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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 성탄으로 오신 자의 승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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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부활절 일곱 번째 주일입니다만, 마지막 부활절 주일을 승천 기념 주일로 지키기 때문에, 오늘은 승천기념주일이기도 합니다. 왜 부활절 마지막 주일을 승천기념주일로 지키느냐 하면, 다음 주일부터는 성령강림절이 시작되는데, 성령강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뒤에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영국 여행을 하신 분은 보셨겠지만, 런던의 버킹검 궁에 가보면 궁 앞의 의장대가 시간에 따라서 임무교대를 합니다. 버킹검 궁전도 아름답지만, 그 교대식도 참 아름답습니다. 크렘린 궁의 의장대는 보지 못했습니다만, 거기서도 의장대가 교대를 합니다. 우리나라 덕수궁에서도 옛날 조선시대의 옷을 입은 의장대가 나와서 임무교대를 하고, 돈화문에서도 교대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느낀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시간에 따라서 맡은 바 임무의 교대를 합니다. 사람이 바뀌고 부대도 바뀝니다. 그러나 바뀌지 않는 게 있습니다. 어떤 사람, 어떤 부대가 교대를 하든지 간에 의장대의 임무는 꼭 같습니다. 규율도 같고 의장대의 차림새도 같습니다. 사람만 부대만 바뀔 뿐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면서, 우리 경동교회가 창립40주년 때 강 목사님의 주창으로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 신앙을 고백하는 교회로 다시 태어나기로 했던 일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삼위일체 그 뜻이 무얼까 성부와 성자와 성령, 이렇게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는 있습니다만, 그 뜻을 잘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오늘 제가 의장대의 임무교대에 관해 말씀드렸습니다만, 삼위일체란 여호와 하나님이 인간과 세상을 구원하시는 임무를 세 번에 나누어서 교대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야웨 여호와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시는 방식으로 구원 역사를 전개하셨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구원의 임무를 맡게 하셨습니다. 그리고서 또 한번 교대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다음에, 부활한 그리스도를 하늘로 데려가시면서 임무교대를 하시는데, 성령으로 하여금 그 임무를 맡게 하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 세 분은 같은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임무를 교대하시는 분입니다. 이렇게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을 보신다면 이해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성자 여호와 하나님이 성부 여호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아버지 곁으로 떠나가는 것, 이것을 “승천”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승천이란 인간의 입장에서 하는 말이고, 여호와 하나님 편에서 보면 임무교대를 위하여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 우편에 앉게 하시고, 그 대신 똑같은 일을 성령을 파송하여 수행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승천하면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아버지께로 가는데, 가면 다시 올 것이다. 어떤 모습으로 오는가 하면, 지금 구름 타고 가는 모습 그대로 다시 올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약속의 증표로, 또 당신이 떠나감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계속된다는 증표로 성령을 보내실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시는 복음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야웨 여호와 하나님, 성자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영이신 성령, 이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고백합니다. 임무 담당자가 바뀌어도 완전한 데 이르기까지 구원의 역사를 계속 이끄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또 의지하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오늘도 그 연장선상에 서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승천하신 모습으로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면서, 성령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승천하신 그분은 누구십니까 승천하신 분은 베들레헴 마구간에 태어났던 그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승천할 수 있으려면, 반드시 이 세상에 태어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승천하신 분은 이미 태어났습니다. 태어난 베들레헴 그곳, 얼마나 귀한 장소입니까 또한 승천하시는 감람산, 얼마나 귀중한 장소입니까 우리는 승천하시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크리스마스에 태어나신 아기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송축합니다. 그래서 누구나 태어난 날, 태어난 땅의 감격, 그걸 잃지 않으려고 합니다.
