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 성탄준비
본문
오늘은 우리 모두에게 소망을 주시고, 구원을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아기 예수님을 축하하는 기쁨의 성탄절입니다. 우리 모두의 가슴과 가정가운데 기쁨과 평화가 더욱 충만하실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난 주일에는 마리아의 성탄준비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요셉의 성탄준비에 대하여 말씀드리면서 은혜를 사모하려고 합니다. 요셉은 어떤 사람입니까 시골의 정숙한 처녀 마리아와 정혼한 사이입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동거하기도 전에 잉태를 했습니다.
그 때 요셉이 얼마나 당황했겠고 마음가운데 고민하였을까요 바로 그 때 천사가 꿈에 나타났습니다. "요셉아"불러서 세 가지를 당부하십니다. 하나는 마리아 데려오기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마리아의 잉태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는 것입니다. 이 때 요셉이 어떻게 했습니까 이 시간 본문 말씀 중심해서 세 가지 내용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째 요셉의 인격.
요셉은 어떤 사람입니까
① 요셉은 의로운 사람입니다.
본문19절을 보면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죄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여기 의로운 사람이란 정의롭게, 바르게, 정직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에는 잘사는 사람 많습니다. 그러나 요새 요셉처럼 살아보려는 사람은 많지 못합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망할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전혀 죄 없는 사람을 찾은 것은 아닙니다.
비록 허물이 있을지라도 옳게, 바르게, 정직하게 사람과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살아보려고 힘쓰는 요셉과 같은 의로운 사람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의로운 사람이 없었기에 소돔과 고모라는 망하고 말았습니다. 요셉은 마리아를 정죄할 줄 몰랐습니다. '나쁜 여자, 죄를 범한 여자'그렇게 정죄하지 아니했습니다.
또 요셉은 자기 주장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고집이 없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본문24절에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요셉은 내 뜻대로 살지 않고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작정하고 주님을 찬송하면서 순종하는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오늘 성탄주일에 주님께서도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요셉인생을 찾고 계십니다. 이러한 가정에 임하기를 원하고 이러한 성도 만나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이 땅에 의로운 사람이 누구냐 묻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② 남의 허물을 드러내지 아니한 사람입니다.
요셉은 약혼녀 마리아의 임신을 알게 되었을 때 몹시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19절을 보면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남의 허물을 찾으려고 뒷조사하며 찾으면 그것을 들추어내려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남의 눈 속에 있는 작은 티를 지적하려는 사람입니다. 또 하나는 남의 허물을 덮어주고 감싸주고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주고 치료해 줄줄 아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를 깨닫는 사람입니다.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배가 불러 왔습니다. 그런데 누가 마리아의 사정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만일 '여기 부정한 마리아를 보라. 배가 부른 것이 그 증거가 아니냐'이렇게 나팔을 불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마리아는 물론 요셉도 함께 패가망신(敗家亡身)되었을 것입니다.
③ 생각이 깊은 사람입니다.
우리의 인격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본문20절을 보면 "이 일을 생각할 때" 이 말은 깊이 숙고했다는 뜻이요, 무슨 곡절이 있었겠지 라고 생각했다는 말입니다.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마리아를 이해하려고 했다는 의미입니다.
이 때 20절을 보니까"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불렀습니다. 왜 요셉아 부르지 않고 "다윗의 자손 요셉아"불렀을까요 마1장 서두에 보면 메시아 족보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 가운데서 나오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바로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입니다. 때가 차매 요셉에게 메시아 곧 한 아들을 낳을 것인데 이름을 예수라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요셉은 떠드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팔부는 사람이 아닙니다. 남의 허물을 들추어내려는 사람이 아닙니다. 생각이 깊은 사람입니다. 천사가 누구에게 나타났습니까 생각이 깊은 사람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두려워 말라"격려하고 축복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천사를 만나 뵙는 금년 성탄절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요셉의 믿음.
