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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 베들레헴 에브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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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한 해를 지난 중에 모든 사람들이 가장 들뜨고 기뻐하게 되는 달을 지내고 있습니다.
성탄절과 연말을 앞에 두고 사람들은 벌써부터 마음도 설레고 몸도 바빠지기 시작합니다.
여기저기 가는 곳마다 흥겨운 크리스마스 캐럴들이 우리 귀를 즐겁게 해주고 오색찬란한 등불들이 거리를 장식하기 시작하고 쇼핑센터에는 선물을 사려는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밤늦게까지 북적거리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탄절을 기다리고 즐기는 면에 있어서 미국 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보다 훨씬 더 요란합니다.
그래서 제 어머니께서 언젠가 성탄절 즈음에 미국에 오셨을 때에 그런 모습을 보시면서 "참, 예수 믿는 사람은 따로 있고 성탄 즐기는 사람은 따로 있구나. "라고 말씀하신 적도 있습니다.
정말 그 말씀대로, 매년 이맘때면 이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성탄절을 즐기고 있기는 하지만, 그 중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성탄절의 진정한 의미는 전혀 모르는 가운데 그저 자기네의 휴일로서만 즐기고들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미국 사람들은 자기 집에서 성탄 파티를 하는 사람이 제일 많겠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역시 술집이 일등이 되지 않을까 하고, 제발 틀리기를 바라는 씁쓸한 짐작을 해 봅니다.
이 기쁜 절기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그 주님 탄생을 축하하는 진짜 잔치가 어디에서 벌어지고 있는지 그 장소부터 제대로 알고 찾아가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장소란 두말할 필요 없이 물론 교회입니다.
현재 '주님의 몸'으로서 존재하고 있는 교회야말로 성탄을 바로 즐기고 지킬 수 있는 바르고도 유일한 잔칫집인 것입니다.
미가서의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탄생하시게 될 장소가 '유대 땅 베들레헴'이 될 것이라고 700여년 전에 미리 정확하게 예언해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원래는 이름 없는 작은 촌락에 불과했던 베들레헴이 장차 구세주께서 탄생하실 곳으로 예정되면서부터 일약 세계적으로 유명한 장소로 부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베들레헴은, 장차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는 지상교회에 대하여 아주 귀중한 의미를 부여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우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초림하셨던 날을 이제 한 주일 앞둔 이때에, 오늘날 우리가 다른 장소 아닌 교회에 모여서 이 성탄절을 지켜야 하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 '베들레헴 에브라다'를 향하여 선포되었던 말씀을 통하여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교회는 외면적으로는 아무리 초라해 보일지라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구세주의 도래를 선포하고 성취해 주시는 가장 귀중한 장소입니다.
본문 2절에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고 예언되었습니다.
구약 당시에나 예수님 탄생 때나 베들레헴은 실제로 아주 작고 초라하기 짝이 없던 동네였습니다.
여기서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라고 묘사되어 있는 것은 조금도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에브라다'라는 것은 베들레헴이 속해져 있던 남조 유다 지파의 한 구역의 이름으로 보이는 것인데 구약(창 35:19)에서부터 베들레헴과 결합된 명칭으로 자주 나타납니다.
또한 베들레헴이란 동네는 스불론 지파에도 하나 있었으므로 그것과 명확하게 구별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여튼 이 베들레헴은 유다 지파 중에서, 속된 표현을 빌리자면, '족보에도 끼지 못할 정도로' 별 것 없는 동네였습니다.
사실 '베들레헴'이라는 이름 자체의 문자적인 뜻도 '떡집'이었으니, 우리 말 식으로 조금 바꾸어 표현한다면 '떡방앗골' 같은 식의 촌티 물씬 하는 지명이었던 것입니다.
이 동네는 얼마나 작았던지, 앗수르 제국의 침략 당시 미가서 1장 10-15절에 기록된 유다의 주요 방어 거점에도 속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여호수아 15장 21-63절에 기록된 유다 지파의 100여 개의 성읍들 이름 가운데조차 끼어들지 못할 정도였던 것입니다.
