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 베들레헴이 주는 교훈
본문
성탄이 다가오면 늘 주목받는 한 동네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태어나신 유대 땅 베들레헴입니다. 당시 스불론에도 같은 이름의 성읍이 있어 '유대 베들레헴'이라고 불리웠던 이 마을은 예루살렘에서 약 10Km 정도, 그러니까 구미에서 선산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는 자그마한 마을이었습니다.
'베들레헴' 하면 여러분은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우리가 베들레헴이란 동리가 이 지구상 어드매쯤 있는지도 확실히 모르고 또 가본 적도 없지만 왠지 베들레헴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낮설지 않은 마을입니다. 먼저 그곳은 야곱의 영원한 연인이었던 라헬의 무덤이 있는 곳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베냐민을 낳다 산고 끝에 숨져간 라헬을 야곱은 이 베들레헴에 장사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조상인 야곱에게 이 베들레헴은 각별한 장소가 되었을 것이고 그 자손들에게도 이곳은 결코 평범하지 않은 장소가 되었을 것입니다. 가장 사랑했던 여인이 잠든 그곳을 야곱과 그 후손들이 어찌 잊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베들레헴하면 떠오르는 것이 바로 룻이라는 여인입니다. 이례적으로 메시야 반열에 오른 이방 여인 룻과 보아스의 애틋한 연정 그리고 그 시어머니 나오미와의 푸근한 고부간의 정겨움이 서려있는 곳이 바로 유대 땅 베들레헴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이것과 연계해서 중요한 사실은 베들레헴이 바로 메시야 가문을 상징하는 다윗의 고향이라는 것입니다. 룻이 낳은 아들 오벳이 이새를 낳았고 이새가 다윗을 낳아 결국은 베들레헴은 다윗의 고향이 되었고 그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에서 다윗의 자손인 메시야가 태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베들레헴은 이렇게 다윗 자손인 아기 예수가 태어난 곳이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잊혀질 수 없는 기억의 자리가 된 것입니다.
'메시야가 베들레헴이라는 이 동리에서 태어날 것'이라는 것은 일찍이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되어진 것이었습니다. 오늘 마태가 인용하는 이 말씀은 미가서 5:2절의 말씀으로 일찍이 베들레헴은 메시야가 태어날 땅으로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되어져온 곳입니다. 동방박사들로부터 '유대인의 왕을 경배하러 왔다'는 전갈을 전해들은 헤롯이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모아 놓고 물을 때 저들이 한 말은 바로 미가 선지를 통해 예언된 그 말씀이었습니다.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저들의 미가 선지의 예언을 인용함으로서 베들레헴이 장차 이스라엘을 다스릴 메시야가 태어날 곳임을 증거했던 것입니다.
사실 어떤 지역이나 공간이 그 자체로서 의미를 갖는 경우는 드뭅니다. 대부분 어떠한 인물을 배출했느냐에 따라 그 마을의 위상이 달라지는 것을 우리는 보고 또 경험합니다. 우리가 몸담고 사는 이 구미만 해도 그렇습니다. 구미라는 동리가 각광받은 것은 바로 이곳에서 한 시대를 풍미한 대통령이 배출되었기 때문입니다. 3-40년 전만 해도 이 땅은 황무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읍소재지인 선산의 변방으로서 수풀이 우거지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그런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대통령이 배출되자 60년대 이후 구미는 달라지기 시작했고 급기야 한국에서 손꼽히는 공업단지로 부상하게 된 것입니다.
한 인물의 배출이 이 도시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이제 구미는 옛날의 구미가 아닙니다. 한 인물의 부각과 함께 이 동리도 부각되어 새로운 동리로 발돋움하게 된 것입니다. 베들레헴이 바로 그런 동리였습니다. 베들레헴은 메시야를 품고 있었고 또 메시야를 탄생시킨 땅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까지도 기억되는 명소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베들레헴 동리 자체로만 볼 때는 정말 보잘 것 없는 변방에 불과한 그런 땅이었습니다. 무덤으로나 쓰이던 땅이었고, 흉년이 들어 황폐화되어 그곳을 떠나야만했던 폐허의 땅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사울의 위협 속에서 급작스레 기름부음을 받고 도망쳐야 했던 땅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베들레헴은 옛부터 작은 마을, 보잘 것 없는 마을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미가 선지는 그러한 과거의 인식들을 불식시키면서 '유대 땅 베들레헴은 결코 작지 아니한 동리'라고 선언하며 그 이유로 바로 거기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스라엘의 목자, 곧 메시야가 태어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사실 헤롯 시대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메시야 출생과 관련해 인용하는 미가서 5:2절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 가장 작은 고을 베들레헴에서 가장 크고 위대한 인물이 태어난다는 예언으로 우리 속담으로 하면 '개천에서 용이 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베들레헴에서 메시야가 태어났습니다. 메시야는 예루살렘도 아니고 벧엘도 아니고 세겜도 아니고 브엘세바도 아닌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습니다. 메시야가 태어난 베들레헴은 '떡집' 또는 '음식점'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동리입니다. 사람들에게 영원한 양식을 주는 도시로서 부족함이 없는 이름입니다.
