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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 희망을 새롭게 품으십시오

본문

성정식이란 분의 간증입니다. 1988년 10월 5일 새벽, 약수터에 간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해 뇌출혈에다 두개골 골절 등의 치명적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때부터 남편은 식물인간이 되어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살았고, 아내의 눈물겨운 병 수발이 시작되었습니다. 새벽에는 가래를 받아내고, 배설을 돕고, 하루에 세 번 휠체어에 태워 운동을 시키고, 간식을 먹이며, 때때로 마사지를 하는 등의 반복적인 일을 했습니다.
너무 힘든 삶이었지만 그 힘든 삶을 이기게 한 것은 신앙이었습니다. 남편이 입원하는 날부터 그녀는 병원 교회를 다니면서 점점 변화되어 남편의 사고가 자신을 변화시키려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으로 이해하고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교회 나가는 사람들을 비웃었던 자신의 미련함과 교만을 회개하며 간절히 여호와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그래도 남편은 전혀 차도가 없었습니다. 합병증이 생기면 위험한데, 하필이면 급성 폐렴까지 생겨 폐의 기능이 최악에 달했습니다. 입과 항문으로 피를 토했고, 복수가 차서 분만을 앞둔 산모처럼 배가 불러왔습니다. 의료진은 이제 포기하라고 했습니다. 이제 그녀도 지치고 절망감이 들었습니다. 하루에도 수십 차례씩 남편의 볼에 뽀뽀를 하면서 살아 있는 것만도 고맙다고 여겼는데, 이제 모든 희망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눈물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느 날, 6년 동안 아무 반응도 없이 천장만 바라보던 남편이 기도를 듣고 “아멘!”하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습니다. 그리고 남편의 입에서 찬송이 흘러나왔습니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
누가 변화시켰습니까 아내의 정성과 의료진의 노력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절망적인 순간에 도우신 여호와 하나님의 손길 때문이었습니다. 그처럼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절망도 희망으로 만드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성탄절은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희망을 새롭게 하는 날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셔서 절망에 빠진 인류에게 희망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인류 역사의 전환점이십니다. 세상의 연대도 예수님이 오신 해를 기준으로 삼고 있습니다. 기원전을 BC라고 하는데 그 말은 ‘Before Christ’의 약자로 ‘예수님 전’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기원후를 AD라고 하는데 그 말은 ‘Anno Domini’의 약자로 ‘우리 주님의 해’를 뜻합니다.
그처럼 예수님은 인류 역사의 전환점일 뿐 아니라 개인의 삶에서도 획기적인 변화를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 안에 있으면 절망과 미움과 어둠은 물러가고 희망과 용서와 빛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셔야 합니다. 성탄절은 다시 한번 예수님을 우리의 마음 구유에 모시고, 여호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다짐하며 희망을 새롭게 품는 날입니다.
 왜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까
우리는 어떤 환경에서도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은 우리가 절망하지 말아야 하는 몇 가지 이유를 말해줍니다. 왜 우리는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까
1. 주님은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1절을 보십시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 이 구절에서 ‘말씀’은 예수님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태초에 말씀에 계셨다”는 “예수님이 없었던 때와 장소가 없었다”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그 말은 지금 이 시간에도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는 말이고, 우리가 고통 중에 있을 때도 함께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환경에서도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가끔 보면 철이 지나 뒤늦게 꽃을 피우는 꽃들이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 기필코 꽃을 피우겠다는 의지가 읽혀지고, 생명의 신비가 느껴집니다. 그렇게 꽃을 피우기까지 얼마나 오래 기다렸겠습니까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고 기다렸다가 기필코 꽃을 피워내는 꽃을 보면 너무 사랑스럽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랑스런 존재들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은 희망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희망을 잃지 않으면 언젠가 그 희망대로 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당해도 주님 품을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떠난 삶은 오직 불행뿐입니다.
