시게 되길 바랍니다. 올해 대강절 설교 본문말씀을 그동안 이사야서에서 골라 봤습니다. 오늘 본문말씀도 이사야서에서 택하였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복잡한 이스라엘 역사의 한 정황을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훌륭한 유다 왕 웃시야왕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아들에 이어 손자인 아하스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때 남왕국은 두 나라와 싸우고 있었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과 아람이라는 나라였습니다. 사실 남왕국이 이 두 나라와 싸워 각각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문제의 시작은 유다 왕국에 패한 이 두 나라가 힘을 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두 나라가 동맹을 맺고 남왕국을 치려고 계획을 세웠습니다. 오늘 본문말씀 바로 전 구절을 보면 이 두 나라가 동맹한 것을 알고 두려워 떨고 있는 남왕국왕 아하스에게 이사야가 자기 아들과 함께 찾아갑니다. 그리고는 여호와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메시지는 이 두 나라를 결코 두려워하지 말라는 메시지입니다. 그들의 계획이 성사되지 못할 것이라는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아하스는 이사야의 말이 귀에 들어 올 리가 없습니다. 예언자가 아들과 함께 와서 두 나라의 동맹이 무산될 것이라고 하는데 전혀 눈에 보이는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동안의 살아온 경험, 아버지, 할아버지가 통치할 때의 경험들을 미루워 봐서 결코 이사야의 말이 마음에 와 닿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두 동맹국에 굴복하려고 합니다. 이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또다시 이사야를 통하여 남왕국와 아하스에게 예언을 합니다.
"너는 네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데서 든지 높은데서 든지 구하라. "
이사야는 여호와 하나님의 예언이 그렇게 마음에 와 닿지 않으면 한 이상한 징조를 구하라고 합니다. 그 징조를 보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learned helplessness'를 소유한 아하스는 어떻게 말합니까 "나는 구하지 않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치 아니하겠나이다. "
"여호와로 시험치 말라" 사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사십일간 시험받을 때 사탄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아하스는 예수님 전에 먼저 이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이 말씀은 신명기 6장 16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맛사에서 시험한 것 같이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치 말고... "
사실 같은 성경 말씀을 아하스와 예수님이 전혀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탄을 무찌르려고 이 말씀을 사용하셨습니다. 반면 아하스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원하지 않기에 자신의 뜻대로 행하려고, 아니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learned helplessness'에 따라 행하려고 이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에 이사야가 선언합니다.
"다윗의 집이여 청컨데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게 하고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서 또 나의 여호와 하나님을 괴로우시게 하려느냐. "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원하지 않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을 얼마나 괴롭게 하시는 것인지를 알리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놀라운 선언을 합니다.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
'습득된 무기력증(learned helplessness)'에 노예가 되어 징조도 원하지 않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친히 징조를 주십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다는 징조를 주십니다. 곧 임마누엘,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징조를 보여 주십니다.
아하스가 징조를 원치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원치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아하스는 'learned helplessness'에 빠져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하스를 위해,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여호와 하나님은 징조를 보여 주십니다. 습득된 무기력에서 건져줄 징조를 보여 주십니다. 곧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 징조를 보여 주십니다.
이 아이가 2000년전 마굿간 말구유에 태어난 아기 예수입니다. 아기 예수는 'learned helplessness'에 빠져 있는 자들을 위하여 태어난 여호와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의 징조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며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성탄절은 아기 예수를 바라보면서 우리 안에 그동안 쌓여진 'learned helplessness'를 발견하는 날입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진정 아기 예수의 오심을 환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기 예수를 바라볼 때 우리가 느끼는 'learned helplessness'는 무엇일까요
아기 예수가 우리들에게 주는 첫 번째 선물은 웃음일 줄 압니다. 아기 예수는 성자의 웃음을 우리들 영혼 깊숙이 안겨 주십니다.
