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 베들레헴 성탄의 위대성
본문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정성을 모두어서 선물을 주고 받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님을 선물로 주신 것처럼 동방 박사들이 황금과 유황과 몰약을 싸가지고 베들레헴에 찾아가서 경배하고 예물을 드린 것처럼 우리가 이 선물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어느 젊은 남녀가 성탄절에 작은 선물이지만은 조그마한 팩키지를 만들어서 주고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근원이 되어서 이 젊은 남녀가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어서 행복하게 살게 되었습니다. 제가 결혼식 주례할 때 보면 조그마한 이 결혼식에 예물을 주고받음으로써 그 조그마한 예물이지만은 그로부터 큰 가정이 행복하게 이루어지게 되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 기독교 역사는 지극히 보잘것없고, 적은 것이지만은 결과는 위대한 것으로 끝나는 이 기독교역사를 우리는 찾아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국은 마치 작은 겨자씨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자라므로 새들이 깃들이게 되는 것과 같다. 밀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욥기서 8장 7절에 보면, 욥의 친구 빌닷이라는 사람의 입을 통해서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시작은 미미하였지만은 얼마 후에, 나중에는 크게 창대해지는 것이 되리라. 기독교 역사는 마치 처음 성탄절이 작은 고을, 베들레헴에서 어린 아기가 저말구유에 탄생하는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출발이 오늘날에 와서는 이 역사를 B. C. 와 A. D. 로 나누고, 우리가 지금 떠들고 있는 뉴 밀레니엄의 시작도 어린아기, 예수님이 베들레헴에 탄생함으로부터 시작된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이야말로 이 인류 역사의 코스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 속에 위대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오늘의 새 밀레니엄의 시간도 바로 베들레헴의 말구유에 탄생하신 예수님의 시간부터 계산된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성탄의 위대성은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가 우리는 ’이 성탄을 어떻게 위대한 성탄으로 만들 것인가’, 저는 이 본문의 말씀을 가지고 세 가지로 나누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로는, 성탄의 위대성은 그의 겸손하게 오심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겸손하게 이 땅 위에 모든 사람이 잘 알지 못하는 시간 속에 오셨습니다. 그것을 이사야 선지자는 뭐라고 그랬는고 하니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이새의 줄거리에서 싹이 하나 돋아나더니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하는 것이요’, 그랬습니다. 나뭇가지의 뿌리에서 가지가 하나 돋아나는 것처럼 남이 알지 못하게 조용히 이 땅 위에 생성한 그 싹과 나뭇가지가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서 놀라운 결실을 맺게 하셨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 탄생하실 때에 저 앗수르라든지, 로마라든지, 저 헬라 나라는 놀라운 권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유대땅이라고 하는 것은 지극히 보잘것없는 나약한 유대 땅, 그것도 작은 고을, 베들레헴에 예수님이 어린 아기의 몸으로 탄생하실 때에, 이새에서 싹이 하나 돋아나는 것 같고 또 뿌리에서한 가지가 나오는 것 같지만은 그 위에 여호와의 신, 지혜의 신, 총명의 신, 모략의 신, 재능의 신,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임함으로 말미암아 그로부터 역사가 달라지고 인류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을 이사야 선지자는 말하면서 어린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노는 것처럼 사자와 같이 소들이 노는 것처럼 새로운 역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통해서 이루어졌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목수였습니다. 마리아는 팔레스타인, 나사렛의 소박한 농촌 처녀였습니다. 그와 더불어 정혼한 그 사이에 마리아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님께서 탄생할 때에 무슨 병원에서 탄생한 것도 아니고, 온돌방에서 조용히 탄생된 것도 아니라 오랜 여행 중에 있다가 피곤한 마리아와 요셉이 여관방에 들어 갈려고 할 때에 그 방, 하나도 우리가 비워 놓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 말구유간에 마리아가 예수님을 탄생시키고 겸손하게 이 땅 위에 오신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여든 네 살 난 과부, 안나가 예수님을 만납니다. 경건한 사람, 시므온이 예수님을 만납니다. 이렇게 보잘것없는, 겸손하게 이 세상에 나신 예수님이야말로 그의 모든 역사적인 일로 말미암아 위대한 성탄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에 헤롯왕이 이 예수님을 죽이기로 작정을 하고 어린 아기를 모두 다 죽이려고 하고 또 죽였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애굽으로 피난을 가서 저 애굽 땅에서 얼마동안 지납니다. 그래서 카이로에 가게 되면 예수님께서 어려서 피난생활 했다고 하는, 저 보잘것없는 지하실을 보여 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피난생활과 마찬가지로 저 지하실에서 어린 아기 예수님이 피난생활을 애굽에서 했습니다. 이것도 겸손하게 오신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겸손하게 오셔서 이 성탄을 위대하게 하셨습니다.
