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 왕으로 오신 메시야
본문
성경을 여호와 하나님 말씀이라고 합니다. 사실 성경의 기록을 보면 1600여년 동안 기록된 것입니다. 28명의저자들이 기록하였는데 앞뒤가 틀린 것이 없습니다. 구약에서 예언된 말씀이 수 천년이 지난 신약에서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기록을 사람이 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성경 딤후3:17- “모든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 성경 속에 스여진 주인공은 예수그리스도입니다. 구약성경은 장차 오실 메시야를 소개하기 위해 쓰여진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이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언약대로 오신 예수님은
I. 다스릴자 만왕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2절 또 유대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중에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다스리는 자 왕) 왕중에 왕(King of Kings) 만왕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눅23:3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총독 빌라도가 재판을 하면서 묻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님께서 "네 말이 옳도다" 왕이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미가 선지자를 통해 약속하신 그대로 700여년이 지난후 베들레헴에서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습니다.
마 2:1-3 에 보면 동방에서 박사들이 새로 나신 왕을 찾아 경배하기 위해 먼길을 달려 예루살렘에 도착하였을 때 이 소식을 들은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소동하였습니다. 왕은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 하고 물으니 그들은 지체 없이 유대땅 베들레헴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중 누구도 베들레헴에 찾아가 성경에서 예언한 메시야가 어디서 탄생했는지 확인을 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지식이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구원합니다. (믿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야이며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러 오신 분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그분을 영접해야 하는 것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지식으로 베들레헴에 탄생 할 것을 알게 되었고, 동방박사들은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에 별을 보고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 별을 따라 가보면 탄생하신 왕을 만나게 될 것이다 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의 지식은 행함이 없는 지식이었다면 동방박사들은 행동하는 학자들 이었습니다. 그 별의 인도를 따라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예루살렘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묻기를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이가 어디계시뇨. 우리가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누구를 찾고 있습니까 왕을 찾고 있어요.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이가 어디계시뇨
우리 예수님은 왕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다스릴자 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왕으로 오셨는데 어느 누구도 그를 왕으로 모시려하지 않았습니다.
말구유에,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로, 독생자 예수그리스도가 이 땅에 왕으로 탄생하셨는데 그 분을 모실만한 방 하나 없어서 저 비천한 마구간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여관방은 다른 손님들로 가득가득 차 있었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그리스도가 탄생해야 할 방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마굿간에 가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우리 심령의 방에 세상적인 것들로 가득가득 차 있어서 만왕의 왕으로 오시는 아기예수를 모실 공간이 없는 것은 아닌지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현실에서도 우리의 심령이 돈으로, 욕심으로, 세상으로만 가득차 있다면 주님을 모실 마음의 방이 없습니다. 성탄을 준비하는 우리들의 심령 속에 만왕의 왕이신 우리 주님이 계셔야할 줄 믿습니다. 성탄의 계절을 맞이하여 탄생하신 예수그리스도가 여러분 마음의 주인이요, 여러분 가정의 주인이요, 여러분 삶의 왕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메시야는 작은 곳 낮은 곳으로 오셨습니다.
높은 곳은 아무나 갈 수 없습니다. 청와대 한번 갈려고 신청하면 얼마나 복잡한지 모릅니다. 검문이 심합니다. 그러나 낮은 곳은 누구든지 올 수 있는 곳입니다. 검문도 없습니다. 마굿간에서 검문하는 것을 보지 못 했습니다. 누구든지 자유스럽게 올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가장 낮은 곳 누구든지 올 수 있는 곳으로 탄생하셨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세계에서 작은 나라 이스라엘, 이스라엘에서도 작은 고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미가 선지자는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上古)에, 태초(太初)에니라"고 하였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 그곳은 유대 땅의 고을 중에도 작은 곳입니다.
유대 땅에 있는 베들레헴은(옛 지명은 에브라다임) 국경지역에 위치하고 있어 옛날부터 전쟁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간 곳입니다. 그래서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다는 유서 깊은 지역입니다. 여호수아 15장에 보면 유다 지파에게 분배된 100여개의 성읍이 열거되고 있는데 그중에 베들레헴이란 지명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후 포로귀환 이후 쓰여진 글(스 2:21, 느 7:26)에 비로소 그 이름이 등장하나 주민 천명 이상을 가진 성읍 속에도 끼지 못한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이렇게 작은 성읍, 그러면서도 눈물과 비애의 성읍인 베들레헴에서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신 것입니다.
