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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례] 하나님나라 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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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세계교회가 한 성찬을 나누며 한 형제 자매됨을 확인하는 세계성찬 기념주일입니다. 오늘 성찬식에 앞서서 성찬식을 하는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잔치로서의 성찬식입니다.
예수님은 주로 여행하시며, 나그네로서 사셨습니다. 그런데 그가 가는데 마다 먹고 마시는 이야기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가 있는 곳에 잔치가 있습니다(조태연외 공저 뒤집어 읽는 신약성서"밥상에 가득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가" 47-57쪽 참조).
예수님의 비유는 잔치로 가득차 있습니다. 잃은 동전을 찾고 축하하기 위해 잔치를 벌입니다. 그 동전이 얼마 짜리인지는 모르겠으나 배보다 배꼽이 클 것 같습니다. 잃은 양을 찾았다고, 기뻐 잔치를 벌입니다. 아마 애써 찾아온 양을 다시 잡아 먹어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연로한 아버지가 허랑방탕한 아들이 돌아온 것을 기뻐하여 잔치를 벌입니다. 그 비용 때문에 한 다른 아들이 시험에 들기도 합니다. 에수님의 말씀은 이렇게 잔치를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흥겨운 잔치로 이야기가 가득차 있습니다.
동네에 잔치가 벌어질 때, 먹고 마시는 곳마다 거기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몇 날 몇시에 동네 잔치가 있다하면 반드시 챙겨서 먹는 사람이 있는데 아마도 예수님은 그런 분이셨던 것 같습니다. 이런 흥겨운 잔치에 예수님이 계시고, 그의 말씀과 그의 가르침이 있으니 마치 여호와 하나님 나라가 식탁에 임하는 것을 그들은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와서 빵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들렸다 하더니, 사람의 아들은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한다"(눅 7,33-34, 개역)
표준새번역은 예수님을 가리켜 "먹보요 술꾼"이라고 번역합니다. 신 21,18-21을 보면 아비나 어미의 말을 순종치 않는 패역한 자식은 "그를 잡아 성읍 장로들에게 가서 그를 먹보요 술꾼이라고 하면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인다. "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먹보요 술꾼이라 비난받는 것은 이미 그가 십자가에 달릴 징표입니다.
깐깐한 법통들이 보기에는 잔치가 벌어지고 갈릴리부터 여인들이 따르고,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아 떠들면서 한참 예민한 쟁점들을 떠드는 사람을 도대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유대인 예수는 너무 껄끄럽고, 감당키 어려운 사람, 황당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방탕한 자라고 비난을 받습니다.
밥상에는 소외된 모든 사람, 여인, 세리 죄인이 초청되었고 예수님이 이들과 어울림에 대하여 언제나 비난이 뒤따랐습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언제나 죄인 문둥병자, 장애인, 환자, 이방인 ,사마리아인, 여인, 아이들, 창기 들이 잔치의 주인공으로 가난한자, 우는 자, 배고픈 자들이 초대받았습니다. 바로 이런 자들과 먹고 나눔이 예수님의 잔치였습니다.
비난하는 이들에게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마 21, 31)"라고 하십니다. 이들과 함께 먹는다는 것은 자격없는 모든 사람들에게 다가오는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상징적 구현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배고팠습니다. 그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가 "돌로 떡이 되게 하라"는 유혹을 받으신 것은 일상의 배고픔에서 받는 시험과 유혹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성전 위에서 뛰어내려 천사들이 받들게" 하려는 유혹은 외로움의 경험에서 오는 것이고 "절을 하면 온세상을 주겠다"는 말씀도 아무 것도 가질 것 없는 자의 설음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요한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아직 배부른 것입니다. 배고픈 사람은 기회가 있으면 먹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화려한 잔치 뒤에는 수많은 배고픈 나날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거지와 목사의 공통점이 있다고 합니다.
1. 출근 시간이 정확치 않다
2. 하는 일 없어도 바쁘다
3. 오라는 데보다 갈 데가 많다.
4. 다른 사람의 애경사를 많이 기억한다.
놓치지 말고 남의 애경사에 확실히 참석해서 먹는 것은 배고픈 사람들이 가지는 미덕입니다.