그런데 이 베들레헴이 '에브라다'라는 이름과 함께 언급되고 있습니다. '열매가 많다'라는 뜻인 이 '에브라다'는 한편으론 베들레헴이 속해 있던 지역의 이름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경북 구미'라는 말과 같겠습니다. 그리고 범위를 더욱 좁히면 '에브라다'라는 말은 '베들레헴에 정착한 에브랏 집안 사람들이 사는 곳을 가리킨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가 지명이면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여러 성읍 중에 작을지라도'라고 해야겠는데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라고 한 것이 그 증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느 해석을 따르든지 간에 '베들레헴 에브라다'는 약한 존재, 작은 존재, 보잘 것 없는 존재, 주목받지 못하는 존재를 가리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베들레헴은 큰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 여리고, 세겜, 벧엘, 브엘세바 등 당대의 내노라 하는 도시들과는 비교조차 안되는 아주 작고 초라한 촌락이었습니다. 그래서 '작다'는 것이 강조되고 있는 것입니다. 유다 지역에서도 베들레헴은 아주 작은 마을이었고 에브랏 가문 또한 보잘 것 없는 집안이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에브랏 사람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룻의 시어머니인 나오미 가족들입니다. 룻1:1-2절을 보면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흉년에 시달려 이민을 떠나고 객지에서 너무 격무에 시달려 과로한 나머지 남편과 두 아들, 남정네 모두를 잃고 홀로 된 기가 막힌 처지의 나오미, 그녀가 바로 우리에게 남아있는 에브랏 사람의 인상입니다. 그러므로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라는 말은 약한 존재, 작은 존재, 보잘 것 없는 존재, 비천한 존재를 강조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베들레헴은 결코 작지 않다는 겁니다. 아니 오히려 무지 큰 도시라고 미가는 선언합니다. 땅이 커서가 아니라 바로 그 땅에서 일어난 특별한 사건 때문입니다. 베들레헴은 기독교가 시작된 자리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마리아를 통해 메시야를 잉태케 하시고 바로 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게 하심으로 그곳을 기독교의 발원지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베들레헴은 결코 작지 않은 겁니다. 세계보다 크시고 우주보다 크신 분이 나오신 동리를 어찌 작다 하겠습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크다 하고 무엇을 작다 하십니까 무엇을 기준으로 크고 작은 것을 구별하십니까 물량 수량 사이즈... 크고 작은 것은 결코 그런 것으로 가늠되는 게 아닙니다. 키 작은 사람이 거인일 수도 있고 키 큰 사람이 소인일 수도 있습니다. 크고 작은 것은 외형도 아니고, 소유도 아니고, 수치도 아닙니다. 바로 무엇을 담고 있느냐가, 무엇을 드러내느냐가 중요한 겁니다.
여러분은 스스로를 어떻게 여기시며 사시는지요 혹 작게 여기시지는 않습니까 그렇지요. 우리 자신들은 작았습니다. 보잘 것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주 안에서는 결코 우리 자신을 작게 여겨서는 안됩니다. 그건 불신앙입니다. 이게 바로 베들레헴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무지 무지 큰 사람이 된 것입니다. 내 속에 계신 주님으로 인해 우리는 거인이 된 겁니다. 이게 바로 신앙인이 세워가야할 자기 정체성입니다. '아무개야, 너는 이 시대의 사람들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너는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의 도구로 쓰임받을 수 있는 자이니라... ' 베들레헴은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스스로를 업수히 여기거나 축소시켜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결코 작지 않습니다. 결코 시시하지 않습니다. 질그릇 같은 우리지만 그 속에 보물이 담겨 있습니다. 보물을 갖고 있으면서도 가난하다 여기십니까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 실존이 바뀌었습니다. 이게 바로 베들레헴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사실입니다. 작은 마을 베들레헴은 작은 우리, 보잘 것 없는 우리에게 자긍심을 고취시킵니다. 결코 작지 않다고, 그리스도로 인하여 이제 우리는 결코 보잘 것 없는 존재가 아니라고... 성탄이 무엇입니까 성탄은 가장 작은 것이 가장 크고, 가장 보잘 것 없는 것이 가장 소중한 것임을 일깨워준 각성의 사건이었습니다.
저는 새천년의 원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이 말씀이 이렇게 읽혀집니다. '구미 땅에 있는 영락교회야, 너는 이 시대의 교회들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너희는 새 시대 새 역사를 열어 가는 교회가 되리라, 21세기 한국교회의 새로운 모델이 될 것이다... ' 이 구절 속에서, 이 베들레헴의 속삭임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꿈과 비전을 봅니다.
