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례] 유월절 식탁을 준비하라
본문
최근, 일간지 신문에 화제가 되고 있는 기사 하나가 있습니다. 지난 1970년대에 이집트의 한 사막에서 발견된 2,000년 동안 묻혀 있던『유다복음』(The Gospel of Judas)이 최근에, 영어와 불어와 독일어로 번역되어 공개되었기 때문입니다.
유다복음은, 주후 2세기에 성행하였던 영지주의(靈知主意⋅Gnosticism)의 한 분파인 가인파(Cainites, 가인과 같은 지탄을 받고 있는 성서 속의 인물들을 추종하는 종파)가 만든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신약성서의 정경으로 채택되지 못한 수많은 복음서들이 있는 데, 그 중 하나가 ‘유다복음’입니다(397년 A. D. 카르타고 공의회). 유다복음이, 정경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였던 ‘가룟 유다’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다복음에 의하면, 가룟 유다가 예수의 요구에 따라 예수를 배신한 것으로 기술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가룟 유다’의 배신이 없었다면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또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하려는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이 완성되지도 못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말하자면, 유다의 예수님 배신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진 각본이라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일고(1考)의 가치도 없는 주장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운명적運命的으로 창조하시지 않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동감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사고하는 존재로 창조하셨고, 여호와 하나님과 같이 호흡하면서 살도록 지으셨습니다. 그러나 자기 스스로의 결단에 의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거역할 수도 있는 자유의지를 가진 책임적인 존재로 만드셨습니다(동산 중앙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금하신 것).
분명히 말씀드리는 것은, 저와 여러분은, 여호와 하나님이 금하신 실과를 먹은 후 변명하였던 아담처럼 하지 말아야 합니다. 가룟 유다에 대한 유다복음서의 견해처럼, 우리가 스스로 지은 허물과 죄악을 여호와 하나님의 책임이나 여호와 하나님의 뜻으로 돌리는, 책임전가의 죄를 결코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회개할 기회마저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종려주일, 성찬성례전주일을 맞이하여,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主님께서 어떤 심정을 가지고, 열두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 ‘마지막 유월절 식탁’을 잡수셨는가? 그리고 저와 여러분을 이 성찬에 초대하신 주님의 마음은 과연 어떤 마음이실까를 생각하면서, 이 성찬을 받는 자가 되었으면 합니다.
먼저, 마지막 유월절 만찬 상(床)을 앞두신 예수님의 두 가지 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에는, 준비된 객실이 없어서, 가축들이 먹이를 먹는 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눅 2, 7 첫 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Katalumata). 그러나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두고 있는 유월절에는, 예수님을 위하여 ‘객실’을 준비해 준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을 위하여 객실을 준비해 준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군가 하면 마가복음서를 기록한 저자 마가의 아버지, ‘요한 마가’입니다.
제자들은 전혀 모르는 일이었지만,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유월절 음식을 잡수시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 안에서 살고 있던 마가의 아버지 ‘요한 마가’와 미리 약속하셨던 셈입니다. 가까운 제자들에게도, 알리지 않고 비밀을 지키셨습니다.
그 사실도 모르는 제자들이 걱정합니다.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께서 유월절 음식을 잡수시게준비하기를 원하시니이까?”(막 14, 12) 그 때, 제자 中 베드로와 요한 둘을 보내시며 말씀합니다(눅 22, 8).
城內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를 따라가서, 어디든지 그가 들어가는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냐? 하시더이다.
그리하면, 자리를 펴고 준비한 큰 다락방(guest room, kataluma)을 보이리니,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라(막 14, 13-14 ; 눅 2, 7과 같은 단어를 쓰고 있음).
예수님 말씀대로 순종하였더니, 마지막 유월절 음식을 드실 다락방(guest room, kataluma)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열두 제자가 모처럼 한 식탁에 앉았습니다. 그러나 이 식탁은 평소에 예수님과 함께 하였던 수많은 식탁과는 분위가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합니다. 두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1) “내가 고난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눅 22, 15). 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그토록 유월절 음식 먹기를 원하고 원하셨을까요? 사도 요한(복음)의 증언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 먹기를 원하셨던 이유가 나옵니다. 그것은, 제자들을 향한, 변함없는 사랑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3, 1말씀에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하셨습니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특히, 열두 제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 바로 그 마음 때문에, 사랑하는 제자들과 더불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셨던 겁니다.
(2) 동시에, 유월절 식탁에 앉으신 예수님의 마음에는, 그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또 한 가지 마음이 있었습니다. 유월절 식탁에 둘러앉은 사랑하는 제자들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너무 너무 고통스러운 아픔 그 자체’이셨습니다. 요한복음의 저자 사도요한은, 다른 복음서 저자들은 언급하고 있지 않는, 가슴 아파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이렇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말씀합니다(요 13, 21).
