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 이 사람은 평강이 될 것이라
본문
성탄절을 앞둔 주일을 맞이하여 아기 예수께서 주시는 평화와 기쁨이 오늘 이 예배에 참석한 성도들에게 차고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구약성경에는 메시아가 오실 것이 여러 군데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미가서 5장은 그 가운데에서 중요한 예언 가운데 하나입니다.
미가는 먼저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것을 예언합니다.
미가는 예수님이 태어나기 700년 이전의 예언자입니다. 700년 전에 메시아가 출생하실 곳을 어떻게 그렇게 정확하게 맞출 수 있을까, 참 신기한 일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일, 특히 구원의 역사는 여호와 하나님의 치밀하신 계획 속에서 진행되고 있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의 모든 비밀을 여호와 하나님의 대변인들이라고 할 수 있는 예언자들에게 남김없이 알려주신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렇게 신기하게 여길 필요도 없습니다.
미가는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것을 예언하면서 ‘그는 어떤 분인가’ 하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는 그 분은 우리를 다스릴 분입니다.
2절에서 메시아를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라고 부르고 있지요.
우리는 예수님의 통치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이 나의 통치자라고 인정하고 예수님의 통치에 복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는데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려면 꼭 이렇게 해야합니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는 그 분은 모든 것의 근원이요, 시작이 되는 분입니다.
2절 뒷부분은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상고에,” 히브리말로 ‘미케뎀 미메 올람,’ 이 말은 문자적으로는 ‘아득한 옛날’이라고 풀이할 수 있는데 속뜻은 “모든 것의 시작,”이렇습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이것을 “태초에”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은 “태초에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인데 영어성경은 이것을 ‘In the
beginning'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메시아는 상고에, 영원 전부터, 태초에, 모든 것이 시작될 때부터 계신 분이라는 것을 요한복음은 1장 1절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요1:1)라고 ‘요한식’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식’이라는 것은 요한이 목회하고 있던 에베소 사람들이 좋아하고 잘 이해하는, 좀 추상적인 느낌을 주는 표현방식입니다.
요한 1서 2장 13절과 14절에서는 예수님을 “태초부터 계신 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밧모 섬에서 귀양생활을 하고 있는 사도 요한에게 “나는 알파와 오메가”(계1:8)라고 하셨습니다.
알파는 ‘모든 것의 시작’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가장 근본적인 시작, 가장 위대한 시작에 나를 연결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찬송가 53장 “하늘에 가득 찬 영광의 여호와 하나님,” 이 찬송가의 4절은
주 앞에 나올 때 우리 맘이 기쁘고 그 말씀 힘 되어 희망 솟아오른다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옵시고 영원에 잇대어 살아가게 하소서
라고 되어 있는데 근본이 상고에, 영원에 있는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영원에 잇대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저는 제주도 생활을 몇 해 한 체험이 있는데 제주도 주민끼리 만나서 인사를 할 때 ‘조상께서 언제 입도(入島)하셨습니까’ 묻는 것을 몇 번 보았습니다. ‘당신네 집안은 언제부터 이 섬에서 살고 있습니까’ 하는 것이지요.
오래된 분들일수록 더 인정을 받는 것 같습니다. ‘우리 조상은 조선 왕조 때 들어왔습니다’ 하는 분은 ‘고려 때 들어왔습니다’ 하는 분 앞에서 그저 가만히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625 때 제주도에 피난 가서 그냥 눌러 살고 있는 분들이 많은데 그 분들은 여기 끼지 못하더군요.
그런데 고씨, 양씨, 부씨끼리는 이런 것을 묻지 않습니다. 이 분들은 본이 제주도이기 때문입니다. 제주시에 삼성혈(姓穴)이라는 곳이 있는데 이 세 성의 시조인 고을나(高乙那), 양을라(良乙那: 뒤에 梁이 됨), 부을나(夫乙那)가 태어난 곳이라고 합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은 제주도에서 고씨, 양씨, 부씨로 살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 세상과 우주의 근본, 시작에 내가 직접 연결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복사할 때 복사된 것을 가지고 다시 복사하면 좀 흐립니다. 시작이신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그렇게 복사하는 것이 아니라 원본을 가지고 복사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본적인 진리를, 예수님의 모습을 선명하게 나타내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는 그 분은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는 분입니다.
5절을 보세요. “이 사람은 평강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의 “평강”이라는 말은 미가서 5장에서 중요한 말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가장 중요한 말, 키워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평강은 무한대의 무게를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평강은 ‘샬롬’이라는 말을 번역한 것입니다. 평화, 화평, 평안, 모두 이 말을 번역한 것입니다.
샬롬은 수동적인 것이 아니고 능동적인 것입니다.
소극적인 것이 아니고 적극적인 것입니다.
샬롬은 한두 가지의 부분적인 복이 아닙니다. 종합적인 복입니다. 종합 비타민과 같이 사람에게 좋은 모든 것이 여기에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샬롬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하면 만사 축복, 모든 축복을 말합니다.