또한, 보잘것없는 동네에서 자라나셨습니다. 거기는 나사렛이었습니다.
어느날 예수님을 만났던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가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고 하자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 1:45-46)고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나사렛은 갈릴리의 한 벽촌입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사투리를 사용하며, 교양이 부족하고, 이방인과 교제한다는 이유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요 7:53)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3. 메시야는 우리의 평강이 되실 것이다.
신곡의 작가 단테가 어느 날 저녁, 프랑스의 한 수도원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안에서 늙은 수도사가 귀찮은 듯 거지인줄 알고 무엇을 구걸하러 왔소그때 단테는 라틴어로 간단히 "파쳄(pacem)" "나는 평화를 구걸하고 있습니다. "
오늘날 이 땅에 요구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평화입니다. 요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 예수님은 우리의 가정과 마음속에 평강을 주셨습니다.
불안과 두려움 속에 떨고 있는 이에게 평화를 주십니다. 공포와 죽음에 쪄들어 있는 이에게 참 평화와 안식을 주신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저께 심야기도시간에 ‘지선아 사랑해’라는 영상을 잠시 보았습니다. 지선양은 이화여대 졸업반 때에 교통사고로 전신 화상을 입고 여러 차례 수술 끝에 겨우 살아났습니다. 그처럼 예쁘고 귀여웠던 숙녀가 하루 아침에 몰골 상한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보는이 마다 사람이 어찌면 저렇게 될 수 있을까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지선양은 믿음안에서 평안을 얻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얻었습니다. (저런 모습으로 죽지 왜 살까)
그래서 기적 같이 살아난 지선양을 찾아오는 이들에게 내가 살아난 것이 기적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막을수 없는 넘치는 평안과 기쁨과 감사가 있는 것이 기적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감사 할 것이 없는 것 같은데 넘치는 감사가 있습니까 평안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평화가 있습니까 이것이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크신 축복이요 능력인줄 믿습니다.
5:5-6을 다시 한 번 읽어보자. "이 사람은 우리의 평강이 될 것이라. 앗수르 사람이 우리 땅에 들어와서 우리 궁들을 밟을 때에는 우리가 일곱 목자와 여덟 군왕을 일으켜 그를 치리니 그들이 칼로 앗수르 땅을 황무케 하며 니므롯 땅에 들어와서 우리 지경을 밟을 때에는 그가 우리를 그에게서 건져내리라. "
메시야는 평화의 왕 일뿐 아니라(사 9:6) 바로 평화 그 자체이십니다. 앗수르 처럼 자기 백성을 괴롭히는 원수들을 물리치셔서 원수들로부터 당신의 백성들을 보호하실 것이며, 더나아가 원수 되었던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까지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많은 백성들 중 남은 자 즉 여호와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들은 하늘에서 내리는 이슬 같고, 풀 위에 내리는 가랑비(단비) 같이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만 의지하며 살아갈 것이다.
시146:3-4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수풀에 있는 짐승중의 사자 같을 것이다. 그 누구도 감히 대항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탄생하실 때 갑자기 허다한 천군(天軍)이 그 천사와 함께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눅2:13-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지금도 예수님은 우리의 가정에 평화의 왕으로 계십니다. 매일 싸우고 불화 하던 가정이 예수 믿으면 화목한 가정으로 변화합니다. 예수는 전쟁을 그치고 온 땅에 평화를 선언하십니다.
유명한 러시아의 작가 톨스토이는 원래 귀족출신으로 온갖 부귀와 영화를 누리며 살아왔으나 참 만족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는 작품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갈채를 받았으나, 죄에 대한 공포와 불안한 마음으로 늘 괴로움을 겪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적한 시골길을 걸어가던 중 어느 시골 농부를 만났는데, 그 얼굴에는 유난히도 평화가 깃들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농부에게 가서 그렇게 평화스런 삶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농부는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기 때문에 언제나 내 마음은 기쁠 뿐이다"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톨스토이는 그 날부터 진지하게 여호와 하나님을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후 결국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과거의 불안과 공포는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하기를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것이 바로 사는 길이다"라고 고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믿는 것이 바로 사는 길인줄 믿습니까
누구든지 주님을 찾고 주님을 만나면 평안의 축복을 받을 줄 믿습니다. 그리스도와 관계 속에서 평안을 가지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성공적인 생활을 하는 것 같아도 근본적으로 여호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바로 맺어지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여전히 불안한 법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안으로 왕으로 오신 주님을 기다리며 평강과 은총의 축복이 항상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 다스릴자 만왕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2절 또 유대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중에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다스리는 자 왕) 왕중에 왕(King of Kings) 만왕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눅23:3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총독 빌라도가 재판을 하면서 묻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님께서 "네 말이 옳도다" 왕이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미가 선지자를 통해 약속하신 그대로 700여년이 지난후 베들레헴에서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습니다.