미국, 보스턴에 주택개발 업자로 있던 로봇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수천만 달러의 자본금을 가지고 크게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은행에서 자본금이 풀어지지 아니해서 그 기업이 파산이 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이 뱅크럽(bankrupt)을 당해서 아무것도 없이 빈손 들고 실패하고 돌아섰습니다. 또 한번은 자동차를 타고 낙심이 되어서 가다가 옆에 조그마한 예배당에서 찬송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 로봇은 가다가 그 길가에 차를 세우고 그 조그마한 길가의 예배당에 들어가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한때는 자기가 성공한 줄 알았고, 내 수단과 방법으로 크게 번영한 줄 알았는데 빈손 들고 아무것도 없이 지나가던 이 로봇은 예배당에 가서 뒷전에 앉아 무릎을 꿇고 앉아서 설교를 듣습니다. 한 열댓 명 모인 조그마한 교회에 목사님이 설교를 하시는데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고 예수님의 손을 붙잡고 일어나서 부활하지 않았느냐 예수님의 손을 붙잡고 일어서라고 하는 설교를 듣게될 때에 이 로봇은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내가 지금 있는 것은 저 은행의 돈줄이 끊어진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의 손을 붙잡았던 것을 놓치고 죄를 짓고 실패하고 나아만이 교만한 것처럼 살아왔던 이것입니다. ’예수님의 손을 다시 붙잡아야 되겠다’, 예수님의 손을 붙잡고 겸손하게 무릎을 꿇고 이제는, ’예수님 중심으로 살겠습니다. 교회 중심으로 살겠습니다’, 겸손하게 여호와 하나님 앞에 회개함으로부터 그에게 다시 성공의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겸손하게 자기를 깨닫고, 회개하고, 예수님의 손을 붙잡는 날부터 로봇은 위대한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 얘기입니다.
성탄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겸손하게 오신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들에게 가르친 교훈대로 살아가게 될 때에 우리가 맞이하는 성탄은 위대한 성탄이 될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로는, 성탄의 위대성을 예수님의 종 된 삶을 통해서 나타내십니다. 우리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오신 것은 명문집 가정에서 명성을 지니고 탄생하지를 않았습니다. 종의 모습으로 탄생했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당한 자, 사회의 버림을 받은 자들을 찾아다니면서 그들을 격려하고, 그들에게 소망을 주고, 그들을 관심을 가지고 구원해 냈습니다. 말구유간에 보잘 것 없는 곳에 종의 모습으로 목수의 가정에 태어나시게 되었습니다.