수험생들에게는 합격이 샬롬의 축복이고, 아픈 사람에게는 건강이 샬롬의 축복이고, 결혼 적령기의 미혼남녀에게는 좋은 신랑과 신부가 샬롬의 축복이고, 사업을 하는 사람에게는 많은 이익이 샬롬의 축복이고, 운동 선수에게는 우승이 샬롬의 축복입니다.
성도 여러분에게 샬롬의 복이 임하기를 기원합니다.
“이 사람은 평강이 될 것이라” 이 말은 평강이 인격화된, 아주 강한 표현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평화를 가져다 줄 것이다”( 표준새번역개정판)라는 뜻입니다.
“모두 그가 이룩한 평화를 누리며 살리라”(공동번역 성서 개정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평강의 조성자’라는 뜻입니다.
지난 주일에 진리에 대해서 말씀드리면서 ‘성경은 진리 덩어리입니다’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미가는 “예수님은 ‘평화 덩어리’가 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평화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내면의 평화, 가정의 평화, 사회의 평화, 부족간의 평화, 나라의 평화, 우리 나라에는 남북간의 평화, 세계평화, 자연과의 평화, 나가서는 우주적인 평화,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과의 평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평화를 주시는 분입니다.
먼저 내면의 평화를 살펴봅니다.
여러분, ‘치유’라는 말을 많이 들으셨을 것입니다. 요즘 세상에 상처가 많기 때문인지 이 치유라는 말이 점점 더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습니다.
제가 잘 아는 분이 은퇴를 하고서 시간의 여유가 생기니까 더 공부를 하겠다고 준비를 하기에 무엇을 공부하나 보았더니 치유상담대학원에 입학을 하더군요. 그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판단된 모양입니다.
치유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내적 치유’입니다. 어느 상담전문가가 내면 세계의 치유라는 책을 냈는데 나오자마자 베스트 셀러가 되었고 3년 전에 나왔는데 지금까지 꾸준히 보급되고 있습니다.
작년에 기도원에 며칠 들어가 있는데 첫날에는 조용했습니다. 이틀째 되는 날 사람들이 많이 몰려와서 기도원이 꽉 찼습니다. 그 날부터 어느 강사가 와서 그 기도원에서 내적 치유 세미나를 하는데 거기에 참석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내적 치유는 마음의 상처를 낫게 하는 것입니다. 내적 치유가 이루어져야 다른 치유도 가능해집니다.
평화도 내면의 평화, 마음의 평화가 중요합니다.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나네”라는 찬송이 있지요. 찬송가 469장인데 2절 가사를 생각해 보세요.
내 맘속에 솟아난 이 평화는 깊이 묻히인 보배로다
나의 보화를 캐내어 가져갈 자가 그 누구랴 안심일세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여러분, 마음 속의 평화를 보배로 여기고 잘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친구로 삼을 때 참 평화를 누린다고 하였으니 예수님을 맞아들여 참 평화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개인의 내면의 평화가 이루어져야 다른 평화가 가능합니다. 사회의 정의와 평화는 그 사회 안의 개개인들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그들의 마음 속에 그의 평화를 간직하고 그의 의로운 가르침을 따라 사는 정도에 따라 넓게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은 역사와 현실이 증명해 주는 사실입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서4장 6절과 7절에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여호와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고 말씀했는데 이 말씀 그대로 여러분과 저의 마음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평강을 누리고 그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기를 바랍니다.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킬 때 우리는 평화로운 말을 할 수 있습니다.
평화로운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이제 나라의 평화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올해 우리 나라는 평화롭지 못했습니다.
대학교수들은 이 시대가 나가는 방향을 제시하는 오피니언 리더들인데 한 주간지가 대학교수들 가운데서 글을 활발하게 쓰고 있는 76명에게 올해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한자숙어가 무엇이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1위로 뽑힌 말이 무엇인지 아시지요 ‘우왕좌왕’입니다.
2위에서 5위까지는 점입가경, 이전투구, 지리멸렬, 아수라장, 이런 말들이 뽑혔다고 합니다. 모두 한국 사회의 모습을 잘 나타내는 말들이고 올해 나라가 평안하지 못하고 평화스럽지도 못했음을 알려주는 말들입니다.
우리는 ‘아, 참 어려운 가운데, 어지러운 가운데 올해를 보냈다’ 하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그런 가운데서 이 한 해를 보내느라고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더 많은 사람들이 아기 예수를 마음에 맞아들이고, 교회가 평화의 사자로서 사명을 다 해이 나라가 평화로운 나라가 되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그리스도께서 주신 평화를 망각한 채 형제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일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평강의 왕을 섬기는 한 백성, 한 형제로서 서로 사랑으로 감싸주고 이끌어야 합니다.
이제 남북간의 평화를 생각합니다.
미가는 3절에서 그 분께서는 나라가 유지되게 하고 돌아오게 할 것이라고, 회복시키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지금 포로생활이 예고된 가운데 있습니다. 예고라고 하는 것보다는 ‘선고’라고 하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에 그 벌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끌려가서 포로생활을 할 것이라고 선고하셨습니다.
