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례] 주님의 몸과 피
본문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서신을 통하여 예배에서 벌어지는 여러 불미스러운 일들을 언급하며 바로 가르칩니다. 그 중 주의 만찬에 관한 말씀 중 일부분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우리 교회는 각종 절기와 또 매월 첫 주를 성찬예식으로 드리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해당하는 병행 구절은 마태복음(26:26-28), 마가복음(14:22-24), 누가복음(22:19,20)에도 있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떡(빵)과 잔에 시차를 두지 않았고, “기념하라”는 말씀도 생략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과 가장 유사한 병행 구절이 있는 책은 누가복음입니다. 누가복음은 떡을 떼는 것과 잔을 붓는 것이 시간적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포도주는 떡을 모두 먹은 후에 제자들에게 부어주시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기념하라”는 말씀은 떡을 뗄 때에만 하신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만 “이와 같이 하여”라는 말씀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잔을 주시면서도 하신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성경을 보면 초대 교회의 성찬과 오늘 우리들이 행하는 성찬예식과는 다소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후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면서 음식을 나누어먹었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기도하였습니다(행 2:42-46). 매일 예배드린 것으로 보입니다. 예배드릴 때마다 떡을 떼고 잔을 들었습니다. 예배와 성찬만 있은 것이 아니라 공동 식사와 교제가 함께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도 비슷합니다. 그들은 저녁 일찍이 모였습니다. 공동 식사를 한 후에 예배를 드리고 성찬의 떡과 잔을 나누었습니다. 성도들의 공동 식사와 예배, 성찬은 동일한 장소에서 연이어 진행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공동 식사를 성찬 예식이 포함된 예배 후에 하거나 생략하기도 합니다. 어떤 교회는 주일마다, 어떤 교회는 매 월, 어떤 교회는 절기마다, 어떤 교회는 부활절과 성탄절에만 성찬 예식을 드립니다. 한국의 장로교 헌법은 “성찬을 종종 베푸는 것이 좋으나 1년에 몇 회를 거행하든지 각 교회 당회가 작정하되 덕을 세우기에 합당한 대로 정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세계의 개신교회가 받아들이는 신앙고백서가 있습니다. 1647년에 제정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입니다. 성찬에 관한 내용은 이렇습니다. 성찬은 예수님과의 교통임을 고백합니다. 성찬은 십자가 희생의 단순한 기념임을 고백합니다. 성찬은 성찬에 직접 참여하는 자에게만 미치는 것임을 고백합니다. 사적인 성례와 숭배를 금지합니다. 성찬의 떡과 포도주는 단지 상징적인 것이며, 떡과 포도주의 실체와 본질이 변화되는 것이 아님을 고백합니다. 성찬의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실체로 진짜로 바뀐다고 하는 교리(화체설)를 부정합니다. 성찬을 통한 영적 깨달음과 경건한 자세를 강조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시면서 분명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기념이란 기억(memory)과 회상(reminder)을 말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회상해야 하겠습니까? 무엇을 기념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의 알려지지 않은 얼굴입니까? 제자들과 더불어 나누시던 마지막 성만찬의 기막힌 장면입니까? 십자가의 처참한 광경입니까? 물론 모두 다 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도 기억하고, 베푸신 기적들도 기억하고, 최후의 만찬도 기억하고,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하신과 승천하심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역 전체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모든 것들을 성찬을 나눌 때마다 모두 기억해야 한다고 강요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기에는 우리는 아직 너무도 부족합니다. 우리의 머리와 가슴이 다 소화하기에는 너무 연약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떡과 포도주의 의미가 무언인지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먼저, 주님의 살과 떡에 관해서 살펴봅시다. 예수께서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시면서 “이것은 내 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우리가 성찬의 떡을 뗌으로 말미암아 화체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처럼 정말로 그것이 예수님의 몸으로 변화되는 신비한 떡(빵)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게 믿는다면 바람직하지 못한 신비주의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포도주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께서 성만찬의 떡과 주님의 몸을 관련시켜 말씀하신 것은 요한복음에 아주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비유로 자신을 소개하실 때 가장 먼저 하신 비유가 “내가 곧 생명의 떡”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물론 여기서 생명의 떡이라고 하신 것은 영적 양식을 말합니다. 양식, 곧 음식은 모든 살아 있는 존재에게 그 존재를 가능케 하는 에너지의 원천입니다. 살아 있는 생물은 사람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반드시 먹어야 살고 먹어야 성장합니다. 