제가 오늘 돈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언론 매체를 통해 안 이야기입니다. 돈 액수 2억 6,758만 원! 무엇이 생각나십니까 우리나라 독도의 공시지가가 5월부로 2억 6758만 원이라고 합니다. 그 보도를 보면서 ‘나도 살 수가 있겠는데’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것도 작년 시가보다
1. 77퍼센트 오른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쨌든 작은 아파트 하나만 팔아도 독도를 몽땅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별 값어치도 없는 땅을 지키겠다고 우리 민족은 그 땅의 가격보다 수십 배, 수백 배, 수천 배 되는 돈을 들여서 독도를 지킵니다. 그런가 하면 일본은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고, 극우파 몇 명이 배를 타고 와서 독도에 상륙하겠다고 난리를 피워서 한일간에 신경전을 벌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린 왜 그 싼 땅을 그렇게 수많은 돈을 들여서 지키려고 애를 쓸까요 독도를 지키려는 것은 독도 땅덩어리 때문만은 아닙니다. 독도라는 섬 속에 포기할 수 없는 민족의 혼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독도 때문에 영해도 넓어지는 실리적인 면도 있습니다만, 독도라는 그 섬에는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우리 민족의 혼이 서려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독도는 지금 우리의 가슴속에 있기도 합니다. 우리의 가슴속에 있는 독도가 사라지면 우리는 민족의 혼을 잃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켜야 할 독도, 우리 가슴 속에 있는 독도의 값은 얼마입니까 독도에 숨겨진 우리의 혼 값은 얼마입니까
이야기를 바꿔보십시다. 우리의 구세주인 예수 그리스도가 베들레헴에 태어나셨습니다. 베들레헴 마구간, 몇 평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건 가격이 얼마나 됐겠습니까 몇 푼 안 됐을 겁니다. 그러나 지난 이천 년 동안, 거기서 태어난 아기 예수를 구세주로 받아들인 사람들, 아니 앞으로 이 세상이 없어지고 여호와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까지 예수를 믿을 수많은 사람들이 가슴에 품은 베들레헴 마구간의 값은 얼마입니까
그것은 결코 값으로 따질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계산은 여기에 맞지 않습니다. 신앙의 값은 얼마입니까 가슴속에 있는 사랑의 값은 얼마입니까 누구도 따져서 계산할 수 없습니다. 계산할 수가 없어서 그냥 믿는 겁니다. 계산할 수 있다면 무엇 하러 여호와 하나님을 믿습니까 계산되는 여호와 하나님, 계산되는 신앙, 계산으로 숫자가 딱 떨어지는 것,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은 계산이 없어야 합니다. 만질 수 있는 것 같으면서도 못 만지는 것이 신앙입니다. 가지고 있지만 소유할 수 없는 것이 신앙입니다.
성령의 값, 그리스도의 값, 여호와 하나님의 값, 이 값은 계산하지 마십시다. 신앙의 값은 계산하지 마십시오. 사랑의 값도 계산하지 마십시오. 계산해서 봉사하지도 마십시다. 얼마만큼 봉사하라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적 없습니다. 계산해서 기도하지 마십시다. 그냥 무계산 속에, 있는 그대로 진심으로 믿으면 그만입니다. 절대 계산은 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계산 없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값없이” 주시는 것입니다. ‘값없이’라는 말은 헐값이란 말이 아닙니다. 계산할 수 없이 귀한 것을 값없이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제가 최근의 보도를 보니까 새로운 용어가 하나 생긴 것 같습디다. 저는 쇼핑을 잘 안하는데 TV광고는 즐겨 보는 편입니다. 그런데 쇼핑의 인기 품목들이 있더군요. 브랜드가 뭐냐 했더니 웰빙! 저 처음 알았습니다. 웰빙 주택, 웰빙 냉장고, 오만가지가 다 있더라고요. 웰빙이라는 글자가 붙은 것들을 사면 행복해지고 편안해지고 기쁘고 건강해지는 것처럼 생각하게 합니다. 모든 것이 다 웰빙입니다. 웰빙 글자가 붙어야 장사가 됩니다. 웰빙의 남용입니다. 우리 경동교회도 소위 장사가 잘 되려면 웰빙 교회로 포장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우스운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신앙은 실제로 웰빙입니다. 어떤 웰빙인지 제가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야웨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릴 적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웰빙의 삶을 주셨습니다. 사백 년 동안 종살이하던 이집트에서 끌어내셨습니다. 그러고서 ‘이제 이 백성을 내가 사랑하는 백성으로 만들겠다. ’고 하시면서, 그 대신에 이스라엘 백성은 계약서에 서명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 계약서의 내용은,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는 조항으로 시작되는 십계명입니다. 이 계약서를 모세를 통해서 돌 두 판에다가 다 새겼습니다.
이 계약서를 위반하자 여호와 하나님은 벌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망하고 백성은 바벨론의 포로가 되게 하셨습니다. 완전히 식민지로 전락했습니다. 이것이 계약 위반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진노가 너무나 견디기 힘드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여호와 하나님, 언제까지 이 고난을 주시렵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탄원을 들으시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읽은 구약 본문 예레미야서 말씀입니다.
