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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 내 영혼의 명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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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넘쳐나는 성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옆에 계신 분께 성탄의 인사를 드립니다.
“예수님은 바로 당신을 위해 오셨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시인 김현승 님은 크리스마스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집집마다 예수 그리스도 탄생의 기쁨이 넘치는 가장 큰 영혼의 명절”입니다.
시인은 크리스마스를 영혼의 명절이라고 노래합니다.
왜 크리스마스가 우리 영혼의 명절이 될 수 있을까요
명절하면 고향과 가족간의 따뜻한 사랑이 생각납니다.
멀리 떨어져 있던 가족, 친지, 친구들이 만나서 삶을 서로 나누는 포근한 정이 생각납니다.
명절에는 감사가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마음의 넉넉함과 풍성함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탄절은 그런점에서 우리 영혼의 명절임에 틀림없습니다.
내 영혼이 예수님을 통해서 새롭게 존재의 고향을 발견합니다.
내 마음이 예수님을 통해서 새롭게 거듭납니다.
내 환경이 예수님을 통해서 새롭게 변화됩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을 만남으로 모든 것이 변화되고 새롭게 됩니다.
더 풍성하게 하시고, 자유케 하시는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그 중심에 바로 예수님이 탄생하신 성탄절이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지 않았다면 이런 놀라운 축복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탄절은 우리에게 있어서 최고의 영혼의 명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오시기 700년 전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하셨습니다.
이사야서는 구약의 복음서로 알려질 만큼, 장차 메시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사역, 그리고 죽으심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수님의 오심을 예언했던 시대적 상황은 이렇습니다.
그 당시 앗수르 라는 나라가 세계의 패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미 북 왕국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침공 앞에 무참하게 짓밟히고 말았습니다.
앗수르는 그 여세를 몰아 남 유다를 침공했습니다.
유다 역시 앗수르의 대군과 맞서 싸울 수 있는 힘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남 유다를 다스리던 웃시야 왕까지 죽고 말았습니다.
웃시야 왕의 죽음으로 인해 남 유다는 정치적인 공백 상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선장이 없는 배처럼 유다 백성들은 국가적 위기상황 속에서 두려움에 떨어야만 했습니다.
자신들의 힘으로는 도전히 나라를 지켜낼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그렇다고 주변 어느 나라에 도움을 청할 수도 없는 실정입니다.
그나마 지금까지 믿을 수 있는 나라는 오직 애굽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애굽 역시도 힘이 세약해져서 도움을 요청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유다로서는 어느 곳 하나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제 곧 북 이스라엘처럼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을 당하고 말 것이라는 절망감만이 가득했습니다.
그렇게 두려움과 불안에 떨고 있는 유다 백성들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희망의 빛을 던져주십니다.
바람 앞에 등불처럼, 곧 멸망할 것만 같은 유다 민족을 구원할 메시야를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비하고 계신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소망이 없는 나라, 꺼져가는 등불같이 멸망의 위기 앞에 서 있는 나라 유다를 그 위기에서 건져낼 수 있는 사람은 세상의 권력을 가진 왕이 아닙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손,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습니다.
절망 가운데 다가오시는 소망의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바로 본문 6절 말씀입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
한 아기가 태어날 것인데, 그 아기가 이 민족의 유일한 희망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는 평범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 어깨에는 세상의 모든 정치세력보다 더 큰 위엄과 권세를 가졌습니다.
그분은 '기묘자'이며 '모사'입니다. 어느 누구도 생각할 수 없는 놀라운 일들을 계획하시고 행하실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분은 또한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인간적인 권위를 가지고 통치하시는 분이 아니라, 신적인 권위를 가지신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진정한 평화를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사람을 보고 상황을 볼 때에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디에서도 기쁨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을 위해서 보내주실 메시야는 참 소망이요 어둠을 밝히는 빛이십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백성들에게 기쁨과 평화를 회복시켜 주실 전능자이십니다.
그분은 바로 온 인류의 구세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약 7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한 아기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세가지 이유를 살펴봅니다.
 첫째, 예수님은 흑암 가운데 소망의 빛을 비추기 위해 오셨습니다.
본문 2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
2006년 전에 아기 예수로 태어나신 그리스도는 흑암에 살던 백성들에게 희망의 빛을 비춰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오신 당시에도 이스라엘은 이사야 시대의 유다만큼이나 혼란스러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선지자가 예언을 멈춘 지 400년이나 되었습니다.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외칠 선지자가 그리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지 않으니까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는 흑암과 사망으로 표현된 바로 그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정치적인 상황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로마의 식민지 생활 때문에 너무나도 많은 백성들이 압제와 수탈로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바로 그 때 예수님이 태어나셨습니다.
그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셨습니다.
죄악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신음하던 백성들에게 천국을 보여주신 세상의 참 빛이셨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어두움 가운데 앉아 있던 수많은 사람들은 참 빛이 세상에 오셨지만 그분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어둠은 근본적으로 빛을 싫어합니다.
빛이 오면 어둠은 그 자리를 빛에게 내어주고 물러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한 아기를 우리에게 주셨을 때에도 그랬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메시야를 기다리고는 있었지만, 참 빛이신 아기 예수를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그분을 싫어했습니다.
어둠이 빛을 쫓아내려 하고 있습니다.
세상 어둠의 대명사인 헤롯왕은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군사를 풀기도 했습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참 빛이신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 어둠의 세력들이 늘 틈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참 빛이신 예수님은 죄와 사망의 그늘에 앉은 우리에게 생명의 빛을 비춰주셨습니다.