우리는 때로 필요에 의해 금식할 때도 있지만 금식은 곧 고통임을 깨닫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셔서 배고픔을 느끼지 못한다 할지라도 언제까지나 금식할 수는 없습니다. 금식 후의 관리는 더 중요합니다. 배고프다고 함부로 먹었다가는 죽을 수도 있습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사람은 육신뿐만 아니라 영(spirit)을 가진 존재입니다. 영도 육신처럼 듣고 보고 말하고 느낍니다. 우리는 영안이 열린다든지 영의 귀로 듣는다든지 영적으로 느낀다고 합니다. 나의 육신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말합니다. 영도 양식을 필요로 합니다. 육신이 먹지 않으면 죽듯이 영도 먹지 않으면 죽습니다. 육신이 먹지 않으면 육신이 죽습니다. 영이 먹지 않으면 영이 죽습니다. 그러므로 육신도 영도 먹어야 합니다.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산(living) 떡입니다.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셨던 떡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육신을 위한 떡이었습니다. 육신의 떡만 먹고 살면 영혼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떡이지만 육신을 위한 떡이 아니라 영혼을 위한 생명의 떡입니다. 이 떡을 먹으면 죽음을 넘어서서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살을 먹으라고 하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고 하십니다. “내 피는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많은 사람들이 오해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식인종이 아니냐고 말입니다. 영혼이 깨어나지 않으면 그렇게 생각됩니다. 그것을 나무랄 수는 없습니다. 안타까워할 뿐입니다.
예수께서는 사람을 살리는 것이 육신의 양식이 아니라 영의 양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영의 양식은 곧 ‘말씀’입니다. 살아 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영혼과 더불어 육신까지 살립니다. 영생에 이르도록 합니다. 이것이 신비입니다.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아무나 읽어서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쉬운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신비로 가득합니다. 성령이 아니시고는 깨달을 수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천국의 비밀, 천국에 이르는 비밀입니다. 예수님은 주로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비유는 쉬운 것 같지만 그 속에 비밀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복음을 쉽게 전하기 위해서 비유로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나 쉽게 알아들으라고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에게 예수께 그 까닭을 물었습니다. “주님, 어찌하여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들에게는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릇 있는 사람은 받아서 넉넉하게 되지만, 없는 사람은 그나마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느니라. 내가 저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까닭은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 그러시면서 저들이 깨닫지 못하는 이유가 완악한 마음 때문이라고 부연 설명을 하셨습니다(마 13:10-15).
저 사람들처럼 마음이 완악하면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주께서 내 살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라고 하신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심지어 분당의 어느 교회 목사님처럼 “예수님은 좌파다”라고 거침없이 외치는 일이 벌어집니다.
기독교의 모든 비밀은 말씀 속에 있습니다. 천국의 출발은 말씀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천지창조도 말씀으로부터 시작된 것처럼 말입니다. 이 말씀이 바로 생명을 살리는 양식이요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하는 양식입니다. 성찬의 떡에는 그런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예수님을 기념하는 것으로 성찬의 떡을 떼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기념으로만 생각한다면 참으로 큰 실수요 어리석음이 될 것입니다. 떡을 떼시면서 주님의 살을 생각하십시오. 성육신하신 로고스(말씀)를 생각하십시오. 변함없이 살아 계신 말씀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생각하십시오. 내 영혼을 자라게 하는 참된 양식임을 생각하십시오. 머리에 기억하지 말고 전 인격으로 먹으십시오. 그리고 에스겔이나 사도 요한처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꿀처럼 달다는 영적 감각을 느끼게 되시기 바랍니다.
이제, 주님의 피와 포도주에 관해서 살펴봅시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 마태복음에서는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성찬의 잔을 들면서 이것을 기억하고 회상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흘리신 피의 의미를 기억해야 합니다. 왜 흘리셨습니까?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 용서받게 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나의 죄, 여러분의 죄, 우리 모두의 죄 말입니다. 죄를 들먹이면 사람들은 언짢아합니다. 불편해 합니다. 그래도 마음이 편하다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내가 무슨 죄를 그리 지었다고…. ”, “내 앞에서는 그런 소리 하지 마시오. 참 불편합니다. ” 그러나 성경은 뭐라고 말씀합니까? 세상에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단언합니다. 좀 더 할까요?