한 소년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져왔을 때 그것을 붙들고 축사하시고, 배고픈 사람들을 나누어 먹이셨습니다.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을 고쳐 주셨습니다. 죄인처럼 버림받은 저 세리를 길가에서 불러서 제자로 삼았습니다. 간음한 여인, 모두다 돌로 쳐죽이려고 할 때에 예수님은, ”이제 다시는 이런 죄를 짓지 말라”, 간음한 여인을 붙드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던 사마리아 여인도 붙드셔서 전도자가 되게 했습니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 종의 모습으로 오셔서 예수님은 죄인과 더불어 먹고 마신다고 비난을 받으리만치 저 속된 사람들, 하류계층에 있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종의 모습으로 예수님이 그들을 섬겼기 때문에 성탄은 위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평범한 어부들을 불러서 제자를 삼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성탄의 위대성은 예수를 믿는 우리들의 삶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여러분, 또 하나의 성탄의 위대성은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고 예수님처럼 겸손하게, 예수님처럼 종의 모습을 가지고 남을 섬기면서 예수님처럼 우리가 헌신하면서 살아갈 때에 우리 예수님의 탄생은 위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0장 26절로 27절에 보면,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크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야 된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하리라’ 전혀 파라독시칼(paradoxical)한 역리적인 교훈입니다.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위대한 사람이 되기 원하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고 종이 되어야 된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오늘 예수님처럼 남을 섬기고 종이 되는 사람, 그래서 오늘의 성탄을 위대하게 하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슈바이처의 위대성은 그가 종의 모습으로 한번은 성경을 읽다가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보면서 이 부자는 백인들이고, 저 나사로는 흑인들, 아프리카 사람들이 아니냐, 백인들의 죄를 회개하기 위해서 종의 모습으로 저 아프리카에 찾아가서 그 흑인들을 섬기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분이 성탄을 위대하게 만든 분입니다. 리빙스턴은 아프리카에 가서 복음을 전하시다가 마지막에 세상을 떠날 때에 리빙스턴의 전함을 들은, 복음을 들은 흑인들이 이 리빙스턴을 영국에 보낼 수가 없다고 그의 심장을 아프리카에 묻고, 이 리빙스턴의 시체가 저 웨스턴민스터 앞에 가서 묻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마더 테레사는 예수님처럼 섬기는 자세로 저 캘커타에 가서 죽어 가는 인도사람들 옆에서 그를 섬기는 까닭에, 위대한 인물이 된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성탄을 위대하게 하신 분은 바로 여러분들이고, 종의 모습을 가지고 섬기는 사람이 될 때에 우리의 성탄은 위대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저는 모태적부터 신앙을 받았지만은 세레는 커서 받았습니다. 제가 세레를 받을 때는 제가 피난을 내려와 있던 북한에서 월남을 하려고 내려왔던 곳에서, 어느 수요일 저녁에 목사님이 오셔서 제게 세례를 베푸는데 수요일 저녁에 몇사람 되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 제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지극히 적은 출발입니다. 제 마음속에 ’나는 세례교인인데, 나는 예수님을 닮아야 할텐데, 예수님의 교훈대로 살아야 할텐데, 나는 세례교인인데’, 그 다음부터 예수님의 그 하신 일을 생각하면서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기로 마음을 작정을 했습니다. 성탄절이 됐습니다. 그 공산 치하에서 박해를 받으면서 성찬을, 성탄 때에 연극을 하고, 크리스마스 캐롤을 부르고, 새벽송을 돌고 할 때에 그렇게 기쁠수가 없습니다. 한번은 성탄절에 성극을 하는데 제가 모세의 대역을 맡았습니다. 모세가 노예생활을 하는 이스라엘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땅을 들어가는 그 장면을, 연극을 하는데 공산 치하에서 제가 모세의 그 역할을 하면서 연극을 할 때에, 정말로 여호와 하나님께 약속의 땅을, 자유의 땅을 바라면서 가는 그 심정을 가지고 열연을 했습니다. 내 자신이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후부터 공산당원이 제게 주목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예수님 믿고 또 모세의 역할을 한 제게 대해서 크게 여러 가지 박해를 시작한 것을 기억하게 됩니다. 그러나 저는 어느 수요일 저녁에 목사님이 오셔서 세례를 베푼 그것으로 하여금 보잘것없는 출발이지만은 나는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될텐데, 나중에 저는 주의 종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이 교회를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의 종으로써 세계를 다니며 복음을 전할 때에, 수요일 저녁에, 어느날 저녁 제게 세례를 베푼 것부터 출발해서 오늘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시는 위대한 역사를 이룩하게 하신 것은 시작은 미미하고 보잘것없지만 믿음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에게 성탄을 위대하게 하시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의 성탄을 예수님이 오신 뜻을 내가 생활로 옮기게 될 때에, 내가 위대하게 되고 성탄이 위대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저 다니엘 웹스터라는 사람이 미국의 하원의원을 지내고, 국무장관을 두 번이나 지낸 분인데, ”당신이 성공한 비결이 무엇입니까” 하고 기자들이 물을 때에 이 분은 이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나의 이념은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책임감입니다. 이 신념만 확실하면은 성공적인 인생을 살 것입니다. ”
