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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 하나님은 과연 우리를 돌아보셨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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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에 예수 믿는 우리들의 경배를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는 아버지께서 분명히 교우 여러분들에게 지난날 보다 더 크고 깊은 평화와 기쁨의 샘물을 주실 줄 믿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백성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유일한 재산과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약속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들에게 구원을 약속하시고 메시야를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구주와 함께 구원을 성취할 때와 민족과 땅에 대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약속에 대한 꿈을 먹고 살아온 백성입니다.
이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이 그들로 하여금 온갖 환난과 시련 가운데서 이기고 견디게 한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역사 가운데서 늘 가슴 속에 되풀이 되어온 신앙적 질문은 “과연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아보실 것인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질문을 부정적으로 표현한다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신 것이 아닌가”가 될 것입니다. 이런 질문이 혹 소망으로 혹 실망으로 그들의 현실생활 가운데 늘 되풀이되곤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 이 두 가지요 한 가지인 질문이 늘 반복되어 왔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의 질문에 침묵하시면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셨다고 낙심했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극적으로 그들에게 임하여 구원을 베풀어 주시면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고 감격했습니다.
어쨌든 그들이 가지고 있던 성경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임하셨으며 그들의 고난을 돌아보셨으며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셨다는 증거로 가득합니다. 성경에 보면, 아담 이후 예수 오실 때까지 여자가 아들을 낳는 것이 구주가 오실 보이는 증거였습니다. 그 이유는 창 3:15에 기록된 첫번 복음에 여인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깨뜨리라고 예언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와가 가인을 낳고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득남했다”고 자신의 신앙과 희망을 표명했는가 하면, 바울 사도는 그의 서신에서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딤전 2:15)고 말씀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400여 년간 종살이할 때, 광야에서 40년간 방황할 때, 바벨론에서 70년간 포로생활을 할 때 그들은 계속 회의하였습니다. “과연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시지 않으셨는가 구원과 메시야를 보내신다는 약속은 지금 어디 있는가” 이런 모습은 어떤 면에서 오늘 우리들에게 해당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어려울 때, 외로울 때, 답답할 때, 삶이 피곤하고 낙심될 때, 우리도 속으로 “여호와 하나님이 과연 우리를 돌아보고 계시는가”하는 신앙적 회의가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우리들의 이러한 회의에 대하여 구약은 전 역사를 통하여 항상 말씀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결단코 버리지 않으신다.
 여호와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아니하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다(민 23:19) 그분의 약속은 반드시 성취되고 만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 하나님, 쯔바욧 여호와 하나님으로 계시되었습니다. “나는 내향적으로 말하면 언약에 신실한 영원한 여호와 하나님이요, 외향적으로 말하면 약속을 반드시 성취하고야 마는 전능한 쯔바욧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다”
여호와 하나님, 쯔바욧 여호와 하나님은 여러 사건과 상황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모세를 통하여 기적을 행하셨고, 여호수아를 통하여 은혜로운 승리를 주셨습니다. 다니엘이 사자굴에 들어갔을 때는 이방인 다리오 왕을 통하여 질문을 던지게 하고 또 그 질문에 스스로 답변하게 하셨습니다. “사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너의 항상 섬기는 네 여호와 하나님이 사자에게서 너를 구원하시기에 능하셨느냐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이 과연 너를 사자굴에서도 돌아보셨느냐” 다니엘이 사자굴 속에서 대답합니다.
“왕이여 만세수를 하옵소서 나의 여호와 하나님이 사자굴에서도 나를 돌아보셨나이다” 다리오 왕이 온 천하에 조서를 내립니다. “내 나라 관할 아래 있는 사람들은 다 다니엘의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할찌니 그는 사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시오 영원히 변치 않으실 자시며 그 나라는 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그 권세는 무궁할 것이며 그는 구원도 하시며 건져내시기도 하시며 하늘에서든지 땅에서든지 이적과 기사를 행하시는 자로서 다니엘을 구원하여 사자의 입에서 벗어나게 하였음이니라”(단 6:26-27). 이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의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있었던 믿는 자의 용기와 신앙이 거둔 승리의 한 장면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이 장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앙의 환희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인간적이며, 너무나 신앙적인 승리의 찬송이 메아리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는 성령이 충만하여 노래합니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이시여 그 백성을 돌아보사 속량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도다”(눅 1:68-69). 할렐루야! 간단히 말하면 과연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돌아보셨다고 소리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구약의 제일 끝에 속한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이 기다리다가 보기를 원하던 것을 그는 보았습니다. 그는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믿고 의로와진 구원받은 구약성도들의 맨 끝에 서 있습니다. 바로 그가 구약을 대표해서, 구약 성도의 끝에서, 오신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소개하고 증거합니다. 그리하여 구약의 제일 큰 자로 축복받습니다. 그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그의 아버지의 입술을 통하여 과연 여호와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대로 이스라엘을 돌아보사 독생자를 보내셨다고 외친 것입니다.
