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 성탄과 동방박사
본문
오늘 이 시간에는 "성탄과 동방박사", 이러한 제목으로 같이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한 번 따라하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성탄과 동방박사. "
드디어 내일이면 새 천년 들어서 첫 번째 성탄절, 또 20세기 마지막 성탄절입니다. 성탄은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면, 지구상의 모두가 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아기 예수를 위하여, 아기 예수 때문에 성탄절을 축하하고 즐거워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은 두 말할 것도 없고, 예수를 믿고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하는 사람들마저도 성탄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고,
그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그 진정한 의미를 모르고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탄절은 그 누구의 생일이 아니라, 바로 여호와 하나님 아들되시는 예수님, 구세주되신 예수님, 메시아되신 예수님의 생일날입니다. 이 날만큼은 모든 영광과 존귀와 찬양이 "아기 예수"께 돌려져야 됩니다. 이 성탄절 때 실시하는 여러 행사와 이웃 사랑은 아기 예수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과연 우리의 성탄절은 아기 예수를 위한 날인가 우리가 기뻐하고,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하는 성탄절이 정말로 여호와 하나님 아들되시는 예수, 메시아 예수, 우리의 구세주되신 아기 예수의 탄생을 정말로 마음속으로 즐거워하는 날인가 그 예수님의 그 날을, 탄생하신 그 날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날인가 한번 생각해 보아야 될 것입니다.
이 시간, 이방인으로 가장 먼저 아기 예수께 경배한 사람, 동방 박사의 자세를 살펴봄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온전한 경배와 찬양을 아기 예수께 돌려드립시다.
첫째, 먼 길을 찾아온 동방 박사
첫째로, 먼 길을 찾아온 동방 박사, 먼 길을 찾아온 동방 박사. 감사하게도 우리 순복음인천교회에도 먼 데에서부터 우리 교회를 찾아오는 성도들이 많이 계세요. 연안부두에서, 월미도에서, 저 계산동에서, 또 부개동에서. 인천만이 아닙니다. 여태명 장로님은 저 일산에서, 그 뿐이 아닙니다. 민병우 장로님은 저 대전에서, 한국방송공사 대전 지부장으로 가셨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주 민병우 장로님은 아침 일찍 출발해서 주일 날 예배를 드리고, 또 봉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얼마나 감사한 지 몰라요.
동방 박사들은 목숨을 걸고 아기 예수를 찾아왔습니다. 성경이 말합니다. 마태복음 2장 1절입니다.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마 2:1) 이렇게 말했습니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을 찾아왔습니다. 왜 찾아왔습니까 아기 예수를 만나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예수님의 몸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주일 성수하러 교회에 온 것은 아기 예수, 우리의 구세주 예수, 메시아 예수님을 만나러 온 것으로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학자들에 따르면, 여기서 "동방"이란 어디를 말하느냐 바벨론 지역을 말한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여러 가지 위험이 있었습니다. 강도의 위험, 질병의 위험, 사막의 위험, 강의 위험, 짐승의 위험을 무릅쓰고 예수를 찾아왔습니다. 먼 길을 찾아서 아기 예수를 만나러 동방 박사들이 왔다 그 말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는 유일한 목적을 가지고 멀고 먼 길을 나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성탄을 맞이하고 있는가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 한 분만으로 기뻐하고 눈물 흘렸던 첫사랑을 회복하는 성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매년마다 성탄절을 맞이합니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찬송을 부르면서, 성탄절을 맞이합니다. 과연 정말로 예수님을 믿을 때의 첫 사랑, 처음 은혜 받았던 그 첫 사랑을 회복하고 있는가 정말로 감사하고 있는가 기뻐하고 있는가 즐거워하고 있는가 예수 한 분만으로 만족하고 있는가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동방 박사들처럼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모든 것을 초월하는 신앙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 만나는 그 일이라면, 예수님 만나는 그 일이라면 모든 것을 다 저버리고라도 오직 그것 하나가 제일이다, 찾는 신앙.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잖아요. 먼 길을 온 동방 박사들과 달리 가까운 곳에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누구입니까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그들은 예수님을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동방 박사들에게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는 성경의 예언을 가르쳐 준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마태복음 2장 4절로 5절 말씀입니다.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 물으니 가로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마 2:4-5) 그랬습니다.