미가는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생활을 하다가 사라질 것이 아니라, 존속되고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의 현실에 비추어보면서 읽을 때 우리는 분단이 끝나고 통일이 오게 해 달라고 다시 한 번 기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분단은 이스라엘의 포로생활과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열흘이 지나면 2003년이 끝납니다. 2003년을 보내면서 우리가 가져야 할 첫 번째 생각은 무엇입니까
여러분, 이 질문에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제가 원하는 답을 말씀하실 수 있는 분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제가 원하는 답은 한 개인의 취향에 맞는 답이 아니라 한반도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해야 할 바람직한 답인데요, ‘아, 올해도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보내는구나!’ 하는 것이 되어야합니다.
우리 나라의 문제 가운데 하나가 통일에 대한 인식이 점점 희박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북한과 단절되어 있을 때는 통일에 대해 많이 이야기했습니다. 간절하게 기도도 했습니다.
지금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북한과 교류가 확대되고 있습니다. 사람의 왕래도 늘어나고 교역도 늘어나고 있는데 그렇게 되면서 이상하게 통일에 대한 감각이 무뎌졌습니다. 이것은 통일에 대한 각종 여론조사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통일을 위한 기도 소리가 많이 희미해졌습니다.
이것은 분단현실에 살고 있는 국민으로서 죄를 짓는 것입니다.
우리는 통일에 대한 감각을 새롭게 하고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통일을 기원해야 하겠습니다.
4절을 보세요. 마지막 부분에 “땅 끝”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는 그가 창대하여 땅 끝까지 미치리라
‘땅 끝이 어디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전에는 지리적인 거리를 기준으로 해서 답을 찾았습니다.
먼 곳을 땅 끝이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상징적인 의미를 기준으로 답을 찾습니다. 거리와 상관없이 전도하기 어려운 곳을 땅 끝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 시대의 대표적인 땅 끝은 북한입니다.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 끝까지 미치리라” 우리는 주님의 통치가 북한까지 미치도록 기도하며 힘써야 할 것입니다.
세계의 평화를 생각합니다.
미가는 장차 이스라엘을 다스릴 분이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과 그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땅끝까지 통치하며 모든 백성에게 그가 이룩한 평화를 누리며 살게 하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계의 평화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메시아는 세계의 평화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제거하실 것입니다.
6절에서 앗수르 땅이 황폐해질 것을 말하고 있는데 앗수르는 당시 이스라엘을 자주 침공하며 괴롭히던 강한 세력이었습니다.
동시에 앗수르는 매 시대마다 여호와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원수를 말합니다. 지금 이 시대의 앗수르는 공산주의, 세속주의, 향락풍조, 여호와 하나님께 순종하지 세력들, 여호와 하나님을 부인하는 모든 세력들입니다.
또 니므롯 땅 어귀가 황폐해질 것을 말하고 있는데 니므롯은 세상의 첫 용사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이 사람이 니느웨를 건설했다고 창세기 12장 10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라크에 군대를 보내는 일이 점점 구체적으로 진행되고 있는데 처음에는 한국군이 주둔할 곳으로 모슬이란 곳이 꼽혔습니다. 이 모슬이 바로 예전의 니느웨였었다고 합니다. 니느웨는 앗수르 왕국의 수도였습니다.
니므롯은 바벨론의 시조입니다. 니므롯의 땅에 세워진 바벨론도 이스라엘을 많이 괴롭혔고 이스라엘 민족을 포로로 잡아가서 70년 동안 억류해 두었습니다.
본문 밖에 있는 10절을 보세요. 여호와 하나님은 군마와 병거를 부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라의 힘이라고 하면 경제적인 힘, 외교적인 힘, 문화적인 힘, 국민들의 단결력, 여러 가지로 다양하지만 그래도 가장 기본적인 것은 군사적인 힘입니다.
그래서 북한이 식량위기를 겪으면서도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비용을 쓰고 있고 핵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평양에 가니까 곳곳에 선군통치(先軍統治)라는 말이 여기 저기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여러 분도 북한과 관련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이 말을 보셨을 것입니다. 선군통치는 ‘군대를 우선시하는 통치’라는 뜻입니다.
북한에서 군대 우선시의 선군통치가 아닌, 선한 임금이 다스리는 선군통치(善君統治)가 이뤄져야 하겠습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그의 통치를 통해 군사력이 세계를 지배하는 일에 종지부를 찍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본문 앞의 미가서 4장 3절과 4절을 보세요. 거기 참 아름다운 평화의 노래가 있습니다.
그가 많은 민족들 사이의 일을 심판하시며
먼 곳 강한 이방 사람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고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을 것이라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의 입이 이같이 말씀하셨음이라
얼마나 아름다운 노래입니까
메시아가 이 세상을 다스릴 때 이와 같이 아름다운 평화가 이 땅에 실현됩니다.
세계의 평화를 이루려는 노력이 과거에도 많이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이것을 위한 조약도 많이 체결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허사입니다.