아리조나주 어느 수도원에 한 그림이 벽에 걸려 있습니다. 그림 제목은 '웃고 있는 그리스도(The Laughing Christ)'입니다. 예수님이 머리를 뒤로 적기면서 입을 크게 벌려 파안대소하는 그림입니다. 수도사가 이 그림을 들고와서 수업시간에 가르칠 때 보여 주었습니다. 얼굴이 굳어져 있는 한 여인이 일어나면서 묻습니다.
"어디 성경에 예수님이 웃었다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까"
수도사는 대답합니다.
"예수님이 한때는 어린아이였습니다. 아마도 기저귀를 많이 적셨을 것입니다. 어디 성경에 기저귀를 적셨다는 말씀이 쓰여 있습니까"
아기 예수는 어린아이의 웃음을 안고 오셨습니다. 그는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불행하게도 마굿간에 태어납니다. 말구유에 누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없이 밝은 웃음을 소유하셨습니다. 2000년이 지난 오늘도 우리는 아기 예수를 생각할 때 그의 밝고 맑은 어린아이의 웃음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를 짓눌렀던 'learned helplessness'를 발견케 됩니다.
사실 아기 예수뿐이 아닙니다. 우리 주변의 모든 어린아이들은 아기 예수의 웃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도 한때 이 웃음을 소유했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세상 정황에 상관없이 웃음과 유머가 가득 넘쳐흐르고 있습니다.
에르마 봄벡이 또 다음과 같은 글을 썼습니다. "낙곽적인 사람을 견딜 수 없거든 암에 걸린 아이들 근처에도 가지 마십시오. " 아이들은 무척 낙관적이란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다리를 하나 잃어 하나밖에 안남으며 그 한 다리를 가지고 물장난을 칩니다. 거울 옆을 지나다가 머리가 빠진 자기 얼굴을 보면 혀를 낼름 내밀고 지나갑니다. 만일 어른들이 그들을 휠체어에 앉친다면 그들은 그것을 타고 경주하기 시작합니다. "
모든 삶에서 웃음과 유머를 잃지 않는 어린아이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한 어린아이에게 죽음이 주는 좋은 점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아이는 대답합니다. "더이상 신발끈을 매고 풀고 할 필요가 없어서 좋죠. "
어린아이들은 웃음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웃음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웃음을 안고 아기 예수가 말구유에 태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야의 징조는 더 놀라운 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기 예수의 모습이 다른 아이들과 본질적으로 다른 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입니다. 그 사건 자체가 많은 웃음을 자아내게 합니다.
만일 우리가 어느 책을 읽고 있다고 가정합시다. 갑자기 '처녀가 잉태하였다'는 내용을 접합니다. 현대 의학과 과학을 아는 사람 같으면 웃을 수밖에 없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아브라함의 아들의 이름이 이삭, 곧 '웃음'인데 왜 웃음이라 지었습니까 100살 된 두 노인이 할머니는 경수가 끊어졌는데 아들을 낳았으니 웃음이라고 아들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습니까 100살 된 노인네가 이 아들을 낳는다고 할 때 사라가 웃으면서 아들의 이름을 이삭이라 하였는데 처녀가 잉태한다 하면 어떨까요 온 우주가 웃지 않았을까요 온 우주가 폭소를 터뜨리지 않았을까요
사실 아기 예수는 온 우주의 폭소를 들으면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성자의 멋진 웃음을 안고 말구유에 누워 계십니다. 우리가 당신을 보고 웃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기 예수는 온 우주의 폭소에 우리가 동참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습득된 무기력증" 가운데 웃음을 잃어버린 우리에게 밝게 웃고 계십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낳은 아들, 그 아기를 생각만 하더라도 우리는 평생 웃고 또 웃고, 또 웃고 하다가 하늘 나라에 가서도 계속 웃을 수밖에 없는 놀라운 축복을 받지 않았을까요
이러한 웃음을 소유한 자는 이 땅 위에서 무슨 일도 감당할 수 있는 자가 되지 않을까요
어느 수퍼 우먼이란 별명을 가진 분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완전하게 해내는 분입니다. 가정을 온전히 가꿉니다. 자녀를 잘 기릅니다. 남편을 늘 행복하게 합니다. 이분은 BishopFulton Sheen의 책을 좋아하는 분인데 어느날 BishopFulton Sheen이 이분을 방문했습니다. 그때 이 Bishop에게 자기집 문이 임신을 했다고 말했습니다.