“내가 용서하고 구원해줄 테니, 두 가지를 같이 하자. 첫째, 내가 모세를 통해서 계약서를 썼는데, 이제 전혀 다른 방식으로 계약서를 쓰겠다. 계약서를 돌판에 새기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슴에, 마음판에 쓰겠다. 그리고 둘째로, 마음판에 쓴 계약서에 서명하자. 나는 너희의 여호와 하나님, 너희들은 나의 백성이다. ”
야웨께서는 옛 계약을 파기하고 새로운 계약서를 만드시되, 그것을 가슴판에다가 새깁니다. 사람이 죽어도 가슴판의 계약은 남습니다. 아무리 죄를 지어도 가슴 속에 새겨진 여호와 하나님의 계약은 없어질 수가 없습니다. 계약은 파기할 수 없습니다. 이 계약이 뭔지 아십니까 이스라엘에게 준 여호와 하나님의 웰빙 계약입니다. 웰빙이 뭔지 아십니까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여호와 하나님, 우리는 당신의 백성이라는 약속 가운데 사는 것이 곧 웰빙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 둘이 함께 즐기는 행복, 둘이 함께 살며 누리는 기쁨, 이게 웰빙이지, 다른 게 웰빙이 아닙니다. 건강, 행복, 편안한 것, 다 우리한테 복입니다. 그러나 더불어 누리는 행복, 그것도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누리는 행복보다 더 큰 웰빙은 없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아버지는 내 안에, 나는 아버지 안에 있습니다. ” 아버지가 아들 안에 있고 아들이 아버지 안에 있습니다. 하나입니다. 그 하나 된 데에다 우리를 포함시키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 속에, 그분은 우리 속에 있게 하십니다. 우리 모두의 웰빙을 위해서! 이것이 예수께서 우리에게 오신 목적입니다.
예수께서는 인간의 몸을 입는 방식으로 우리와 함께 계셨습니다. 그 예수님은 이제 우리를 떠나십니다. 임무를 교대하십니다. 성령이 성자와 임무를 교대합니다. 이제부터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이 새겨진 우리의 가슴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을 통해서 구원의 역사를 계속하십니다. 보이지 않고 만져볼 수는 없지만, 그러나 느끼고 감지할 수 있는 성령의 역사를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성령은 우리 마음속에 새겨진 여호와 하나님의 계약의 보증입니다.
임무를 교대하시는 예수께서는, 다시 돌아오겠다고 하셨습니다. 부활절 마지막 주일인 오늘 주님이 다시 온다는 그 약속 때문에 저는 예수를 믿고 기다립니다. 소망의 기쁨을 누립니다. 오신다는 약속이 없었다면,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그분, 약속도 하지 않은 그분을 우리가 언제까지 바라보면서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묻습니다. 그분이 언제 오시느냐고! 그 나라는 언제 임하느냐고! 그 시간과 때는 여호와 하나님이 결정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받은 약속이 있습니다. 역사의 종말이 오기 전에도 그분은 매일 매순간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맛볼 수 있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가슴 속에서, 우리들 가운데에서 하늘나라의 기쁨을 누리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먼 미래에 이루어질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만 믿고, 하늘만을 쳐다보고 사는 사람은 복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웰빙을 누릴 자격이 없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매순간마다 성령을 통해서 하늘의 기쁨을 누리며 사는 자만이 복된 사람입니다. 이것이 오늘 그리스도가 승천하시며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이자 기쁨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면서 매일같이 성령이 미리 마련해주시는 여호와 하나님나라의 기쁨을 맛보면서 오늘을 살아갑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지만 세상을 넘어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통 중에 살지만 고통을 넘어서 희망을 안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절망 가운데에서 살지만 절망을 뛰어넘는 새로운 생명의 희망을 순간마다 누리며 살아갑니다. 이 사실을 성령이 깨우치십니다.
성령은 이 작은 천국을 우리 개개인에게만 아니라 우리 가정에도, 우리 교회에도, 우리나라에도 , 아니 온 세계에 주십니다. 그리하여 우리 하나 하나가, 가정이, 교회가, 사회가 바뀌게 됩니다. 마음의 평화가 이루어지고 세계에 평화가 정착됩니다. 전쟁이 찌든 곳도 성령이 오시면 평화로운 곳으로 바뀝니다. 이런 변화의 역사, 갱신의 역사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절에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으로 알고, 그 변화의 역사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바뀝니다. 새 생명으로 바뀝니다. 성령이 오시면. 이것이 우리가 기쁘게 살아갈 근거입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복입니다. 이 복을 비켜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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