요셉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천사가 현몽한 아들에 대한 두 이름이 답을 줍니다. 하나는 예수, 또 하나는 임마누엘입니다. 요셉이 무엇을 믿었습니까
① 죄에서 구원하실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본문21절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란 이름은 요셉이 지어준 이름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어주신 이름이고 천사가 전하여준 이름입니다. 이름마다 뜻이 있습니다. 예수란 무슨 뜻입니까 '도와준다. 구원한다'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불쌍한 인생을 도와주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시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십니다. 오신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누구의 죄를 위해서 입니까 바로 내 죄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꿈속에서라도 부를 우리의 구원가가 아닙니까
② 우리와 함께 하실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본문23절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여기 임마누엘이란 말은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마28:20을 기억하시지요. "볼지어다 내가 세상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크리스마스는 예수님께서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기 위하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날입니다. 거룩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낮고, 천하고, 냄새나고, 추한 죄인들과 함께 하신다는 말이 놀랍지 않습니까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떻게 유한한 그리고 죽을 인생인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말입니까 이것이 무엇입니까
기적입니다. 크리스마스입니다. 성육신 사건, 임마누엘 사건입니다. 임마누엘은 어떤 신화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추상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사건이고 지금도 아기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 현실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사 무엇을 하신다는 것입니까 사30:26이 답합니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상처 입은 우리를 싸매십니다. 슬픈 자를 위로하십니다. 가난한 자를 부유케 하십니다.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예수님은 누구신가 우는 자의 위로와 없는 자의 풍성이며 천한 자의 높임과 잡힌 자의 놓임 되고 우리 기쁨 되시네♬찬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소망, 기쁨이십니다. 만일 우리에게 예수님이 안 계시다면 우리처럼 불쌍한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 고마우신 예수님 앞에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남은 생애를 전적으로 드려야 만 할 것입니다.
셋째 요셉의 증거.
25절을 보십시오.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만일 요셉이 아들을 낳기도 전에 마리아와 동침했다면 어찌되었겠습니까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설을 무너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이야말로 기독교의 기둥이 아닙니까 핵심이 아닙니까 어떻게 죄인이 인생을 구원할 수가 있겠습니까 죄 없으신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시기 위해서 정결한 처녀의 몸으로 탄생하신 우리 주님이십니다.
카톨릭에서는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않았다는 이 말씀을 근거해서 영원한 동정녀 설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빗나간 주장입니다. 요셉은 그 후에 정상적인 마리아와 부부생활을 했습니다. 예수님에게도 형제들이 있었으니 그 증거입니다. 카톨릭에서는 그 형제들을 사촌 형제들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촌이라는 말이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그냥 형제들이라고 했습니다. 왜 요셉이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않았습니까 죄인을 구속하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입니다.
누가복음은 누가가 기록했습니다. 누가는 기독교역사가가 아닌 세속적인 역사학자들까지도 훌륭한 역사가로 지목하는 인물입니다. 그리고 누가의 직업은 의사입니다. 의사인 누가에 의해서 동정녀 탄생의 기록이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움직일 수 없는 기독교의 기둥이요, 발판,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말입니다. 물론 반대자들의 주장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의 기록이 많지 않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연구의 부족 탓입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꿰뚫는 교리 하나가 있는데 바로 동정녀 탄생입니다. 또 예수님 자신이 동정녀 탄생을 말씀하신 일이 없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아니합니다.
요8:23을 보면"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과학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일본신학자 우찌무라간조가 말합니다. 성경에서 과학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만 남기고 나머지를 모두 제거한 다면은 무엇이 남을 것인가 두 가지만 남을 것인데 성경의 앞 뚜껑과 성경의 뒤 뚜껑만 남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말씀은 이적적인 말씀이요 과학이 용납할 수 없지만 과학을 반대하는 말씀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창1|1을 보십시오 "태초에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얼마나 엄청난 기적입니까 과학이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또 성경의 맨 마지막 선언을 보십시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했습니다. 구름 타고 영광 중에 다시오 실 예수님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지 않습니까 이 얼마나 놀라운 이적이라는 말입니까 성경은 이적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적으로 마칩니다.
미국 남침례 신학교 학장을 역임한 시카고라 박사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오늘 아들이 학교에서 선생님의 말을 듣고 와서 질문을 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는 큰 물고기가 요나를 삼켰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그때 아버지는 말했습니다. '아들아! 나는 그 사실을 믿는다. 만일 성경에 요나가 물고기를 삼켰다고 기록했을지라도 나는 그대로 믿는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불가능이 어디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결코 과학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과학을 초월합니다. 믿음에서 초자연적인 기적을 제거하면 믿음은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프링스턴신학교가 낳은 위대한 신학자가 한사람 있습니다. 그레샴메이천 박사입니다. 그
가 쓴 책 가운데 '예수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대하여 많은 신학자들은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말합니다. 메이천 박사가 쓴 예수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에 관하여 반론을 제기할 수 있는 작품은 아직 나오지 아니 했다고 한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동정녀 몸에서 태어나셔야만 했습니까 우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구약성경에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이 얼마나 많이 예언되어 있습니까 만일 예수님이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모든 구약의 약속이 거짓말 약속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본문 22절입니다.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여기 선지자가 누구입니까 이사야입니다. 본문 23절은 사7|14을 인용한 말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만일 예수님께서 처녀의 몸에서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여호와 하나님의 종 이사야는 새빨간 거짓말쟁이가 되고 말지 않았겠습니까 또 죄인을 구속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동정녀의 몸에서 탄생하셔야만 하셨습니다. 죄 있는 것은 죄 있는 것을 대신 할 수 없습니다. 거룩하고 죄 없는 자만이 죄인을 대속할 제물이 될 수 있습니다. 요셉의 증언을 소개합니다.