물론 하루 아침에 될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미5:3절에 보면 이 약속에 뒤이어 이런 말씀이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여인이 해산하기까지 그들을 붙여 두시겠고... ' 메시아가 탄생하기까지는 시간이 더 흘러야 한다는 겁니다. 여인이 출산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시간이 필요하듯이 그러한 성숙의 기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저가 이삭을 얻기 위해 오랜 세월을 기다리고 인내하며 많은 갈등과 시련을 겪지 않습니까 좀 더 기다렸어야 할 터인데 그만 서두느라고 이방여인 하갈을 통해 서자 이스마엘을 얻지 않습니까 이스마엘은 아랍의 조상입니다. 좀 더 참고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의한 해산을 기다리지 않은 결과가 수천 년에 걸친 아랍과 이스라엘의 분쟁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의한 해산 시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이게 신앙인의 지혜입니다. 저는 올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이 한해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은총은 교회 부지 4만평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서 감사한 게 있습니다. 그 동안 하마평에 올랐던 여러 교회 부지들을 구입하지 않은 것을 감사했습니다. 이런 저런 후보지와 건물들이 나왔었지만 이상하게 딜레이가 되고 구입이 막혔습니다. 만약 그때 조급히 생각해서 덥썩 구입했더라면 아마 후회가 많이 되리라고 생각됩니다. 오늘도 선산엘 다녀오면서 전에 부지로 거론되던 지산의 길가 땅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의 부지와 비교해 볼 때 상대가 되지 않는 땅들이었습니다.
목회생활 20년 동안에 터득한 게 있다면 그건 '비우고 기다려야 한다'는 겁니다. 그게 가장 지혜로운 것이라는 걸 목회 경험을 통해서 깨달았습니다. 결국 목회는 여호와 하나님이 하시는 겁니다. 이루시고 완성하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어느 목사님이 설교 제목을 이렇게 달았습니다. '기다리면 이삭, 서두르면 이스마엘!'... 그렇습니다. 여러분, 서두르다가 이스마엘을 낳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의한 해산의 시기에 이삭을 낳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러면 인내할 줄 알아야 합니다. 진통을 참고 이겨내야 합니다. 진통을 이기지 못하면 옥동자를 낳을 수 없습니다. 그 진통은 창조적 고통입니다. 다른 고통에는 진통제를 사용합니다만 진통에는 진통제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걸 그냥 온몸으로 감당해내야 합니다.
이제 우리 교회는 아름다운 열매를 위해서 얼마간 창조적 진통에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인내하고 협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진통이 얼마가지 않아 환희와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산모에게 진통이 올 때 의사가 하는 말이 있습니다. '힘 주세요, 이제 다 됐어요. 조금만 더 힘주세요. 조금만 더... ' 그리고 나서 '으앙'하는 기운 찬 생명의 소리를 듣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참으로 약합니다. 보잘 것 없습니다. 우리 자신들을 보면 아무 것도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약하지 않습니다. 미미하지 않습니다. 무능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우리 속에 계시면 우리는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베들레헴처럼 오고 오는 세대에 기억되는 제단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4절에 보면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 끝까지 미치리라'고 공포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영적으로 창대하여 땅끝까지 영향을 미치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새시대에 걸맞는 교회로서 지역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교회가 되어야겠습니다. 복음을 증거하고 풍성한 삶을 증거하는 교회가 되어야겠습니다. 진정한 쉼을 맛조는 안식의 터전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위생적이고 영양많은 생명의 양식을 공급하는 영적 떡집이 되어야겠습니다. 미5:5절 첫 부분에 보면 '이 사람은 평강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인 우리 영락교회가 이 시대에 그리고 이 지역사람들에게 평강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개인적으로 이 말씀을 이렇게도 읽습니다. '근호야, 너는 여러 종들 가운데 작고 보잘 것 없는 존재같을지라도 그렇지 않느니라. 너는 결코 작지 아니하노라. 내가 네 속에서 너를 존귀하게 하고 너를 귀하게 사용하리라... ' 이건 여러분을 향한 베들레헴의 속삭임이기도 합니다. '아무개야, 너는 여러 사람 가운데 결코 작고 보잘 것 없는 존재가 아니니라. 내가 네 속에서 너를 존귀하게 하고 너를 귀하게 사용하리라... ' 얼마나 감격스런 주님의 말씀입니까