또 아기 예수를 잉태한 마리아를 보세요. 그 여자야말로 신약의 제일 처음에 속한 사람입니다. 이 나사렛 시골 처녀도 성령이 충만하여 노래합니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여호와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음이라”(눅 1:46-48). 할렐루야! 과연 여호와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대로 우리들을 돌아보셨다고 찬송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눅 1장에는 구약에서 제일 큰자와 신약에서 제일 큰 자가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남자요, 한 사람은 여자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두 사람의 환희의 코러스, 감격의 이중창이 메아리치고 있습니다. 이 코러스는 우리들 모든 성도가 영원히 부를 크리스마스 송가입니다. 그 송가의 주제는 과연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아보셨으며, 진실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 제일 크다는 의미를 상대적으로 비교적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 크다는 말은 단지 이 역사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가장 근접해 있다는 의미에 지나지 않습니다.
구약의 끝에 있는 남자도 성령의 가르침으로 비로소 노래합니다. 신약의 제일 앞에 있는 여성, 한 시골 처녀도 성령이 임하심으로 비로소 성탄의 즐거운 환희를 노래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마 11:11).
성탄절에 구약성도와 신약성도의 대변자들이 노래한 크리스마스 송가를 들어봅시다. 사가랴가 노래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돌보심은 궁극적인 승리를 보장하는 돌보심이요(68-75) 여호와 하나님의 돌보심은 적절한 시기를 확정한다고 노래합니다(76-79). 마리아가 노래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돌보심은 정말 은혜롭고 겸허하신 돌보심이요(47-53) 여호와 하나님의 돌보심은 영원한 효능을 가진다고 노래합니다(54-55).
루마니아 작가 게오르규는 그의 작품 “25시”에서 이렇게 서구세계를 고발합니다. “서구세계는 기계주의, 획일주의, 이데올로기 만능의 병균에 감염되었다. 서구세계는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최후의 시간 다음에 오는 시간, 메시야가 강림해도 어찌할 수 없는 25시를 가르키고 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의 돌보심은 유럽의 시계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돌보심은 Cronos, 수평적으로 흘러가는 세상의 시간 안에서 Kairos, 수직적으로 임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구원의 역사를 일으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돌보심이 연대적 시간 안에서 구원의 시간과 구원의 사건이 일어나게 만듭니다. 첫 번째 주님의 탄생을 예견하고 경험했기 때문에 큰자들이었던 사가랴와 마리아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 자신과 그들의 백성들을 돌아보셨다는 확신 때문에 마음껏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이들 곧 천국에서 극히 작은 경험을 한 이분들에 비해서 얼마나 크게 기뻐하고 감사해야 할까요
저는 1987년 11월 주님께서 태어나시고 가르치시고 기도하시던 땅,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대지를 밟아보았습니다. 그 땅들이야말로 작고 척박해서 다시 가서 살고 싶지 않지만 제가 오후 4시경 감람 산에서 예루살렘 성을 굽어보았을 때 제 영혼 속에 떠오른 감흥은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과연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구나”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모세에게 약속하신 그대로, 아담과 다윗에게 약속하신 그대로, 진실로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셨구나.
바로 이땅을 거니시며 가난하고 무지하고 비천한 이들의 친구가 되시고 구주가 되셨구나. 과연 여호와 하나님께서 역사 가운데서 사실로 마리아와 사가랴를 만나주셨구나. 그래서 마리아, 사가랴 같은 무명한 우리를 지극히 높여주시고 만세에 복을 주셨구나” 바로 이 감동이 마리아와 사가랴 또는 저와 여러분의 감동이 아니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돌보셨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만 아니라 오늘 여호와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예수 믿는 저와 여러분을 돌보신다는 뜻이 아닙니까
히 2:14-16을 보세요.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고 말씀했고, 갈 3:13-14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성탄에, 구약의 모든 약속이 역사 안에서 가장 극적으로 성취되기 시작한 순간에, 여호와 하나님의 돌보심이야말로 가장 겸허하고 완전하며 영원하고 적절한 것임을 다시 한번 믿고 받아들입시다. 그래서 첫 번 성탄절을 경험한 자들보다 더 큰 확신을 가지고 과연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만 아니라 참 이스라엘인 믿는 자들을 돌아보셨다고 외치며 찬송하며 크게 기뻐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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