완전하게 사는 자신의 삶이 너무 힘들다보니 자기 자신이 성모 마리아라고 말할 순 없고 해서 자기 집 문이 성모 마리아처럼 혼자서 임신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분은 계속해서 자신의 삶을 이야기합니다.
"매일 저녁 세 아이를 목욕시키고 깨끗한 침대에 재우고 그 다음날을 위한 점심을 만들고 아이들의 신발을 정리한 후 아이들과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나 혼자 무릎을 끓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이 아이들을 하나도 죽이지 않은 것을 감사합니다. "
완벽한 어머니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이렇게 해낼 수 있는 힘은 바로 그분의 유머에 있다고 봅니다. '우리 문이 임신했습니다. ' 말할 수 있는 유머가 그분을 그 모든 삶에서 승리하게 한다고 봅니다.
복잡한 삶 속에서 문을 바라보며 문이 임신했다고 생각할 때마다 웃음이 그의 삶 속에 터집니다. 아울러 어린아이들의 웃음소리도 듣게 됩니다. 온 우주의 웃음소리를 듣게 됩니다.
이분이 이러한 유머를 갖게 된 것은 처녀를 통해 임신한 아기 예수를 늘 보았기 때문인 줄 압니다. 처녀를 통하여 낳은 아기를 보고 폭소할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learned helplessness'를 해결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우리에게 웃음이 왜 없어졌습니까 'Learned helplessness' 때문이 아닙니까 Shock을 받아 발버둥쳐도 소용이 없으니까 이젠 어떤 shock이 와도 고통 가운데 주저앉아 웃음을 잃은 자가 되진 않았습니까
우리가 처녀가 잉태한 한 아기를 유심히 바라보노라면 우리는 어린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온 우주의 웃음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웃음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지난주에 소개한 불란서 유전학자인 레쥬네(Lejeune)의 이야기를 한가지 더 소개합니다. 레쥬네는 자녀들을 가르치곤 하였는데 가끔 과학과 수학 숙제를 자녀들이 아빠가 가르쳐 준대로 해갑니다. 그런데 간혹 아이들은 'F'를 받아 옵니다. 학교 학생이 잘 이해를 못하므로 'F'를 줍니다. 그때 자녀들은 즐겁게 'F'를 받아 가지고 옵니다. 그리고 아빠에게 "아빠는 수학에 F야!"하며 놀리곤 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우리도 아기 예수를 따라가다 보면 세상에서는 'F'를 받는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웃을 수 있지 않습니까 주님께 주님이 'F'를 받았다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성탄절은 처녀가 낳은 아기 예수의 웃음을 듣는 날입니다. 우리의 인생 성적표 'F'를 안고 아기 예수 앞에 나아가 함께 웃는 날입니다.
온 우주가 함께 웃고 있습니다. 성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께서 함께 웃고 있습니다. 우리도 함께 웃습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기를 낳았습니다. 임마누엘의 사건은 역사 최대의 희극의 사건입니다.
이사야는 말씀합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
그런데 드디어 아이의 어머니가 노하기 시작합니다. 조용히, 그러나 주위 사람에게 들리도록 야단칩니다.
"여기는 교회야, 그렇게 웃으면서 돌아다니지마. "
엄마는 아이를 붙잡아 옆에 안칩니다. 아이의 뺨에는 눈물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엄마가 아이의 눈물을 보고 말합니다. "그게 더 낫다(That's better). " 그리고 다시 기도를 드립니다. 에르마는 이 장면을 보고 다음과 같은 글을 썼습니다.