대제사장들은 누구입니까 서기관들은 누구입니까 성경을 가르쳐주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을 풀어주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성경을 잘 몰랐던 동방 박사는 머나먼 길을 떠나서 아기 예수가 탄생한 그곳을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정작 성경을 풀어서 가르쳐 주던 대제사장들이나 그것을 기록하는 서기관들은 아기 예수가 탄생을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인정도 하지 아니하고 찾아오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성경을 온전히 믿었다면, 가르치는 것만이 아니라 정말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었다면, 쉽게 이 예언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먼 길을 온 동방 박사들과 달리, 그들이 있는 베들레헴은 8킬로미터 정도 밖에 떨어지지 않은 가까운 거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메시아가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리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가르쳐주었지만, "설마!" 설마 그럴까 설마 베들레헴 그 마구간에서 예수님이 태어나실까 그것은 분명히 예언한대로, 성경이 기록한 대로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마!" 우리는 우리 신앙생활에서 "설마"를 말하면 안돼요. 설마를 따라가면 안돼요. 우리 속담에도 뭐라고 그러죠 "설마가" 뭐라 그래요 "사람 잡는다. " 설마가 인생 실패하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설마가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듣는 거예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믿는 거예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실천하는 거예요. 우리가 듣고, 우리가 그대로 믿고, 우리가 그대로 실천하면 하늘 문이 열리고, 은혜의 문이 열리고, 축복의 문이 열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기적을 체험하면서 복되게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것 믿으시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들은 경험과 환경에 근거해서 말씀을 판단하는 잘못을 저지른 것입니다. 그 결과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종국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다는 데 앞장섰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이는 데 앞장 서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에게는 말씀보다는 경험을 의지하고 환경을 바라보는 성향이 있다면,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제일 중요한 것이 뭐냐 환경이 아무리 좋아도 말씀을 믿는 겁니다. 반대로 환경이 아무리 어려워도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어떤 유혹이 와도 말씀을 믿는 겁니다. 우리 눈에 아무것도 안보이고, 우리 손에 아무것도 안 잡히고, 내 앞 길이 칠흙같이 어두워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살 때, 주님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대로 될 지어다(마 9:29). 그런 기적, 그런 은혜 다 체험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베뢰아 사람처럼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말씀에 이끌리는 삶을 사는 우리가 되어져야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을 합니다. 사도행전 17장 11절입니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행 17:11).
그렇습니다. 은혜 받을 사람은 누구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 받을 사람은 누구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는 사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는 사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복을 받습니다. 그런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있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아기 예수께 엎드려 경배한 동방 박사
그 다음에 두 번째, 아기 예수께 엎드려 경배한 동방 박사. 동방 박사들은 아기 예수께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성경은 말을 합니다. 동방 박사들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자 부귀와 명예를 소유한 그런 사람들입니다. 동방 박사들은 지식이 있어요. 그 뿐 아닙니다. 부귀가 있어요. 그 뿐이 아닙니다. 명예가 있어요. 그들은 학문적 호기심이나, 정치적 목적, 또는 개인적 욕망을 위해서 아기 예수께 나온 것이 아닌 것입니다. 동방 박사들이 먼 길을 온 것은 뭐냐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뭐냐 오직 아기 예수께 경배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아기 예수께 "경배"하기 위해서. "아기 예수를 만나면 복을 받는다", "아기 예수를 만나면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 올라간다, 인정을 받는다, 박사가 된다", "아기 예수를 만나면 명예와 권세가 올라간다. " 그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들이 와서 할 수 있었던 것이 뭐냐 오직 한 가지 목적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아들로 오신 메시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 아기 예수께 "경배"하기 위해서, 아기 예수께 "경배"하기 위해서.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일 성수하러 교회 올 때는 다른 것이 필요 없습니다. 나는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께 예배를 드리러 간다. 나는 아기 예수께 경배하러 간다. 그런 마음으로 사는 그 신앙이 산 신앙이요, 여호와 하나님께 사랑받는 신앙이요, 인정받는 신앙이요, 칭찬받는 신앙이요, 복 받는 신앙인 것입니다. 우리 신앙은 절대 거래가 아닙니다. 부모와 자녀간에는 거래하면 안되요.
내가 이렇게 하면 부모님이 복 주실거야, 그게 아닌 것입니다. 자식이니까, 자녀이니까, 피로 낳아 주시고, 나를 길러 주시고, 나를 교육해 주신 부모님, 나는 그 부모님 앞에 나는 감사해야 돼요. 효도해야 돼요. 그 분을 공경해야 돼. 그것은 뭐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 여호와 하나님과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거래가 아닌 것입니다. 거래는, 그런 사랑은 필레오 사랑입니다. 그러나 우리 여호와 하나님과 우리의 사랑은 그런 사랑입니다. 아가페 사랑입니다. 그냥 주신 거예요. 그냥 주신 것이 감사하여 그냥 드리는 거예요. 그냥 드리는 거예요. 그런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있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은 말을 합니다. 마태복음 2장 2절 말씀입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마 2:2).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조건 때문에 온 것이 아닙니다. 경배하러 왔노라. 그들은 사도 바울처럼 이 땅에서 가장 고귀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 다른 것은 배설물로 여긴 것입니다. 바울의 삶은 이런 삶이 아닙니까
빌립보서 3장 8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 3:8).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얻기 위하여 바울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겠다,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겠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목적으로 예수님께 나옵니까 과연 어떤 마음으로 우리가 성탄을 준비하고 있는가 우리는 생각해 봐야 될 것입니다.