뉴 밀레니엄을 앞에 두고 있는 여러분들은 오늘 탄생하신 예수님의 이 성탄을 위대하게 하시는, 축복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근원이 되어서 이 젊은 남녀가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어서 행복하게 살게 되었습니다. 제가 결혼식 주례할 때 보면 조그마한 이 결혼식에 예물을 주고받음으로써 그 조그마한 예물이지만은 그로부터 큰 가정이 행복하게 이루어지게 되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 기독교 역사는 지극히 보잘것없고, 적은 것이지만은 결과는 위대한 것으로 끝나는 이 기독교역사를 우리는 찾아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국은 마치 작은 겨자씨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자라므로 새들이 깃들이게 되는 것과 같다. 밀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욥기서 8장 7절에 보면, 욥의 친구 빌닷이라는 사람의 입을 통해서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시작은 미미하였지만은 얼마 후에, 나중에는 크게 창대해지는 것이 되리라. 기독교 역사는 마치 처음 성탄절이 작은 고을, 베들레헴에서 어린 아기가 저말구유에 탄생하는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출발이 오늘날에 와서는 이 역사를 B. C. 와 A. D. 로 나누고, 우리가 지금 떠들고 있는 뉴 밀레니엄의 시작도 어린아기, 예수님이 베들레헴에 탄생함으로부터 시작된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이야말로 이 인류 역사의 코스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 속에 위대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오늘의 새 밀레니엄의 시간도 바로 베들레헴의 말구유에 탄생하신 예수님의 시간부터 계산된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성탄의 위대성은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가 우리는 ’이 성탄을 어떻게 위대한 성탄으로 만들 것인가’, 저는 이 본문의 말씀을 가지고 세 가지로 나누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로는, 성탄의 위대성은 그의 겸손하게 오심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겸손하게 이 땅 위에 모든 사람이 잘 알지 못하는 시간 속에 오셨습니다. 그것을 이사야 선지자는 뭐라고 그랬는고 하니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이새의 줄거리에서 싹이 하나 돋아나더니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하는 것이요’, 그랬습니다. 나뭇가지의 뿌리에서 가지가 하나 돋아나는 것처럼 남이 알지 못하게 조용히 이 땅 위에 생성한 그 싹과 나뭇가지가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서 놀라운 결실을 맺게 하셨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 탄생하실 때에 저 앗수르라든지, 로마라든지, 저 헬라 나라는 놀라운 권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유대땅이라고 하는 것은 지극히 보잘것없는 나약한 유대 땅, 그것도 작은 고을, 베들레헴에 예수님이 어린 아기의 몸으로 탄생하실 때에, 이새에서 싹이 하나 돋아나는 것 같고 또 뿌리에서한 가지가 나오는 것 같지만은 그 위에 여호와의 신, 지혜의 신, 총명의 신, 모략의 신, 재능의 신,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임함으로 말미암아 그로부터 역사가 달라지고 인류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을 이사야 선지자는 말하면서 어린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노는 것처럼 사자와 같이 소들이 노는 것처럼 새로운 역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통해서 이루어졌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목수였습니다. 마리아는 팔레스타인, 나사렛의 소박한 농촌 처녀였습니다. 그와 더불어 정혼한 그 사이에 마리아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님께서 탄생할 때에 무슨 병원에서 탄생한 것도 아니고, 온돌방에서 조용히 탄생된 것도 아니라 오랜 여행 중에 있다가 피곤한 마리아와 요셉이 여관방에 들어 갈려고 할 때에 그 방, 하나도 우리가 비워 놓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 말구유간에 마리아가 예수님을 탄생시키고 겸손하게 이 땅 위에 오신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여든 네 살 난 과부, 안나가 예수님을 만납니다. 경건한 사람, 시므온이 예수님을 만납니다. 이렇게 보잘것없는, 겸손하게 이 세상에 나신 예수님이야말로 그의 모든 역사적인 일로 말미암아 위대한 성탄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에 헤롯왕이 이 예수님을 죽이기로 작정을 하고 어린 아기를 모두 다 죽이려고 하고 또 죽였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애굽으로 피난을 가서 저 애굽 땅에서 얼마동안 지납니다. 그래서 카이로에 가게 되면 예수님께서 어려서 피난생활 했다고 하는, 저 보잘것없는 지하실을 보여 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피난생활과 마찬가지로 저 지하실에서 어린 아기 예수님이 피난생활을 애굽에서 했습니다. 이것도 겸손하게 오신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겸손하게 오셔서 이 성탄을 위대하게 하셨습니다.
