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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 성탄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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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 아침 주 앞에 모인 여러분과 가정 위에 성탄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2천년 전 이스라엘의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 한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가장 비천한 모습으로 태어난 아기였습니다. 여관방 한 칸도 얻지 못해 마구간에서 태어났습니다. 요때기 하나 없어 누더기 강보에 싸여 말구유에 뉘어졌습니다.
누가 이 아기를 보고 위대한 인물이라 여길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이 아기는 바로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의 탄생은 인류 역사 상 가장 중대한 사건이었습니다. 인류 역사는 그를 중심으로 B. C. (Before Christ)와 A. D. (Anno Domini)로 양분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탄생을 거룩한 탄생 ‘성탄’(聖誕, Nativity)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성탄에 관한 기록은 성경 전체에 나와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예언의 형태로, 신약에서는 성취된 사건의 기록으로 등장합니다. 그 중에 신약의 첫 부분인 복음서에 가장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사실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성탄에 관한 기록이 거의 언급이 없고, 공생애부터 기록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사실적인 기록으로서가 아니라, 신학적인 설명으로 언급됩니다.
오늘 본문을 보니까, 성탄을 가리켜 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까 5절.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빛’으로 오셨다는 겁니다. 말하자면 성탄은 어두운 세상에 빛이 나타난 사건입니다.
본문 외에도 성탄을 빛으로 묘사한 성경 구절들이 많이 있습니다. 마4:16(사9:1~2 인용) 보면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눅2:8~9 보면 베들레헴 지경의 목자들이 밤중에 양떼를 지키다가 천사들로부터 성탄의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때 주의 영광이 빛으로 나타나 비춥니다.
눅2:8~9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마2:1~11 보면 멀리 동방 박사들이 예수님의 성탄 사실을 알고 찾아옵니다. 그때 어떻게 찾아왔습니까 밤하늘에 이상한 별빛을 보고 아기 예수 계신 곳을 찾아갑니다.
우리도 성탄절 아침 이 시간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 성탄의 빛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진정한 성탄의 큰 은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1 예수님의 빛 : 생명의 빛, 영적인 빛
예수님이 빛으로 오셨다고 했는데, 그 빛은 과연 어떤 빛일까요 물론 우리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빛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빛은 ‘영적인 빛’입니다. 이 빛은 우리 인간의 영혼에 생명을 부여하는 ‘생명의 빛’입니다. 4절.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물리적인 빛도 생물체에 육적인 생명을 줍니다.
만일 태양빛이 없다면 식물이든 동물이든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 창조 기사를 보면 맨 첫날 여호와 하나님께서 무엇부터 창조하셨습니까 빛입니다! 물리적인 빛이 없으면 생명체가 죽어버리는 것처럼, 예수님이 비춰주시는 영적인 빛이 없으면 인간의 영혼은 죽습니다. 멸망하고 맙니다. 인간은 육체로만 되어 있지 않고 영혼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예수님의 빛을 받아야 합니다.
2 생명의 빛의 다양한 모습 : 구원의 빛, 소망의 빛, 치유의 빛, 사랑의 빛
그러면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빛은 우리에게 어떤 빛으로 나타납니까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마치 물리적인 빛이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과 같습니다. 태양빛은 때로는 밝은 조명으로, 때로는 뜨거운 열기로, 때로는 동력을 일으키는 에너지 등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생명의 빛, 영적인 빛도 마찬가지 여러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① 구원의 빛 :
성경 보면 인간의 죄와 사망을 가리켜 ‘어둠’으로 비유합니다. 죄로 인해 인간은 육신적으로 뿐 아니라 영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 영혼에 두려움과 허무가 밀려듭니다. 그리고 마지막 영원한 지옥에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영혼 가운데 영접하면 이 어둠이 사라집니다. 어둠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오직 빛입니다. 빛이 오면 어둠은 즉시 사라집니다. 두려움과 허무는 사라지고 평안과 기쁨으로 충만해집니다.
예수님이 어둠을 이긴 빛이심을 보여주는 사건이 있습니다. 성탄 당시 빛이 나타난 것도 그렇지만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한낮인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 칠흑 같은 어둠이 깔렸습니다. 그것은 죄와 영원한 사망,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는 어둠이었습니다. 그런데 사흘 만에 죄와 사망 권세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의 아침 어둠이 사라지고 여명이 밝아왔습니다. 막16:2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은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 ” 부활의 빛은 인간을 구원하는 생명의 빛이었습니다.