"크리스마스", 한 번 따라합시다.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 " 어떤 뜻입니까 "그리스도"와 "경배"란 말의 합성어인 것입니다. "그리스도, 메시아, 기름부음 받은 자. " 그 뒤에 뭡니까 "경배. " 그러므로 크리스마스란 말이 뭡니까 "그리스도께 경배한다", "예수님께 경배한다. " 그 말이 크리스마스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성탄절은 놀고 즐기는 날이 아닌 것입니다. 아기 예수께 경배 드리는 날인 것입니다. 아기 예수께 경배드리는 날, 그 아기 예수를 찬양하는 날, 예배드리는 날, 높여드리는 날, 자랑하는 날, 경배하는 날. 이 날이 크리스마스인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들끼리, 가족과 가족들끼리, 친구와 친구들끼리, 선물 교환하는 것 좋습니다. 그러나 선물을 교환하는 날이 크리스마스가 아니라, 아기 예수께 경배하고, 예배하고, 찬양하는 날이 크리스마스인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아기 예수께 경배는 쏙 빠지고, 서로서로 선물만 교환하는 것이, 그냥 나가서 노는 것이 크리스마스로 잘못 안다면 이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아기 예수께 먼저 경배하고, 아기 예수를 먼저 찬양하고, 아기 예수께 먼저 감사하고 그 사랑을 받아서 이제는 가족들끼리, 이웃끼리, 형제끼리, 친구끼리 선물을 나누고, 사랑을 나누고 교제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깊이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최고의 축복, 예수님께 경배 드리는 것이 최고의 특권. 그렇습니다. 여러분! 최고의 복이 뭔가 최고의 특권이 뭔가 예수를 믿는 것이 최고의 복, 아기 예수께 경배할 수 있는 것이 최고의 특권인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알고 살면 행복합니다. 기쁩니다. 즐겁습니다. 보람이 있습니다. 살 맛이 납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복중에 최고의 복입니다. 아기 예수께 경배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는 것이 최고의 특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최고의 복을, 최고의 특권을 누리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동방 박사들은 아기 예수께 엎드려 경배 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동네에, 그것도 방도 없이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 예수를 왕이라고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동방박사들은 그것을 믿었어요. 여호와 하나님이 역사하셨어요. 그들은 별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아기 예수가 어디서 나신 것을 알았어요. 그들은 성경을 알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배운 성경, 그들이 들은 성경을 그들은 믿었어요. 그래서 그들은 아기 예수께 엎드려 경배 드렸습니다. 마태복음 2장 11절 상반절입니다.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마 2:11상).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여기서 "경배한다"는 것은 뭡니까 "몸을 던져 엎드렸다" 그 말입니다. 지식도 있는 사람이, 부귀도 있는 사람이, 명예도 있는 동방 박사들이,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 아주 어린 아기 예수, 피 덩어리 같은 아기 예수께 엎드려서 경배했어요. 아주 절하면서 경배했어요.
예배가 뭡니까 경배하는 겁니다. 기도가 뭡니까 엎드리는 겁니다. 겸손하게 엎드리는 것, 이게 진정한 경배요, 진정한 믿음인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들은 지금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편안하게 앉아 계시다고요. 그러나 진정한 마음은, 여러분의 몸은 의자에 편안하게 앉아 계시지만, 여러분의 마음은, 예배드릴 때의 마음의 자세는 뭡니까 항상 엎드린 자세, 여호와 하나님 앞에 굴복한 자세,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만 높이는 예배, 그런 마음을 가지고 예배를 드릴 때, 그 예배가 주님이 흠양하시는 예배, 응답하시는 기도가 되는 줄 믿습니다. 중요한 것은 뭐냐 예배는요 예배드리는 마음의 중심이 뭐예요 우리는 겸손해야 해요. 교회 나와서 엎드리는 거예요. 예배는 엎드리는 거예요. 경배는 엎드리는 거예요. 동방박사들은 아기 예수를 보고 엎드려 아기 예수께 경배했다, 이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동방 박사들은 모든 지위와 체면 그리고 자존심을 다 버렸습니다. 아기 예수 앞에 완전히 그들은 엎드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예배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경배인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온전히 나를 드리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드리고, 내 생각을 드리고, 내 몸을 몽땅 드리는 것, 이것입니다. 마치 세례 요한의 고백처럼, 내 고백이 될 때, 예수님을 온전히 경배하는 자세가 되고, 온전한 경배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장 30절에 보면 세례요한이 말을 합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 3:30). "예수님은 흥해야 되겠고, 나는 쇠하여야 되리라. " "예수님은 사셔야 되겠고, 나는 죽어야 되겠다. " "그는 흥하여야 되겠고, 나는 쇠하여야 되리라. " 이런 자세가 누구의 자세냐 동방 박사가 예수께 경배한 자세. 이런 자세가 어떤 자세냐 여호와 하나님께, 아기 예수께 온전히 경배하는 자세인 것입니다.