사람이 그렇지 않습니까 다 스스로의 한계와 약점과 부족함을 느끼고 사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내가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 내가 얼마나 무능한 존재인지, 내가 얼마나 형편없는 존재인지... ' 그래서 좌절하고 주저앉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우리를 격려해 주십니다. '작다고 작지 아니하니라. 무능하다고 무능하지 아니하니라.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형편없다고 그래서 자학한다고 아니라, 존귀한 존재가 되었으니 너 자신을 귀히 여기며 살거라... '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나는 작고 보잘 것 없는 존재다', 이런 비감한 생각을 갖고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건 주님이 주시는 생각이 아니라 사탄이 우리를 실족케 하려고 슬며시 우리 속에 가라지를 뿌려 넣는 겁니다. 한마디로 '초를 치는' 겁니다. 이 맛을 톡톡히 본 경험이 있는 사도 베드로는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으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고 근신하고 깨어 있으라'고 권면합니다. 그게 바로 우리로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다움을 포기케 하려는 사탄의 술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는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 따라 지음 받은 소중한 존재'라는 자긍심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이게 바로 베들레헴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다른 사람들보다 못 생기고, 재주도 없고, 돈도 없고, 많이 배우지 못했는데... ' 이런 생각이 드십니까 '나, 우리 부모, 우리 집안, 내 모교, 내 직장, 내 조국... 뭐 하나 내세울 게 없는데... ' 이런 생각이 드십니까 그때는 성령충만하지 못한 자신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거듭 말하거니와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이러한 비교 의식은 사탄이 주는 생각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바로 이 사탄이 불어넣은 비교의식에 말려 실패한 거 아닙니까 '이것 먹으면 여호와 하나님과 같아질거야... ' 거기에 넘어간 것 아닙니까 사람이 거듭나지 못하면 늘 이 비교의식 속에서 자격지심과 교만지심이라는 양 널을 뛰면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은 작은 고을 베들레헴을 들어 쓰시는 분이십니다. 형 이스마엘보다 동생 이삭을, 형 에서보다 동생 야곱을, 형 루우벤보다 동생 요셉을 들어쓰신 분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말째'인 다윗을 들어 이스라엘의 성군으로 삼으셨습니다. 키작은 삭개오, 가방줄이 짧은 베드로, 약골 중의 약골 바울을 들어 귀하게 사용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베들레헴 에브라다 같이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들을 통해 당신의 위대함과 능력많으심을 드러내는 분이신 것입니다.
오늘 2002년도에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길 새일꾼들을 임명했습니다. 참으로 쉽지않은 일이었습니다. 이맘 때가 되면 당회원들이 여러 차례 모여 기도하고 숙의하며 고심 끝에 결정합니다. 그저 바라는 것은 이 부르심 앞에 그 어떤 자격지심도 또 교만지심도 갖지 마시고 베들레헴에서 메시야를 낳았던 마리아처럼 순종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의 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사이다', 이런 전적 수용과 전적 위탁의 믿음으로 응답하시기 바랍니다.
작아서 못한다면 주님이 크게 해 주실 것입니다. 없어서 못한다면 주님이 있게 해 주실 것입니다. 약해서 못한다면 주님이 강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역사는 언제나 그렇게 일어났습니다. 작다고, 없다고, 약하다고 발뺌하던 모세를 여호와 하나님은 끝까지 붙잡아 이스라엘의 해방을 이루어 가지시 않습니까 내가 작다고 느껴지십니까 초라한 존재라고 느껴지십니까 메시아이신 주님께서 바로 나에게 다가 오십니다. 아니 내 속에 이미 들어와 계십니다. 마리아처럼 믿음으로 당신을 낳아주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오시겠다고 하실 때 당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베들레헴의 한 여관 주인처럼 '다른 곳으로 가 보세요'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내 속에 당신 모실 자리가 없습니다', 돌려보내서도 안됩니다. 맞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기꺼이 환대하시고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보잘 것 없는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서, 스스로 비천하다고 여겼던 마리아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의 위대한 일이 일어난 것이 바로 성탄입니다.
예루살렘 곁에 있던 베들레헴, 얼마나 왜소하고 초라했겠습니까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크고 화려한 예루살렘이 아니라 작고 초라한 베들레헴을 찾아와 이렇게 속삭이십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고을 중에 네가 가장 작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라, 너는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너는 그 어느 고을보다도, 저 예루살렘보다도 더 귀하게 쓰임받으리라... '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런 이 시대의 베들레헴이 되십시다. 우리 교회가 이런 이 시대의 베들레헴이 되십시다. 여호와 하나님은 베들레헴의 가장 연약하고 보잘 것 없던 여인 나오미와 그 며느리 이방 여인 룻을 통해 메시야의 계보를 이어가시지 않았습니까 중요한 건 믿음입니다. 마리아와 같은 믿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영락제단과 이곳에 속한 우리들을 통해서 메시야의 역사가 계승되어갈 것입니다. 이 시대에 생명의 양식을 공급하는 진정한 말씀의 제단이 되어갈 것입니다.