“깨닫는 자도 없고 여호와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롬 3:11-18).
예수님의 피는 이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죄를 처리하는데 아주 탁월합니다. 죄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 밖에 없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 17:9),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이 예수를 여호와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 3:25),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롬 5:9),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엡 2:13),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히 10:19),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22), 누가 능히 여호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여호와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3,34). ”
여호와 하나님의 법칙대로라면, 죄를 지은 인간은 그 죄에서 해방되려면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모든 것이 끝장이니까 짐승이 대신 희생제물이 되어서 죽었습니다. 짐승의 피 제사가 온전치 못하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생명은 피에 있으므로 피를 흘려야 죄값을 치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그 피값을 치르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흘리신 피로 우리 자신을 날마다 정결케 해야 합니다. 날마다 말입니다.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성령과 피로써 거듭나니
이 세상에서 내 영혼이 하늘의 영광 누리로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나 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 (찬 204).
예수 십자가에 흘린 피로써 그대는 씻기어 있는가
더러운 죄 희게 하는 능력을 그대는 참 의지 하는가
예수의 보혈로 그대는 씻기어 있는가
마음속의 여러 가지 죄악이 깨끗이 씻기어 있는가 (찬 193).
먹보다도 더 검은 죄로 물든 이 마음
흰눈보다 더 희게 깨끗하게 씻겼네
주의 보혈 흐르는데 믿고 뛰어 나아가
주의 은혜 내가 입어 깨끗하게 되었네 (찬 213).
변챦는 주님의 사랑과 거룩한 보혈의 공로를
우리 다 찬양을 합시다 주님을 만나볼 때까지
예수는 우리를 깨끗케 하시는 주시니
그의 피 우리를 눈보다 더 희게 하셨네 (찬 214).
우리 모두 주님을 더욱 믿읍시다. 하늘의 생명 양식인 말씀을 날마다 먹읍시다. 그리스도 보혈의 피로써 날마다 깨끗케 합시다. 말씀과 보혈이 능력임을 믿고 전진해 나아갑시다.
오늘 본문에 해당하는 병행 구절은 마태복음(26:26-28), 마가복음(14:22-24), 누가복음(22:19,20)에도 있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떡(빵)과 잔에 시차를 두지 않았고, “기념하라”는 말씀도 생략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과 가장 유사한 병행 구절이 있는 책은 누가복음입니다. 누가복음은 떡을 떼는 것과 잔을 붓는 것이 시간적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포도주는 떡을 모두 먹은 후에 제자들에게 부어주시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기념하라”는 말씀은 떡을 뗄 때에만 하신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만 “이와 같이 하여”라는 말씀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잔을 주시면서도 하신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성경을 보면 초대 교회의 성찬과 오늘 우리들이 행하는 성찬예식과는 다소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후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면서 음식을 나누어먹었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기도하였습니다(행 2:42-46). 매일 예배드린 것으로 보입니다. 예배드릴 때마다 떡을 떼고 잔을 들었습니다. 예배와 성찬만 있은 것이 아니라 공동 식사와 교제가 함께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도 비슷합니다. 그들은 저녁 일찍이 모였습니다. 공동 식사를 한 후에 예배를 드리고 성찬의 떡과 잔을 나누었습니다. 성도들의 공동 식사와 예배, 성찬은 동일한 장소에서 연이어 진행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공동 식사를 성찬 예식이 포함된 예배 후에 하거나 생략하기도 합니다. 어떤 교회는 주일마다, 어떤 교회는 매 월, 어떤 교회는 절기마다, 어떤 교회는 부활절과 성탄절에만 성찬 예식을 드립니다. 한국의 장로교 헌법은 “성찬을 종종 베푸는 것이 좋으나 1년에 몇 회를 거행하든지 각 교회 당회가 작정하되 덕을 세우기에 합당한 대로 정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세계의 개신교회가 받아들이는 신앙고백서가 있습니다. 1647년에 제정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입니다. 성찬에 관한 내용은 이렇습니다. 성찬은 예수님과의 교통임을 고백합니다. 성찬은 십자가 희생의 단순한 기념임을 고백합니다. 성찬은 성찬에 직접 참여하는 자에게만 미치는 것임을 고백합니다. 사적인 성례와 숭배를 금지합니다. 성찬의 떡과 포도주는 단지 상징적인 것이며, 떡과 포도주의 실체와 본질이 변화되는 것이 아님을 고백합니다. 성찬의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실체로 진짜로 바뀐다고 하는 교리(화체설)를 부정합니다. 성찬을 통한 영적 깨달음과 경건한 자세를 강조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시면서 분명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기념이란 기억(memory)과 회상(reminder)을 말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회상해야 하겠습니까? 