"사실 우리는 '기뻐하며 경배하세 영광의 주 여호와 하나님' 찬송하지만 우리의 얼굴은 금방 가족의 장례식을 마친 사람의 얼굴을 갖고 있다. 우리는 '만일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꾕가리가 된다'고 외운다. 그리고 실로 울리는 꾕가리가 되어 예배당을 나온다. 나는 갑자기 화가 나기 시작했다. 마치 온 세계가 함께 우는 듯 싶었다. 나는 이 아이에게 우리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즐거워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웃으시는 여호와 하나님, 유머가 많아 우리 같은 사람을 만드신 재미있는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었다.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이해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예배 시간에 어린아이들이 지루해서 장난치시는 것을 이해하신다.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부인이 예배당에서 예배 드리는 동안 남편은 주차장에서 만화를 보고 있는 것을 이해하신다.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나의 다음과 같은 어리광섞인 기도를 받아 주신다.
"당신이 나를 날씬하게 만드실 수 없다면, 나의 친구들을 뚱뚱하게 만드세요. "
사실 오늘날 우리는 장례식에 다녀온 사람과 같은 표정을 지어야만 신앙이 있다고 한다. 얼마나 어리석은가, 이들에게 남아 있는 희망은, 기적은 하나밖에 없다. 죽음 후의 삶 밖에 없다. "
에르마는 웃음을 잃은 오늘날 현대교회의 아픈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한편 생각해 봅니다. '이 어린아이가 후에 어떻게 되었을까 그 다음주에는 어떤 마음으로 교회에 왔을까"
마틴 셀리그만(Martin Seligman)이란 학생이 펜실베니아 대학 실험실에서 다음과 같은 실험을 하였습니다. 실험제목은 '습득된 무기력증(Learned helplessness)'입니다.
개들을 방에 넣고는 전기 shock을 줍니다. 이 방 가운데는 작은 장애물, 곧 건너갈 수 있는 나무 판자로 만든 칸막이 장애물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 작은 칸막이를 건너면 전기 shock이 꺼집니다. 보통 개들을 이 방에 넣고 shock을 주면 개들이 놀라 왔다갔다하다가 이 작은 칸막이를 뛰어 넘습니다. 뛰어 넘으면 전기 shock이 꺼집니다. 그래서 언제나 shock이 오면 무조건 이 칸막이를 건넙니다.
한편 어떤 개들을 따로 실험을 합니다. 어느 방에 넣고 전기 shock을 줍니다. 아무리 날 뛰어도 전기 shock을 멈추질 않습니다. 이 개들은 자기들 힘으로는 전기 shock을 멈추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제 이 개들을 칸막이가 설치된 방에 넣고 실험을 또 합니다. 이 칸막이가 설치된 방에서는 칸막이만 뛰어 넘으면 shock이 멈추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될까요 이 개들은 shock을 받으면 뛰지 않고 포기한 채 가만히 있습니다. 칸막이만 넘으면 되는데... 개들은 'learned helplessness'를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처음 말씀드린 이 어린아이는 어떠했을까요 저는 감히 생각해 봅니다. 그 어린아이는 아마도 새로운 변화가 있지 않는 한 평생 장례식을 참여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렸을 것입니다. 예배 시간에는 눈물을 흘려도 되지만 웃으면 절대로 안된다는 교훈을 안고 한가지 희망, 곧 죽음 후의 삶을 기다리며 주일마다 예배당에 힘없이 걸어왔을 것입니다. '습득된 무기력증(learned helplessness)'를 안고 교회에 다녔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의 모습이 우리들의 모습은 아닙니까 우리도 인위적으로 만든 강단의 모양만을 안고 교회에 나오지 않습니까 이것이 참 기독교의 모습일까요 우리도 'learned helplessness'의 노예가 되어 있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성탄주일 예배를 드립니다. 이제 대강절 촛대(Advent Wreath)의 촛불 네 개가 다 켜졌습니다. 아기 예수가 베들레헴 마굿간에 탄생하심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감사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오늘 말구유에 태어나신 아기 예수를 바라보면서 우리 안에 누적된 'learned helplessness'가 무엇인지 발견하시게 되길 바랍니다. 올해 대강절 설교 본문말씀을 그동안 이사야서에서 골라 봤습니다. 오늘 본문말씀도 이사야서에서 택하였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복잡한 이스라엘 역사의 한 정황을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훌륭한 유다 왕 웃시야왕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아들에 이어 손자인 아하스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때 남왕국은 두 나라와 싸우고 있었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과 아람이라는 나라였습니다. 