사랑하는 제자들과 더불어 유월절 식탁에 앉아서 음식을 드시고 계시던 예수님의 마음이, 심히 괴로우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냥 괴로우신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너무 너무 괴로우셔서, 자신의 괴로움을 예수님이 스스로 증언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증언하다”는 표현은, 평상시에 그저 쉽게 쓰는 말이 아니지요. 매우 비상식적이거나, 非凡한 특별한 사건이 있을 때에, 마지막으로 간곡하게 말하고자 할 때, 말씀하시는 하시는 말씀方式이지요.
그렇게, 가슴 아프게, 비장한 각오로, 증언하여 말씀하시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다음의 말씀에서 드러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中 하나가, 나를 팔리라”(요 13, 21).
바로 예수님의 이 두 마음이, 저와 여러분을 이 성찬에 초대해 주신 주님의 마음입니다. 이 두 마음을 헤아리는 자라야, 이 聖餐을 받기에 合當한 者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와 더불어 먹고 마시기 위해서 베푸신 이 떡과 잔에는, 바로 이와 같은 주님의 두 가지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과 열두 제자들이 마주 앉은 마지막 유월절 만찬은, 수많은 사람들, 다양한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하였던 예수님과의 그 어떤 밥상과는 전혀 분위기와 의미가 다른 자리였습니다. 신나는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잔치 기분이 나는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지금까지, 공생애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한 식탁에는, 언제나 이 땅에 現存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 사건이 일어나는 자리였습니다. 세리와 창기들과 죄인들이, 수천 년의 역사 만에 처음으로, 그들도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신분변화, 존재변화, 영생과 구원을 얻는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로부터, “저 예수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세례자 요한은 와서 금식하고 금욕생활을 했는데, 저 예수는 먹보요, 술꾼이로다” 비난받기도 했습니다.
비난과 조롱을 받으시는 한이 있어도, 예수님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왜요? 人子가 온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입니다(막 2, 17). 罪人이, 悔改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사는,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存在變化와 삶의 變化가 일어나는 구원 사건의 현장이었기 때문이지요. 바로, 그 자리가 죄인을 구원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이었기 때문이지요.
삭개오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도 그러셨습니다. 죄인으로 낙인찍혔던 막달라 마리아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도 예수님은 행복하셨습니다. 마치 집나간 둘째 아들을 다시 얻은 아버지의 기쁨을 맛보는, 자리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눅 15, 11-24) 이것이 예수님 공생애 동안 있었던 예수님의 식탁의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유월절 마지막 만찬은, 그렇지가 못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主님의 이 두 가지 마음이 담긴 성찬을 받을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깨닫는 일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그 마음이 담겨 있는 이 떡과 잔을 받을 때, 나는 과연 주님 앞에 어떤 사람으로 應答하며 설 수 있는 자인가? 自己自身을 돌이켜 보는 자가 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만찬을 통하여, 비록 자신을 배반할 제자들이었지만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 뜨거운 사랑 때문에, r고난 받기 전에 제자들과 더불어 유월절 먹기를 그렇게 원하고 원하셨던 겁니다(눅 22, 15).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제자들과 더불어 유월절 음식을 드시고자 원하고 원하셨지만, 제자들과 유월절 음식 먹는 자리에서 두 번씩이나 반복하여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눅 22, 16). 또 조금 있다가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눅 22, 18). 떡과 잔을 들지 않겠다고 두 번씩이나 선언하셨습니다.
이 무슨 말씀입니까? 제자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함께 유월절 음식 드시는 예수님이셨지만, 예수님과 더불어 함께 떡과 잔을 나눈 바로 그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갈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뿐이 아니지요. 사랑하는 제자 중 하나인 가룟 유다가, 자신을 배신하여, 은 30에 팔 것을 아셨기 때문에, 너무 너무 가슴이 아픈 식탁이 되었던 겁니다.
너무나, 마음이 괴로우셔서,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셨기에 그렇습니다. 十字架 上에서,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당하실 때, 절규하시던 예수님의 그 아픔, 그 다음의 아픔이 있다면, 무슨 아픔이겠습니까?(막 15, 34)
사랑하는 제자들로부터의 버림당하심이 아니겠습니까? 배신당하고, 죽음에 넘겨줌을 당하는 그 아픔이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무의미하게 버림당하심은 절망적인 아픔이지요. 예수님은, 그 어떤 사람도, 단 한 번도, 사람을 버린 적이 없습니다. 배신한 적이 없습니다.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온 世上과 온 人類와 宇宙萬物의 ‘영원한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아니십니까? “내가 곧 길이요, 眞理요, 生命이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者가 없느니라”(요 14, 6).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아니십니까?