셋째, 세 가지 예물을 드린 동방 박사
세 번째, 세 가지 예물을 드린 동방 박사. 동방 박사는 빈손으로 오지 않았습니다. 먼 길을 찾아온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경배한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동박 박사는 세 가지 예물을 드리고 갔습니다. 그래서 동방 박사는 가장 귀한 것을 아기 예수께 드렸습니다. 성경에 말을 합니다. 마태복음 2장 11절 하반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보배 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보배 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마 2:11하).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군가에게 무엇을 줄 때는 그 사람에게 어울리는 것을 준비합니다. 이사 갈 때의 선물은 뭐합니까 세제를 사 가지고 갑니다. 비누를 사 가지고 갑니다. 아니면, 화장지를 사 가지고 갑니다. 그렇지요 김장할 때의 선물을 산다면, 아마 젖(젖갈)을 사서 줄 겁니다. 그죠 소금을 사서 줄 겁니다. 고춧가루, 마늘을 갖다 줄 것입니다. 결혼하는 사람은 결혼에 합당한 결혼 선물이 또 따로 있습니다. 약혼하는 사람에게는 약혼 선물이 또 따로 있습니다.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이 동방 박사는 세 가지 예물을 통해서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이 예물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뭡니까 황금입니다. 황금은 무엇을 말합니까 예수님이 이 땅을 통치하시는 "왕"이심을 상징합니다. 황금은 왕을 상징합니다. 또 "유향"은 제사 때 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실 것을 알고 드린 것입니다. 그 다음에 몰약은 뭡니까 시체 보존을 위해 쓰는 것입니다. 산 사람을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죽은 사람을 위해서 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인류의 모든 죄를 지시고, 나의 죄, 너의 죄, 모든 죄를 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그렇게 매 맞으시고, 그렇게 가시관 쓰시고, 양손과 양발에 못 박히시고, 죽으실 것을 벌써 알고 몰약을 드렸습니다. 동방 박사들은 그러므로 예수님을 인정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환영한 것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모셔들임으로 말미암아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린 것입니다. 20세기 마지막 성탄절, 새 천년 들어 첫 번째 맞는 성탄절, 금번 성탄절은 우리가 어떻게 맞이할까 우리들도 동방 박사들처럼 우리의 왕이시자, 우리의 구세주이시며, 다시 오실 예수님께 가장 잘 어울리는 예물을 드리는 성탄절이 됩시다.
예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뭐냐 우리 자신을 예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 " 우리의 마음, 우리의 몸, 우리의 시간, 우리의 모든 것을 예수님께 드리는 것을 주님이 제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독자를, 또 사르밧 과부에게 마지막 양식을 요구하신 것은 그것이 모자라거나, 필요해서가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리아의 향유와 과부의 두 렙돈을 기쁘게 받으신 것은 그 마음의 중심을 보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로부터 황금같은 믿음, 유향같은 기도, 몰약같은 헌신과 봉사를 받기 원하시는 것 아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황금같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의 기도가 유향같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헌신과 봉사가 몰약같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이나 개인을 위해서는 가장 좋은 것을 쓰면서, 예수님께는, 아기 예수께는 어떤 예물을 드리기로 준비되어 있는지, 준비하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성탄절 날이 되면 자기 자녀에게, 가족에게, 친척에게, 거래측에게 많은 선물을 준비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뭐냐 나는 과연 아기 예수께 드릴 예물이 뭘까 제일 중요한 것이 뭐냐고요 황금같은 믿음, 유향같은 기도, 몰약같은 헌신, 이것을 준비하고 드릴 때 주님이 기뻐 받으실 줄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각자, 각자 자기 생애 최고의 예물을 주님께 드리는 20세기 마지막 성탄절이 되게 합시다.