사실 남왕국이 이 두 나라와 싸워 각각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문제의 시작은 유다 왕국에 패한 이 두 나라가 힘을 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두 나라가 동맹을 맺고 남왕국을 치려고 계획을 세웠습니다. 오늘 본문말씀 바로 전 구절을 보면 이 두 나라가 동맹한 것을 알고 두려워 떨고 있는 남왕국왕 아하스에게 이사야가 자기 아들과 함께 찾아갑니다. 그리고는 여호와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메시지는 이 두 나라를 결코 두려워하지 말라는 메시지입니다. 그들의 계획이 성사되지 못할 것이라는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아하스는 이사야의 말이 귀에 들어 올 리가 없습니다. 예언자가 아들과 함께 와서 두 나라의 동맹이 무산될 것이라고 하는데 전혀 눈에 보이는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동안의 살아온 경험, 아버지, 할아버지가 통치할 때의 경험들을 미루워 봐서 결코 이사야의 말이 마음에 와 닿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두 동맹국에 굴복하려고 합니다. 이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또다시 이사야를 통하여 남왕국와 아하스에게 예언을 합니다.
"너는 네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데서 든지 높은데서 든지 구하라. "
이사야는 여호와 하나님의 예언이 그렇게 마음에 와 닿지 않으면 한 이상한 징조를 구하라고 합니다. 그 징조를 보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learned helplessness'를 소유한 아하스는 어떻게 말합니까 "나는 구하지 않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치 아니하겠나이다. "
"여호와로 시험치 말라" 사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사십일간 시험받을 때 사탄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아하스는 예수님 전에 먼저 이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이 말씀은 신명기 6장 16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맛사에서 시험한 것 같이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치 말고... "
사실 같은 성경 말씀을 아하스와 예수님이 전혀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탄을 무찌르려고 이 말씀을 사용하셨습니다. 반면 아하스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원하지 않기에 자신의 뜻대로 행하려고, 아니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learned helplessness'에 따라 행하려고 이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에 이사야가 선언합니다.
"다윗의 집이여 청컨데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게 하고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서 또 나의 여호와 하나님을 괴로우시게 하려느냐. "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원하지 않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을 얼마나 괴롭게 하시는 것인지를 알리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놀라운 선언을 합니다.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
'습득된 무기력증(learned helplessness)'에 노예가 되어 징조도 원하지 않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친히 징조를 주십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다는 징조를 주십니다. 곧 임마누엘,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징조를 보여 주십니다.
아하스가 징조를 원치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원치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아하스는 'learned helplessness'에 빠져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하스를 위해,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여호와 하나님은 징조를 보여 주십니다. 습득된 무기력에서 건져줄 징조를 보여 주십니다. 곧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 징조를 보여 주십니다.
