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 성탄절의 정신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본문
매년 맞이하는 성탄절이지만 사회의 분위가가 어두워서 거리마다 트리 장식이나 캐럴 송이 뜸한 느낌 한산한 느낌이 듭니다. 경기를 탄다 할까요
저는 요란한 것보다 분위기는 무겁지만 차라리 조용한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듭니다. 성도 여러분도 요란한 분위기보다 좀 점잖은 성탄절이 더 좋지 않습니까
즉 성탄절의 정신(Christmas Spirit)이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자는 말입니다. 성탄절이란 말의 뜻이 무엇인지 아시죠
단순하게 말하면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교회 절기로서 좀 더 정확한 의미를 살핀다면 크리스마스라는 단어를 분석해 보면 될 것입니다.
이 단어는 그리스도(Christ)+경배, 미사(Mass)의 합성어로서 예수님을 경배하여 우리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께 제사를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하이데거. 인간의 사고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Calculative thinking이라 해서 다분히 계산적이고 타산적이며 추리적인 생각입니다. 지극히 인간적인 사고죠
또 하나는 inspired thinking으로 영감적인 직감입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생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에서부터 오는 영적인 직감입니다.
이 시간 계산적이고 추리적인 생각을 다 비우고 위로부터 오는 영적인 직감으로 오늘의 말씀을 대한다면 성탄절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 함께 메시야로서 오신 주님을 내가 만나고 그 분과 함께 동행하는 삶이되기를 축원합니다.
1. 성탄절은 내가 예수님을 만나고 영접해야 합니다.
요 0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 말씀에는 예수님을 향하여 두 가지 태도가 나오는데 영접하는 자가 있고 영접하지 않는 자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먼저는 1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는 사람들을 밝히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유대인들은 영접하지를 않았습니다.
영접하지 않는 것은 고사하고 마지막엔 예수님을 핍박하고 그것도 모자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일까지도 하였습니다.
다음으로는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이 있는데 12절 말씀으로서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 모두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었다고 말합니다.
지금 이 시간 이 자리에 계신 분들 가운데도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서 영접한 사람이 있는 반면 혹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있는 분은 없습니까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탄생하였을 때 기쁨으로 축하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예수님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거절하거나 증오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영접하지 아니한 사람들 중에 대표적인 몇 사람을 한 번 살펴볼까요
①미움과 증오로 불태운 헤롯 왕. 헤롯 왕은(Herod the Great) 의심이 많고 잔인한 사람으로서(마 02:01)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눅 02:01) 영을 내릴 때의 통치자입니다.
이 사람은 40여 년 왕위에 있으면서 가이사랴와 예루살렘의 원형경기장을 건축했고 수도 공사를 했고 또 40여 년에 걸쳐서 예루살렘에 성전 곧 제 3성전을 건축했습니다.
그러나 미움과 증오로 가득 찬 인물이었기에 아내가 10명이고 자식이 15명이었는데 자기의 권력을 위하여 아내도 장모도 세 명의 아들까지도 살해했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로마의 줄리어스 시이저 황제는 헤롯의 아들로 태어나기보다는 돼지가 되는 것이 더 안전할 것이다 고 말했다 합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을 때에 동방 박사의 제보를 듣고 그는 속에 음흉한 계획을 가지고 베들레헴에 있는 두 살 미만의 어린 아이들을 모두 죽였지 않습니까
②세속화된 제사장과 서기관들.
이들의 반응은 이상하게 느껴질 만큼 철저하게 무관심했습니다. 메시아의 탄생지는 베들레헴이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기는 하였으나 저들은 베들레헴에 가지도 않았고 대망의 메시아가 오셨다고 하는데도 기뻐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특권만 챙기고 헤롯 왕 눈치만 살폈기에 메시아에 대한 지식이 있으면서도 무관심하였습니다. 왜 그렇게 무관심했습니까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겁니까
예, 그것은 당시 제사장이나 서기관들이 너무 깊이 세속화되었기 때문이에요. 물질이나 명예나 사회적 측면에서 볼 때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나 불편이 없었기 때문에 구태여 메시아를 필요로 하지 않은 것입니다.