성만찬은 이 예수님의 호탕한 식탁, 자유롭고 차별이 없는 식탁의 잔치에서 유래합니다
 둘째, 성찬을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해서 보는 것입니다.
성만찬의 예식문 처음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 바울은 예수께서 하셨던 떠들썩한 잔치를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해서 보았습니다. 그의 잔치를 주님의 몸, 피를 나누는 비장한 식사와 연결 시켰습니다. 이제 떠들썩하게 비난을 받기도 칭찬을 받기도 하신 사랑스러우신 그분이 곁에 계시지 않습니다. 성찬을 통해서는 주께서 잡히시던 날 밤의 절박한 상황이 재현됩니다. 그와 함께 늘 나누던 떡을 떼며 그분의 마지막 죽음의 자리를 생각합니다. "이것은 나의 몸이다, 받아 먹어라"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다. '이것은 내가 흘릴 피다, 내가 너를 위해 피흘림 같이 너도 나와 이웃을 위해 피흘리는 자리에서 살아라'라는 당부를 성찬을 통해서 듣습니다. 우리는 응답합니다. "예, 주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렇게 성찬을 통해 우리는 주님과 다시 감격적인 만남을 갖게되고 그와의 새로운 계약을 갱신하게되는 새로운 계약의 잔을 듭니다.
바울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성례전으로, 깊은 감성을 가진 종교로 승화시켰습니다. 이 감성은 놀라운 것입니다. 2000년의 간격을 넘어 십자가 사건을 생생한 오늘 나의 사건으로 재연시켜 줍니다. 그 시간의 간격을 넘어서 우리가 "오 주님!" 하고 눈물 흘릴 수 있게, 그 앞에 나아와 응답할 수 있게 해줍니다. 아마 이것이 없다면 한국교회의 부흥과 일어섬은 없었을 것입니다. 이 감성적 접근은 우리로 하여금 시공을 초월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만나게 해주고 그가 마지막 정표로 자신의 몸과 피를 나누어주는 역사적 자리에 서게 해줍니다.
 셋째, 한 빵, 한잔의 나눔의 의미입니다.
한 청년이 산을 보고 말했습니다. 산에는 나무, 돌, 흐르는 물, 다람쥐, 벌래, 새 모두가 있지요. 그러나 그것들이 산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한 우리가 그 모두를 '산'이라고 부르지요 그 산을 오르고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예요. 그냥 산일 뿐이지요. 사람이 산이 좋아 산을 오르는 한 그는 이미 그 개인이 아니라 자연의 일부이고, 그 산의 일부라는 말입니다.
크리스천은 거룩한 백성입니다. 이들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서 하나입니다. 우리 성찬식 기도문에 "지나간 세대, 앞으로 올 세대와도 하나되게 하시고... "라고 합니다. 성찬은 한 빵에서 한 잔에서 나누며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한 지체, 한 몸임을 확인하고 그 연대의 자리를 확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세계 성찬일에 모든 세계의 크리스천이 하나로 연대하는 의미일 것입니다.
"모든 크리스천은 개별적 인격, 개체가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존재, 하나의 인격으로 인식되는 것입니다. "
구 한말에 독립신문의 한 귀퉁이를 장식하는 기사입니다. 이때 벼슬자리를 매관매직하는 일이 빈번했는데 어느 시골에 군수자리를 사서 부임하려던 사람이 그 마을에 크리스천들이 모여 산다는 말을 듣고는 그 마을 말고 다른 곳으로 부임케 해달라고 청원을 했다는 기사입니다.
그 당시 기독교인의 숫자는 전체 인구의 0. 1%도 안되는 숫자였지만 그들이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했느냐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기독교인이 있는 마을에 부임해 봤자 그 원칙대로, 곧이 곧대로 사는 사람들이 있다면 기껏 돈주고 산 군수직도 무용지물이 되고 아마 본전도 못 건질 터이므로 다른 마을로 부임케 해달라는 청을 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전체 인구의 25%가 넘는 기독교인들을 자랑하지만 과연 우리는 소금의 맛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가 크리스천이라고 할 때 그것이 그에게 어떤 하나의 이미지를 부여해 줍니까 그가 크리스천이란 사실이 그가 어떤 사람이란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우리 모두가 과연 빛인가, 소금인가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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