결론입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아기 예수를 "보고", "경배" 드리는 성탄절의 영광을 누린 사람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두 아기 예수를 기다렸고, 사모했으며, 하늘의 음성에 귀가 열린 사람들이었던 것을 우리는 압니다. 20세기 마지막 성탄절이 해마다 돌아오는 절기가 아니라, 아기 예수를 보고, 또 경배하고, 드리는 영광의 날이 될 수 있도록 기억될 수 있는, 최고의 추억이 될 수 있는 성탄절이 되게 합시다. 여호와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고, 우리는 은혜를 받게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바르게 전할 수 있으며,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으며, 복되게 살아가는 여러분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드디어 내일이면 새 천년 들어서 첫 번째 성탄절, 또 20세기 마지막 성탄절입니다. 성탄은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면, 지구상의 모두가 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아기 예수를 위하여, 아기 예수 때문에 성탄절을 축하하고 즐거워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은 두 말할 것도 없고, 예수를 믿고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하는 사람들마저도 성탄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고,
그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그 진정한 의미를 모르고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탄절은 그 누구의 생일이 아니라, 바로 여호와 하나님 아들되시는 예수님, 구세주되신 예수님, 메시아되신 예수님의 생일날입니다. 이 날만큼은 모든 영광과 존귀와 찬양이 "아기 예수"께 돌려져야 됩니다. 이 성탄절 때 실시하는 여러 행사와 이웃 사랑은 아기 예수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과연 우리의 성탄절은 아기 예수를 위한 날인가 우리가 기뻐하고,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하는 성탄절이 정말로 여호와 하나님 아들되시는 예수, 메시아 예수, 우리의 구세주되신 아기 예수의 탄생을 정말로 마음속으로 즐거워하는 날인가 그 예수님의 그 날을, 탄생하신 그 날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날인가 한번 생각해 보아야 될 것입니다.
이 시간, 이방인으로 가장 먼저 아기 예수께 경배한 사람, 동방 박사의 자세를 살펴봄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온전한 경배와 찬양을 아기 예수께 돌려드립시다.
첫째, 먼 길을 찾아온 동방 박사
첫째로, 먼 길을 찾아온 동방 박사, 먼 길을 찾아온 동방 박사. 감사하게도 우리 순복음인천교회에도 먼 데에서부터 우리 교회를 찾아오는 성도들이 많이 계세요. 연안부두에서, 월미도에서, 저 계산동에서, 또 부개동에서. 인천만이 아닙니다. 여태명 장로님은 저 일산에서, 그 뿐이 아닙니다. 민병우 장로님은 저 대전에서, 한국방송공사 대전 지부장으로 가셨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주 민병우 장로님은 아침 일찍 출발해서 주일 날 예배를 드리고, 또 봉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얼마나 감사한 지 몰라요.
동방 박사들은 목숨을 걸고 아기 예수를 찾아왔습니다. 성경이 말합니다. 마태복음 2장 1절입니다.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마 2:1) 이렇게 말했습니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을 찾아왔습니다. 왜 찾아왔습니까 아기 예수를 만나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예수님의 몸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주일 성수하러 교회에 온 것은 아기 예수, 우리의 구세주 예수, 메시아 예수님을 만나러 온 것으로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학자들에 따르면, 여기서 "동방"이란 어디를 말하느냐 바벨론 지역을 말한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여러 가지 위험이 있었습니다. 강도의 위험, 질병의 위험, 사막의 위험, 강의 위험, 짐승의 위험을 무릅쓰고 예수를 찾아왔습니다. 먼 길을 찾아서 아기 예수를 만나러 동방 박사들이 왔다 그 말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는 유일한 목적을 가지고 멀고 먼 길을 나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성탄을 맞이하고 있는가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 한 분만으로 기뻐하고 눈물 흘렸던 첫사랑을 회복하는 성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매년마다 성탄절을 맞이합니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찬송을 부르면서, 성탄절을 맞이합니다. 과연 정말로 예수님을 믿을 때의 첫 사랑, 처음 은혜 받았던 그 첫 사랑을 회복하고 있는가 정말로 감사하고 있는가 기뻐하고 있는가 즐거워하고 있는가 예수 한 분만으로 만족하고 있는가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동방 박사들처럼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모든 것을 초월하는 신앙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 만나는 그 일이라면, 예수님 만나는 그 일이라면 모든 것을 다 저버리고라도 오직 그것 하나가 제일이다, 찾는 신앙.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잖아요. 먼 길을 온 동방 박사들과 달리 가까운 곳에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누구입니까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그들은 예수님을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동방 박사들에게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는 성경의 예언을 가르쳐 준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마태복음 2장 4절로 5절 말씀입니다.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 물으니 가로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마 2:4-5) 그랬습니다.