이 아이가 2000년전 마굿간 말구유에 태어난 아기 예수입니다. 아기 예수는 'learned helplessness'에 빠져 있는 자들을 위하여 태어난 여호와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의 징조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며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성탄절은 아기 예수를 바라보면서 우리 안에 그동안 쌓여진 'learned helplessness'를 발견하는 날입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진정 아기 예수의 오심을 환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기 예수를 바라볼 때 우리가 느끼는 'learned helplessness'는 무엇일까요
아기 예수가 우리들에게 주는 첫 번째 선물은 웃음일 줄 압니다. 아기 예수는 성자의 웃음을 우리들 영혼 깊숙이 안겨 주십니다.
아리조나주 어느 수도원에 한 그림이 벽에 걸려 있습니다. 그림 제목은 '웃고 있는 그리스도(The Laughing Christ)'입니다. 예수님이 머리를 뒤로 적기면서 입을 크게 벌려 파안대소하는 그림입니다. 수도사가 이 그림을 들고와서 수업시간에 가르칠 때 보여 주었습니다. 얼굴이 굳어져 있는 한 여인이 일어나면서 묻습니다.
"어디 성경에 예수님이 웃었다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까"
수도사는 대답합니다.
"예수님이 한때는 어린아이였습니다. 아마도 기저귀를 많이 적셨을 것입니다. 어디 성경에 기저귀를 적셨다는 말씀이 쓰여 있습니까"
아기 예수는 어린아이의 웃음을 안고 오셨습니다. 그는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불행하게도 마굿간에 태어납니다. 말구유에 누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없이 밝은 웃음을 소유하셨습니다. 2000년이 지난 오늘도 우리는 아기 예수를 생각할 때 그의 밝고 맑은 어린아이의 웃음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를 짓눌렀던 'learned helplessness'를 발견케 됩니다.
사실 아기 예수뿐이 아닙니다. 우리 주변의 모든 어린아이들은 아기 예수의 웃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도 한때 이 웃음을 소유했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세상 정황에 상관없이 웃음과 유머가 가득 넘쳐흐르고 있습니다.
에르마 봄벡이 또 다음과 같은 글을 썼습니다. "낙곽적인 사람을 견딜 수 없거든 암에 걸린 아이들 근처에도 가지 마십시오. " 아이들은 무척 낙관적이란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다리를 하나 잃어 하나밖에 안남으며 그 한 다리를 가지고 물장난을 칩니다. 거울 옆을 지나다가 머리가 빠진 자기 얼굴을 보면 혀를 낼름 내밀고 지나갑니다. 만일 어른들이 그들을 휠체어에 앉친다면 그들은 그것을 타고 경주하기 시작합니다. "
모든 삶에서 웃음과 유머를 잃지 않는 어린아이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한 어린아이에게 죽음이 주는 좋은 점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아이는 대답합니다. "더이상 신발끈을 매고 풀고 할 필요가 없어서 좋죠. "
어린아이들은 웃음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웃음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웃음을 안고 아기 예수가 말구유에 태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야의 징조는 더 놀라운 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기 예수의 모습이 다른 아이들과 본질적으로 다른 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입니다. 그 사건 자체가 많은 웃음을 자아내게 합니다.
만일 우리가 어느 책을 읽고 있다고 가정합시다. 갑자기 '처녀가 잉태하였다'는 내용을 접합니다. 현대 의학과 과학을 아는 사람 같으면 웃을 수밖에 없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아브라함의 아들의 이름이 이삭, 곧 '웃음'인데 왜 웃음이라 지었습니까 100살 된 두 노인이 할머니는 경수가 끊어졌는데 아들을 낳았으니 웃음이라고 아들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습니까 100살 된 노인네가 이 아들을 낳는다고 할 때 사라가 웃으면서 아들의 이름을 이삭이라 하였는데 처녀가 잉태한다 하면 어떨까요 온 우주가 웃지 않았을까요 온 우주가 폭소를 터뜨리지 않았을까요
사실 아기 예수는 온 우주의 폭소를 들으면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성자의 멋진 웃음을 안고 말구유에 누워 계십니다. 우리가 당신을 보고 웃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기 예수는 온 우주의 폭소에 우리가 동참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습득된 무기력증" 가운데 웃음을 잃어버린 우리에게 밝게 웃고 계십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낳은 아들, 그 아기를 생각만 하더라도 우리는 평생 웃고 또 웃고, 또 웃고 하다가 하늘 나라에 가서도 계속 웃을 수밖에 없는 놀라운 축복을 받지 않았을까요
이러한 웃음을 소유한 자는 이 땅 위에서 무슨 일도 감당할 수 있는 자가 되지 않을까요
어느 수퍼 우먼이란 별명을 가진 분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완전하게 해내는 분입니다. 가정을 온전히 가꿉니다. 자녀를 잘 기릅니다. 남편을 늘 행복하게 합니다. 이분은 BishopFulton Sheen의 책을 좋아하는 분인데 어느날 BishopFulton Sheen이 이분을 방문했습니다. 그때 이 Bishop에게 자기집 문이 임신을 했다고 말했습니다.