내면의 평화, 나라 안의 평화, 남북사이의 평화, 세계의 평화에 이어 여호와 하나님과의 평화에 대해 살펴봅니다.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과 죄인인 우리를 화해시켜 평화가 이뤄지게 하는 분입니다.
인간과 여호와 하나님 사이는 죄의 담으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이 죄의 담은 38선 보다도 더 무섭습니다. 예수님은 이 담을 무너뜨렸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백성에게 평강을 주신다는 말은 그가 여호와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을 화목하게 하시는 중보자가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5장 1절에서 우리에게 예수를 믿은 다음에 가장 급한 일은 여호와 하나님과 평화를 이루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여호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내면의 평화가 모든 평화의 알파라면 여호와 하나님과의 평화는 모든 평화의 오메가입니다.
영원한 평화의 세계는 인간들이 여호와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회복되고 재수립될 때, 여호와 하나님과 평화를 맺을 때 비로소 오는 것입니다.
미가는 인간들이 여호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수립하지 않는다면 인간과 인간 사이에 참된 평화와 조화로운 관계가 이루어질 수 없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예수님이 평강이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최초의 이방인 신자인 고넬료의 청함을 받아 가이사랴에 있는 그 집에 가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고넬료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이 모여 기다리고 있습니다.
글이나 말이나 설교나 모두 시작이 중요한데 베드로는 사도행전 10장에 기록된 이 설교의 시작 부분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화평의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행10:34).
에베소서 2장 14절은 예수님에 대해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라고, 예수님은 평화 그 자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탄에 대해 이야기할 때 제일 많이 나오는 단어가 바로 평강입니다.
이사야는 예수님의 탄생을 예언하면서 9장 6절에서 아기 예수를 평강의 왕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예수님께서 태어났을 때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했는데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라고 했습니다.
그 영향으로 성탄 찬송에는 “평화의 왕”이라는 말이 여러 군데에 들어가 있습니다.
찬송가 108장 4절,
평화의 왕이 나시니
목자 같이 우리도 구주 찾아뵈옵고
기쁜 찬송 부르세 기쁜 찬송 부르세
찬송가 112장 1절,
그 맑고 한한 밤중에 뭇 천사 내려와
그 손에 비파 들고서 다 찬송하기를
평강의 왕이 오시니다 평안하여라
그 소란하던 세상이 다 고요하도다
120장 2절,
온 세상 모든 사람들 잠자는 동안에
평화의 왕이 세상에 탄생하셨도다
저 새벽별이 홀로 그 일을 아는듯
밤새껏 귀한 그 일을 말없이 지켰네
126장 4절
의로우신 예수는 평화의 왕이시고
세상빛이 되시며 우리 생명 되시네
죄인들을 불러서 거듭나게 하시고
영생하게 하시니 왕께 찬양하여라
영생하게 하시니 왕께 찬양하여라
오늘 우리가 부른 찬송가 117장은 지금 우리는 많이 부르는 편이 아니지만 18세기와 19세기에서는 가장 많이 불리던 찬송입니다.
크리스마스 캐롤이라는 유명한 소설이 있습니다. 디킨슨이 썼는데 스쿠리치 영감이 이 소설의 주인공입니다. 이 소설에도 이 찬송이 등장합니다.
1절,
만백성 기뻐하여라 하늘의 평화
저 마귀 권세 이기고 우리를 구했네
구세주의 탄생하심을 다 함께 기리세
오 기쁘다 반가운 소식 구주 오셨네
이 땅 위에 평화 내리시네
3절,
그 천사가 말하기를 무서워 말아라
동정녀의 몸을 빌어 주 탄생하셨네
높은 곳엔 주께 영광 땅에는 평화
오 기쁘다 반가운 소식 구주 오셨네
이 땅 위에 평화 내리시네
아기 예수의 탄생과 평강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평강, 평화가 빠진 성탄은 그야말로 노른자위가 없는 달걀과 같습니다.
이제 사흘이 지나면 올해의 성탄절이 됩니다.
성도 여러분, 다스릴 자로 오시는 예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내 모든 것이 근원으로, 시작으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특히 “이 사람은 평강이 될 것이라” 이라는 말씀을 생각하며 평화를 깊이 생각하는 성탄절이 되기 바랍니다.
아까 말씀 드렸는데 요즘은 한 해가 끝나가면 그 해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 단어 또는 글자를 고릅니다. 일본에서는 한 글자를 고르더군요.
올해 성탄절에는 “평강”이 우리의 중심단어가 되기 바랍니다.
내면의 평화를 이루는 성탄절이 되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한없이, 한없이 평화스러워지기 바랍니다.
마음의 평화가 마음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밖으로 나와 이웃과의 평화, 가정의 평화가 이루어지기 바랍니다.
그것이 나라의 평화로 연결되고 연장되기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남북간에 평화를 주시고 나가서 통일을 주시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세계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또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드리지 않았지만 자연과의 평화, 환경보호 문제를 위해서도 힘쓰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과의 평화를 이루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이를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 사람은 평강이 될 것이라” 이 말씀이 우리 가운데, 가정과 사회에, 나라에, 세계에 울려 퍼지는 성탄절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구약성경에는 메시아가 오실 것이 여러 군데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미가서 5장은 그 가운데에서 중요한 예언 가운데 하나입니다.