비록 보잘 것 없고 연약한 우리지만 바로 여러분과 저가 이 시대의 베들레헴이 되라고 옛 도성 베들레헴은 우리에게 요청합니다. 베들레헴은 바로 우리들인 것입니다.
'베들레헴' 하면 여러분은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우리가 베들레헴이란 동리가 이 지구상 어드매쯤 있는지도 확실히 모르고 또 가본 적도 없지만 왠지 베들레헴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낮설지 않은 마을입니다. 먼저 그곳은 야곱의 영원한 연인이었던 라헬의 무덤이 있는 곳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베냐민을 낳다 산고 끝에 숨져간 라헬을 야곱은 이 베들레헴에 장사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조상인 야곱에게 이 베들레헴은 각별한 장소가 되었을 것이고 그 자손들에게도 이곳은 결코 평범하지 않은 장소가 되었을 것입니다. 가장 사랑했던 여인이 잠든 그곳을 야곱과 그 후손들이 어찌 잊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베들레헴하면 떠오르는 것이 바로 룻이라는 여인입니다. 이례적으로 메시야 반열에 오른 이방 여인 룻과 보아스의 애틋한 연정 그리고 그 시어머니 나오미와의 푸근한 고부간의 정겨움이 서려있는 곳이 바로 유대 땅 베들레헴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이것과 연계해서 중요한 사실은 베들레헴이 바로 메시야 가문을 상징하는 다윗의 고향이라는 것입니다. 룻이 낳은 아들 오벳이 이새를 낳았고 이새가 다윗을 낳아 결국은 베들레헴은 다윗의 고향이 되었고 그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에서 다윗의 자손인 메시야가 태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베들레헴은 이렇게 다윗 자손인 아기 예수가 태어난 곳이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잊혀질 수 없는 기억의 자리가 된 것입니다.
'메시야가 베들레헴이라는 이 동리에서 태어날 것'이라는 것은 일찍이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되어진 것이었습니다. 오늘 마태가 인용하는 이 말씀은 미가서 5:2절의 말씀으로 일찍이 베들레헴은 메시야가 태어날 땅으로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되어져온 곳입니다. 동방박사들로부터 '유대인의 왕을 경배하러 왔다'는 전갈을 전해들은 헤롯이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모아 놓고 물을 때 저들이 한 말은 바로 미가 선지를 통해 예언된 그 말씀이었습니다.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저들의 미가 선지의 예언을 인용함으로서 베들레헴이 장차 이스라엘을 다스릴 메시야가 태어날 곳임을 증거했던 것입니다.
사실 어떤 지역이나 공간이 그 자체로서 의미를 갖는 경우는 드뭅니다. 대부분 어떠한 인물을 배출했느냐에 따라 그 마을의 위상이 달라지는 것을 우리는 보고 또 경험합니다. 우리가 몸담고 사는 이 구미만 해도 그렇습니다. 구미라는 동리가 각광받은 것은 바로 이곳에서 한 시대를 풍미한 대통령이 배출되었기 때문입니다. 3-40년 전만 해도 이 땅은 황무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읍소재지인 선산의 변방으로서 수풀이 우거지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그런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대통령이 배출되자 60년대 이후 구미는 달라지기 시작했고 급기야 한국에서 손꼽히는 공업단지로 부상하게 된 것입니다.
한 인물의 배출이 이 도시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이제 구미는 옛날의 구미가 아닙니다. 한 인물의 부각과 함께 이 동리도 부각되어 새로운 동리로 발돋움하게 된 것입니다. 베들레헴이 바로 그런 동리였습니다. 베들레헴은 메시야를 품고 있었고 또 메시야를 탄생시킨 땅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까지도 기억되는 명소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베들레헴 동리 자체로만 볼 때는 정말 보잘 것 없는 변방에 불과한 그런 땅이었습니다. 무덤으로나 쓰이던 땅이었고, 흉년이 들어 황폐화되어 그곳을 떠나야만했던 폐허의 땅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사울의 위협 속에서 급작스레 기름부음을 받고 도망쳐야 했던 땅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베들레헴은 옛부터 작은 마을, 보잘 것 없는 마을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미가 선지는 그러한 과거의 인식들을 불식시키면서 '유대 땅 베들레헴은 결코 작지 아니한 동리'라고 선언하며 그 이유로 바로 거기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스라엘의 목자, 곧 메시야가 태어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사실 헤롯 시대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메시야 출생과 관련해 인용하는 미가서 5:2절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 가장 작은 고을 베들레헴에서 가장 크고 위대한 인물이 태어난다는 예언으로 우리 속담으로 하면 '개천에서 용이 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베들레헴에서 메시야가 태어났습니다. 메시야는 예루살렘도 아니고 벧엘도 아니고 세겜도 아니고 브엘세바도 아닌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습니다. 메시야가 태어난 베들레헴은 '떡집' 또는 '음식점'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동리입니다. 사람들에게 영원한 양식을 주는 도시로서 부족함이 없는 이름입니다.