1980년대에 대학가에서 가장 인기 있는 강사는 김동길, 김용옥, 마광수 교수였습니다. 그들은 다 도발적인 발언을 잘했는데, 그 중에서도 마광수 교수는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는 등의 일반 상식과 윤리를 깨뜨리는 발언으로 인기를 누렸습니다. 그는 최근에도 TV토론에 나와서 “못생긴 여자는 게으른 여자이다. 성형도 치료이므로 의료보험 처리가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한때 우울증과 자폐증, 그리고 거식증으로 고생했습니다. 그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앞으로 내 인생이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다. 다만 말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지금 외로움의 극한에 와 있다는 것이다. 언젠가 구원의 천사가 내 앞에 나타나 줄 것을 기대할 뿐 내가 나서서 구해 보겠다는 생각은 없다. 그러면서 나는 점점 더 늙어갈 것이고, 결국 대리배설로만 사랑의 역사를 마무리 하게 될지 모른다. 그건 정말 겁나는 일이다. ”
그때 그를 취재했던 기자는 마 교수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12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그는 외로움을 넘어 공포의 극한에 내몰려 있었다. ” 2년 전 그가 52살 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혼한 걸 후회한다. 자식 낳고 사는 친구들이 부럽다. ” 그 모습이 여호와 하나님의 품을 떠난 사람의 결말입니다. 참된 축복과 참된 자유는 여호와 하나님의 품 안에 있습니다.
왜 삭개오가 중년에 새로운 길을 찾았습니까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삭개오가 뽕나무에 올라간 모습을 통해서 그가 공허하고 외로운 영혼인 것을 아시고 그와 함께 하며 위로하고 싶어서 말씀하셨습니다. “삭개오야!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고 싶구나!” 그때 주님을 영접함으로 외로운 영혼이 교회에서 가장 사랑 받는 캐릭터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아무리 불쌍한 영혼도 주님을 모시면 사랑받는 영혼이 됩니다.
루돌프 사슴을 보십시오. 그의 코는 매우 반짝이는 코였습니다. 너무 반짝여서 다른 모든 사슴들이 놀려대며 웃었습니다. 결국 가엾은 루돌프는 외톨이가 되었는데 안개 낀 성탄절 날 산타 할아버지가 말했습니다. “루돌프야! 네 코가 반짝이니 네가 끄는 썰매를 타고 싶구나!” 그때부터 사슴들이 루돌프를 매우 사랑했고, 그는 길이 길이 기억되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모시면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과 사람으로부터 사랑받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2. 주님은 우리를 위한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3절 말씀을 보십시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 이 말씀은 주님이 만물을 지으셨다는 말씀이고, 더 나아가 우리도 지으셨다는 말씀입니다. 결국 이 말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한 계획이 있다!”는 말입니다. 또한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상황과 환경이 주님의 관리와 허락 하에 주어진 환경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가끔 절망적인 상황을 만나지만, 그 상황도 여호와 하나님의 관리 하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절망적인 일을 당해도 “왜 이런가 여호와 하나님은 정말 나를 사랑하시나”라고 믿음의 회의에 빠지지 말고, “이것도 여호와 하나님이 만드신 상황이고 이 가운데도 나를 유익하게 하려는 여호와 하나님의 선한 섭리가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넉넉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처럼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믿음을 가지고, 소명을 버리지 않고 전진하면 반드시 소명을 멋지게 이룰 날이 있게 될 것입니다.
요새는 젊은 사람들도 뇌경색으로 많이 쓰러진다고 합니다. 마음에 평화가 없고, 스트레스에 짓눌리고,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불안한 분위기에서 심신이 지쳐있기 때문입니다. 그 근본 원인은 불신입니다. 불신은 힘 있는 사람도 쓰러뜨립니다. 반면에 확신은 힘없는 사람도 일으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에서 사람에게 믿음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어떤 분야나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이 없이는 축복도 없고, 발전도 없습니다.
제가 요새 수영을 꾸준히 합니다. 3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건강을 위해서입니다. 아무리 소중한 비전이 있어도 건강이 없으면 이루기 힘듭니다. 둘째, 물 문제 때문입니다. 우리 집이 여름에는 가끔 물이 안 나와서 문제고, 요새는 뜨거운 물이 잘 안 나와서 문제입니다. 그래서 수영장에 가서 운동도 하고, 샤워까지 다 해버립니다. 그런 목적이 없으면 며칠 가다가 말 것 같아서 아예 세면을 할 셈으로 갑니다.