이런 점들을 볼 때 베들레헴은 당시의 행정 구역 단위를 이루기 위한 최소한의 인구인 1000명도 채 못 되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니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나라가 위급한 처지에 빠졌을 때 그런 촌구석 조그마한 동네에서 유력한 군대를 조직해 낼 길도 없었고 더구나 이스라엘 전체를 이끌고 나라를 살려낼 만한 구세주가 나온다는 것은 거의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하고많은 동네와 성읍들 중에서 바로 그 베들레헴을 택하셔서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이 미가서가 기록될 당시 북조 이스라엘과 남조 유다는 북쪽의 앗수르 제국의 침략 위협으로 인하여 국가의 존폐가 크게 위협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국가안보의 위기 상황 때문에 모든 백성들은 그들을 구원해 줄 수 있는 진짜 능력이 있는 왕의 출현을 간절히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미가 선지자는 바로 그런 새 통치자가 태어날 곳이 그 유다의 한 조그마한 동네 베들레헴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새 왕은 이스라엘 백성이 기대하고 있는 정도를 훨씬 뛰어넘는 구세주가 될 것이라고 미가 선지자는 또한 예언했습니다.
그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자'가 "네게서(베들레헴에서) 내게로(여호와 하나님께로)" 나올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내게로"라는 말은 '나를 위하여'라는 의미로 생각하시면 그 문맥이 훨씬 더 쉽게 통하게 됩니다.
즉 그 장차 오실 메시아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오실 분이라는 뜻인 것입니다.
그 분은 그저 사람들의 정치적, 경제적 욕구만을 채워 주는 세속적인 군주가 결코 아니라, 바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죄인을 살려주고자 하시는 그 위대하신 구속사역을 받들어 섬기고자 오실 구세주이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내실 메시아에 대한 놀라운 묘사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본문 2절 하반절을 다시 보시면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고 선언했습니다.
장차 베들레헴에 태어나실 메시아는 그 근본이 옛날 바로 그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던 다윗의 왕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서 영원 전부터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에서부터 출발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그 메시아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뜻인 것입니다.
이런 메시아, 그처럼 사람들이 기다리던 메시아, 그러면서도 사람의 기대를 훨씬 초월하는 위대하신 메시아가 바로 그 베들레헴에서 태어나게 되었으니, 그곳은 세상에서 더없이 가장 귀중한 장소가 되었습니다.
인간적, 사회적으로 볼 때에는 정말 초라하고 볼품없는 작은 동네였지만, 장차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 위대하신 통치자, 이 은혜로우신 구원자, 이 지극히 높으신 성자 여호와 하나님께서 바로 그곳에 태어나실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에 베들레헴은 그 탄생하실 메시아를 만나고 싶은 사람은 반드시 가 보아야 될 동네가 되었던 것입니다.
베들레헴이 예수님의 초림을 준비했던 장소라면, 오늘날의 교회들은 바로 예수님의 재림을 위하여 준비하고 있는 장소입니다.
사람들의 눈에 이 지상교회들은 세상의 다른 곳들에 비해서 작고 초라하고 아무 눈여겨 볼 것 없는 곳으로만 보일 것입니다.
대도시의 중심가에 마천루라는 이름 그대로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있는 고층빌딩들에 비할 때 상가를 임대하고 겨우 십자가탑 하나 옥상 위에 세우고 있는 교회들의 모습이란 아예 비교의 상대조차 되지 않습니다.
수 만 명의 공무원들이 돌리고 있는 국가 행정이나 수 만 명의 사원들로 짜여 있는 대기업의 조직들에 비교해 볼 때, 교회의 당회나 제직회 같은 것은, 속된 말로, '새발의 피'도 되지 않습니다.