대제사장들은 누구입니까 서기관들은 누구입니까 성경을 가르쳐주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을 풀어주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성경을 잘 몰랐던 동방 박사는 머나먼 길을 떠나서 아기 예수가 탄생한 그곳을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정작 성경을 풀어서 가르쳐 주던 대제사장들이나 그것을 기록하는 서기관들은 아기 예수가 탄생을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인정도 하지 아니하고 찾아오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성경을 온전히 믿었다면, 가르치는 것만이 아니라 정말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었다면, 쉽게 이 예언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먼 길을 온 동방 박사들과 달리, 그들이 있는 베들레헴은 8킬로미터 정도 밖에 떨어지지 않은 가까운 거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메시아가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리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가르쳐주었지만, "설마!" 설마 그럴까 설마 베들레헴 그 마구간에서 예수님이 태어나실까 그것은 분명히 예언한대로, 성경이 기록한 대로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마!" 우리는 우리 신앙생활에서 "설마"를 말하면 안돼요. 설마를 따라가면 안돼요. 우리 속담에도 뭐라고 그러죠 "설마가" 뭐라 그래요 "사람 잡는다. " 설마가 인생 실패하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설마가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듣는 거예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믿는 거예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실천하는 거예요. 우리가 듣고, 우리가 그대로 믿고, 우리가 그대로 실천하면 하늘 문이 열리고, 은혜의 문이 열리고, 축복의 문이 열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기적을 체험하면서 복되게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것 믿으시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들은 경험과 환경에 근거해서 말씀을 판단하는 잘못을 저지른 것입니다. 그 결과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종국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다는 데 앞장섰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이는 데 앞장 서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에게는 말씀보다는 경험을 의지하고 환경을 바라보는 성향이 있다면,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제일 중요한 것이 뭐냐 환경이 아무리 좋아도 말씀을 믿는 겁니다. 반대로 환경이 아무리 어려워도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어떤 유혹이 와도 말씀을 믿는 겁니다. 우리 눈에 아무것도 안보이고, 우리 손에 아무것도 안 잡히고, 내 앞 길이 칠흙같이 어두워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살 때, 주님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대로 될 지어다(마 9:29). 그런 기적, 그런 은혜 다 체험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베뢰아 사람처럼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말씀에 이끌리는 삶을 사는 우리가 되어져야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을 합니다. 사도행전 17장 11절입니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행 17:11).
그렇습니다. 은혜 받을 사람은 누구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 받을 사람은 누구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는 사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는 사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복을 받습니다. 그런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있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아기 예수께 엎드려 경배한 동방 박사
그 다음에 두 번째, 아기 예수께 엎드려 경배한 동방 박사. 동방 박사들은 아기 예수께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성경은 말을 합니다. 동방 박사들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자 부귀와 명예를 소유한 그런 사람들입니다. 동방 박사들은 지식이 있어요. 그 뿐 아닙니다. 부귀가 있어요. 그 뿐이 아닙니다. 명예가 있어요. 그들은 학문적 호기심이나, 정치적 목적, 또는 개인적 욕망을 위해서 아기 예수께 나온 것이 아닌 것입니다. 동방 박사들이 먼 길을 온 것은 뭐냐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뭐냐 오직 아기 예수께 경배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아기 예수께 "경배"하기 위해서. "아기 예수를 만나면 복을 받는다", "아기 예수를 만나면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 올라간다, 인정을 받는다, 박사가 된다", "아기 예수를 만나면 명예와 권세가 올라간다. " 그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들이 와서 할 수 있었던 것이 뭐냐 오직 한 가지 목적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아들로 오신 메시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 아기 예수께 "경배"하기 위해서, 아기 예수께 "경배"하기 위해서.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일 성수하러 교회 올 때는 다른 것이 필요 없습니다. 나는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께 예배를 드리러 간다. 나는 아기 예수께 경배하러 간다. 그런 마음으로 사는 그 신앙이 산 신앙이요, 여호와 하나님께 사랑받는 신앙이요, 인정받는 신앙이요, 칭찬받는 신앙이요, 복 받는 신앙인 것입니다. 우리 신앙은 절대 거래가 아닙니다. 부모와 자녀간에는 거래하면 안되요.
내가 이렇게 하면 부모님이 복 주실거야, 그게 아닌 것입니다. 자식이니까, 자녀이니까, 피로 낳아 주시고, 나를 길러 주시고, 나를 교육해 주신 부모님, 나는 그 부모님 앞에 나는 감사해야 돼요. 효도해야 돼요. 그 분을 공경해야 돼. 그것은 뭐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 여호와 하나님과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거래가 아닌 것입니다. 거래는, 그런 사랑은 필레오 사랑입니다. 그러나 우리 여호와 하나님과 우리의 사랑은 그런 사랑입니다. 아가페 사랑입니다. 그냥 주신 거예요. 그냥 주신 것이 감사하여 그냥 드리는 거예요. 그냥 드리는 거예요. 그런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있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은 말을 합니다. 마태복음 2장 2절 말씀입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마 2:2).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조건 때문에 온 것이 아닙니다. 경배하러 왔노라. 그들은 사도 바울처럼 이 땅에서 가장 고귀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 다른 것은 배설물로 여긴 것입니다. 바울의 삶은 이런 삶이 아닙니까
빌립보서 3장 8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 3:8).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얻기 위하여 바울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겠다,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겠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목적으로 예수님께 나옵니까 과연 어떤 마음으로 우리가 성탄을 준비하고 있는가 우리는 생각해 봐야 될 것입니다.