완전하게 사는 자신의 삶이 너무 힘들다보니 자기 자신이 성모 마리아라고 말할 순 없고 해서 자기 집 문이 성모 마리아처럼 혼자서 임신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분은 계속해서 자신의 삶을 이야기합니다.
"매일 저녁 세 아이를 목욕시키고 깨끗한 침대에 재우고 그 다음날을 위한 점심을 만들고 아이들의 신발을 정리한 후 아이들과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나 혼자 무릎을 끓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이 아이들을 하나도 죽이지 않은 것을 감사합니다. "
완벽한 어머니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이렇게 해낼 수 있는 힘은 바로 그분의 유머에 있다고 봅니다. '우리 문이 임신했습니다. ' 말할 수 있는 유머가 그분을 그 모든 삶에서 승리하게 한다고 봅니다.
복잡한 삶 속에서 문을 바라보며 문이 임신했다고 생각할 때마다 웃음이 그의 삶 속에 터집니다. 아울러 어린아이들의 웃음소리도 듣게 됩니다. 온 우주의 웃음소리를 듣게 됩니다.
이분이 이러한 유머를 갖게 된 것은 처녀를 통해 임신한 아기 예수를 늘 보았기 때문인 줄 압니다. 처녀를 통하여 낳은 아기를 보고 폭소할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learned helplessness'를 해결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우리에게 웃음이 왜 없어졌습니까 'Learned helplessness' 때문이 아닙니까 Shock을 받아 발버둥쳐도 소용이 없으니까 이젠 어떤 shock이 와도 고통 가운데 주저앉아 웃음을 잃은 자가 되진 않았습니까
우리가 처녀가 잉태한 한 아기를 유심히 바라보노라면 우리는 어린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온 우주의 웃음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웃음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지난주에 소개한 불란서 유전학자인 레쥬네(Lejeune)의 이야기를 한가지 더 소개합니다. 레쥬네는 자녀들을 가르치곤 하였는데 가끔 과학과 수학 숙제를 자녀들이 아빠가 가르쳐 준대로 해갑니다. 그런데 간혹 아이들은 'F'를 받아 옵니다. 학교 학생이 잘 이해를 못하므로 'F'를 줍니다. 그때 자녀들은 즐겁게 'F'를 받아 가지고 옵니다. 그리고 아빠에게 "아빠는 수학에 F야!"하며 놀리곤 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우리도 아기 예수를 따라가다 보면 세상에서는 'F'를 받는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웃을 수 있지 않습니까 주님께 주님이 'F'를 받았다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성탄절은 처녀가 낳은 아기 예수의 웃음을 듣는 날입니다. 우리의 인생 성적표 'F'를 안고 아기 예수 앞에 나아가 함께 웃는 날입니다.
온 우주가 함께 웃고 있습니다. 성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께서 함께 웃고 있습니다. 우리도 함께 웃습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기를 낳았습니다. 임마누엘의 사건은 역사 최대의 희극의 사건입니다.
이사야는 말씀합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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