마 2:1-3 에 보면 동방에서 박사들이 새로 나신 왕을 찾아 경배하기 위해 먼길을 달려 예루살렘에 도착하였을 때 이 소식을 들은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소동하였습니다. 왕은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 하고 물으니 그들은 지체 없이 유대땅 베들레헴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중 누구도 베들레헴에 찾아가 성경에서 예언한 메시야가 어디서 탄생했는지 확인을 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지식이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구원합니다. (믿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야이며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러 오신 분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그분을 영접해야 하는 것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지식으로 베들레헴에 탄생 할 것을 알게 되었고, 동방박사들은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에 별을 보고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 별을 따라 가보면 탄생하신 왕을 만나게 될 것이다 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의 지식은 행함이 없는 지식이었다면 동방박사들은 행동하는 학자들 이었습니다. 그 별의 인도를 따라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예루살렘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묻기를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이가 어디계시뇨. 우리가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누구를 찾고 있습니까 왕을 찾고 있어요.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이가 어디계시뇨
우리 예수님은 왕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다스릴자 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왕으로 오셨는데 어느 누구도 그를 왕으로 모시려하지 않았습니다.
말구유에,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로, 독생자 예수그리스도가 이 땅에 왕으로 탄생하셨는데 그 분을 모실만한 방 하나 없어서 저 비천한 마구간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여관방은 다른 손님들로 가득가득 차 있었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그리스도가 탄생해야 할 방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마굿간에 가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우리 심령의 방에 세상적인 것들로 가득가득 차 있어서 만왕의 왕으로 오시는 아기예수를 모실 공간이 없는 것은 아닌지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현실에서도 우리의 심령이 돈으로, 욕심으로, 세상으로만 가득차 있다면 주님을 모실 마음의 방이 없습니다. 성탄을 준비하는 우리들의 심령 속에 만왕의 왕이신 우리 주님이 계셔야할 줄 믿습니다. 성탄의 계절을 맞이하여 탄생하신 예수그리스도가 여러분 마음의 주인이요, 여러분 가정의 주인이요, 여러분 삶의 왕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메시야는 작은 곳 낮은 곳으로 오셨습니다.
높은 곳은 아무나 갈 수 없습니다. 청와대 한번 갈려고 신청하면 얼마나 복잡한지 모릅니다. 검문이 심합니다. 그러나 낮은 곳은 누구든지 올 수 있는 곳입니다. 검문도 없습니다. 마굿간에서 검문하는 것을 보지 못 했습니다. 누구든지 자유스럽게 올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가장 낮은 곳 누구든지 올 수 있는 곳으로 탄생하셨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세계에서 작은 나라 이스라엘, 이스라엘에서도 작은 고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미가 선지자는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上古)에, 태초(太初)에니라"고 하였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 그곳은 유대 땅의 고을 중에도 작은 곳입니다.
유대 땅에 있는 베들레헴은(옛 지명은 에브라다임) 국경지역에 위치하고 있어 옛날부터 전쟁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간 곳입니다. 그래서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다는 유서 깊은 지역입니다. 여호수아 15장에 보면 유다 지파에게 분배된 100여개의 성읍이 열거되고 있는데 그중에 베들레헴이란 지명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후 포로귀환 이후 쓰여진 글(스 2:21, 느 7:26)에 비로소 그 이름이 등장하나 주민 천명 이상을 가진 성읍 속에도 끼지 못한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이렇게 작은 성읍, 그러면서도 눈물과 비애의 성읍인 베들레헴에서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신 것입니다.
또한, 보잘것없는 동네에서 자라나셨습니다. 거기는 나사렛이었습니다.