미국, 보스턴에 주택개발 업자로 있던 로봇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수천만 달러의 자본금을 가지고 크게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은행에서 자본금이 풀어지지 아니해서 그 기업이 파산이 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이 뱅크럽(bankrupt)을 당해서 아무것도 없이 빈손 들고 실패하고 돌아섰습니다. 또 한번은 자동차를 타고 낙심이 되어서 가다가 옆에 조그마한 예배당에서 찬송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 로봇은 가다가 그 길가에 차를 세우고 그 조그마한 길가의 예배당에 들어가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한때는 자기가 성공한 줄 알았고, 내 수단과 방법으로 크게 번영한 줄 알았는데 빈손 들고 아무것도 없이 지나가던 이 로봇은 예배당에 가서 뒷전에 앉아 무릎을 꿇고 앉아서 설교를 듣습니다. 한 열댓 명 모인 조그마한 교회에 목사님이 설교를 하시는데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고 예수님의 손을 붙잡고 일어나서 부활하지 않았느냐 예수님의 손을 붙잡고 일어서라고 하는 설교를 듣게될 때에 이 로봇은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내가 지금 있는 것은 저 은행의 돈줄이 끊어진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의 손을 붙잡았던 것을 놓치고 죄를 짓고 실패하고 나아만이 교만한 것처럼 살아왔던 이것입니다. ’예수님의 손을 다시 붙잡아야 되겠다’, 예수님의 손을 붙잡고 겸손하게 무릎을 꿇고 이제는, ’예수님 중심으로 살겠습니다. 교회 중심으로 살겠습니다’, 겸손하게 여호와 하나님 앞에 회개함으로부터 그에게 다시 성공의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겸손하게 자기를 깨닫고, 회개하고, 예수님의 손을 붙잡는 날부터 로봇은 위대한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 얘기입니다.
성탄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겸손하게 오신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들에게 가르친 교훈대로 살아가게 될 때에 우리가 맞이하는 성탄은 위대한 성탄이 될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로는, 성탄의 위대성을 예수님의 종 된 삶을 통해서 나타내십니다. 우리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오신 것은 명문집 가정에서 명성을 지니고 탄생하지를 않았습니다. 종의 모습으로 탄생했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당한 자, 사회의 버림을 받은 자들을 찾아다니면서 그들을 격려하고, 그들에게 소망을 주고, 그들을 관심을 가지고 구원해 냈습니다. 말구유간에 보잘 것 없는 곳에 종의 모습으로 목수의 가정에 태어나시게 되었습니다.