성경 보면 지옥은 영원한 사망의 장소로 어둠이 가득한 곳입니다. 마25: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유 1:13 “자기의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에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 반면 천국은 영생의 장소로 빛이 가득한 곳입니다.
계21: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으니 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계22: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여호와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지옥의 어둠에서 구원해서 천국의 빛으로 인도하시는 ‘참 빛’이십니다.
② 소망의 빛 :
악한 원수 마귀는 인간에게 자꾸 절망하게 만듭니다. 부정적인 생각과 말에 빠져들게 합니다. “나는 안 돼!” “이젠 끝장이야!” “다 틀렸어!” “힘들어서 죽겠어. ” 등등.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절망이 없습니다. 항상 긍정이요 소망입니다. “괜찮아. ” “잘 될 거야!” “나는 승리할 수 있어!” 이렇게 긍정적인 생각과 소망을 말하게 해 줍니다.
어둠은 절망입니다. 빛은 소망입니다. 예수님의 빛이 우리 영혼에, 우리 삶의 현장에 비춰지면 절망은 사라집니다. 사60:20 “다시는 네 해가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은 여호와가 네 영영한 빛이 되고 네 슬픔의 날이 마칠 것임이니라” 미7:8 “나의 대적이여 나로 인하여 기뻐하지 말지어다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 데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
우리가 태양을 바라보면 마음이 환해지듯이 예수님의 빛을 바라보면 소망이 넘칩니다. 그러나 태양을 등지면 어두운 그림자가 내 앞을 가로막듯이 예수님을 멀리 떠나 등지고 살면 낙심과 절망으로 침울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망의 빛이신 예수님만 바라보며 삽시다. 예수 믿는 성도들의 사전에는 절망이란 단어가 없습니다. 오직 소망이란 단어만 있습니다.
여러분, A. 링컨을 잘 아시죠. 미국 대통령 중에서 가장 많이 존경 받는 분입니다. 그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공부도 많이 못하고 많은 고난을 겼으며 자랐습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사업 실패, 주 의회 선거 낙선, 신경 쇠약, 의회의장직 낙선, 대통령 선거위원 낙선, 국회의원 낙선, 또 낙선, 부통령 낙선, ... 하도 실패하니까 그도 사람인지라 절망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살 충동을 느꼈고, 가족이나 친구들이 그 주위에 칼이나 면도날이 보이면 치워버릴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살하지도 않았고, 폐인이 되지도 않고 화려하게 재기했습니다. 대통령이 되었고 흑인 노예 해방이라는 대업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이었을까요 소망의 빛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캄캄한 어둠이 사방에 깔려 있었지만 그 가운데 분명히 내리 비취는 한 줄기 빛을 발견하고 끝까지 붙잡았기에 결국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잠 24:16)
여러분, 혹시 여러 가지 고통으로 힘들어하십니까 이젠 더 이상 소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소망의 빛이 되시는 한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이런 확신으로 꼭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③ 치유의 빛 :
인간의 죄로 인해 세상에는 온갖 질병과 고통이 만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빛이 오면 그 모든 것이 회복되고 치유됩니다. 물리적인 빛도 치유의 능력을 갖고 있죠. 태양빛이 비춰지면 각종 병원균이 죽고 소독이 됩니다.
요즘엔 레이저로 치료하고 수술까지 합니다. 빛의 신기한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영적인 빛에는 더욱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영혼과 육신의 상처와 질병을 치유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영혼이 치유되면 육체도 치유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혼이 육체를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구약 말라기 선지자는 예수님의 탄생을 미리 내다보면서 이렇게 예언한 바 있습니다. 말4: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뛰리라” 말라기는 예수님의 성탄을 가리켜 ‘떠오르는 태양’으로 비유했습니다. 그리고 치료하는 광선을 발함을 밝히고 있습니다.