"크리스마스", 한 번 따라합시다.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 " 어떤 뜻입니까 "그리스도"와 "경배"란 말의 합성어인 것입니다. "그리스도, 메시아, 기름부음 받은 자. " 그 뒤에 뭡니까 "경배. " 그러므로 크리스마스란 말이 뭡니까 "그리스도께 경배한다", "예수님께 경배한다. " 그 말이 크리스마스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성탄절은 놀고 즐기는 날이 아닌 것입니다. 아기 예수께 경배 드리는 날인 것입니다. 아기 예수께 경배드리는 날, 그 아기 예수를 찬양하는 날, 예배드리는 날, 높여드리는 날, 자랑하는 날, 경배하는 날. 이 날이 크리스마스인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들끼리, 가족과 가족들끼리, 친구와 친구들끼리, 선물 교환하는 것 좋습니다. 그러나 선물을 교환하는 날이 크리스마스가 아니라, 아기 예수께 경배하고, 예배하고, 찬양하는 날이 크리스마스인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아기 예수께 경배는 쏙 빠지고, 서로서로 선물만 교환하는 것이, 그냥 나가서 노는 것이 크리스마스로 잘못 안다면 이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아기 예수께 먼저 경배하고, 아기 예수를 먼저 찬양하고, 아기 예수께 먼저 감사하고 그 사랑을 받아서 이제는 가족들끼리, 이웃끼리, 형제끼리, 친구끼리 선물을 나누고, 사랑을 나누고 교제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깊이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최고의 축복, 예수님께 경배 드리는 것이 최고의 특권. 그렇습니다. 여러분! 최고의 복이 뭔가 최고의 특권이 뭔가 예수를 믿는 것이 최고의 복, 아기 예수께 경배할 수 있는 것이 최고의 특권인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알고 살면 행복합니다. 기쁩니다. 즐겁습니다. 보람이 있습니다. 살 맛이 납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복중에 최고의 복입니다. 아기 예수께 경배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는 것이 최고의 특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최고의 복을, 최고의 특권을 누리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동방 박사들은 아기 예수께 엎드려 경배 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동네에, 그것도 방도 없이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 예수를 왕이라고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동방박사들은 그것을 믿었어요. 여호와 하나님이 역사하셨어요. 그들은 별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아기 예수가 어디서 나신 것을 알았어요. 그들은 성경을 알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배운 성경, 그들이 들은 성경을 그들은 믿었어요. 그래서 그들은 아기 예수께 엎드려 경배 드렸습니다. 마태복음 2장 11절 상반절입니다.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마 2:11상).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여기서 "경배한다"는 것은 뭡니까 "몸을 던져 엎드렸다" 그 말입니다. 지식도 있는 사람이, 부귀도 있는 사람이, 명예도 있는 동방 박사들이,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 아주 어린 아기 예수, 피 덩어리 같은 아기 예수께 엎드려서 경배했어요. 아주 절하면서 경배했어요.
예배가 뭡니까 경배하는 겁니다. 기도가 뭡니까 엎드리는 겁니다. 겸손하게 엎드리는 것, 이게 진정한 경배요, 진정한 믿음인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들은 지금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편안하게 앉아 계시다고요. 그러나 진정한 마음은, 여러분의 몸은 의자에 편안하게 앉아 계시지만, 여러분의 마음은, 예배드릴 때의 마음의 자세는 뭡니까 항상 엎드린 자세, 여호와 하나님 앞에 굴복한 자세,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만 높이는 예배, 그런 마음을 가지고 예배를 드릴 때, 그 예배가 주님이 흠양하시는 예배, 응답하시는 기도가 되는 줄 믿습니다. 중요한 것은 뭐냐 예배는요 예배드리는 마음의 중심이 뭐예요 우리는 겸손해야 해요. 교회 나와서 엎드리는 거예요. 예배는 엎드리는 거예요. 경배는 엎드리는 거예요. 동방박사들은 아기 예수를 보고 엎드려 아기 예수께 경배했다, 이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동방 박사들은 모든 지위와 체면 그리고 자존심을 다 버렸습니다. 아기 예수 앞에 완전히 그들은 엎드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예배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경배인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온전히 나를 드리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드리고, 내 생각을 드리고, 내 몸을 몽땅 드리는 것, 이것입니다. 마치 세례 요한의 고백처럼, 내 고백이 될 때, 예수님을 온전히 경배하는 자세가 되고, 온전한 경배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장 30절에 보면 세례요한이 말을 합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 3:30). "예수님은 흥해야 되겠고, 나는 쇠하여야 되리라. " "예수님은 사셔야 되겠고, 나는 죽어야 되겠다. " "그는 흥하여야 되겠고, 나는 쇠하여야 되리라. " 이런 자세가 누구의 자세냐 동방 박사가 예수께 경배한 자세. 이런 자세가 어떤 자세냐 여호와 하나님께, 아기 예수께 온전히 경배하는 자세인 것입니다.