청와대나 국회 의사당을 드나들며 모든 권력을 쥐고 흔들고 있는 정치가들이나, 여의도 증권가를 누비면서 떼돈을 벌고 있는 경제인들이나, 세계적인 명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노벨상 후보로 거론될만한 훌륭한 연구를 하고 있는 교수들과 비교해 볼 때, 오늘도 주일날 강단에서 외롭게 외치고 있는 목사들은 정말 초라하게만 보이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도 그렇게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눈에도 이 교회란 곳이 이 사회 속에서 내가 다니고 있는 대학교보다도, 내가 출근하고 있는 회사보다도, 내게 유리한 정책을 펼쳐주고 있는 정당보다도 더 작게, 덜 중요하게 보이십니까
결코 그래서는 아니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처럼 세상에서 유명하고 찬란하고 요란한 장소를 장차 오실 재림주를 맞이할 곳으로 택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 대신에 대다수의 사람들의 눈에는 이 거대한 현대사회 속에서 아주 작고 초라한, 이 화려한 과학문명에 비해 정말 뒤떨어진 구식으로만 보이는 교회를 그런 영광스러운 장소로 택정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에는 오직 참된 성도들만이 그 지상교회에서 공중으로 휴거되어 그 영광의 주님을 영접하게 되는, 사상 초유의 대장관이 벌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님의 재림을 어떻게 다른 곳에서 기다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우리가 예수님의 초림을 다른 어떤 더 좋은 장소에서 축하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베들레헴에서 '여호와 하나님께로 나오셔서' 여호와 하나님의 구속역사를 성취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그분의 몸 되신 교회에서 경배하며 축하하고, 그 근본이 '상고와 태초'가 되신 성자께서 이제 재림주로 다시 오실 그날을 위하여 늘 교회중심의 삶으로 예비하면서 소망 중에 기다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교회는 현실적으로는 아무리 고난 중에 있더라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택자의 영광스러운 미래를 약속해 주시는 가장 복스러운 장소입니다.
이어지는 3절 말씀에 "그러므로 임산한 여인이 해산하기까지 그들을 붙여 두시겠고 그 후에는 그 형제 남은 자가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돌아오리니"라고 약속되었습니다.
비록 베들레헴이 장차 메시아가 탄생하실 곳으로 확정되어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현재의 고통이 당장 해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선 여기서 "그들을 붙여 두시겠고"라고 번역되어 있는 말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을 내버려 두시겠고,' 혹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을 원수의 손에 맡겨 두시겠고'라는 뜻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 앗수르 제국으로부터 고통당하고 있는 현실이 당분간은 계속될 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 앞에 있는 "임산한 여인이 해산하기까지"라는 말씀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되고 있는데, 하나는 '메시아를 잉태한 여인이 그 아기를 낳기까지'라는 뜻으로 보는 것이고, 또 다른 해석은 그 '임산한 여인'을 메시아를 탄생시키게 할 공동체로서의 이스라엘로 보는 것입니다.
즉 여인이 해산하기까지는 어쩔 수 없이 긴 고통의 시간을 겪어야 하는 것처럼 이스라엘 민족도 메시아가 올 때까지 아직은 좀 더 참고 인내해야 할 기간이 남아 있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이 둘 중에서 대체로 전자의 해석이 더 많은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만, 사실 전자나 후자나 그 어떤 해석을 취하더라도 '메시아가 탄생하실 때까지 이스라엘은 아직 고난의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는 전체적인 문맥에는 아무 변함이 없습니다.
그처럼 베들레헴은, 그리고 온 이스라엘은 지금 당장은 앗수르 제국의 침략이라는 현실적인 어려움들이 여전히 남아 있지만 그 미래는 실로 영광스러운 것이 될 것이었습니다.
본문 3절 하반절에 "그 후에는 그 형제 남은 자가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돌아오리니"라고 약속하신 말씀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미가 선지자 당시 이스라엘 민족은 본토에 남아 있는 형제들의 수가 점점 줄어드는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앗수르 제국의 반복되는 침략과 약탈에 견디다 못해 약 20년 간에 걸쳐서 북조 이스라엘에서는 자기 고향을 버리고 떠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늘어만 갔습니다.