절망과 좌절 속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의 빛이 되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삶의 자리는 어떻습니까
무엇이 여러분을 좌절하게 만듭니까
희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인생의 뒷골목에 서 있다고 생각되신 분은 없으십니까 이 땅에 참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베들레헴 말구유에 오신 아기 예수님은 절망 가운데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어 주십니다.
예수님은 절망 가운데 신음하는 자들에게 소망의 빛을 비추어 주십니다.
성탄의 아침, 참된 소망의 빛이 여러분 가운데 비추어지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예수님의 모든 멍에를 꺾어 주시고, 참된 기쁨과 만족을 주시는 사랑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본문 3-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케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누는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이는 그들의 무겁게 멘 멍에와 그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
예수님은 우리의 어깨에서 무거운 멍에를 벗겨주시는 분이십니다.
고통의 채찍과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시고 우리에게 즐거움과 기쁨을 회복시켜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날 우리 인간들은 너무나도 허전한 가슴을 쓸어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무리 만족함을 얻으려고 해도 세상 그 어디에서도 만족함을 찾을 수가 없어서, 그저 공허한 모습 그대로를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서 재물에 취해보기도 합니다.
죽도록 돈을 벌어 주머니가 두둑해지면 공허함이 없어질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돈을 은행에 쌓아놓고 있다 하더라도 가슴 속의 공허함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쾌락의 늪에 빠져 들어감으로 그 공허함을 채워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쾌락은 그 순간 뿐입니다.
그 순간을 벗어나면 더 큰 구멍이 가슴 속에 남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루의 삶을 마감하고 잠자리에 누워서 가만히 하루를 되돌아보면 가슴 뿌듯할 때가 더 많습니까
아니면 뭔지 모를 공허함이 가슴 가득 밀려오는 것을 느낄 때가 더 많습니까
지금까지 살아오신 삶에 만족하십니까
지금까지 너무 헛 살아온 것은 아닌가 하는 깊은 좌절감에 빠져보신 적은 없으십니까
행복할 것만 같은 희망을 품고 결혼생활을 시작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행복보다는 남편이나 아내가 메꿔줄 수 없는 텅 비어 있는 가슴 때문에 괴롭지 않습니까 아니 그 비어버린 가슴을 체념하고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호와 하나님 밖에서는 참된 인생의 만족을 얻을 수 없습니다.
아버지 곁을 떠난 탕자가 먹을 것이 없어 돼지들이 먹는 쥐엄열매로 배를 채우려 하지만, 그것마저 구할 수가 없어서 굶주릴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여호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세상 그 무엇으로 그 구멍 뚫린 가슴을 채우려고 해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의 영적인 빈 가슴을 채울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 10:10) 말씀하십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 때, 생명을 얻고, 풍성케 하시는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진정한 만족과 기쁨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멍에를 꺾어 주시고, 진정한 자유와 기쁨을 주시는 주님의 사랑이 가 가득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셋째, 예수님은 평화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상의 빛으로 주신 한 아기는 평강의 왕이셨습니다.
본문 6-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이름은…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
아기 예수는 평화가 없는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오신 분이십니다.
죄와 처절한 싸움을 해야 하는 우리들에게 하늘의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아기 예수가 탄생했을 때 하늘의 천군과 천사들이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눅 2:14)
아기 예수를 영접한 사람들의 마음 속에 하늘의 평화가 채워집니다.
아기 예수가 이 땅에 오심은 그를 기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평화가 주어집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이 땅에 평화를 만드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여호와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엡 2:14-18)
이 땅에 평화는 전쟁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평화는 사람들의 노력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어떤 정치적인 지도자 한 두 사람의 힘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끊임없이 전쟁과 싸움을 만들어낼 뿐입니다.
인간은 겉으로는 모두 평화를 원합니다.
그러면서도 근본적으로 평화보다는 싸움을 좋아하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어떤 노력으로도 진정한 평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함으로 그곳에 평화가 정착되었습니까
북한의 핵무기 실험으로 우리나라는 국제적으로 어려움에 직면해 있습니다.
6자회담을 통해서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평화는 회의를 통해서, 인간의 어떤 힘과 방법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시고 통치하실 때 가능합니다.
그런점에서 이 땅의 진정한 평화는 여호와 하나님이 위로부터 주셔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평화의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성 프랜시스의 평화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오늘 본문 7절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을 덧붙입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
세상에 소망의 빛을 비추어 주시고, 참된 기쁨과 만족을 주시고, 평화의 빛을 비추게 하시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의 열심히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열심이 반드시 그 일을 이루십니다.
따라서 우리의 할 일은 여호와의 열심히 이루시도록 준비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속히 우리 가운데 역사하셔서 여호와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시도록 우리가 차지하고 있는 자리를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내 방법을 포기하고 주님께서 이루시도록 순종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나는 죽고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도록’ 내 주권을 포기하고 주님께 내어 드릴 때 여호와 하나님의 열심히 우리를 통하여 선한 역사를 이루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기 예수의 오심은 어두움과 흑암 가운데 살던 백성들에게 소망의 빛이 비춰진 사건입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은 머든 멍에를 꺾어주시고, 우리들에게 참된 만족과 기쁨을 가져다 주는 사랑의 사건입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은 전쟁과 폭력이 난무한 세상에 참된 평화를 가져온 사건입니다.
오직 아기 예수님을 통해서만 우리 삶 속에 소망과 사랑과, 평화의 빛을 비출 수 있습니다.
성탄의 아침, 우리 마음 중심에 다시 한번 예수 그리스도를 모심으로 진정한 소망과 사랑과 평화의 빛이 가득해지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여호와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우리 모두에게는 기쁨과 감격이 넘치는 영혼의 명절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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