그런데 이 베들레헴이 '에브라다'라는 이름과 함께 언급되고 있습니다. '열매가 많다'라는 뜻인 이 '에브라다'는 한편으론 베들레헴이 속해 있던 지역의 이름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경북 구미'라는 말과 같겠습니다. 그리고 범위를 더욱 좁히면 '에브라다'라는 말은 '베들레헴에 정착한 에브랏 집안 사람들이 사는 곳을 가리킨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가 지명이면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여러 성읍 중에 작을지라도'라고 해야겠는데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라고 한 것이 그 증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느 해석을 따르든지 간에 '베들레헴 에브라다'는 약한 존재, 작은 존재, 보잘 것 없는 존재, 주목받지 못하는 존재를 가리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베들레헴은 큰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 여리고, 세겜, 벧엘, 브엘세바 등 당대의 내노라 하는 도시들과는 비교조차 안되는 아주 작고 초라한 촌락이었습니다. 그래서 '작다'는 것이 강조되고 있는 것입니다. 유다 지역에서도 베들레헴은 아주 작은 마을이었고 에브랏 가문 또한 보잘 것 없는 집안이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에브랏 사람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룻의 시어머니인 나오미 가족들입니다. 룻1:1-2절을 보면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흉년에 시달려 이민을 떠나고 객지에서 너무 격무에 시달려 과로한 나머지 남편과 두 아들, 남정네 모두를 잃고 홀로 된 기가 막힌 처지의 나오미, 그녀가 바로 우리에게 남아있는 에브랏 사람의 인상입니다. 그러므로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라는 말은 약한 존재, 작은 존재, 보잘 것 없는 존재, 비천한 존재를 강조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베들레헴은 결코 작지 않다는 겁니다. 아니 오히려 무지 큰 도시라고 미가는 선언합니다. 땅이 커서가 아니라 바로 그 땅에서 일어난 특별한 사건 때문입니다. 베들레헴은 기독교가 시작된 자리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마리아를 통해 메시야를 잉태케 하시고 바로 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게 하심으로 그곳을 기독교의 발원지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베들레헴은 결코 작지 않은 겁니다. 세계보다 크시고 우주보다 크신 분이 나오신 동리를 어찌 작다 하겠습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크다 하고 무엇을 작다 하십니까 무엇을 기준으로 크고 작은 것을 구별하십니까 물량 수량 사이즈... 크고 작은 것은 결코 그런 것으로 가늠되는 게 아닙니다. 키 작은 사람이 거인일 수도 있고 키 큰 사람이 소인일 수도 있습니다. 크고 작은 것은 외형도 아니고, 소유도 아니고, 수치도 아닙니다. 바로 무엇을 담고 있느냐가, 무엇을 드러내느냐가 중요한 겁니다.
여러분은 스스로를 어떻게 여기시며 사시는지요 혹 작게 여기시지는 않습니까 그렇지요. 우리 자신들은 작았습니다. 보잘 것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주 안에서는 결코 우리 자신을 작게 여겨서는 안됩니다. 그건 불신앙입니다. 이게 바로 베들레헴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무지 무지 큰 사람이 된 것입니다. 내 속에 계신 주님으로 인해 우리는 거인이 된 겁니다. 이게 바로 신앙인이 세워가야할 자기 정체성입니다. '아무개야, 너는 이 시대의 사람들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너는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의 도구로 쓰임받을 수 있는 자이니라... ' 베들레헴은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스스로를 업수히 여기거나 축소시켜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결코 작지 않습니다. 결코 시시하지 않습니다. 질그릇 같은 우리지만 그 속에 보물이 담겨 있습니다. 보물을 갖고 있으면서도 가난하다 여기십니까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 실존이 바뀌었습니다. 이게 바로 베들레헴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사실입니다. 작은 마을 베들레헴은 작은 우리, 보잘 것 없는 우리에게 자긍심을 고취시킵니다. 결코 작지 않다고, 그리스도로 인하여 이제 우리는 결코 보잘 것 없는 존재가 아니라고... 성탄이 무엇입니까 성탄은 가장 작은 것이 가장 크고, 가장 보잘 것 없는 것이 가장 소중한 것임을 일깨워준 각성의 사건이었습니다.
저는 새천년의 원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이 말씀이 이렇게 읽혀집니다. '구미 땅에 있는 영락교회야, 너는 이 시대의 교회들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너희는 새 시대 새 역사를 열어 가는 교회가 되리라, 21세기 한국교회의 새로운 모델이 될 것이다... ' 이 구절 속에서, 이 베들레헴의 속삭임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꿈과 비전을 봅니다.