③돈벌이에만 관심이 있는 여관주인.
오직 돈 벌이에만 관심이 있다 보니 만삭된 마리아와 요셉이 찾아왔을 때에 방 한 칸 내어줄 여유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관집 주인의 구유에서 나셨다면 여관집 주인은 가만히 앉아서 메시아를 자기 집에 모실 수 있는 영광을 얻었는데도 그 기회를 놓쳐 버리고 만 것입니다.
땅을 치고 통곡 할 일 아닐까요 물질에 마음 빼앗기면 축복의 기회를 놓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도 성탄을 맞을 때에 사람들은 트리를 만들고 장식을 하고 카드와 선물을 주고받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산타가 오시기를 고대하기도 하고요.
그러나 이런 여러 가지 행위 속에 상업의 속셈만이 들어 있다면 크리스마스는 진정한 의미를 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리에 나서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전혀 관계를 맺지 않은 사람들이 돈벌이를 한다고 얼마나 야단법석을 떨고 있습니까
장사를 위해서 크리스마스를 이용하는 현대판 불신자들의 크리스마스는 이 여관집 주인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 중에 축복받은 대표적인 몇 사람을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①사모하는 마음으로 먼 길을 찾아와 경배한 동방박사들.
동방박사들은 사모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멀리 동방에서부터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기 위하여 달려왔습니다. 사모하는 마음속에 정성이 담겨져 있고 헌신이 있는 법 아닙니까
그들이 먼 길을 달려와서 황금과 유황과 몰약을 예수님께 드렸듯이 오늘 우리도 예수님의 성탄을 맞이하여 기쁨으로 이 자리에 나오셨습니까 우리의 귀한 정성의 예물을 드립시다.
②기쁨의 소식을 전하는 목자들.
목자들은 천사가 전해준 소식을 듣고 아기 예수님께 가서 경배하고 그 소식을 기쁨으로 전하였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소식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기쁨으로 전합시다. 그런데 성탄절 하면 모두가 즐거워 하지만 진정 성탄절의 의미를 아는 자는 드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탄절을 통하여 서로 선물과 카드를 주고받는데 우리는 그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는 목자처럼 되어보시지 않으렵니까
2. 내가 영접한 그 분은 영광의 보좌를 떠나 오셨습니다.
06 그는 근본 여호와 하나님의 본체시나 여호와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0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01~03절을 보면 말씀이신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고 보이지 아니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이나(골 01:15) 여호와 하나님과 동등 됨을 포기하셨습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으로서의 신성 자체를 몽땅 버렸다는 뜻은 아니고 여전히 여호와 하나님이시지만 그 영광과 존귀를 포기 유보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대신 종의 형체 즉 인간의 비천한 몸을 입으셨으니 즉 신성은 그대로 가지고 계시면서 자발적으로 인성을 입으시고 고난의 길을 택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신인 양성을 지닌 분이라고 하죠. 그 비움과 포기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에게 사랑을 베풀기 위함이지요.
죄인인 우리에게 의(義)를 주시기 위해서 가난한 우리에게 부요함을 주시기 위해서 슬픈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기 위해서 기꺼이 그 길을 택하여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탄절의 정신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비우고 포기하면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은혜로 채움을 받은 성도 여러분! 이제는 주님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스스로를 비우는 자리로 이동해야지 않겠습니까
내가 얻은 것 가진 것들 중에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과 나라와 이웃을 위하여 비울 줄을 알아야 하며 때로는 포기도 되어야 하는 겁니다. 이것이 성탄절의 정신이에요.
성도 여러분! 우리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십시오. 어렵다고 다들 엄살들을 부리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너무나 부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어쩌면 가난한 것보다 오히려 너무 부해져 있는 게 많은 사람들의 문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방학과 동시에 외국으로 하도 달려 나가다 보니 지금 항공권 구하는 게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렵다고 하네요. 유명 호텔 객실과 식당들은 연말까지 계약이 꽉 차 있고요.
이런 환경들 속에서 우리 교회 성도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계속해서 부해지려는 마음보다는 오히려 가난해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나를 비움으로써 남을 채우는 길이라면 그 길을 기꺼이 택할 줄 아는 마음의 자세 이런 자세를 연말에 주님은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인색한 사람도 세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①자기와 남에게 인색한 사람(수전노). ②자기에게 후하고 남에게 인색한 사람(욕심쟁이).
