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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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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세계 교회가 다 똑같이 성찬예식을 행하자고 약속한 만국 성찬 주일입니다. 목회자들은 교회에서 이렇게 성찬예식이나 특별한 일이 있을 때는 수십 년 목회를 했으면서도 긴장을 하게 됩니다. 혹시나 실수를 할까봐 긴장을 하기 때문에 더 실수를 합니다. 우리 목회자들이 모여서 자신들이 실수했던 경험을 피차 이야기하면 창피하기도 하고 때로는 재미있기도 하는 일이 많습니다. 제가 어느 목사님한테 들은 이야기인데 성찬식 집례를 했는데 너무 긴장을 한 나머지 떡을 먼저 주어야 하는 것을 잔을 먼저 나눴답니다. 그런데 앞에 있는 학생이 목사님께 “목사님! 바뀌었어요. 떡 먼저 주셔야 돼요!” 깜빡 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잔이 이미 돌아갔습니다. 이걸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어쩔 줄 모르다가 목사님이 대답하신 말씀이 “마찬가지야. 주는 대로 먹어!” 그랬답니다. 저도 긴장하지 않으려고 이렇게 우스운 말부터 시작합니다.
오늘 말씀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피와 살을 우리가 어떻게 뜯어 먹는단 말이냐” 예수님의 설교에 오해적 다툼을 벌리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52절에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이렇게 다툼이 벌어졌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대한 오해하는 반응인데 예수님께서 자신을 떡이라고 비유말씀 하시고 자신의 살을 떡같이 떼어 줄 테니 먹으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아니, 우리가 사람의 살을 떼어먹는 식인종인가’ 이렇게 생각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다툼이 오늘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57절에도 주님은 똑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를 인하여 살리라. ” 나를 먹으라는 말씀에 대해 누구든지 오해하는 반응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다른 성경에는 더 강한 표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약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는 자는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반드시 먹으라!”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54절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라. ” 안 먹을 수 없게 “내 살을 먹으라!”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설교를 듣고 나서 “반드시 먹으라는데 어떻게 예수님의 살을 뜯어먹느냐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고 다투었다고 그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다 알고 있는 대로 십자가 사건의 영적 의미를 설명하신 것인데 누구도 그 당시의 그 설교 말씀을 잘 이해한 사람이 없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성찬의 의미는 인간을 죄에서 자유하게 하시는 구원의 능력을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 범죄를 인간들이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그 길이 무엇이냐 희생의 피를 흘릴 때는 속죄의 은총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대신해서 동물들이 그렇게 많은 피를 대신 흘려주므로 말미암아 이 제사를 통한 인간의 속죄의 기쁨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열어주셔서 우리가 다 속죄의 제사를 통해 죄에 대해서 자유로워질 수 있게 하시고 마음에 평안과 구원이 약속되는 기쁨을 주셨습니다. 반드시 다른 생명이 나를 위해서 피를 흘리고 죽어야 되는 이유가 생겼습니다. 제사는 죄의 종류에 따라 다양하게 실시하였는데 대체적으로 피는 뿌리고 고기는 먹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내 살을 먹으라!” 