무엇을 기념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의 알려지지 않은 얼굴입니까? 제자들과 더불어 나누시던 마지막 성만찬의 기막힌 장면입니까? 십자가의 처참한 광경입니까? 물론 모두 다 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도 기억하고, 베푸신 기적들도 기억하고, 최후의 만찬도 기억하고,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하신과 승천하심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역 전체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모든 것들을 성찬을 나눌 때마다 모두 기억해야 한다고 강요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기에는 우리는 아직 너무도 부족합니다. 우리의 머리와 가슴이 다 소화하기에는 너무 연약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떡과 포도주의 의미가 무언인지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먼저, 주님의 살과 떡에 관해서 살펴봅시다. 예수께서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시면서 “이것은 내 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우리가 성찬의 떡을 뗌으로 말미암아 화체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처럼 정말로 그것이 예수님의 몸으로 변화되는 신비한 떡(빵)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게 믿는다면 바람직하지 못한 신비주의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포도주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께서 성만찬의 떡과 주님의 몸을 관련시켜 말씀하신 것은 요한복음에 아주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비유로 자신을 소개하실 때 가장 먼저 하신 비유가 “내가 곧 생명의 떡”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물론 여기서 생명의 떡이라고 하신 것은 영적 양식을 말합니다. 양식, 곧 음식은 모든 살아 있는 존재에게 그 존재를 가능케 하는 에너지의 원천입니다. 살아 있는 생물은 사람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반드시 먹어야 살고 먹어야 성장합니다. 우리는 때로 필요에 의해 금식할 때도 있지만 금식은 곧 고통임을 깨닫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셔서 배고픔을 느끼지 못한다 할지라도 언제까지나 금식할 수는 없습니다. 금식 후의 관리는 더 중요합니다. 배고프다고 함부로 먹었다가는 죽을 수도 있습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사람은 육신뿐만 아니라 영(spirit)을 가진 존재입니다. 영도 육신처럼 듣고 보고 말하고 느낍니다. 우리는 영안이 열린다든지 영의 귀로 듣는다든지 영적으로 느낀다고 합니다. 나의 육신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말합니다. 영도 양식을 필요로 합니다. 육신이 먹지 않으면 죽듯이 영도 먹지 않으면 죽습니다. 육신이 먹지 않으면 육신이 죽습니다. 영이 먹지 않으면 영이 죽습니다. 그러므로 육신도 영도 먹어야 합니다.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산(living) 떡입니다.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셨던 떡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육신을 위한 떡이었습니다. 육신의 떡만 먹고 살면 영혼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떡이지만 육신을 위한 떡이 아니라 영혼을 위한 생명의 떡입니다. 이 떡을 먹으면 죽음을 넘어서서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살을 먹으라고 하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고 하십니다. “내 피는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많은 사람들이 오해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식인종이 아니냐고 말입니다. 영혼이 깨어나지 않으면 그렇게 생각됩니다. 그것을 나무랄 수는 없습니다. 안타까워할 뿐입니다.
예수께서는 사람을 살리는 것이 육신의 양식이 아니라 영의 양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영의 양식은 곧 ‘말씀’입니다. 살아 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영혼과 더불어 육신까지 살립니다. 영생에 이르도록 합니다. 이것이 신비입니다.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아무나 읽어서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쉬운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신비로 가득합니다. 성령이 아니시고는 깨달을 수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천국의 비밀, 천국에 이르는 비밀입니다. 예수님은 주로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비유는 쉬운 것 같지만 그 속에 비밀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복음을 쉽게 전하기 위해서 비유로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나 쉽게 알아들으라고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에게 예수께 그 까닭을 물었습니다. “주님, 어찌하여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들에게는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릇 있는 사람은 받아서 넉넉하게 되지만, 없는 사람은 그나마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느니라. 내가 저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까닭은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 그러시면서 저들이 깨닫지 못하는 이유가 완악한 마음 때문이라고 부연 설명을 하셨습니다(마 13:10-15).