미가는 먼저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것을 예언합니다.
미가는 예수님이 태어나기 700년 이전의 예언자입니다. 700년 전에 메시아가 출생하실 곳을 어떻게 그렇게 정확하게 맞출 수 있을까, 참 신기한 일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일, 특히 구원의 역사는 여호와 하나님의 치밀하신 계획 속에서 진행되고 있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의 모든 비밀을 여호와 하나님의 대변인들이라고 할 수 있는 예언자들에게 남김없이 알려주신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렇게 신기하게 여길 필요도 없습니다.
미가는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것을 예언하면서 ‘그는 어떤 분인가’ 하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는 그 분은 우리를 다스릴 분입니다.
2절에서 메시아를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라고 부르고 있지요.
우리는 예수님의 통치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이 나의 통치자라고 인정하고 예수님의 통치에 복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는데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려면 꼭 이렇게 해야합니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는 그 분은 모든 것의 근원이요, 시작이 되는 분입니다.
2절 뒷부분은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상고에,” 히브리말로 ‘미케뎀 미메 올람,’ 이 말은 문자적으로는 ‘아득한 옛날’이라고 풀이할 수 있는데 속뜻은 “모든 것의 시작,”이렇습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이것을 “태초에”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은 “태초에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인데 영어성경은 이것을 ‘In the
beginning'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메시아는 상고에, 영원 전부터, 태초에, 모든 것이 시작될 때부터 계신 분이라는 것을 요한복음은 1장 1절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요1:1)라고 ‘요한식’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식’이라는 것은 요한이 목회하고 있던 에베소 사람들이 좋아하고 잘 이해하는, 좀 추상적인 느낌을 주는 표현방식입니다.
요한 1서 2장 13절과 14절에서는 예수님을 “태초부터 계신 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밧모 섬에서 귀양생활을 하고 있는 사도 요한에게 “나는 알파와 오메가”(계1:8)라고 하셨습니다.
알파는 ‘모든 것의 시작’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가장 근본적인 시작, 가장 위대한 시작에 나를 연결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찬송가 53장 “하늘에 가득 찬 영광의 여호와 하나님,” 이 찬송가의 4절은
주 앞에 나올 때 우리 맘이 기쁘고 그 말씀 힘 되어 희망 솟아오른다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옵시고 영원에 잇대어 살아가게 하소서
라고 되어 있는데 근본이 상고에, 영원에 있는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영원에 잇대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저는 제주도 생활을 몇 해 한 체험이 있는데 제주도 주민끼리 만나서 인사를 할 때 ‘조상께서 언제 입도(入島)하셨습니까’ 묻는 것을 몇 번 보았습니다. ‘당신네 집안은 언제부터 이 섬에서 살고 있습니까’ 하는 것이지요.
오래된 분들일수록 더 인정을 받는 것 같습니다. ‘우리 조상은 조선 왕조 때 들어왔습니다’ 하는 분은 ‘고려 때 들어왔습니다’ 하는 분 앞에서 그저 가만히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625 때 제주도에 피난 가서 그냥 눌러 살고 있는 분들이 많은데 그 분들은 여기 끼지 못하더군요.
그런데 고씨, 양씨, 부씨끼리는 이런 것을 묻지 않습니다. 이 분들은 본이 제주도이기 때문입니다. 제주시에 삼성혈(姓穴)이라는 곳이 있는데 이 세 성의 시조인 고을나(高乙那), 양을라(良乙那: 뒤에 梁이 됨), 부을나(夫乙那)가 태어난 곳이라고 합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은 제주도에서 고씨, 양씨, 부씨로 살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 세상과 우주의 근본, 시작에 내가 직접 연결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복사할 때 복사된 것을 가지고 다시 복사하면 좀 흐립니다. 시작이신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그렇게 복사하는 것이 아니라 원본을 가지고 복사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본적인 진리를, 예수님의 모습을 선명하게 나타내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는 그 분은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는 분입니다.
5절을 보세요. “이 사람은 평강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의 “평강”이라는 말은 미가서 5장에서 중요한 말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가장 중요한 말, 키워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평강은 무한대의 무게를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평강은 ‘샬롬’이라는 말을 번역한 것입니다. 평화, 화평, 평안, 모두 이 말을 번역한 것입니다.
샬롬은 수동적인 것이 아니고 능동적인 것입니다.
소극적인 것이 아니고 적극적인 것입니다.
샬롬은 한두 가지의 부분적인 복이 아닙니다. 종합적인 복입니다. 종합 비타민과 같이 사람에게 좋은 모든 것이 여기에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샬롬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하면 만사 축복, 모든 축복을 말합니다.