욥25:4절에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부녀에게서 난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의인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예수님을 동정녀 몸에서 탄생하게 섭리하신 것입니다.
본문24절에 보면 요셉은 주의 사자의 분부한대로 행하였다고 했고, 또 본문25절을 보면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라고 하였으며 또 본문25절은 요셉은 천사의 지시대로 아들을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했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아기 예수님을 잘 소개한 증거자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크리스마스는 어떤 날입니까 이사야, 요셉이 증거한 대로 아기 예수님께서 처녀의 몸에 탄생하여 우리 가운데 오신 날입니다. 첫 번 크리스마스가 기독교를 이 땅에 설립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오직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한자로 기독(基督)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한자로 우리가 믿고 있는 교를 기독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한글로는 예수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없는 기독교는 없습니다. 예수님 없는 그리스도인은 없습니다. 예수님 없는 기독교문화, 역사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육적으로는 베들레헴 말구유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적으로 우리 모든 죄인들의 가슴가운데 오셨습니다. 불신과 가난으로 쪼들린 가정마다 오셨습니다. 충장로 거리, 중앙교회에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여기 오셨다는 말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 오셨다는 말이요, 여호와 하나님께서 시간가운데 오셨다는 말이요,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의 피곤하고 지친, 고독하고, 고달픈 내 삶 속에 오셨다는 말입니다.
오실 때에 놀라운 방법으로 오셨습니다. 성령으로 잉태하였고, 처녀의 몸을 통하여 오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왜 오셔야만 했습니까 죽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성탄의 의미를 십자가를 통해서만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골고다의 언덕을 떠나서는 베들레헴의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 모두가 죄 씻음을 받고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 모두는 삶의 목적을 발견하였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 길이 뚫려지고 승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 가슴가운데 기쁨, 평화가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의 남은 생애가 승리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와 같은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난 주일에는 마리아의 성탄준비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요셉의 성탄준비에 대하여 말씀드리면서 은혜를 사모하려고 합니다. 요셉은 어떤 사람입니까 시골의 정숙한 처녀 마리아와 정혼한 사이입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동거하기도 전에 잉태를 했습니다.
그 때 요셉이 얼마나 당황했겠고 마음가운데 고민하였을까요 바로 그 때 천사가 꿈에 나타났습니다. "요셉아"불러서 세 가지를 당부하십니다. 하나는 마리아 데려오기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마리아의 잉태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는 것입니다. 이 때 요셉이 어떻게 했습니까 이 시간 본문 말씀 중심해서 세 가지 내용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째 요셉의 인격.
요셉은 어떤 사람입니까
① 요셉은 의로운 사람입니다.
본문19절을 보면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죄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여기 의로운 사람이란 정의롭게, 바르게, 정직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에는 잘사는 사람 많습니다. 그러나 요새 요셉처럼 살아보려는 사람은 많지 못합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망할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전혀 죄 없는 사람을 찾은 것은 아닙니다.
비록 허물이 있을지라도 옳게, 바르게, 정직하게 사람과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살아보려고 힘쓰는 요셉과 같은 의로운 사람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의로운 사람이 없었기에 소돔과 고모라는 망하고 말았습니다. 요셉은 마리아를 정죄할 줄 몰랐습니다. '나쁜 여자, 죄를 범한 여자'그렇게 정죄하지 아니했습니다.
또 요셉은 자기 주장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고집이 없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본문24절에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요셉은 내 뜻대로 살지 않고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작정하고 주님을 찬송하면서 순종하는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오늘 성탄주일에 주님께서도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요셉인생을 찾고 계십니다. 이러한 가정에 임하기를 원하고 이러한 성도 만나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이 땅에 의로운 사람이 누구냐 묻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② 남의 허물을 드러내지 아니한 사람입니다.