셋째, 세 가지 예물을 드린 동방 박사
세 번째, 세 가지 예물을 드린 동방 박사. 동방 박사는 빈손으로 오지 않았습니다. 먼 길을 찾아온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경배한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동박 박사는 세 가지 예물을 드리고 갔습니다. 그래서 동방 박사는 가장 귀한 것을 아기 예수께 드렸습니다. 성경에 말을 합니다. 마태복음 2장 11절 하반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보배 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보배 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마 2:11하).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군가에게 무엇을 줄 때는 그 사람에게 어울리는 것을 준비합니다. 이사 갈 때의 선물은 뭐합니까 세제를 사 가지고 갑니다. 비누를 사 가지고 갑니다. 아니면, 화장지를 사 가지고 갑니다. 그렇지요 김장할 때의 선물을 산다면, 아마 젖(젖갈)을 사서 줄 겁니다. 그죠 소금을 사서 줄 겁니다. 고춧가루, 마늘을 갖다 줄 것입니다. 결혼하는 사람은 결혼에 합당한 결혼 선물이 또 따로 있습니다. 약혼하는 사람에게는 약혼 선물이 또 따로 있습니다.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이 동방 박사는 세 가지 예물을 통해서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이 예물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뭡니까 황금입니다. 황금은 무엇을 말합니까 예수님이 이 땅을 통치하시는 "왕"이심을 상징합니다. 황금은 왕을 상징합니다. 또 "유향"은 제사 때 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실 것을 알고 드린 것입니다. 그 다음에 몰약은 뭡니까 시체 보존을 위해 쓰는 것입니다. 산 사람을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죽은 사람을 위해서 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인류의 모든 죄를 지시고, 나의 죄, 너의 죄, 모든 죄를 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그렇게 매 맞으시고, 그렇게 가시관 쓰시고, 양손과 양발에 못 박히시고, 죽으실 것을 벌써 알고 몰약을 드렸습니다. 동방 박사들은 그러므로 예수님을 인정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환영한 것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모셔들임으로 말미암아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린 것입니다. 20세기 마지막 성탄절, 새 천년 들어 첫 번째 맞는 성탄절, 금번 성탄절은 우리가 어떻게 맞이할까 우리들도 동방 박사들처럼 우리의 왕이시자, 우리의 구세주이시며, 다시 오실 예수님께 가장 잘 어울리는 예물을 드리는 성탄절이 됩시다.
예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뭐냐 우리 자신을 예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 " 우리의 마음, 우리의 몸, 우리의 시간, 우리의 모든 것을 예수님께 드리는 것을 주님이 제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독자를, 또 사르밧 과부에게 마지막 양식을 요구하신 것은 그것이 모자라거나, 필요해서가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리아의 향유와 과부의 두 렙돈을 기쁘게 받으신 것은 그 마음의 중심을 보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로부터 황금같은 믿음, 유향같은 기도, 몰약같은 헌신과 봉사를 받기 원하시는 것 아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황금같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의 기도가 유향같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헌신과 봉사가 몰약같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이나 개인을 위해서는 가장 좋은 것을 쓰면서, 예수님께는, 아기 예수께는 어떤 예물을 드리기로 준비되어 있는지, 준비하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성탄절 날이 되면 자기 자녀에게, 가족에게, 친척에게, 거래측에게 많은 선물을 준비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뭐냐 나는 과연 아기 예수께 드릴 예물이 뭘까 제일 중요한 것이 뭐냐고요 황금같은 믿음, 유향같은 기도, 몰약같은 헌신, 이것을 준비하고 드릴 때 주님이 기뻐 받으실 줄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각자, 각자 자기 생애 최고의 예물을 주님께 드리는 20세기 마지막 성탄절이 되게 합시다.
결론입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아기 예수를 "보고", "경배" 드리는 성탄절의 영광을 누린 사람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두 아기 예수를 기다렸고, 사모했으며, 하늘의 음성에 귀가 열린 사람들이었던 것을 우리는 압니다. 20세기 마지막 성탄절이 해마다 돌아오는 절기가 아니라, 아기 예수를 보고, 또 경배하고, 드리는 영광의 날이 될 수 있도록 기억될 수 있는, 최고의 추억이 될 수 있는 성탄절이 되게 합시다. 여호와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고, 우리는 은혜를 받게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바르게 전할 수 있으며,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으며, 복되게 살아가는 여러분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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