수험생들에게는 합격이 샬롬의 축복이고, 아픈 사람에게는 건강이 샬롬의 축복이고, 결혼 적령기의 미혼남녀에게는 좋은 신랑과 신부가 샬롬의 축복이고, 사업을 하는 사람에게는 많은 이익이 샬롬의 축복이고, 운동 선수에게는 우승이 샬롬의 축복입니다.
성도 여러분에게 샬롬의 복이 임하기를 기원합니다.
“이 사람은 평강이 될 것이라” 이 말은 평강이 인격화된, 아주 강한 표현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평화를 가져다 줄 것이다”( 표준새번역개정판)라는 뜻입니다.
“모두 그가 이룩한 평화를 누리며 살리라”(공동번역 성서 개정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평강의 조성자’라는 뜻입니다.
지난 주일에 진리에 대해서 말씀드리면서 ‘성경은 진리 덩어리입니다’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미가는 “예수님은 ‘평화 덩어리’가 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평화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내면의 평화, 가정의 평화, 사회의 평화, 부족간의 평화, 나라의 평화, 우리 나라에는 남북간의 평화, 세계평화, 자연과의 평화, 나가서는 우주적인 평화,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과의 평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평화를 주시는 분입니다.
먼저 내면의 평화를 살펴봅니다.
여러분, ‘치유’라는 말을 많이 들으셨을 것입니다. 요즘 세상에 상처가 많기 때문인지 이 치유라는 말이 점점 더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습니다.
제가 잘 아는 분이 은퇴를 하고서 시간의 여유가 생기니까 더 공부를 하겠다고 준비를 하기에 무엇을 공부하나 보았더니 치유상담대학원에 입학을 하더군요. 그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판단된 모양입니다.
치유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내적 치유’입니다. 어느 상담전문가가 내면 세계의 치유라는 책을 냈는데 나오자마자 베스트 셀러가 되었고 3년 전에 나왔는데 지금까지 꾸준히 보급되고 있습니다.
작년에 기도원에 며칠 들어가 있는데 첫날에는 조용했습니다. 이틀째 되는 날 사람들이 많이 몰려와서 기도원이 꽉 찼습니다. 그 날부터 어느 강사가 와서 그 기도원에서 내적 치유 세미나를 하는데 거기에 참석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내적 치유는 마음의 상처를 낫게 하는 것입니다. 내적 치유가 이루어져야 다른 치유도 가능해집니다.
평화도 내면의 평화, 마음의 평화가 중요합니다.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나네”라는 찬송이 있지요. 찬송가 469장인데 2절 가사를 생각해 보세요.
내 맘속에 솟아난 이 평화는 깊이 묻히인 보배로다
나의 보화를 캐내어 가져갈 자가 그 누구랴 안심일세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여러분, 마음 속의 평화를 보배로 여기고 잘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친구로 삼을 때 참 평화를 누린다고 하였으니 예수님을 맞아들여 참 평화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개인의 내면의 평화가 이루어져야 다른 평화가 가능합니다. 사회의 정의와 평화는 그 사회 안의 개개인들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그들의 마음 속에 그의 평화를 간직하고 그의 의로운 가르침을 따라 사는 정도에 따라 넓게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은 역사와 현실이 증명해 주는 사실입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서4장 6절과 7절에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여호와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고 말씀했는데 이 말씀 그대로 여러분과 저의 마음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평강을 누리고 그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기를 바랍니다.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킬 때 우리는 평화로운 말을 할 수 있습니다.
평화로운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이제 나라의 평화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올해 우리 나라는 평화롭지 못했습니다.
대학교수들은 이 시대가 나가는 방향을 제시하는 오피니언 리더들인데 한 주간지가 대학교수들 가운데서 글을 활발하게 쓰고 있는 76명에게 올해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한자숙어가 무엇이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1위로 뽑힌 말이 무엇인지 아시지요 ‘우왕좌왕’입니다.
2위에서 5위까지는 점입가경, 이전투구, 지리멸렬, 아수라장, 이런 말들이 뽑혔다고 합니다. 모두 한국 사회의 모습을 잘 나타내는 말들이고 올해 나라가 평안하지 못하고 평화스럽지도 못했음을 알려주는 말들입니다.
우리는 ‘아, 참 어려운 가운데, 어지러운 가운데 올해를 보냈다’ 하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그런 가운데서 이 한 해를 보내느라고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더 많은 사람들이 아기 예수를 마음에 맞아들이고, 교회가 평화의 사자로서 사명을 다 해이 나라가 평화로운 나라가 되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그리스도께서 주신 평화를 망각한 채 형제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일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평강의 왕을 섬기는 한 백성, 한 형제로서 서로 사랑으로 감싸주고 이끌어야 합니다.
이제 남북간의 평화를 생각합니다.
미가는 3절에서 그 분께서는 나라가 유지되게 하고 돌아오게 할 것이라고, 회복시키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지금 포로생활이 예고된 가운데 있습니다. 예고라고 하는 것보다는 ‘선고’라고 하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에 그 벌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끌려가서 포로생활을 할 것이라고 선고하셨습니다.