③자기에게 인색하고 남에게 후한 사람(성탄절의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
0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예수님은 자기를 스스로 낮추셨는데 이것을 가리켜 흔히 자기 비하라고 부릅니다. 겸손이란 단어보다 더 강한 뉘앙스를 가진 단어지요. 여호와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으로 낮아지되 특히 사람 중에서도 가장 낮은 자가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나라 영광의 자리에서 이 세상에 오신 것만도 엄청나게 낮아지신 것인데 이 세상에서는 더 이상 낮아질 수 없는 곳까지 가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왜 이처럼 낮아지셨습니까 한 마디로 우리를 섬겨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막 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요 13: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3. 성탄절의 정신을 알고 있는 자에겐 축복이 있습니다.
09 이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사람은 한 번 죽으면 끝장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이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고 무덤 위에 장사지냄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죽음으로 끝났다면 우리의 주님이 될 수 없이 그저 성인의 죽음 정도는 될 수 있었을 것이고 존경의 대상은 될 수 있을 것이나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을 겁입니다. 왜냐하면 보통 사람의 죽음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흘 만에 부활하셨고 사십일 동안 계시다가 승천하셨고 다시 오신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주님이기에 여호와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존귀하게 하셨고 높이신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 섬길 수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처럼 스스로 낮은 자리를 향해 열린 마음으로 찾아가는 사람입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겸손하지 못하고 섬기지 못합니까 자기 스스로 높음의 자리에 좌정해 있기 때문일 것이며 그 자리를 지키려 하는 한 교만을 떨치지 못하고 말 것입니다.
성탄절의 정신은 주님 가셨던 곳을 나도 가는 것이며 계속 섬기는 자리를 찾아나서는 겁니다.
요즘의 우리들 얼마나 높아져 있는지 몰라요. 직함도 많고 타이틀도 많고. 그런 것들이 정말 섬김을 위해 사용된다면 그때는 가치 있는 직함 타이틀이 되겠지요
우리의 높음을 가지고 겸손하게 섬기면 거기서 놀라운 변화들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인간관계의 변화가 생기고 사회가 달라질 것이고 교회가 변화될 것입니다.
그러나 혹시 높음의 요소들이 우리의 겸손을 질식시켜 버린다면 그때는 오히려 비극이겠지요.
자기를 비우시고 낮추심으로 이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그냥 비하의 모습 그대로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부활 승천하셨고 영광 가운데 들어가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존귀하게 영광스럽게 승리하며 사는 비결이 곧 성탄절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를 비우고 포기함으로써 남을 부요케 하면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더욱 부요하게 해 주시며 또 나를 낮추고 섬기면 더욱 더 존귀한 이름의 자리에 이르게 해 주실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번 성탄절부터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시고 성탄절 정신으로 성숙한 신앙을 가꿔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존귀한 자리에 이르게 해 주실 것을 내다보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된 일에 잘 쓰임을 받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높아지신 그 이름의 자리에 우리 모두가 다 들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속죄의 제물로 오신 것처럼 나도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희생되는 인물이 된다면 존귀한 이름의 자리에 자리 매김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수님! 기적의 이름이에요. 그 이름을 부를 때에 병이 물러갔고 열 두 해를 혈루병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낳음을 입었습니다.
날 때부터 사십년을 앉은뱅이로 있던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었고 문둥병자 소경 다리를 저는 사람 온갖 장애를 입은 사람들이 그 이름을 부를 때에 일어났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버나드. 예수님의 이름 속에 있는 그 비밀을 깨달은 자의 입 속에는 꿀 송이처럼 달콤함이 있고 예수님의 이름을 듣는 귀에는 아름다운 멜로디가 울리고 그 마음속에는 기쁨이 솟아난다고 했습니다.
어떤 글을 보았는데 일 년 중 마귀가 제일 좋아하는 달은 12월이며 제일 좋아하는 날은 바로 성탄절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경건해야 할 날인데 더 많은 사람들을 죄악에 빠뜨릴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 주님의 나심을 축하하면서 미혹의 자리를 벗어나 축복의 자리로 나아갑시다.