물론 하루 아침에 될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미5:3절에 보면 이 약속에 뒤이어 이런 말씀이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여인이 해산하기까지 그들을 붙여 두시겠고... ' 메시아가 탄생하기까지는 시간이 더 흘러야 한다는 겁니다. 여인이 출산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시간이 필요하듯이 그러한 성숙의 기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저가 이삭을 얻기 위해 오랜 세월을 기다리고 인내하며 많은 갈등과 시련을 겪지 않습니까 좀 더 기다렸어야 할 터인데 그만 서두느라고 이방여인 하갈을 통해 서자 이스마엘을 얻지 않습니까 이스마엘은 아랍의 조상입니다. 좀 더 참고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의한 해산을 기다리지 않은 결과가 수천 년에 걸친 아랍과 이스라엘의 분쟁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의한 해산 시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이게 신앙인의 지혜입니다. 저는 올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이 한해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은총은 교회 부지 4만평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서 감사한 게 있습니다. 그 동안 하마평에 올랐던 여러 교회 부지들을 구입하지 않은 것을 감사했습니다. 이런 저런 후보지와 건물들이 나왔었지만 이상하게 딜레이가 되고 구입이 막혔습니다. 만약 그때 조급히 생각해서 덥썩 구입했더라면 아마 후회가 많이 되리라고 생각됩니다. 오늘도 선산엘 다녀오면서 전에 부지로 거론되던 지산의 길가 땅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의 부지와 비교해 볼 때 상대가 되지 않는 땅들이었습니다.
목회생활 20년 동안에 터득한 게 있다면 그건 '비우고 기다려야 한다'는 겁니다. 그게 가장 지혜로운 것이라는 걸 목회 경험을 통해서 깨달았습니다. 결국 목회는 여호와 하나님이 하시는 겁니다. 이루시고 완성하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어느 목사님이 설교 제목을 이렇게 달았습니다. '기다리면 이삭, 서두르면 이스마엘!'... 그렇습니다. 여러분, 서두르다가 이스마엘을 낳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의한 해산의 시기에 이삭을 낳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러면 인내할 줄 알아야 합니다. 진통을 참고 이겨내야 합니다. 진통을 이기지 못하면 옥동자를 낳을 수 없습니다. 그 진통은 창조적 고통입니다. 다른 고통에는 진통제를 사용합니다만 진통에는 진통제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걸 그냥 온몸으로 감당해내야 합니다.
이제 우리 교회는 아름다운 열매를 위해서 얼마간 창조적 진통에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인내하고 협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진통이 얼마가지 않아 환희와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산모에게 진통이 올 때 의사가 하는 말이 있습니다. '힘 주세요, 이제 다 됐어요. 조금만 더 힘주세요. 조금만 더... ' 그리고 나서 '으앙'하는 기운 찬 생명의 소리를 듣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참으로 약합니다. 보잘 것 없습니다. 우리 자신들을 보면 아무 것도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약하지 않습니다. 미미하지 않습니다. 무능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우리 속에 계시면 우리는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베들레헴처럼 오고 오는 세대에 기억되는 제단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4절에 보면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 끝까지 미치리라'고 공포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영적으로 창대하여 땅끝까지 영향을 미치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새시대에 걸맞는 교회로서 지역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교회가 되어야겠습니다. 복음을 증거하고 풍성한 삶을 증거하는 교회가 되어야겠습니다. 진정한 쉼을 맛조는 안식의 터전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위생적이고 영양많은 생명의 양식을 공급하는 영적 떡집이 되어야겠습니다. 미5:5절 첫 부분에 보면 '이 사람은 평강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인 우리 영락교회가 이 시대에 그리고 이 지역사람들에게 평강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개인적으로 이 말씀을 이렇게도 읽습니다. '근호야, 너는 여러 종들 가운데 작고 보잘 것 없는 존재같을지라도 그렇지 않느니라. 너는 결코 작지 아니하노라. 내가 네 속에서 너를 존귀하게 하고 너를 귀하게 사용하리라... ' 이건 여러분을 향한 베들레헴의 속삭임이기도 합니다. '아무개야, 너는 여러 사람 가운데 결코 작고 보잘 것 없는 존재가 아니니라. 내가 네 속에서 너를 존귀하게 하고 너를 귀하게 사용하리라... ' 얼마나 감격스런 주님의 말씀입니까