요셉은 약혼녀 마리아의 임신을 알게 되었을 때 몹시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19절을 보면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남의 허물을 찾으려고 뒷조사하며 찾으면 그것을 들추어내려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남의 눈 속에 있는 작은 티를 지적하려는 사람입니다. 또 하나는 남의 허물을 덮어주고 감싸주고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주고 치료해 줄줄 아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를 깨닫는 사람입니다.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배가 불러 왔습니다. 그런데 누가 마리아의 사정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만일 '여기 부정한 마리아를 보라. 배가 부른 것이 그 증거가 아니냐'이렇게 나팔을 불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마리아는 물론 요셉도 함께 패가망신(敗家亡身)되었을 것입니다.
③ 생각이 깊은 사람입니다.
우리의 인격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본문20절을 보면 "이 일을 생각할 때" 이 말은 깊이 숙고했다는 뜻이요, 무슨 곡절이 있었겠지 라고 생각했다는 말입니다.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마리아를 이해하려고 했다는 의미입니다.
이 때 20절을 보니까"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불렀습니다. 왜 요셉아 부르지 않고 "다윗의 자손 요셉아"불렀을까요 마1장 서두에 보면 메시아 족보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 가운데서 나오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바로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입니다. 때가 차매 요셉에게 메시아 곧 한 아들을 낳을 것인데 이름을 예수라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요셉은 떠드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팔부는 사람이 아닙니다. 남의 허물을 들추어내려는 사람이 아닙니다. 생각이 깊은 사람입니다. 천사가 누구에게 나타났습니까 생각이 깊은 사람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두려워 말라"격려하고 축복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천사를 만나 뵙는 금년 성탄절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요셉의 믿음.
요셉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천사가 현몽한 아들에 대한 두 이름이 답을 줍니다. 하나는 예수, 또 하나는 임마누엘입니다. 요셉이 무엇을 믿었습니까
① 죄에서 구원하실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본문21절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란 이름은 요셉이 지어준 이름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어주신 이름이고 천사가 전하여준 이름입니다. 이름마다 뜻이 있습니다. 예수란 무슨 뜻입니까 '도와준다. 구원한다'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불쌍한 인생을 도와주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시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십니다. 오신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누구의 죄를 위해서 입니까 바로 내 죄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꿈속에서라도 부를 우리의 구원가가 아닙니까
② 우리와 함께 하실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본문23절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여기 임마누엘이란 말은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마28:20을 기억하시지요. "볼지어다 내가 세상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크리스마스는 예수님께서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기 위하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날입니다. 거룩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낮고, 천하고, 냄새나고, 추한 죄인들과 함께 하신다는 말이 놀랍지 않습니까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떻게 유한한 그리고 죽을 인생인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말입니까 이것이 무엇입니까
기적입니다. 크리스마스입니다. 성육신 사건, 임마누엘 사건입니다. 임마누엘은 어떤 신화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추상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사건이고 지금도 아기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 현실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사 무엇을 하신다는 것입니까 사30:26이 답합니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상처 입은 우리를 싸매십니다. 슬픈 자를 위로하십니다. 가난한 자를 부유케 하십니다.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예수님은 누구신가 우는 자의 위로와 없는 자의 풍성이며 천한 자의 높임과 잡힌 자의 놓임 되고 우리 기쁨 되시네♬찬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소망, 기쁨이십니다. 만일 우리에게 예수님이 안 계시다면 우리처럼 불쌍한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 고마우신 예수님 앞에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남은 생애를 전적으로 드려야 만 할 것입니다.
셋째 요셉의 증거.
25절을 보십시오.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만일 요셉이 아들을 낳기도 전에 마리아와 동침했다면 어찌되었겠습니까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설을 무너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이야말로 기독교의 기둥이 아닙니까 핵심이 아닙니까 어떻게 죄인이 인생을 구원할 수가 있겠습니까 죄 없으신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시기 위해서 정결한 처녀의 몸으로 탄생하신 우리 주님이십니다.
카톨릭에서는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않았다는 이 말씀을 근거해서 영원한 동정녀 설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빗나간 주장입니다. 요셉은 그 후에 정상적인 마리아와 부부생활을 했습니다. 예수님에게도 형제들이 있었으니 그 증거입니다. 카톨릭에서는 그 형제들을 사촌 형제들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촌이라는 말이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그냥 형제들이라고 했습니다. 왜 요셉이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않았습니까 죄인을 구속하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입니다.
누가복음은 누가가 기록했습니다. 누가는 기독교역사가가 아닌 세속적인 역사학자들까지도 훌륭한 역사가로 지목하는 인물입니다. 그리고 누가의 직업은 의사입니다. 의사인 누가에 의해서 동정녀 탄생의 기록이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움직일 수 없는 기독교의 기둥이요, 발판,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말입니다. 물론 반대자들의 주장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의 기록이 많지 않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연구의 부족 탓입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꿰뚫는 교리 하나가 있는데 바로 동정녀 탄생입니다. 또 예수님 자신이 동정녀 탄생을 말씀하신 일이 없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아니합니다.