저는 요란한 것보다 분위기는 무겁지만 차라리 조용한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듭니다. 성도 여러분도 요란한 분위기보다 좀 점잖은 성탄절이 더 좋지 않습니까
즉 성탄절의 정신(Christmas Spirit)이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자는 말입니다. 성탄절이란 말의 뜻이 무엇인지 아시죠
단순하게 말하면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교회 절기로서 좀 더 정확한 의미를 살핀다면 크리스마스라는 단어를 분석해 보면 될 것입니다.
이 단어는 그리스도(Christ)+경배, 미사(Mass)의 합성어로서 예수님을 경배하여 우리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께 제사를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하이데거. 인간의 사고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Calculative thinking이라 해서 다분히 계산적이고 타산적이며 추리적인 생각입니다. 지극히 인간적인 사고죠
또 하나는 inspired thinking으로 영감적인 직감입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생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에서부터 오는 영적인 직감입니다.
이 시간 계산적이고 추리적인 생각을 다 비우고 위로부터 오는 영적인 직감으로 오늘의 말씀을 대한다면 성탄절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 함께 메시야로서 오신 주님을 내가 만나고 그 분과 함께 동행하는 삶이되기를 축원합니다.
1. 성탄절은 내가 예수님을 만나고 영접해야 합니다.
요 0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 말씀에는 예수님을 향하여 두 가지 태도가 나오는데 영접하는 자가 있고 영접하지 않는 자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먼저는 1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는 사람들을 밝히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유대인들은 영접하지를 않았습니다.
영접하지 않는 것은 고사하고 마지막엔 예수님을 핍박하고 그것도 모자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일까지도 하였습니다.
다음으로는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이 있는데 12절 말씀으로서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 모두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었다고 말합니다.
지금 이 시간 이 자리에 계신 분들 가운데도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서 영접한 사람이 있는 반면 혹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있는 분은 없습니까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탄생하였을 때 기쁨으로 축하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예수님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거절하거나 증오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영접하지 아니한 사람들 중에 대표적인 몇 사람을 한 번 살펴볼까요
①미움과 증오로 불태운 헤롯 왕. 헤롯 왕은(Herod the Great) 의심이 많고 잔인한 사람으로서(마 02:01)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눅 02:01) 영을 내릴 때의 통치자입니다.
이 사람은 40여 년 왕위에 있으면서 가이사랴와 예루살렘의 원형경기장을 건축했고 수도 공사를 했고 또 40여 년에 걸쳐서 예루살렘에 성전 곧 제 3성전을 건축했습니다.
그러나 미움과 증오로 가득 찬 인물이었기에 아내가 10명이고 자식이 15명이었는데 자기의 권력을 위하여 아내도 장모도 세 명의 아들까지도 살해했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로마의 줄리어스 시이저 황제는 헤롯의 아들로 태어나기보다는 돼지가 되는 것이 더 안전할 것이다 고 말했다 합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을 때에 동방 박사의 제보를 듣고 그는 속에 음흉한 계획을 가지고 베들레헴에 있는 두 살 미만의 어린 아이들을 모두 죽였지 않습니까
②세속화된 제사장과 서기관들.
이들의 반응은 이상하게 느껴질 만큼 철저하게 무관심했습니다. 메시아의 탄생지는 베들레헴이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기는 하였으나 저들은 베들레헴에 가지도 않았고 대망의 메시아가 오셨다고 하는데도 기뻐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특권만 챙기고 헤롯 왕 눈치만 살폈기에 메시아에 대한 지식이 있으면서도 무관심하였습니다. 왜 그렇게 무관심했습니까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겁니까
예, 그것은 당시 제사장이나 서기관들이 너무 깊이 세속화되었기 때문이에요. 물질이나 명예나 사회적 측면에서 볼 때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나 불편이 없었기 때문에 구태여 메시아를 필요로 하지 않은 것입니다.
③돈벌이에만 관심이 있는 여관주인.