미가는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생활을 하다가 사라질 것이 아니라, 존속되고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의 현실에 비추어보면서 읽을 때 우리는 분단이 끝나고 통일이 오게 해 달라고 다시 한 번 기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분단은 이스라엘의 포로생활과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열흘이 지나면 2003년이 끝납니다. 2003년을 보내면서 우리가 가져야 할 첫 번째 생각은 무엇입니까
여러분, 이 질문에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제가 원하는 답을 말씀하실 수 있는 분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제가 원하는 답은 한 개인의 취향에 맞는 답이 아니라 한반도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해야 할 바람직한 답인데요, ‘아, 올해도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보내는구나!’ 하는 것이 되어야합니다.
우리 나라의 문제 가운데 하나가 통일에 대한 인식이 점점 희박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북한과 단절되어 있을 때는 통일에 대해 많이 이야기했습니다. 간절하게 기도도 했습니다.
지금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북한과 교류가 확대되고 있습니다. 사람의 왕래도 늘어나고 교역도 늘어나고 있는데 그렇게 되면서 이상하게 통일에 대한 감각이 무뎌졌습니다. 이것은 통일에 대한 각종 여론조사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통일을 위한 기도 소리가 많이 희미해졌습니다.
이것은 분단현실에 살고 있는 국민으로서 죄를 짓는 것입니다.
우리는 통일에 대한 감각을 새롭게 하고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통일을 기원해야 하겠습니다.
4절을 보세요. 마지막 부분에 “땅 끝”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는 그가 창대하여 땅 끝까지 미치리라
‘땅 끝이 어디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전에는 지리적인 거리를 기준으로 해서 답을 찾았습니다.
먼 곳을 땅 끝이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상징적인 의미를 기준으로 답을 찾습니다. 거리와 상관없이 전도하기 어려운 곳을 땅 끝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 시대의 대표적인 땅 끝은 북한입니다.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 끝까지 미치리라” 우리는 주님의 통치가 북한까지 미치도록 기도하며 힘써야 할 것입니다.
세계의 평화를 생각합니다.
미가는 장차 이스라엘을 다스릴 분이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과 그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땅끝까지 통치하며 모든 백성에게 그가 이룩한 평화를 누리며 살게 하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계의 평화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메시아는 세계의 평화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제거하실 것입니다.
6절에서 앗수르 땅이 황폐해질 것을 말하고 있는데 앗수르는 당시 이스라엘을 자주 침공하며 괴롭히던 강한 세력이었습니다.
동시에 앗수르는 매 시대마다 여호와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원수를 말합니다. 지금 이 시대의 앗수르는 공산주의, 세속주의, 향락풍조, 여호와 하나님께 순종하지 세력들, 여호와 하나님을 부인하는 모든 세력들입니다.
또 니므롯 땅 어귀가 황폐해질 것을 말하고 있는데 니므롯은 세상의 첫 용사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이 사람이 니느웨를 건설했다고 창세기 12장 10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라크에 군대를 보내는 일이 점점 구체적으로 진행되고 있는데 처음에는 한국군이 주둔할 곳으로 모슬이란 곳이 꼽혔습니다. 이 모슬이 바로 예전의 니느웨였었다고 합니다. 니느웨는 앗수르 왕국의 수도였습니다.
니므롯은 바벨론의 시조입니다. 니므롯의 땅에 세워진 바벨론도 이스라엘을 많이 괴롭혔고 이스라엘 민족을 포로로 잡아가서 70년 동안 억류해 두었습니다.
본문 밖에 있는 10절을 보세요. 여호와 하나님은 군마와 병거를 부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라의 힘이라고 하면 경제적인 힘, 외교적인 힘, 문화적인 힘, 국민들의 단결력, 여러 가지로 다양하지만 그래도 가장 기본적인 것은 군사적인 힘입니다.
그래서 북한이 식량위기를 겪으면서도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비용을 쓰고 있고 핵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평양에 가니까 곳곳에 선군통치(先軍統治)라는 말이 여기 저기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여러 분도 북한과 관련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이 말을 보셨을 것입니다. 선군통치는 ‘군대를 우선시하는 통치’라는 뜻입니다.
북한에서 군대 우선시의 선군통치가 아닌, 선한 임금이 다스리는 선군통치(善君統治)가 이뤄져야 하겠습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그의 통치를 통해 군사력이 세계를 지배하는 일에 종지부를 찍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본문 앞의 미가서 4장 3절과 4절을 보세요. 거기 참 아름다운 평화의 노래가 있습니다.
그가 많은 민족들 사이의 일을 심판하시며
먼 곳 강한 이방 사람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고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을 것이라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의 입이 이같이 말씀하셨음이라
얼마나 아름다운 노래입니까
메시아가 이 세상을 다스릴 때 이와 같이 아름다운 평화가 이 땅에 실현됩니다.
세계의 평화를 이루려는 노력이 과거에도 많이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이것을 위한 조약도 많이 체결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허사입니다.
내면의 평화, 나라 안의 평화, 남북사이의 평화, 세계의 평화에 이어 여호와 하나님과의 평화에 대해 살펴봅니다.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과 죄인인 우리를 화해시켜 평화가 이뤄지게 하는 분입니다.