그렇게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잡숫기를 원하고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유월절이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어지고, 임할 때까지는, 이와 같은 유월절 음식을 다시는 먹고 마시지 않겠노라고, 반복하여 선언하시는 예수님의 그 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도 이 성찬을 받을 때, 감사와 결단의 고백이 있는 성찬이 되어야 합니다.
(1) 우리가 이 성찬을 먹고도 여전히, 주님을 배반할 자들임을 아시고도, 이 성찬에 초대해 주신 주님의 그 사랑에 감사하고, 감격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원하시고 원하셔서 친히 초대해 주신 이 성찬에 나아왔지만, 우리는 또 세상의 이익에 눈멀어 주님을 모른다고 배반할 자들입니다. 주님의 말씀보다는, 내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할 자들입니다. 그런 연약한 저와 여러분을 부르신 주님의 그 사랑을, 체득하는 성찬이 되기를 바랍니다.
(2) 그러나 우리는, 절대로 가룟 유다처럼 되지는 말아야 합니다. 가룟 유다는, 끝까지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십자가의 죽음의 자리까지 내어주는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마음 아파하시면서, 다시는 이 유월절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두 번씩이나 말씀하시던, 그 주님의 마음을 거역하고 말았습니다.
너희 중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면서, 제자들을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열둘 중 하나, 곧 나와 함께 지금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막 14, 20). 그때, 돌이켰어야 하지요. 그러나 가룟 유다는 그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이번에는, 가룟 유다가 예수님께 직접 묻습니다.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예수님이 對答하십니다. 나를 팔자가 너라는 사실을 “네가 스스로 말하였도다”(마 26, 25). 이 때도, 가룟 유다는 돌이킬 수 있는 또 한 번의 기회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번에는, 가룟 유다에게 이렇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막 14, 21).
돌이키기를 포기한 가룟 유다의 마음을 아신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요 13, 27).
가룟 유다는 정말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이 성찬을 받을 때, 가룟 유다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 결단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도, 가룟 유다와 같은 마음들이 다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 성찬을 주심은, 우리에게 돌이킴과 기회와 생명과 구원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이 성찬을 받을 때, ”가룟 유다와 같은 화인 맞은 심령의 사람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 기도하며 결단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유다복음은, 주후 2세기에 성행하였던 영지주의(靈知主意⋅Gnosticism)의 한 분파인 가인파(Cainites, 가인과 같은 지탄을 받고 있는 성서 속의 인물들을 추종하는 종파)가 만든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신약성서의 정경으로 채택되지 못한 수많은 복음서들이 있는 데, 그 중 하나가 ‘유다복음’입니다(397년 A. D. 카르타고 공의회). 유다복음이, 정경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였던 ‘가룟 유다’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다복음에 의하면, 가룟 유다가 예수의 요구에 따라 예수를 배신한 것으로 기술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가룟 유다’의 배신이 없었다면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또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하려는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이 완성되지도 못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말하자면, 유다의 예수님 배신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진 각본이라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일고(1考)의 가치도 없는 주장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운명적運命的으로 창조하시지 않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동감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사고하는 존재로 창조하셨고, 여호와 하나님과 같이 호흡하면서 살도록 지으셨습니다. 그러나 자기 스스로의 결단에 의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거역할 수도 있는 자유의지를 가진 책임적인 존재로 만드셨습니다(동산 중앙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금하신 것).
분명히 말씀드리는 것은, 저와 여러분은, 여호와 하나님이 금하신 실과를 먹은 후 변명하였던 아담처럼 하지 말아야 합니다. 가룟 유다에 대한 유다복음서의 견해처럼, 우리가 스스로 지은 허물과 죄악을 여호와 하나님의 책임이나 여호와 하나님의 뜻으로 돌리는, 책임전가의 죄를 결코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회개할 기회마저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종려주일, 성찬성례전주일을 맞이하여,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主님께서 어떤 심정을 가지고, 열두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 ‘마지막 유월절 식탁’을 잡수셨는가? 그리고 저와 여러분을 이 성찬에 초대하신 주님의 마음은 과연 어떤 마음이실까를 생각하면서, 이 성찬을 받는 자가 되었으면 합니다.