오직 돈 벌이에만 관심이 있다 보니 만삭된 마리아와 요셉이 찾아왔을 때에 방 한 칸 내어줄 여유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관집 주인의 구유에서 나셨다면 여관집 주인은 가만히 앉아서 메시아를 자기 집에 모실 수 있는 영광을 얻었는데도 그 기회를 놓쳐 버리고 만 것입니다.
땅을 치고 통곡 할 일 아닐까요 물질에 마음 빼앗기면 축복의 기회를 놓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도 성탄을 맞을 때에 사람들은 트리를 만들고 장식을 하고 카드와 선물을 주고받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산타가 오시기를 고대하기도 하고요.
그러나 이런 여러 가지 행위 속에 상업의 속셈만이 들어 있다면 크리스마스는 진정한 의미를 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리에 나서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전혀 관계를 맺지 않은 사람들이 돈벌이를 한다고 얼마나 야단법석을 떨고 있습니까
장사를 위해서 크리스마스를 이용하는 현대판 불신자들의 크리스마스는 이 여관집 주인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 중에 축복받은 대표적인 몇 사람을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①사모하는 마음으로 먼 길을 찾아와 경배한 동방박사들.
동방박사들은 사모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멀리 동방에서부터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기 위하여 달려왔습니다. 사모하는 마음속에 정성이 담겨져 있고 헌신이 있는 법 아닙니까
그들이 먼 길을 달려와서 황금과 유황과 몰약을 예수님께 드렸듯이 오늘 우리도 예수님의 성탄을 맞이하여 기쁨으로 이 자리에 나오셨습니까 우리의 귀한 정성의 예물을 드립시다.
②기쁨의 소식을 전하는 목자들.
목자들은 천사가 전해준 소식을 듣고 아기 예수님께 가서 경배하고 그 소식을 기쁨으로 전하였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소식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기쁨으로 전합시다. 그런데 성탄절 하면 모두가 즐거워 하지만 진정 성탄절의 의미를 아는 자는 드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탄절을 통하여 서로 선물과 카드를 주고받는데 우리는 그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는 목자처럼 되어보시지 않으렵니까
2. 내가 영접한 그 분은 영광의 보좌를 떠나 오셨습니다.
06 그는 근본 여호와 하나님의 본체시나 여호와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0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01~03절을 보면 말씀이신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고 보이지 아니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이나(골 01:15) 여호와 하나님과 동등 됨을 포기하셨습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으로서의 신성 자체를 몽땅 버렸다는 뜻은 아니고 여전히 여호와 하나님이시지만 그 영광과 존귀를 포기 유보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대신 종의 형체 즉 인간의 비천한 몸을 입으셨으니 즉 신성은 그대로 가지고 계시면서 자발적으로 인성을 입으시고 고난의 길을 택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신인 양성을 지닌 분이라고 하죠. 그 비움과 포기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에게 사랑을 베풀기 위함이지요.
죄인인 우리에게 의(義)를 주시기 위해서 가난한 우리에게 부요함을 주시기 위해서 슬픈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기 위해서 기꺼이 그 길을 택하여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탄절의 정신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비우고 포기하면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은혜로 채움을 받은 성도 여러분! 이제는 주님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스스로를 비우는 자리로 이동해야지 않겠습니까
내가 얻은 것 가진 것들 중에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과 나라와 이웃을 위하여 비울 줄을 알아야 하며 때로는 포기도 되어야 하는 겁니다. 이것이 성탄절의 정신이에요.
성도 여러분! 우리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십시오. 어렵다고 다들 엄살들을 부리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너무나 부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어쩌면 가난한 것보다 오히려 너무 부해져 있는 게 많은 사람들의 문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방학과 동시에 외국으로 하도 달려 나가다 보니 지금 항공권 구하는 게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렵다고 하네요. 유명 호텔 객실과 식당들은 연말까지 계약이 꽉 차 있고요.
이런 환경들 속에서 우리 교회 성도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계속해서 부해지려는 마음보다는 오히려 가난해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나를 비움으로써 남을 채우는 길이라면 그 길을 기꺼이 택할 줄 아는 마음의 자세 이런 자세를 연말에 주님은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인색한 사람도 세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①자기와 남에게 인색한 사람(수전노). ②자기에게 후하고 남에게 인색한 사람(욕심쟁이).