인간과 여호와 하나님 사이는 죄의 담으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이 죄의 담은 38선 보다도 더 무섭습니다. 예수님은 이 담을 무너뜨렸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백성에게 평강을 주신다는 말은 그가 여호와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을 화목하게 하시는 중보자가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5장 1절에서 우리에게 예수를 믿은 다음에 가장 급한 일은 여호와 하나님과 평화를 이루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여호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내면의 평화가 모든 평화의 알파라면 여호와 하나님과의 평화는 모든 평화의 오메가입니다.
영원한 평화의 세계는 인간들이 여호와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회복되고 재수립될 때, 여호와 하나님과 평화를 맺을 때 비로소 오는 것입니다.
미가는 인간들이 여호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수립하지 않는다면 인간과 인간 사이에 참된 평화와 조화로운 관계가 이루어질 수 없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예수님이 평강이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최초의 이방인 신자인 고넬료의 청함을 받아 가이사랴에 있는 그 집에 가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고넬료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이 모여 기다리고 있습니다.
글이나 말이나 설교나 모두 시작이 중요한데 베드로는 사도행전 10장에 기록된 이 설교의 시작 부분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화평의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행10:34).
에베소서 2장 14절은 예수님에 대해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라고, 예수님은 평화 그 자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탄에 대해 이야기할 때 제일 많이 나오는 단어가 바로 평강입니다.
이사야는 예수님의 탄생을 예언하면서 9장 6절에서 아기 예수를 평강의 왕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예수님께서 태어났을 때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했는데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라고 했습니다.
그 영향으로 성탄 찬송에는 “평화의 왕”이라는 말이 여러 군데에 들어가 있습니다.
찬송가 108장 4절,
평화의 왕이 나시니
목자 같이 우리도 구주 찾아뵈옵고
기쁜 찬송 부르세 기쁜 찬송 부르세
찬송가 112장 1절,
그 맑고 한한 밤중에 뭇 천사 내려와
그 손에 비파 들고서 다 찬송하기를
평강의 왕이 오시니다 평안하여라
그 소란하던 세상이 다 고요하도다
120장 2절,
온 세상 모든 사람들 잠자는 동안에
평화의 왕이 세상에 탄생하셨도다
저 새벽별이 홀로 그 일을 아는듯
밤새껏 귀한 그 일을 말없이 지켰네
126장 4절
의로우신 예수는 평화의 왕이시고
세상빛이 되시며 우리 생명 되시네
죄인들을 불러서 거듭나게 하시고
영생하게 하시니 왕께 찬양하여라
영생하게 하시니 왕께 찬양하여라
오늘 우리가 부른 찬송가 117장은 지금 우리는 많이 부르는 편이 아니지만 18세기와 19세기에서는 가장 많이 불리던 찬송입니다.
크리스마스 캐롤이라는 유명한 소설이 있습니다. 디킨슨이 썼는데 스쿠리치 영감이 이 소설의 주인공입니다. 이 소설에도 이 찬송이 등장합니다.
1절,
만백성 기뻐하여라 하늘의 평화
저 마귀 권세 이기고 우리를 구했네
구세주의 탄생하심을 다 함께 기리세
오 기쁘다 반가운 소식 구주 오셨네
이 땅 위에 평화 내리시네
3절,
그 천사가 말하기를 무서워 말아라
동정녀의 몸을 빌어 주 탄생하셨네
높은 곳엔 주께 영광 땅에는 평화
오 기쁘다 반가운 소식 구주 오셨네
이 땅 위에 평화 내리시네
아기 예수의 탄생과 평강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평강, 평화가 빠진 성탄은 그야말로 노른자위가 없는 달걀과 같습니다.
이제 사흘이 지나면 올해의 성탄절이 됩니다.
성도 여러분, 다스릴 자로 오시는 예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내 모든 것이 근원으로, 시작으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특히 “이 사람은 평강이 될 것이라” 이라는 말씀을 생각하며 평화를 깊이 생각하는 성탄절이 되기 바랍니다.
아까 말씀 드렸는데 요즘은 한 해가 끝나가면 그 해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 단어 또는 글자를 고릅니다. 일본에서는 한 글자를 고르더군요.
올해 성탄절에는 “평강”이 우리의 중심단어가 되기 바랍니다.
내면의 평화를 이루는 성탄절이 되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한없이, 한없이 평화스러워지기 바랍니다.
마음의 평화가 마음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밖으로 나와 이웃과의 평화, 가정의 평화가 이루어지기 바랍니다.
그것이 나라의 평화로 연결되고 연장되기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남북간에 평화를 주시고 나가서 통일을 주시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세계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또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드리지 않았지만 자연과의 평화, 환경보호 문제를 위해서도 힘쓰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과의 평화를 이루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이를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 사람은 평강이 될 것이라” 이 말씀이 우리 가운데, 가정과 사회에, 나라에, 세계에 울려 퍼지는 성탄절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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