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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 로마 황제의 호적령

본문

크리스마스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주목해야 될 것은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의 호적 령이다. 마태복음 2:1절 “그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 하라 하였으니.. ”라는 구절은 아기 예수의 성탄을 이해하는 데 첫 걸음이 된다. 여기서 ‘그 때에’ 의 그 때는 두 말할 것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때를 말한다.
로마황제의 호적령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 실시한 것인데, 그 당시 실시했던 인구조사를 말하는 것이다. 인구조사 때는 이름, 직업, 재산, 가족관계 등을 모조리 기록하였는데 이는 백성들의 머리수를 헤아려 인두세(人頭稅)를 징수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얼른 생각하면 인구조사는 국가행정정책으로 흔히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되지만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하여 생각하면 이것은 단순한 국가행정정책의 사건으로 지나칠 수 없는 영적(靈的) 으로 매우 중요한 사건이 된다.
로마는 요한계시록에서는 사탄의 도성인 바벨론으로 상징된다. 따라서 로마황제는 바벨론의 지배자로서 사탄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 로마황제가 천하에 있는 모든 인간들의 머리수를 헤아리는 것은 자기백성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를 알기 위한 것이다. 천하에 있는 모든 인간이 자기의 백성이라고 확정하는 사건이다. 호적을 마친 사람은 로마정부로부터 ‘호적필’ 이라는 표(表)를 받게 된다.
그로 말미암아 세상 사람들은 그 머리에 짐승의 표(票)를 받는 것이 된다.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한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것은 사람의 수니 그의 수는 육백육십육이니라.. ”(계13:18) 바로 ‘그 때에’ 만왕의 왕이시고 만주의 주가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시므로... 천하의 모든 인간은 사탄의 백성들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들이며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백성이라고 선포(宣布)하는 사건이 바로 아기예수님 그리스도의 탄생이다. 우리는 가이사 아구스도의 호적령과 그 때에 탄생한 아기 예수님의 사건을 바로 이런 영적인 눈으로 볼 수 있을 때 크리스마스의 의미를 잘 아는 것이 된다.
 동정녀 탄생 /마태복음 1:18-25
크리스마스를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난처한 것은 바로 ‘동정녀 탄생’ 이라는 성경의 기록내용이다. 이것은 첫 번 크리스마스이후 기독교 2000년 역사 내내 시비 거리로 골치를 앓는 문제임을 부인 할 수 없다. 많은 기독교 반대자들이 이 문제로 인하여 기독교신앙을 가질 수없다고 버티는 사건이기도 하다.
골치 아픈 논쟁거리를 만들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은 아예 요셉과 마리아가 이미 정혼한 사이라면 차라리 결혼을 해서 그들 사이에서 아기 예수가 태어나게 했으면 될 것을 왜 과학을 뛰어넘는 엉뚱한 사건으로 시비 거리를 만들었을까를 생각해 보기도 한다. 그러나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아기예수의 동정녀 탄생’의 신학적인 의미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크리스마스를 말한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성탄축하가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아기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기독교의 구원사의 핵심사건이다. 만약에 아기 예수님이 동정녀 탄생으로 나시지 않을 바에는 차라리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편이 훨씬 더 나았을 것이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한마디로 여호와 하나님의 지혜이시다. 이 여호와 하나님의 지혜는 이미 A. D. 75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예언 되어져 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사야 7:14), 이것은 놀라운 일이다. 우리는 아기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의 비밀을 밝히기 위하여 성경의 주변을 두루 살피는 작업이 있어야 한다. 마태복음 기자는 ‘아기예수 수태고지’ 바로 앞에 예수님의 족보를 배치하였다. 어쩌다 그냥 그렇게 배치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의도가 있어서이다.
마태복음 첫 머리에 나타나는 ‘예수의 족보’ 는 유대인들의 족보 전통에 따른 것이다. 그것은 부계(父系) 중심 족보이다. 유대인들은 후손의 혈통이 부계를 통하여 이어지는 전통을 가졌다. 후손의 피는 아비중심으로 그 후손에게 유전되어진다는 뜻이다. 이것은 유대민족이 믿고 있는 원죄(原罪) 사상과도 관계되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준수하는 자에게는 아비로부터 천대에 이르기까지 복을 주시겠지마는, 만약에 여호와 하나님의 계명을 준수하지 아니하고 자기를 미워하는 자는 그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 삼사 대에 이르기까지 죄를 물으실 것이라고 하신다(출20:5).
이것은 아비의 죄가 자녀들에게 유전되어지는 원죄사상과도 관련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만약에 어떤 아들에게 아비가 없는 경우가 생긴다면 그는 원죄(原罪)로부터 자유하다는 논리가 이루어진다. 이런 논리는 사실이다. 예수의 족보를 자세히 기록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마1:18) 고 한 마태의 강조는 예수에게는 아비가 없는 존재로 단지 ‘마리아 동정녀’의 몸을 통하여 이 세상에 탄생하셨다는 논리를 전개해 나간다는 사실에 주목하여야 한다.
마태는 족보이야기 연장선상에서 아기 예수 탄생을 설명하면서 예수에게는 아비가 없는 탄생이 이루어졌으며 그런 이유로 예수에게는 원죄가 없는 존재로 탄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마태는 과학을 뛰어넘은 비이성적인 한계를 성령을 개입시키므로 해결한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마1:18) 이것은 중요한 이야기이다.
예수님에게는 아버지가 개입하지 않는 동정녀 탄생으로 그분에게는 원죄(原罪)가 없다는 것이다. 원죄가 없으면 자범죄(自犯罪) 도 없게 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에게는 원죄도 자범죄도 없으신 분이시다. 그래야만 하셨다. 그것이 인류의 죄를 대속할 메시아의 자격이다.