이렇게 구약 제사를 비유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주님이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나를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생명 보존 원리를 과학적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 생명이 살아있다는 것은 어떤 다른 생명을 죽였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을 먹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는 다른 생명을 먹어야 되는 원리로 되어 있습니다. 온 세상이 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동물이 식물을 먹고 살고, 사람도 동물과 식물을 먹고 살아갑니다. 이 식물도 아주 민감한 생명체입니다. 식물도 감각이 있어서 자기 체온에 맞으면 잘 성장하고 영양 공급을 잘하면 잘 자라고 시원치 않으면 성장이 더디고 추운 것 더운 것 다 가릴 줄 아는 민감한 생명체입니다. 따뜻한 햇볕을 받으면 과일이 더 맛이 있고, 음지에서 햇볕을 받지 못하면 충실한 열매를 주지 않고, 암나무와 숫나무의 배열이 잘 이루어질 때 더 충실한 열매를 내어주고, 좋은 땅과 거친 땅을 다 구별할 줄 알고, 주인의 정성이 성의가 있는지 없는지 다 압니다. 생명체이기 때문입니다. 근래에는 채소 재배 방법도 과학적으로 발달했습니다. 채소들이 느끼는 온도를 잘 맞추어 주기 위해서 겨울이면 밤에 난로를 피워주기도 하고, 밤낮없이 전등불을 수없이 밝혀주며, 심지어는 음악까지 틀어줍니다. 그렇게 했더니 채소들의 수확률이 훨씬 좋아졌다는 과학적인 재배방법이 나왔습니다.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이 교회 안에 여러 아름다운 꽃들이 있고 나무들이 있습니다. 사실 이것들을 관리하시는 분들은 예배 끝나자마자 이것을 가지고 나가서 자연 조건에 맞게 햇볕을 쐬어주고 물을 주십니다. 이 성전 안에만 그냥 놔두면 한 달이면 이것들이 다 죽어버립니다. 그러니 식물들도 얼마나 민감한 생명체입니까 그런데 동물들이 그 생명체를 죽이고 먹음으로 인하여 자기 생명이 살고 있습니다. 동물들은 한층 더 인간에 가까운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다수의 동물은 주인을 알아봅니다. 반가움을 표시할 줄 압니다. 자기 마음이 감동했으니까 그렇게 하는 겁니다. 또, 동물들도 양심이 있습니다. 자기가 잘못했을 때는 주인을 향해서 수치심을 가지고 감추려는 노력을 열심히 합니다. 양심의 가책 때문에 하는 겁니다. 소는 도살장이 가까워지는 것을 압니다. 예감으로 압니다. 그래서 그 앞에만 가면 소리를 지르고 발을 버티고 안 들어가려고 합니다. 두려움에 대한 예감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동물들과 사람들의 새끼 사랑에 대해서는 똑같습니다. 자기 새끼를 사랑할 줄 알고 생명을 걸고 보호하고 양육을 시킵니다. 그 면에 있어서는 인간과 다를 바가 없는 생명체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어떻게 합니까 그러한 생명체를 죽여서 그 생명을 내가 먹음으로 인해 생명이 보존되는 것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입니다. 작은 곤충에서부터 집채만 한 동물에 이르기까지 그 생명체를 모조리 잡아다 먹음으로 인해 생명이 보존됩니다.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다른 생명을 죽어야 되는 진리가 생명 보존의 원리입니다. 내가 지금 이렇게 건강하게 살아있다는 것은 무수히 많은 생명체를 죽이고 먹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생선 한 마리를 구워놓고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그 생명체는 세상에 태어나서 새끼 때부터 지금까지 큰 바다의 수없이 많은 위험을 피해가면서 바다의 좋은 해초를 다 뜯어먹어서 자기 몸을 살찌워서 결국 마지막에는 나에게 한 끼 식량을 제공하기 위해서 살았습니다. 그 생명체를 내가 죽이고 먹음으로 인하여 내 생명이 보존되는 원리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그와 같은 생명 보존 원리에 자침한 말씀이란 말입니다. “너희가 나를 죽이고 내 살을 먹으라. 그리하면 너희 생명이 영원히 살리라. 만약 나를 먹지 아니하면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 우리 인간이 영원히 살고 죄의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다른 생명이 죽어야 되는 진리는 구약시대 때부터 여호와 하나님이 제도화 하신 방법입니다. 양을 잡아서 죽이고 피를 흘리게 함으로 내 생명의 보존이 이루어져왔습니다. 주님은 인간 속죄 방법의 마지막 제도로 “이제는 내가 죽을 것이다. 