③자기에게 인색하고 남에게 후한 사람(성탄절의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
0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예수님은 자기를 스스로 낮추셨는데 이것을 가리켜 흔히 자기 비하라고 부릅니다. 겸손이란 단어보다 더 강한 뉘앙스를 가진 단어지요. 여호와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으로 낮아지되 특히 사람 중에서도 가장 낮은 자가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나라 영광의 자리에서 이 세상에 오신 것만도 엄청나게 낮아지신 것인데 이 세상에서는 더 이상 낮아질 수 없는 곳까지 가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왜 이처럼 낮아지셨습니까 한 마디로 우리를 섬겨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막 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요 13: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3. 성탄절의 정신을 알고 있는 자에겐 축복이 있습니다.
09 이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사람은 한 번 죽으면 끝장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이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고 무덤 위에 장사지냄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죽음으로 끝났다면 우리의 주님이 될 수 없이 그저 성인의 죽음 정도는 될 수 있었을 것이고 존경의 대상은 될 수 있을 것이나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을 겁입니다. 왜냐하면 보통 사람의 죽음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흘 만에 부활하셨고 사십일 동안 계시다가 승천하셨고 다시 오신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주님이기에 여호와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존귀하게 하셨고 높이신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 섬길 수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처럼 스스로 낮은 자리를 향해 열린 마음으로 찾아가는 사람입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겸손하지 못하고 섬기지 못합니까 자기 스스로 높음의 자리에 좌정해 있기 때문일 것이며 그 자리를 지키려 하는 한 교만을 떨치지 못하고 말 것입니다.
성탄절의 정신은 주님 가셨던 곳을 나도 가는 것이며 계속 섬기는 자리를 찾아나서는 겁니다.
요즘의 우리들 얼마나 높아져 있는지 몰라요. 직함도 많고 타이틀도 많고. 그런 것들이 정말 섬김을 위해 사용된다면 그때는 가치 있는 직함 타이틀이 되겠지요
우리의 높음을 가지고 겸손하게 섬기면 거기서 놀라운 변화들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인간관계의 변화가 생기고 사회가 달라질 것이고 교회가 변화될 것입니다.
그러나 혹시 높음의 요소들이 우리의 겸손을 질식시켜 버린다면 그때는 오히려 비극이겠지요.
자기를 비우시고 낮추심으로 이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그냥 비하의 모습 그대로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부활 승천하셨고 영광 가운데 들어가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존귀하게 영광스럽게 승리하며 사는 비결이 곧 성탄절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를 비우고 포기함으로써 남을 부요케 하면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더욱 부요하게 해 주시며 또 나를 낮추고 섬기면 더욱 더 존귀한 이름의 자리에 이르게 해 주실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번 성탄절부터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시고 성탄절 정신으로 성숙한 신앙을 가꿔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존귀한 자리에 이르게 해 주실 것을 내다보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된 일에 잘 쓰임을 받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높아지신 그 이름의 자리에 우리 모두가 다 들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속죄의 제물로 오신 것처럼 나도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희생되는 인물이 된다면 존귀한 이름의 자리에 자리 매김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수님! 기적의 이름이에요. 그 이름을 부를 때에 병이 물러갔고 열 두 해를 혈루병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낳음을 입었습니다.
날 때부터 사십년을 앉은뱅이로 있던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었고 문둥병자 소경 다리를 저는 사람 온갖 장애를 입은 사람들이 그 이름을 부를 때에 일어났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버나드. 예수님의 이름 속에 있는 그 비밀을 깨달은 자의 입 속에는 꿀 송이처럼 달콤함이 있고 예수님의 이름을 듣는 귀에는 아름다운 멜로디가 울리고 그 마음속에는 기쁨이 솟아난다고 했습니다.
어떤 글을 보았는데 일 년 중 마귀가 제일 좋아하는 달은 12월이며 제일 좋아하는 날은 바로 성탄절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경건해야 할 날인데 더 많은 사람들을 죄악에 빠뜨릴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 주님의 나심을 축하하면서 미혹의 자리를 벗어나 축복의 자리로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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