그리고 남조 유다의 수도였던 예루살렘마저 포위를 당하기 시작할 즈음에 가서는 그 성 안에 남아 있던 자들은 끝까지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있던 소수의 형제들밖에 없었습니다.
외적의 침략은 육체적인 고난을 가져다주었지만, 같이 생사와 고락을 함께 하던 형제들이 점점 줄어든다는 것은 유다에 남아 있던 백성들에게 더 큰 심리적인 고통을 안겨주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형제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은 끝내 성취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현실적으로는 나중에 바벨론에서 포로 해방을 받고 유다 백성들이 고국으로 돌아오게 됨으로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영적으로 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인하여 '예수 안에서 형제자매 된 성도'들이 교회를 중심으로 모여들게 됨으로써 완전히 성취되었습니다.
우선 본문에서 "그 형제"라고 번역되어 있는 말은 정확하게 하자면 '그의 형제'(his brethren)입니다.
국가를 나타내는 말은 '딸 이스라엘'이라는 표현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보통 여성형으로 받기 때문에 여기서 '그의 형제'라는 말은 '이스라엘의 형제'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바로 앞의 문맥과 연결시켜 볼 때 '메시아의 형제'라는 뜻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또한 계속해서 "이스라엘 자손에게로"(unto the sons of Israel)라고 번역된 말도 그 전치사의 용도를 엄격하게 따져보면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together with the sons of Israel)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그런 문맥을 계속 이어나가면 "돌아오리니"라는 말도 '회개'를 의미하는 뜻으로 볼 수 있는 것이며, 결국 전체 문장의 뜻은 그리스도의 탄생 후에 유대인의 '남은 자'들이 구원받은 이방인들과 '함께' 새 이스라엘, 즉 신약교회를 이루게 될 것을 예언한 말씀이 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에브라다"라는 이름, 즉 '열매가 풍성함'이라는 그 이름의 뜻이 이 메시아의 도래로 말미암아 그대로 현실화하게 됩니다.
'너희들은 당분간은 이방인의 침략 아래서 고통을 당할 것이다, 하지만 약속된 메시아가 베들레헴에 탄생하는 그날에 이스라엘은 택자들을 사방에서 모아서 가장 영광스러운 새로운 왕국의 모습으로 세워지게 될 것이다. '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은 그 이후의 역사를 통하여, 그리고 오늘 저와 여러분이 체험하고 있는 그대로 구구절절 이루어지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저와 여러분들 역시 바로 이런 소망을 간직하고서 그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이 교회를 지키며 그 안에서 살아야만 합니다.
교회는 분명히 장차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는 지상 최고로 귀중한 장소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날이 올 때까지 당장은 좀 더 참고 견디어야 할 어려움과 고통, 그리도 때로는 핍박과 환난까지도 아직은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교회에 다녀도 환절기만 되면 병에 걸리기도 하고, 열심히 예배에 참석하고 기도드려도 불신남편의 핍박은 계속되고, 정성껏 헌금을 드리고 서원을 해도 경기는 풀리지 않는 현실을 우리는 여전히 겪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인들 중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그만 실족하고 맙니까
'예수 믿기만 하면 당장 내 모든 인생 문제들이 깨끗이 해결된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기대하면서 교회를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회에 다니면서도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예수 믿는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여전히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교인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교육시키고 훈계하시고 연단시키기 위하여 때때로 '앗수르 제국'을 사용하시는 그 깊은 뜻을 조금도 이해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장차 예수님 재림하실 때 구원받고 천당 간다는 것은 좋은데, 그때가 올 때까지 지금 당장 인내하면서 교회를 중심으로 사는 것을 도무지 견디어내지 못하고 그만 도중하차하는 안타까운 교인들이 많이 생기고 있는 것입니다.