 셋째, 작은 성공 목표를 세웠기 때문입니다. 무엇이든지 목표가 없으면 지루하게 되니까 수상 구조요원 자격증 시험에 통과할 정도의 실력을 갖추자는 목표를 가졌습니다. 그런 목표를 가지니까 비교적 수영장에 꾸준히 가게 되었습니다. 수상 구조요원이 되려면 자유형, 평형, 배영, 접영 200미터 이상, 잠영 25미터 이상, 입영 5분 이상을 해야 하고, 횡영을 할 줄 알아야 하고, 다이빙과 벽돌운반 및 심폐소생술 등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저는 1984년에 소명과 비전을 가지면서 한 가지 좋은 습성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잘하고 싶은 것은 잘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면서 한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무엇이든 무작정 했습니다. 영어나 수학도 잘하는 방법을 연구하면 좋은데 무작정 하니까 효율이 얼마나 떨어졌는지 모릅니다. 유능한 선생님이란 잘 하는 방법을 깨닫게 해주는 선생님이고, 공부 잘하는 학생은 대개 공부할 때 공부하는 좋은 방법을 생각하면서 공부하는 학생입니다.
그런 습성이 생겨서 요새 수영도 생각하면서 하는 편입니다. 보통 일주일에 3번 이상 낮 12시 10분부터 12시 50분까지 40분간 수영을 하는데, 2달 가까이 되니까 지금은 어느 정도 수영 실력이 늘어서 한번 물에 들어가면 한번도 땅이나 벽을 닿지 않고 40분 후에 올라옵니다. 그렇게 하면서 수영 잘하는 가장 중요한 기초 원리를 배웠습니다. 그 기초 원리란 바로 믿음입니다.
수영을 잘하려면 물을 믿고 부력을 믿어야 합니다. 수영은 혼자 하는 운동인 것 같지만 물과 함께 하는 운동이라고 생각하고 물과 팀워크를 이루어야 합니다. 수영을 못하는 사람은 물이 숨을 못 쉬게 하니까 적으로 보고, 빨리 차고 밀어내야 하는 극복의 대상처럼 생각합니다. “내가 좀더 빨리 손을 젓고, 발을 빨리 차면 되겠지!”하면서 물의 힘을 무시하거나 물 자체를 적으로 보면 힘만 들고 수영은 늘지 않습니다
수영을 잘하려면 물을 동료로 생각하고, 물의 부력을 믿고, 물에 내 몸을 먼저 맡겨야 합니다.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처럼 물을 밀치고 먼저 숨을 들이쉬면서 살고자 하면 몸은 가라앉지만, 먼저 몸을 가라앉히고 물에 맡기면서 죽고자 하면 그 순간에 물이 몸을 띄워줍니다.
서서 하는 입영의 경우에는 특히 물에 몸을 맡기는 것을 잘해야 합니다. 사람은 가만히 있으면 부력에 의해 눈 정도까지 몸이 뜹니다. 그때 효율적인 발차기를 통해 10-15센티 정도만 올리면 입영이 되는데 그것을 위해서 부력을 믿고 부력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물을 믿고 부력을 느끼는 사람은 물의 힘을 이용해 입영을 할 수 있고, 물을 믿지 못하고 부력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 힘으로 뜨려고 발버둥치기 때문에 입영을 할 수 없습니다.
수영은 물과 함께하는 팀 운동입니다. 물이라는 동료를 믿지 못하면 수영이 힘들어집니다. 체력이나 기술은 그 다음입니다. 그처럼 이 세상의 모든 것에는 믿음이 있어야 발전도 있고, 성공도 있습니다. 가정에도 믿음이 있어야 행복하게 됩니다. 세상에서 성공하려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가능성을 믿고 흔들리지 않고 나가야 합니다. 신앙생활에서도 그처럼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져야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주어질 것입니다.