한 소년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져왔을 때 그것을 붙들고 축사하시고, 배고픈 사람들을 나누어 먹이셨습니다.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을 고쳐 주셨습니다. 죄인처럼 버림받은 저 세리를 길가에서 불러서 제자로 삼았습니다. 간음한 여인, 모두다 돌로 쳐죽이려고 할 때에 예수님은, ”이제 다시는 이런 죄를 짓지 말라”, 간음한 여인을 붙드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던 사마리아 여인도 붙드셔서 전도자가 되게 했습니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 종의 모습으로 오셔서 예수님은 죄인과 더불어 먹고 마신다고 비난을 받으리만치 저 속된 사람들, 하류계층에 있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종의 모습으로 예수님이 그들을 섬겼기 때문에 성탄은 위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평범한 어부들을 불러서 제자를 삼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성탄의 위대성은 예수를 믿는 우리들의 삶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여러분, 또 하나의 성탄의 위대성은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고 예수님처럼 겸손하게, 예수님처럼 종의 모습을 가지고 남을 섬기면서 예수님처럼 우리가 헌신하면서 살아갈 때에 우리 예수님의 탄생은 위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0장 26절로 27절에 보면,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크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야 된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하리라’ 전혀 파라독시칼(paradoxical)한 역리적인 교훈입니다.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위대한 사람이 되기 원하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고 종이 되어야 된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오늘 예수님처럼 남을 섬기고 종이 되는 사람, 그래서 오늘의 성탄을 위대하게 하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슈바이처의 위대성은 그가 종의 모습으로 한번은 성경을 읽다가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보면서 이 부자는 백인들이고, 저 나사로는 흑인들, 아프리카 사람들이 아니냐, 백인들의 죄를 회개하기 위해서 종의 모습으로 저 아프리카에 찾아가서 그 흑인들을 섬기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분이 성탄을 위대하게 만든 분입니다. 리빙스턴은 아프리카에 가서 복음을 전하시다가 마지막에 세상을 떠날 때에 리빙스턴의 전함을 들은, 복음을 들은 흑인들이 이 리빙스턴을 영국에 보낼 수가 없다고 그의 심장을 아프리카에 묻고, 이 리빙스턴의 시체가 저 웨스턴민스터 앞에 가서 묻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마더 테레사는 예수님처럼 섬기는 자세로 저 캘커타에 가서 죽어 가는 인도사람들 옆에서 그를 섬기는 까닭에, 위대한 인물이 된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성탄을 위대하게 하신 분은 바로 여러분들이고, 종의 모습을 가지고 섬기는 사람이 될 때에 우리의 성탄은 위대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저는 모태적부터 신앙을 받았지만은 세레는 커서 받았습니다. 제가 세레를 받을 때는 제가 피난을 내려와 있던 북한에서 월남을 하려고 내려왔던 곳에서, 어느 수요일 저녁에 목사님이 오셔서 제게 세례를 베푸는데 수요일 저녁에 몇사람 되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 제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지극히 적은 출발입니다. 제 마음속에 ’나는 세례교인인데, 나는 예수님을 닮아야 할텐데, 예수님의 교훈대로 살아야 할텐데, 나는 세례교인인데’, 그 다음부터 예수님의 그 하신 일을 생각하면서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기로 마음을 작정을 했습니다. 성탄절이 됐습니다. 그 공산 치하에서 박해를 받으면서 성찬을, 성탄 때에 연극을 하고, 크리스마스 캐롤을 부르고, 새벽송을 돌고 할 때에 그렇게 기쁠수가 없습니다. 한번은 성탄절에 성극을 하는데 제가 모세의 대역을 맡았습니다. 모세가 노예생활을 하는 이스라엘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땅을 들어가는 그 장면을, 연극을 하는데 공산 치하에서 제가 모세의 그 역할을 하면서 연극을 할 때에, 정말로 여호와 하나님께 약속의 땅을, 자유의 땅을 바라면서 가는 그 심정을 가지고 열연을 했습니다. 내 자신이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후부터 공산당원이 제게 주목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예수님 믿고 또 모세의 역할을 한 제게 대해서 크게 여러 가지 박해를 시작한 것을 기억하게 됩니다. 그러나 저는 어느 수요일 저녁에 목사님이 오셔서 세례를 베푼 그것으로 하여금 보잘것없는 출발이지만은 나는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될텐데, 나중에 저는 주의 종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이 교회를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의 종으로써 세계를 다니며 복음을 전할 때에, 수요일 저녁에, 어느날 저녁 제게 세례를 베푼 것부터 출발해서 오늘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시는 위대한 역사를 이룩하게 하신 것은 시작은 미미하고 보잘것없지만 믿음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에게 성탄을 위대하게 하시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의 성탄을 예수님이 오신 뜻을 내가 생활로 옮기게 될 때에, 내가 위대하게 되고 성탄이 위대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저 다니엘 웹스터라는 사람이 미국의 하원의원을 지내고, 국무장관을 두 번이나 지낸 분인데, ”당신이 성공한 비결이 무엇입니까” 하고 기자들이 물을 때에 이 분은 이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나의 이념은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책임감입니다. 이 신념만 확실하면은 성공적인 인생을 살 것입니다. ”
뉴 밀레니엄을 앞에 두고 있는 여러분들은 오늘 탄생하신 예수님의 이 성탄을 위대하게 하시는, 축복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