먼저, 마지막 유월절 만찬 상(床)을 앞두신 예수님의 두 가지 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에는, 준비된 객실이 없어서, 가축들이 먹이를 먹는 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눅 2, 7 첫 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Katalumata). 그러나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두고 있는 유월절에는, 예수님을 위하여 ‘객실’을 준비해 준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을 위하여 객실을 준비해 준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군가 하면 마가복음서를 기록한 저자 마가의 아버지, ‘요한 마가’입니다.
제자들은 전혀 모르는 일이었지만,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유월절 음식을 잡수시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 안에서 살고 있던 마가의 아버지 ‘요한 마가’와 미리 약속하셨던 셈입니다. 가까운 제자들에게도, 알리지 않고 비밀을 지키셨습니다.
그 사실도 모르는 제자들이 걱정합니다.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께서 유월절 음식을 잡수시게준비하기를 원하시니이까?”(막 14, 12) 그 때, 제자 中 베드로와 요한 둘을 보내시며 말씀합니다(눅 22, 8).
城內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를 따라가서, 어디든지 그가 들어가는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냐? 하시더이다.
그리하면, 자리를 펴고 준비한 큰 다락방(guest room, kataluma)을 보이리니,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라(막 14, 13-14 ; 눅 2, 7과 같은 단어를 쓰고 있음).
예수님 말씀대로 순종하였더니, 마지막 유월절 음식을 드실 다락방(guest room, kataluma)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열두 제자가 모처럼 한 식탁에 앉았습니다. 그러나 이 식탁은 평소에 예수님과 함께 하였던 수많은 식탁과는 분위가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합니다. 두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1) “내가 고난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눅 22, 15). 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그토록 유월절 음식 먹기를 원하고 원하셨을까요? 사도 요한(복음)의 증언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 먹기를 원하셨던 이유가 나옵니다. 그것은, 제자들을 향한, 변함없는 사랑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3, 1말씀에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하셨습니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특히, 열두 제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 바로 그 마음 때문에, 사랑하는 제자들과 더불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셨던 겁니다.
(2) 동시에, 유월절 식탁에 앉으신 예수님의 마음에는, 그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또 한 가지 마음이 있었습니다. 유월절 식탁에 둘러앉은 사랑하는 제자들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너무 너무 고통스러운 아픔 그 자체’이셨습니다. 요한복음의 저자 사도요한은, 다른 복음서 저자들은 언급하고 있지 않는, 가슴 아파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이렇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말씀합니다(요 13, 21).
사랑하는 제자들과 더불어 유월절 식탁에 앉아서 음식을 드시고 계시던 예수님의 마음이, 심히 괴로우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냥 괴로우신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너무 너무 괴로우셔서, 자신의 괴로움을 예수님이 스스로 증언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증언하다”는 표현은, 평상시에 그저 쉽게 쓰는 말이 아니지요. 매우 비상식적이거나, 非凡한 특별한 사건이 있을 때에, 마지막으로 간곡하게 말하고자 할 때, 말씀하시는 하시는 말씀方式이지요.
그렇게, 가슴 아프게, 비장한 각오로, 증언하여 말씀하시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다음의 말씀에서 드러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中 하나가, 나를 팔리라”(요 13, 21).
바로 예수님의 이 두 마음이, 저와 여러분을 이 성찬에 초대해 주신 주님의 마음입니다. 이 두 마음을 헤아리는 자라야, 이 聖餐을 받기에 合當한 者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와 더불어 먹고 마시기 위해서 베푸신 이 떡과 잔에는, 바로 이와 같은 주님의 두 가지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과 열두 제자들이 마주 앉은 마지막 유월절 만찬은, 수많은 사람들, 다양한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하였던 예수님과의 그 어떤 밥상과는 전혀 분위기와 의미가 다른 자리였습니다. 신나는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잔치 기분이 나는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지금까지, 공생애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한 식탁에는, 언제나 이 땅에 現存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 사건이 일어나는 자리였습니다. 세리와 창기들과 죄인들이, 수천 년의 역사 만에 처음으로, 그들도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신분변화, 존재변화, 영생과 구원을 얻는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로부터, “저 예수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세례자 요한은 와서 금식하고 금욕생활을 했는데, 저 예수는 먹보요, 술꾼이로다” 비난받기도 했습니다.
비난과 조롱을 받으시는 한이 있어도, 예수님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왜요? 人子가 온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입니다(막 2, 17). 罪人이, 悔改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사는,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存在變化와 삶의 變化가 일어나는 구원 사건의 현장이었기 때문이지요. 바로, 그 자리가 죄인을 구원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이었기 때문이지요.