요8:23을 보면"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과학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일본신학자 우찌무라간조가 말합니다. 성경에서 과학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만 남기고 나머지를 모두 제거한 다면은 무엇이 남을 것인가 두 가지만 남을 것인데 성경의 앞 뚜껑과 성경의 뒤 뚜껑만 남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말씀은 이적적인 말씀이요 과학이 용납할 수 없지만 과학을 반대하는 말씀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창1|1을 보십시오 "태초에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얼마나 엄청난 기적입니까 과학이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또 성경의 맨 마지막 선언을 보십시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했습니다. 구름 타고 영광 중에 다시오 실 예수님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지 않습니까 이 얼마나 놀라운 이적이라는 말입니까 성경은 이적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적으로 마칩니다.
미국 남침례 신학교 학장을 역임한 시카고라 박사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오늘 아들이 학교에서 선생님의 말을 듣고 와서 질문을 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는 큰 물고기가 요나를 삼켰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그때 아버지는 말했습니다. '아들아! 나는 그 사실을 믿는다. 만일 성경에 요나가 물고기를 삼켰다고 기록했을지라도 나는 그대로 믿는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불가능이 어디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결코 과학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과학을 초월합니다. 믿음에서 초자연적인 기적을 제거하면 믿음은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프링스턴신학교가 낳은 위대한 신학자가 한사람 있습니다. 그레샴메이천 박사입니다. 그
가 쓴 책 가운데 '예수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대하여 많은 신학자들은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말합니다. 메이천 박사가 쓴 예수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에 관하여 반론을 제기할 수 있는 작품은 아직 나오지 아니 했다고 한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동정녀 몸에서 태어나셔야만 했습니까 우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구약성경에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이 얼마나 많이 예언되어 있습니까 만일 예수님이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모든 구약의 약속이 거짓말 약속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본문 22절입니다.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여기 선지자가 누구입니까 이사야입니다. 본문 23절은 사7|14을 인용한 말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만일 예수님께서 처녀의 몸에서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여호와 하나님의 종 이사야는 새빨간 거짓말쟁이가 되고 말지 않았겠습니까 또 죄인을 구속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동정녀의 몸에서 탄생하셔야만 하셨습니다. 죄 있는 것은 죄 있는 것을 대신 할 수 없습니다. 거룩하고 죄 없는 자만이 죄인을 대속할 제물이 될 수 있습니다. 요셉의 증언을 소개합니다.
욥25:4절에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부녀에게서 난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의인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예수님을 동정녀 몸에서 탄생하게 섭리하신 것입니다.
본문24절에 보면 요셉은 주의 사자의 분부한대로 행하였다고 했고, 또 본문25절을 보면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라고 하였으며 또 본문25절은 요셉은 천사의 지시대로 아들을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했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아기 예수님을 잘 소개한 증거자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크리스마스는 어떤 날입니까 이사야, 요셉이 증거한 대로 아기 예수님께서 처녀의 몸에 탄생하여 우리 가운데 오신 날입니다. 첫 번 크리스마스가 기독교를 이 땅에 설립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오직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한자로 기독(基督)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한자로 우리가 믿고 있는 교를 기독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한글로는 예수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없는 기독교는 없습니다. 예수님 없는 그리스도인은 없습니다. 예수님 없는 기독교문화, 역사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육적으로는 베들레헴 말구유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적으로 우리 모든 죄인들의 가슴가운데 오셨습니다. 불신과 가난으로 쪼들린 가정마다 오셨습니다. 충장로 거리, 중앙교회에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여기 오셨다는 말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 오셨다는 말이요, 여호와 하나님께서 시간가운데 오셨다는 말이요,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의 피곤하고 지친, 고독하고, 고달픈 내 삶 속에 오셨다는 말입니다.
오실 때에 놀라운 방법으로 오셨습니다. 성령으로 잉태하였고, 처녀의 몸을 통하여 오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왜 오셔야만 했습니까 죽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성탄의 의미를 십자가를 통해서만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골고다의 언덕을 떠나서는 베들레헴의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 모두가 죄 씻음을 받고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 모두는 삶의 목적을 발견하였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 길이 뚫려지고 승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 가슴가운데 기쁨, 평화가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의 남은 생애가 승리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와 같은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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