어느 날, 호숫가 벤치에서 두 사람이 수면에 비친 달을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아! 달이 아름답네!”하고 감탄했습니다. 그때 옆 사람이 돌을 던졌습니다. 물에 파문이 일며 수면의 달이 사라졌습니다. 그때 감탄했었던 사람이 “아! 달이 없어졌네!”하고 슬퍼했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입니까 그때 돌을 던졌던 사람이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습니다. 달은 여전히 하늘에 있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호수와 같습니다. 사단이 의심의 돌을 던지거나 죄를 범하거나 큰 고난이 닥쳐오면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나” 하는 회의도 생깁니다. 그처럼 느낌이나 감정에 구원의 근거를 두면 수시로 구원의 확신이 흔들리고 마음의 평안이 사라지게 됩니다. 우리는 감정적인 믿음을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최종 선을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3. 주님이 우리에게 빛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본문 4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 주님이 빛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을 가장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자신이 빛인 줄 아는 태도입니다. 교만한 모습은 여호와 하나님과 사람의 미움을 받게 하고, 패방을 가져다줍니다. 반대로 주님만이 우리의 빛이라고 인정하고, 겸손하게 그 빛을 반사해서 살 때 우리는 가장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주님의 빛을 받아도 어둠은 금방 물러가지 않습니다. 본문 5절 말씀을 보십시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 원어적인 의미로는 “어두움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빛이 비취면 어두움은 자연히 물러간다고 생각하지만 그때 빛을 막는 물체가 있으면 그 물체 뒤의 그림자는 오히려 더 뚜렷해집니다.
그처럼 주님을 마음속에 모시고 살아도 가끔 믿음의 회의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특별히 내 삶에 큰 고난의 바위가 가로막고 있을 때 믿음에 회의가 생깁니다. 그래도 낙심하지 말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주님이 주신 사명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참 빛이 비췬다고 어두움이 당연히 물러나는 것은 아니지만, 최종적으로는 반드시 빛이 승리하게 됩니다.
사람마다 믿음에 따라 빛의 강도는 다 다릅니다. 특별히 문제는 우리의 믿음의 수준을 나타내는 바로미터입니다. 보석감별사의 말에 의하면 가짜 다이아는 물에 들어가면 빛을 잃지만 진짜 다이아는 물에 들어가면 더욱 빛을 발한다고 합니다. 그처럼 문제 속에서 빛을 잃으면 가짜 신앙이고 더욱 빛을 발하면 진짜 신앙입니다. 우리는 고난 중에 더욱 빛을 발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본문 다음 부분을 보면 세례 요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세례 요한을 보고 그가 그렇게 고대하던 메시야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진정한 참 빛이 아니었습니다. 8-9절 말씀을 보면 그는 참 빛이신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온 사람이었습니다. 그처럼 우리에게 빛이 주어진 이유는 그 빛으로 참 빛이신 주님을 증거하라는 뜻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세상의 빛으로서 살아야 합니다. 항상 주님의 사랑을 가지고 용서하고 사랑하고 화해하며 주님의 빛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의 방식만을 고집하지 말고, 나의 정당한 권리도 기쁘게 포기하며,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 용서와 화해가 어려운 일만은 아닙니다.
2차 대전 때, 수많은 교인들이 독일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 중에 마틴 니오뮬러란 한 독일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독방에서 지냈는데 성탄절에 다른 세 명의 교인이 있는 방으로 옮겨졌습니다. 그 중의 한명은 구세군 출신이었고, 한 명은 오순절 출신,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은 감리교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독일 자유 복음주의 교회 출신이었습니다.
그들은 폭격에 불탄 문 조각을 마룻바닥 위에 탁자로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매일 받는 검은 빵과 물로 주님의 최후의 만찬을 기념했습니다. 그때를 회상하며 니오뮬러는 말했습니다. “우리가 그 차가운 돌 마루 위에 같이 무릎을 꿇고 엎드렸을 때, 우리의 교단적인 차이는 눈 녹듯이 사라졌습니다. ”
주님의 빛이 있는 곳에는 아집과 편견은 사라지게 됩니다. 장로교면 어떻고, 감리교면 어떻고, 성결교면 어떻고, 순복음이면 어떻습니까 서로 언제든지 소통할 수 있는 선교마인드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 교단을 소중히 여기는 만큼 이단이 아니라면 남의 교단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처럼 평화를 추구할 때 주님의 빛이 가장 강렬하게 될 것이고, 여호와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은혜와 축복을 주시고, 그런 사람들을 사용하실 것입니다.