사람이 그렇지 않습니까 다 스스로의 한계와 약점과 부족함을 느끼고 사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내가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 내가 얼마나 무능한 존재인지, 내가 얼마나 형편없는 존재인지... ' 그래서 좌절하고 주저앉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우리를 격려해 주십니다. '작다고 작지 아니하니라. 무능하다고 무능하지 아니하니라.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형편없다고 그래서 자학한다고 아니라, 존귀한 존재가 되었으니 너 자신을 귀히 여기며 살거라... '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나는 작고 보잘 것 없는 존재다', 이런 비감한 생각을 갖고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건 주님이 주시는 생각이 아니라 사탄이 우리를 실족케 하려고 슬며시 우리 속에 가라지를 뿌려 넣는 겁니다. 한마디로 '초를 치는' 겁니다. 이 맛을 톡톡히 본 경험이 있는 사도 베드로는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으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고 근신하고 깨어 있으라'고 권면합니다. 그게 바로 우리로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다움을 포기케 하려는 사탄의 술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는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 따라 지음 받은 소중한 존재'라는 자긍심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이게 바로 베들레헴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다른 사람들보다 못 생기고, 재주도 없고, 돈도 없고, 많이 배우지 못했는데... ' 이런 생각이 드십니까 '나, 우리 부모, 우리 집안, 내 모교, 내 직장, 내 조국... 뭐 하나 내세울 게 없는데... ' 이런 생각이 드십니까 그때는 성령충만하지 못한 자신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거듭 말하거니와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이러한 비교 의식은 사탄이 주는 생각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바로 이 사탄이 불어넣은 비교의식에 말려 실패한 거 아닙니까 '이것 먹으면 여호와 하나님과 같아질거야... ' 거기에 넘어간 것 아닙니까 사람이 거듭나지 못하면 늘 이 비교의식 속에서 자격지심과 교만지심이라는 양 널을 뛰면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은 작은 고을 베들레헴을 들어 쓰시는 분이십니다. 형 이스마엘보다 동생 이삭을, 형 에서보다 동생 야곱을, 형 루우벤보다 동생 요셉을 들어쓰신 분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말째'인 다윗을 들어 이스라엘의 성군으로 삼으셨습니다. 키작은 삭개오, 가방줄이 짧은 베드로, 약골 중의 약골 바울을 들어 귀하게 사용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베들레헴 에브라다 같이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들을 통해 당신의 위대함과 능력많으심을 드러내는 분이신 것입니다.
오늘 2002년도에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길 새일꾼들을 임명했습니다. 참으로 쉽지않은 일이었습니다. 이맘 때가 되면 당회원들이 여러 차례 모여 기도하고 숙의하며 고심 끝에 결정합니다. 그저 바라는 것은 이 부르심 앞에 그 어떤 자격지심도 또 교만지심도 갖지 마시고 베들레헴에서 메시야를 낳았던 마리아처럼 순종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의 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사이다', 이런 전적 수용과 전적 위탁의 믿음으로 응답하시기 바랍니다.
작아서 못한다면 주님이 크게 해 주실 것입니다. 없어서 못한다면 주님이 있게 해 주실 것입니다. 약해서 못한다면 주님이 강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역사는 언제나 그렇게 일어났습니다. 작다고, 없다고, 약하다고 발뺌하던 모세를 여호와 하나님은 끝까지 붙잡아 이스라엘의 해방을 이루어 가지시 않습니까 내가 작다고 느껴지십니까 초라한 존재라고 느껴지십니까 메시아이신 주님께서 바로 나에게 다가 오십니다. 아니 내 속에 이미 들어와 계십니다. 마리아처럼 믿음으로 당신을 낳아주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오시겠다고 하실 때 당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베들레헴의 한 여관 주인처럼 '다른 곳으로 가 보세요'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내 속에 당신 모실 자리가 없습니다', 돌려보내서도 안됩니다. 맞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기꺼이 환대하시고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보잘 것 없는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서, 스스로 비천하다고 여겼던 마리아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의 위대한 일이 일어난 것이 바로 성탄입니다.
예루살렘 곁에 있던 베들레헴, 얼마나 왜소하고 초라했겠습니까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크고 화려한 예루살렘이 아니라 작고 초라한 베들레헴을 찾아와 이렇게 속삭이십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고을 중에 네가 가장 작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라, 너는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너는 그 어느 고을보다도, 저 예루살렘보다도 더 귀하게 쓰임받으리라... '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런 이 시대의 베들레헴이 되십시다. 우리 교회가 이런 이 시대의 베들레헴이 되십시다. 여호와 하나님은 베들레헴의 가장 연약하고 보잘 것 없던 여인 나오미와 그 며느리 이방 여인 룻을 통해 메시야의 계보를 이어가시지 않았습니까 중요한 건 믿음입니다. 마리아와 같은 믿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영락제단과 이곳에 속한 우리들을 통해서 메시야의 역사가 계승되어갈 것입니다. 이 시대에 생명의 양식을 공급하는 진정한 말씀의 제단이 되어갈 것입니다.
비록 보잘 것 없고 연약한 우리지만 바로 여러분과 저가 이 시대의 베들레헴이 되라고 옛 도성 베들레헴은 우리에게 요청합니다. 베들레헴은 바로 우리들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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