어느날 예수님을 만났던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가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고 하자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 1:45-46)고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나사렛은 갈릴리의 한 벽촌입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사투리를 사용하며, 교양이 부족하고, 이방인과 교제한다는 이유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요 7:53)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3. 메시야는 우리의 평강이 되실 것이다.
신곡의 작가 단테가 어느 날 저녁, 프랑스의 한 수도원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안에서 늙은 수도사가 귀찮은 듯 거지인줄 알고 무엇을 구걸하러 왔소그때 단테는 라틴어로 간단히 "파쳄(pacem)" "나는 평화를 구걸하고 있습니다. "
오늘날 이 땅에 요구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평화입니다. 요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 예수님은 우리의 가정과 마음속에 평강을 주셨습니다.
불안과 두려움 속에 떨고 있는 이에게 평화를 주십니다. 공포와 죽음에 쪄들어 있는 이에게 참 평화와 안식을 주신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저께 심야기도시간에 ‘지선아 사랑해’라는 영상을 잠시 보았습니다. 지선양은 이화여대 졸업반 때에 교통사고로 전신 화상을 입고 여러 차례 수술 끝에 겨우 살아났습니다. 그처럼 예쁘고 귀여웠던 숙녀가 하루 아침에 몰골 상한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보는이 마다 사람이 어찌면 저렇게 될 수 있을까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지선양은 믿음안에서 평안을 얻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얻었습니다. (저런 모습으로 죽지 왜 살까)
그래서 기적 같이 살아난 지선양을 찾아오는 이들에게 내가 살아난 것이 기적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막을수 없는 넘치는 평안과 기쁨과 감사가 있는 것이 기적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감사 할 것이 없는 것 같은데 넘치는 감사가 있습니까 평안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평화가 있습니까 이것이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크신 축복이요 능력인줄 믿습니다.
5:5-6을 다시 한 번 읽어보자. "이 사람은 우리의 평강이 될 것이라. 앗수르 사람이 우리 땅에 들어와서 우리 궁들을 밟을 때에는 우리가 일곱 목자와 여덟 군왕을 일으켜 그를 치리니 그들이 칼로 앗수르 땅을 황무케 하며 니므롯 땅에 들어와서 우리 지경을 밟을 때에는 그가 우리를 그에게서 건져내리라. "
메시야는 평화의 왕 일뿐 아니라(사 9:6) 바로 평화 그 자체이십니다. 앗수르 처럼 자기 백성을 괴롭히는 원수들을 물리치셔서 원수들로부터 당신의 백성들을 보호하실 것이며, 더나아가 원수 되었던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까지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많은 백성들 중 남은 자 즉 여호와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들은 하늘에서 내리는 이슬 같고, 풀 위에 내리는 가랑비(단비) 같이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만 의지하며 살아갈 것이다.
시146:3-4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수풀에 있는 짐승중의 사자 같을 것이다. 그 누구도 감히 대항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탄생하실 때 갑자기 허다한 천군(天軍)이 그 천사와 함께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눅2:13-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지금도 예수님은 우리의 가정에 평화의 왕으로 계십니다. 매일 싸우고 불화 하던 가정이 예수 믿으면 화목한 가정으로 변화합니다. 예수는 전쟁을 그치고 온 땅에 평화를 선언하십니다.
유명한 러시아의 작가 톨스토이는 원래 귀족출신으로 온갖 부귀와 영화를 누리며 살아왔으나 참 만족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는 작품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갈채를 받았으나, 죄에 대한 공포와 불안한 마음으로 늘 괴로움을 겪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적한 시골길을 걸어가던 중 어느 시골 농부를 만났는데, 그 얼굴에는 유난히도 평화가 깃들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농부에게 가서 그렇게 평화스런 삶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농부는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기 때문에 언제나 내 마음은 기쁠 뿐이다"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톨스토이는 그 날부터 진지하게 여호와 하나님을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후 결국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과거의 불안과 공포는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하기를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것이 바로 사는 길이다"라고 고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믿는 것이 바로 사는 길인줄 믿습니까
누구든지 주님을 찾고 주님을 만나면 평안의 축복을 받을 줄 믿습니다. 그리스도와 관계 속에서 평안을 가지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성공적인 생활을 하는 것 같아도 근본적으로 여호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바로 맺어지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여전히 불안한 법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안으로 왕으로 오신 주님을 기다리며 평강과 은총의 축복이 항상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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