예수님 탄생 설화 중에 이런 설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마구간에서 탄생하실 때, 그 마구간에는 말과 코끼리와 나귀가 함께 있었습니다. 처음 아기 예수를 보고 말과 코끼리가 서로 보며 웃었습니다. 그러나 나귀는 큰 귀로 들어보니까 그 아기 예수가 보통 분이 아닌 것을 알고 깔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때 말과 코끼리는 서로 자기들이 왕의 총애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코끼리는 힘이 센 것을 자랑했고, 말은 자기는 전쟁의 필수품이라고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나귀는 별로 자랑할 것이 없었습니다. 볼품도 없고, 용맹도 없고, 빠르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중에 힘이 센 말과 코끼리가 아닌 평화의 상징인 나귀를 사용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힘이 있는 사람보다 가는 곳마다 평화를 주는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세상에 희망을 주는 사람
지금은 연말입니다. 어려운 이웃을 위해 나의 따뜻한 손길을 펼쳐야 할 때입니다. 끼니를 거르는 이들, 장애인들, 병자들,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근로자들, 그리고 외국인 노동자들을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시골 교회 목사님과 선교사님들을 위해서도 힘써 기도하고 후원해 드려야 합니다. 선교사들 중에는 병드는 분들이 많은 것은, 그만큼 선교가 힘들다는 말입니다. 그분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처럼 사랑을 받았으면 이제 그 사랑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은혜에 대한 감사 표현이 없고, 나눔이 없이 보내는 연말은 사람을 가장 공허하게 만들 것입니다. 저도 연말이 되면 여기저기 성도들로부터 따뜻한 사랑의 표현을 많이 받는 편입니다. 그 사랑을 받은 후에는 다시 여기저기 사랑을 나눕니다. 그런 삶을 통해 통장은 마이너스 상태라도 마음만은 항상 플러스 상태입니다.
얼마 전에 우리는 백혈병에 걸린 목진훈 목사님의 외아들 찬수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때 목사님이 어렵게 개척교회를 하면서 외아들이 병드는 시련까지 당해서 우리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도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찬수가 하늘나라로 떠났습니다. 너무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지금 목진훈 목사님은 씩씩하게 살고 계십니다. 과거의 극한 아픔을 잊어버리고 그렇게 씩씩하게 사는 모습이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얼마 전에 목진훈 목사님이 저희 선교사역을 위해서 상당히 많은 비용을 보내오셨습니다. 그 재정을 받고 저는 감격했습니다. 아직도 목사님은 지하의 조그만 장소에서 개척교회를 하고 계십니다. 성도도 몇 명 되지 않습니다. 생활도 아주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엄청난 비용을 헌금하신 것을 보고 제가 “목사님! 괜찮으세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을 받았으면 저도 그 사랑을 나눠야지요. ”
여호와 하나님은 가장 소중한 예수님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엡 3:7). 그처럼 우리도 ‘세상의 선물’로 살아야 합니다. 비장한 결심을 해야 ‘세상의 선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줄 수 있는 선물은 평범한 것 중에서도 많기 때문입니다. 친절한 말, 따뜻한 손길, 환한 웃음과 미소, 그리고 어려운 이웃들을 위한 한 마디의 기도도 무엇보다 소중한 선물들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선물이 되기를 힘쓸 때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런 대로 살맛나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성탄절은 예수님이 탄생하신 날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사랑과 평화를 다짐하며 새롭게 거듭나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한 순간에 변화되기는 어렵지만 우리가 희망을 새롭게 품고 일상생활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 한 걸음이라도 내딛는다면 우리는 세상에 희망을 주는 복의 근원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도에게 성탄절은 새로운 길을 향해 떠나는 출발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탄절이 한 해를 마감하는 때에 있다는 것도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오늘도 주신 말씀처럼 여호와 하나님이 항상 우리와 함께 있음을 믿고, 우리를 향한 여호와 하나님의 찬란한 계획도 있음을 믿고 더욱 열심히 세상의 빛과 소금과 선물로 살아서 주님의 향기로 세상을 가득 채우는 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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