너희는 나를 죽이고 내 살을 먹으라. 그리하면 영원히 살리라. 나는 생명의 떡이다. ”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을 신앙 고백하는 자에게는 영원한 속죄의 은총을 약속하신 것이 지금 우리가 거행하고자 하는 이 성찬의 능력입니다. 성찬의 떡과 잔을 받을 때마다 우리들은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나를 먹지 않는 자는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느니라. ”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떨리는 손으로 기도를 드리며 이 주님의 살과 피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 세계 지도력 개발원 사역에 동참하셔서 저와 함께 열심히 사역하고 계시고 우리 갈보리 교회도 두 번이나 오셔서 주일 설교하신 적이 있으신 목사님 한 분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간증하셨습니다. 자신은 성찬 받을 때가 가장 두렵고 떨리고 자신의 과거 모습이 생각난다고 간증하신 말을 제가 직접 들었습니다. 그분의 어머니는 365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자기 아들 목사 되라고 기도하셨답니다. 그런데 자기는 정반대로 365일 방탕하지 않은 날이 없을 만큼 젊은 시절에 날마다 유흥가만 순회하면서 저녁마다 돈은 주머니에 버스표 한 장 남을 때까지 다 쓰고 통행금지 있던 시절에 밤 12시가 되면 자기 집 앞에 만취가 되어서 도착하며 어머니의 기도 정반대의 길을 자기가 가고 있었습니다. 집에 오면 문은 굳게 잠겨있는데 자기 집 담장이 아주 높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담장을 넘어서 집안으로 들어가는데 항상 집 앞에서 부르는 찬송이 하나 있었다고 합니다. 그 높은 담장을 바라보면서 “♬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넘어갑니다. 내 뜻과 정성 다하여 날마다 올라갑니다. ” 1장 찬송을 부르고 나중에는 그가 ‘아! 내가 왜 이렇게 살았는가’ 회개하고 “어머니 기도대로 제가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되겠습니다. ” 말씀을 드렸더니 그렇게 기도하시던 어머니가 그때 가서는 “안 돼! 너 같은 녀석은 신학교에 가면 안 돼! 그렇게 방탕하게 살다가 무슨 신학교야” 야단을 치셨는데 그래도 자기가 소명을 받았기 때문에 신학교에 가서 그때를 생각하면서 속죄하는 마음으로 오늘도 떨리는 손으로 성찬을 받고 여호와 하나님 사역에 속죄하는 마음으로 사역을 하고 있다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간증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성찬을 받으면서 우리 마음을 한번 검토해야 합니다.
“사랑의 근본이신 예수 그리스도여!
나는 당신 앞에 언제나 작아지게 하옵소서.
죄수복을 입은 죄수 같이 살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사명이 바라지 않는 푸른 색깔이 되게 하소서.
오직 하나의 노래를 부르며 마지막 지점에 이르게 하소서.
나를 살리시기 위해 죽음을 택하시고
피와 살을 내게 먹여 나를 살려주신 주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소서!
천성을 향하는 순례의 여정에서 찢기고 피 흘린 험난한 내 모습이
신랑 되신 주님을 만나는 나의 웨딩드레스가 되게 하소서.
버리고 또 버려서 텅 빈 내 마음이
주님께 드리는 나의 마지막 선물이 되게 하소서.
세상에서 너무 많이 누린 추한 모습으로 주님을 만나지 않게 하옵소서.
내 생애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는 그 순간이 가장 기쁜 날이 되게 하소서.
착하고 충성된 종아! 이제 내 나라의 안식을 네게 주노라.
나를 위해 네가 흘린 눈물만큼 너를 위해 준비하였노라.
나를 위해 네가 받은 세상의 상처만큼 네가 받아라!
나를 위해 세상에서 버린 모든 것이 다 여기 있노라.
그렇게 주님의 칭찬을 받게 하소서. ”
이런 마음으로 우리가 성찬을 받아야 합니다.
6·25 전쟁 때 삼사단이 삼팔선을 넘어 원산을 진격한 것이 기념이 되어 10월 1일이 국군의 날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 영적으로 마귀의 삼팔선을 넘어서 삶의 거룩한 변화가 이 성찬을 받음과 함께 성취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 이 성찬의 의미가 무엇인지 저희들이 떨리는 손으로 받고자 합니다. 성찬과 함께 모두가 변화하여 주님의 거룩이 나의 영혼 가운데 성취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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