실로 얼마나 얕은 판단이며 어리석은 행동입니까
성도가 '장차 받을 영광'을 조금이라도 깊이 생각해 보면 그것이 어찌 '현재 겪는 약간의 고난'과 족히 비교의 대상이라도 될 수 있겠습니까
임산한 여인조차도 해산의 기쁨을 위하여 그 고통을 넉넉히 견딜 수 있는 것인데, 하물며 이미 제한되어 있는 잠시 동안의 환난을 못 이기겠다고 영생구원이라는 그 축복을 어떻게 그렇게 간단히 포기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저와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그리고 자신의 인생에서 그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이 교회만큼은 절대로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당하고 있는 그 인생의 고난이 교회를 떠난다고 절로 없어지겠습니까
지금 나를 괴롭히고 있는 그 어려움을 교회 아닌 다른 곳에서 해결 받을 길이 있겠습니까
그 모든 문제는 오히려 자신이 교회 안에 남아 있어야만 풀릴 길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내 인생이 엉망이고 이 세상이 불안한 바로 그 까닭에 오히려 성도는 더욱 교회중심으로, 더더욱 모이기를 힘쓰면서 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절대로 변개치 못할 언약으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비참한 인생을 벗어나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생활의 기쁨을 맛볼 수 있는 곳은 교회밖에 없습니다.
사단의 손아귀에 사로잡혀 있던 사람이 회개하고 주님 품으로 돌아와서 용서받을 수 있는 곳도 오직 교회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날까지 택자는 어김없이 교회로 모여들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이 지구의 기온이 상승하고 자원이 고갈되고 인종 분쟁이 날카롭게 대립하고 도처에 기근과 지진이 일어나더라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남겨 놓으신 자들은 동서사방 원근각지에서부터 오직 이 '구원의 약속'이 선포된 곳 교회로 반드시 돌아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당신의 소수의 택자들을 금세의 고난뿐 아니라 심판날의 지옥영벌로부터도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베풀어 주신 이 언약의 방주 안에 모여서, 죄인의 대속을 위하여 오신 초림을 반기며 또한 성도의 영생부활을 위해 오실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들레헴 에브라다'를 통하여 실로 놀라운 예언을 선포해 주시고 실로 은혜로운 약속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베들레헴은 그것이 많은 사람이 살고 있는 대도시였기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그처럼 장차 오실 메시아께서 탄생하실 장소가 된 까닭에 유다에서뿐 아니라 오늘날까지 일약 최고의 명소가 되었습니다.
메시아를 모시게 된 베들레헴은 더 이상 '작은 떡방앗골' 같은 동네일 수가 없었습니다.
메시아께서 성취시키실 약속을 담게 된 에브라다는 영원히 고통 중에 사는 동네로 끝날 수가 없었고 '많은 열매를 맺는' 축복의 근원지가 되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모여 예배드리고 있는 교회가 바로 그러한 곳이 아니겠습니까
장차 다시 오실 예수님을 철석 같이 믿고 기다리고 있는 이 교회는, 가장 신비한 지혜를 소유하고 있으며 고상하기 견줄 상대가 없는 영적 문화를 누리고 있으며 여호와 하나님과 교통하는 최고 수준의 상류사회가 형성되어 있는 곳입니다.
십자가 구원의 역사를 믿는 신앙이 고백되어지고 재림과 육체부활과 영생구원의 소망을 보배처럼 간직하고 있는 이 교회는,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에도' 조금도 흔들리거나 넘어지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하늘과 땅조차 흔들리게 될 그 마지막 날에 오직 홀로 우뚝 서 있게 될 유일한 도피성이 될 장소인 것입니다.
즐거운 파티가 벌어지고 있는데 그 장소를 잘못 알고 엉뚱한 곳을 찾아가게 되면 정말 낭패입니다.
주님 탄생하신 날을 함께 즐길 잔치집은 이 땅에서 오직 교회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의 소식과 재림의 약속을 선포해 주는 교회, 금세의 은혜를 나누고 내세의 영광에 함께 들어가게 될 교회, 올해의 성탄을 이런 영광스럽고도 복스러운 '베들레헴 에브라다 교회'를 중심으로 더욱 기뻐하며 감사함으로 함께 누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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