저 사람들처럼 마음이 완악하면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주께서 내 살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라고 하신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심지어 분당의 어느 교회 목사님처럼 “예수님은 좌파다”라고 거침없이 외치는 일이 벌어집니다.
기독교의 모든 비밀은 말씀 속에 있습니다. 천국의 출발은 말씀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천지창조도 말씀으로부터 시작된 것처럼 말입니다. 이 말씀이 바로 생명을 살리는 양식이요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하는 양식입니다. 성찬의 떡에는 그런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예수님을 기념하는 것으로 성찬의 떡을 떼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기념으로만 생각한다면 참으로 큰 실수요 어리석음이 될 것입니다. 떡을 떼시면서 주님의 살을 생각하십시오. 성육신하신 로고스(말씀)를 생각하십시오. 변함없이 살아 계신 말씀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생각하십시오. 내 영혼을 자라게 하는 참된 양식임을 생각하십시오. 머리에 기억하지 말고 전 인격으로 먹으십시오. 그리고 에스겔이나 사도 요한처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꿀처럼 달다는 영적 감각을 느끼게 되시기 바랍니다.
이제, 주님의 피와 포도주에 관해서 살펴봅시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 마태복음에서는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성찬의 잔을 들면서 이것을 기억하고 회상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흘리신 피의 의미를 기억해야 합니다. 왜 흘리셨습니까?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 용서받게 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나의 죄, 여러분의 죄, 우리 모두의 죄 말입니다. 죄를 들먹이면 사람들은 언짢아합니다. 불편해 합니다. 그래도 마음이 편하다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내가 무슨 죄를 그리 지었다고…. ”, “내 앞에서는 그런 소리 하지 마시오. 참 불편합니다. ” 그러나 성경은 뭐라고 말씀합니까? 세상에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단언합니다. 좀 더 할까요?
“깨닫는 자도 없고 여호와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롬 3:11-18).
예수님의 피는 이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죄를 처리하는데 아주 탁월합니다. 죄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 밖에 없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 17:9),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이 예수를 여호와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 3:25),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롬 5:9),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엡 2:13),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히 10:19),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22), 누가 능히 여호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여호와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3,34). ”
여호와 하나님의 법칙대로라면, 죄를 지은 인간은 그 죄에서 해방되려면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모든 것이 끝장이니까 짐승이 대신 희생제물이 되어서 죽었습니다. 짐승의 피 제사가 온전치 못하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생명은 피에 있으므로 피를 흘려야 죄값을 치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그 피값을 치르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흘리신 피로 우리 자신을 날마다 정결케 해야 합니다. 날마다 말입니다.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성령과 피로써 거듭나니
이 세상에서 내 영혼이 하늘의 영광 누리로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나 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 (찬 204).
예수 십자가에 흘린 피로써 그대는 씻기어 있는가
더러운 죄 희게 하는 능력을 그대는 참 의지 하는가
예수의 보혈로 그대는 씻기어 있는가
마음속의 여러 가지 죄악이 깨끗이 씻기어 있는가 (찬 193).
먹보다도 더 검은 죄로 물든 이 마음
흰눈보다 더 희게 깨끗하게 씻겼네
주의 보혈 흐르는데 믿고 뛰어 나아가
주의 은혜 내가 입어 깨끗하게 되었네 (찬 213).
변챦는 주님의 사랑과 거룩한 보혈의 공로를
우리 다 찬양을 합시다 주님을 만나볼 때까지
예수는 우리를 깨끗케 하시는 주시니
그의 피 우리를 눈보다 더 희게 하셨네 (찬 214).
우리 모두 주님을 더욱 믿읍시다. 하늘의 생명 양식인 말씀을 날마다 먹읍시다. 그리스도 보혈의 피로써 날마다 깨끗케 합시다. 말씀과 보혈이 능력임을 믿고 전진해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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