여러분, 몸과 마음에 상처와 고통이 있습니까 이 성탄절 아침 예수님의 빛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회복되고 치유되어 강건하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④ 사랑의 빛 :
죄는 인간을 불화하게 만듭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불화하고, 인간과 불화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세상이 미움, 갈등, 불화로 가득하게 된 것입니다. 가정도, 직장도, 사회도 ... 인간이 모인 것마다 그렇습니다. 참 이상한 것은 서로 미워하고 불화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데 그렇습니다. 가정을 봐도 사랑해서 만난 부부요,
그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인데 다투고 싸울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회사를 봐도 그렇죠. 동일한 목표를 갖고 모여서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싸울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세상에 불화와 갈등이 만연해 있습니까 그것은 인간의 죄와 욕심 때문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마음을 어둡게 하고, 온 세상은 어둡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빛이 임하면 미움이 사라지고 사랑이 가득해집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도대체 무엇이 행복입니까 소유입니까 물질입니까 권세입니까 잠17:1을 보십시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한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그렇죠. 비록 초가삼간에서 보리떡을 먹어도 가족들이 화목하면 진수성찬을 먹으며 다투는 사람들보다 훨씬 행복한 것입니다.
옛날 의가 좋기로 소문난 두 형제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둘이 길을 가고 있는데, 발에 뭐가 걸립니다. 동생이 주어보니까 금덩어리입니다. 너무 기뻐합니다. 형도 기뻐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속에서 자꾸 흑심이 생깁니다. 동생은 형이 빼앗을까봐 경계합니다. 형은 동생이 혼자서 가질까봐 견제합니다. 시간이 갈수록 무서운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동생은 형이 사라지면, 형은 동생이 사라지면 혼자서 금덩어리를 가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상대방을 미워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던 중 강변에 도착해서 나룻배를 타게 됩니다. 그런데 갑자기 형이 금덩어리를 낚아채더니 강물에 풍덩 던져 버립니다. 영문을 모르는 동생이 버럭 화를 냅니다. 그러자 형이 자기 마음속을 털어놓습니다. 의좋은 형제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동생도 고개를 끄덕였고, 둘은 이전보다 더 의좋은 형제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물질이나 세상의 소유가 오히려 사람들을 불화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우화입니다.
야곱은 형 에서와 원수가 됩니다. 형의 장자권을 속여서 빼앗은 후 멀리 쫓겨 갑니다. 그런데 20년 후에 고향으로 돌아왔는데도 에서의 원한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병(私兵)을 거느리고 야곱을 죽이러 다가옵니다. 겁에 질린 야곱, 그러나 그가 밤을 새워 기도했을 때 서로 얼싸안고 재회하는 관계로 회복됩니다. 야곱은 기도하는 가운데 사랑의 빛을 가득 받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명심할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빛이 아무리 찬란하게 비추인다 해도 모든 사람들이 이 빛을 누리는 게 아닙니다. 11절~12절 말씀을 보십시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는 그 빛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오직 영접하는 자에게 예수님이 빛이 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교회 처음 나오신 분 계십니까 이미 나온 지 오래되었지만 예수님을 정식으로 영접하지 않은 분이 계십니까 이 시간 예수님의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빛을 받으시고, 그 빛으로 인해 구원과 소망, 치유와 사랑이 가득한 인생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명심합시다. 이미 영접한 사람들 중에도 예수님의 빛이 각각 다르게 나타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이런 것과 같습니다. 겨울철에 창문을 닫아놓고 있으면 빛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창문을 열면 찬란한 빛줄기가 쏟아져 들어옵니다. 얼마만큼 빛이 들어옵니까 창문을 ‘연 만큼’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더욱 더 마음 문을 활짝 여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빛의 역사를 충만히 경험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빛의 증거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은 어둠으로 가득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빛의 증인이 되라고 명령하십니다. 마5:13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엡5:8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요즘 산타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핀란드 같은 나라에서는 산타 마을을 만들어 놓고 돈을 엄청 번다고 합니다. 성탄절의 주인공이 바뀐 느낌입니다. 산타클로스는 3세기 소아시아(터키)의 한 마을에 살던 니콜라스라는 실재 인물입니다. 그는 은밀하게 많은 선행과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그 귀한 신앙을 기리고자 그 이름 앞에 세인트(성스러운)이란 말을 붙이게 된 겁니다. 그 이름이 유럽에 전해지고, 미국으로 건너가 이름도 산타클로스로 바뀌고 엉뚱한 모습으로 전 세계에 퍼져 성탄절의 주인공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린이들은 맥도 모르고 선물을 받고자 산타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산타는 기다리는 존재가 아닙니다. 바로 내가 신앙의 실천자로서의 산타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빛을 증거하는 산타! 빛의 산타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이 거룩한 성탄절 아침 마음 문을 활짝 열고 성탄의 빛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빛을 전하는 거룩한 산타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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