생각해 보라, 자신에게 죄가 있고서야 어떻게 타인의 죄를 대속할 자격을 가지겠는가 이것은 그 분이 질 십자가 사건과 관련이 있다. 메시아는 자신에게 무죄하여야 한다. 세상 죄를 지고 갈 여호와 하나님의 어린양은 흠 없는 화목제물이어야 한다. 이것이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의 비밀이다. 또한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지혜이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아기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놓고 이제는 그만 논쟁을 그쳐야 한다.
 베들레헴 말구유에 탄생 /누가복음 2:4-7
크리스마스 이야기 가운데서 유대 땅 베들레헴의 말구유는 매우 감상적인 배경으로 등장한다. 여호와 하나님의 독생자가 베들레헴 마을의 한 마구간에서 탄생하시어 강보(襁褓)에 싸여 말구유에 누인바 되셨다는 것은 드라마 이상으로 극적인 장면이다. 기독교적인 성탄트리에는 어김없이 마구간과 함께 구유에 누인 아기예수의 모습이 등장한다.
그것을 바라볼 때마다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된다.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베들레헴 그 시골 마을에, 그리고 마구간의 말구유에 누워계신단 말일까! 신기하기도 하고 또 놀랍기도 하다. 이것이 첫 번 크리스마스의 사실적인 배경이었다고 하면 필경 이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님에는 틀림이 없을 것이다. 왜 하고 많은 마을 중에서 하필이면 베들레헴에.. 그리고 말구유에.. 그리스도인들은 충분히 이런 질문을 던져보아야 한다.
그래서 답을 얻어야 크리스마스의 바른 의미를 깨닫게 될 것이다. 우선 역사적으로 살펴보자, 베들레헴은 이스라엘의 성군인 다윗의 고향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다윗시대에 가장 부강한 나라로 전성기를 이루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희망사항으로는 만약에 메시아가 오신다면 적어도 다윗 같은 왕의 모습으로 와서 다윗시대 같은 이스라엘의 전성기를 회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은 그래서 의미 있는 곳이기도 하다. 또 옛 선지자들의 예언 속에도 베들레헴에 대한 중요한 언급이 있다.
미가 5:2절에는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 라.. ” 고 예언되어 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예언한 메시아 예언의 내용이다. 그러니까 왕으로 이 땅에 탄생하시는 메시아는 다윗의 혈통을 이어받는 자로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시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며, 거기다가 예언자들의 메시아 예언과 같이 아기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시는 것이 예언의 성취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함이 있다. 베들레헴은 그 지명의 뜻이 ‘떡집’ 혹은 ‘떡집이 있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 고 하셨고 요한복음 6:51절에는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 그러니까, 생명의 떡이 되시는 그리스도가 떡집이라는 이름을 가진 베들레헴에 탄생하신 것은 신학적으로 의미 있는 관찰이 되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마구간에 나신 아기 예수가 공교롭게도 가축들이 여물을 먹은 먹이통인 ‘구유에’ 누어있는 것도 결코 우연이라고 하기가 어렵습니다. 짐승들의 떡통 안에 생명의 떡이신 아기 예수님이 누어 잠들어 있는 것도 신비스런 사건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세례요한은 요단강가에서 예수님이 거니시는 모습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실 여호와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고 소개를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여호와 하나님께 화목제물로 드릴 여호와 하나님의 어린양이십니다. 그렇다면 어린양이신 아기 예수님이 양들이 잠자는 마구간에 탄생하시는 것은 그것 또한 이치에 맞는 말이 됩니다. 예수님의 탄생이야기는 모두가 다 신비스럽고 모두가 다 딱 맞아 떨어지는 놀라운 사건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러 이 세상에 오셨다면 인간이 사는 곳에 오셔야지 느닷없이 짐승들의 거처인 마구간에 내려와 누우신 것은 왠 일 일까요 첫 번 크리스마스의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이해가 잘 안 가는 것은 나만의 모습일까요 아마도 여호와 하나님의 눈에는 인간의 타락함과 죄로 더러워진 모습이 동물수준이하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쉽습니다. 우리는 첫 번 크리스마스의 그 말구유에 누운 아기예수를 바라보면서 죄인 된 나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는 것이 진정한 크리스마스의 축하가 아닐까 쉽습니다.
 사관에 있을 곳이 없는 예수 /누가복음 2:7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 이러라. ’(눅2:7) 여호와 하나님의 왕자가 이 세상에 왔으나 그 분이 머물 곳은 아무데도 없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면서 수 없이도 그가 오실 것을 예고하시는 일은 부지런히 하셨으면서도 왜 그 분이 머무실 장소는 준비시키지 않으셨을까요 그것은 아마도 여호와 하나님이 그분을 우리의 마음에 모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이번 크리스마스에 마음 문을 활짝 열고 여호와 하나님의 왕자를 우리의 마음의 보금자리에 모시도록 해야 될 것입니다.
 목자들에게 전해진 크리스마스의 기쁜 소식 /누가복음 2:8-13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눅2:10-11) 예루살렘에는 숱한 종교지도자들, 서기관들, 바리새인들 등 당시에 나노라 하는 유명한 인물들이 많았을 터인데 왜 하필이면 들에서 양(羊)을 지키던 무명의 목자들에게 천사들이 첫 번 크리스마스의 기쁜 소식을 알려 주었을까요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라는 기록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목자들은 양떼들의 생명을 지키는 일에 밤을 지새우고 있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밤에 생명 지키는 일에 깨어 있는 목자들에게 성탄의 기쁜 소식을 맨 먼저 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요 우리도 금번 크리스마스에 천사들의 기쁜 성탄 메시지를 들으려면 목자들처럼 ‘생명 살리는 일’에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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