삭개오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도 그러셨습니다. 죄인으로 낙인찍혔던 막달라 마리아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도 예수님은 행복하셨습니다. 마치 집나간 둘째 아들을 다시 얻은 아버지의 기쁨을 맛보는, 자리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눅 15, 11-24) 이것이 예수님 공생애 동안 있었던 예수님의 식탁의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유월절 마지막 만찬은, 그렇지가 못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主님의 이 두 가지 마음이 담긴 성찬을 받을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깨닫는 일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그 마음이 담겨 있는 이 떡과 잔을 받을 때, 나는 과연 주님 앞에 어떤 사람으로 應答하며 설 수 있는 자인가? 自己自身을 돌이켜 보는 자가 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만찬을 통하여, 비록 자신을 배반할 제자들이었지만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 뜨거운 사랑 때문에, r고난 받기 전에 제자들과 더불어 유월절 먹기를 그렇게 원하고 원하셨던 겁니다(눅 22, 15).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제자들과 더불어 유월절 음식을 드시고자 원하고 원하셨지만, 제자들과 유월절 음식 먹는 자리에서 두 번씩이나 반복하여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눅 22, 16). 또 조금 있다가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눅 22, 18). 떡과 잔을 들지 않겠다고 두 번씩이나 선언하셨습니다.
이 무슨 말씀입니까? 제자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함께 유월절 음식 드시는 예수님이셨지만, 예수님과 더불어 함께 떡과 잔을 나눈 바로 그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갈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뿐이 아니지요. 사랑하는 제자 중 하나인 가룟 유다가, 자신을 배신하여, 은 30에 팔 것을 아셨기 때문에, 너무 너무 가슴이 아픈 식탁이 되었던 겁니다.
너무나, 마음이 괴로우셔서,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셨기에 그렇습니다. 十字架 上에서,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당하실 때, 절규하시던 예수님의 그 아픔, 그 다음의 아픔이 있다면, 무슨 아픔이겠습니까?(막 15, 34)
사랑하는 제자들로부터의 버림당하심이 아니겠습니까? 배신당하고, 죽음에 넘겨줌을 당하는 그 아픔이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무의미하게 버림당하심은 절망적인 아픔이지요. 예수님은, 그 어떤 사람도, 단 한 번도, 사람을 버린 적이 없습니다. 배신한 적이 없습니다.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온 世上과 온 人類와 宇宙萬物의 ‘영원한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아니십니까? “내가 곧 길이요, 眞理요, 生命이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者가 없느니라”(요 14, 6).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아니십니까?
그렇게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잡숫기를 원하고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유월절이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어지고, 임할 때까지는, 이와 같은 유월절 음식을 다시는 먹고 마시지 않겠노라고, 반복하여 선언하시는 예수님의 그 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도 이 성찬을 받을 때, 감사와 결단의 고백이 있는 성찬이 되어야 합니다.
(1) 우리가 이 성찬을 먹고도 여전히, 주님을 배반할 자들임을 아시고도, 이 성찬에 초대해 주신 주님의 그 사랑에 감사하고, 감격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원하시고 원하셔서 친히 초대해 주신 이 성찬에 나아왔지만, 우리는 또 세상의 이익에 눈멀어 주님을 모른다고 배반할 자들입니다. 주님의 말씀보다는, 내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할 자들입니다. 그런 연약한 저와 여러분을 부르신 주님의 그 사랑을, 체득하는 성찬이 되기를 바랍니다.
(2) 그러나 우리는, 절대로 가룟 유다처럼 되지는 말아야 합니다. 가룟 유다는, 끝까지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십자가의 죽음의 자리까지 내어주는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마음 아파하시면서, 다시는 이 유월절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두 번씩이나 말씀하시던, 그 주님의 마음을 거역하고 말았습니다.
너희 중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면서, 제자들을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열둘 중 하나, 곧 나와 함께 지금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막 14, 20). 그때, 돌이켰어야 하지요. 그러나 가룟 유다는 그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이번에는, 가룟 유다가 예수님께 직접 묻습니다.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예수님이 對答하십니다. 나를 팔자가 너라는 사실을 “네가 스스로 말하였도다”(마 26, 25). 이 때도, 가룟 유다는 돌이킬 수 있는 또 한 번의 기회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번에는, 가룟 유다에게 이렇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막 14, 21).
돌이키기를 포기한 가룟 유다의 마음을 아신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요 13, 27).
가룟 유다는 정말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이 성찬을 받을 때, 가룟 유다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 결단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도, 가룟 유다와 같은 마음들이 다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 성찬을 주심은, 우리에게 돌이킴과 기회와 생명과 구원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이 성찬을 받을 때, ”가룟 유다와 같은 화인 맞은 심령의 사람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 기도하며 결단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