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례] 하나님의 가족
본문
오늘은 세계 성만찬 주일입니다.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만찬에 참가함으로써 하나됨을 확인하는 주일입니다. 1982년 페루의 수도 리마(Lima)에서 모였던 세계 교회 협의회(WCC) 에서 개신교와 카톨릭을 포함한 전 세계의 교회가 매년 10월 첫째 주일을 성만찬 주일로 지키기로 결정하고, 성만찬 예식서 세례, 성만찬, 사역(Baptism Eucharist and Ministry)를 내놓았습니다. 이 문서를 리마 다큐먼트(Lima Documents)라고 합니다. 이 문서의 가치에 대하여 신학자들은 16세기 마틴 루터의 95개 조항에 맞먹는 것이라고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됨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여호와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 (에베소서4:1-6)
이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이유로든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분리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교파가 서로 다른 것도 분리의 이유가 될 수 없고, 교리(doctrine)가 서로 다른 것도 분리의 이유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우리는 주님의 만찬을 같이 나눈 한 가족입니다. (고린도전서 10:17)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생명의 떡(bread of life)을 먹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 생명의 떡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 (요한복음 6:35) 나의 제자들은 나로 말미암아 배부르고, 나로 말미암아 목마르지 않고, 나로 말미암아 만족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최권능이라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 목사님의 본명은 최봉석입니다. 한번은 그가 황해도 곡산군 어느 산골에서 화전민들에게 전도하던 때의 일이었습니다. 집이 드문드문 떨어져 있는 산골에서 사람을 모으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그 때는 농사 일에 바쁜 때여서 전도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최목사는 묘안을 냈습니다. "아이구 배야, 사람 살려!" 하면서 그는 산골짜기가 울리도록 큰 소리로 고함을 치면서 뒹굴었습니다. 그러자 근처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모두 뛰어와 물었습니다.
"아니, 배가 어떻게 아픕니까" 최목사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여러분을 놀라게 해서 죄송합니다. 사실은 배가 아픈 게 아니라 당신들이 앞으로 지옥에 갈 생각을 하니 하도 마음이 아파서 해본 소리입니다. 여러분 제발 예수를 믿고 천당에 가십시오. " 이 말을 들은 화전민들은 어이가 없어서 "그럼 우리더러 예수를 믿으라고 우리를 속였단 말입니까 예수가 밥 먹여 준답니까 떡대가리 같은 소리하지 마시오" 하면서 욕을 퍼부었습니다. 이 말에 최목사는 정색을 하면서 말했습니다. "참 좋은 말씀입니다.
여러분, 예수가 밥 먹여 줍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입니다. 떡 중의 떡이요, 떡 중에 제일 머리가 되는 떡대가리가 되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으면 죽어도 죽지 않는 천당에 갈 수 있습니다. " 예수가 밥 먹여 준다는 말에 솔깃한 이 사람들은 어느 새 최목사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 깊은 산골짜기에도 주님의 복음이 들어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생명의 떡입니다. 우리는 이 생명의 양식을 함께 먹는 사람들입니다. 이 생명의 떡을 먹는 사람은 배고프지 않습니다. 여러분, 성만찬 떡을 받으실 때 바로 예수님께서 생명의 떡이신 것을 고백하십시오. 이것이 성만찬의 첫 번째 의미입니다. 그분 안에서 그분과 교제하고 그분과 관계를 맺게 될 때 우리는 풍성한 생명(abundant life)을 누립니다.
둘째로, 우리는 성만찬에 참가함으로써 예수님과의 깊은 교제를 경험합니다. 우리는 성만찬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참가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참가합니다. 포도주와 떡의 의미는 단순히 물질적인 의미에서 포도주와 떡이 아니라 “a participation in the blood of Christ and a participation in the body of Christ”입니다. 여기서 참가한다(participate)는 말은 “…..... 와 같이 나눈다(share with)”는 뜻도 있고 “……의 한 부분이 된다(to have a part)”는 뜻도 있습니다. 우리는 포도주와 떡을 먹음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예수 그리스도의 살을 나누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엄청난 일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요한 웨슬레(John Wesley) 는 성만찬의 중요성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만찬은 성령의 모든 은총이 모든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혼에 전달되는 큰 통로이다. ” 그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자주 성만찬에 참여해야 되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는, 이것이 그리스도의 명령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많은 유익을 주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주님의 성만찬을 받는 사람은 "주님의 성육신과 고난이 주는 모든 은혜를 받을 수 있으며,” 동시에 “지금 여기에서(hear and now) 우리의 영혼이 그분의 은혜로 강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초대교회 안디옥 교회의 감독이었던 이그나티우스(Ignatius)는 97년경 로마로 붙잡혀 가면서 모두 일곱 편의 편지를 썼습니다. 그는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주님의 만찬을 "불사(不死)의 약(藥)이요, 죽음의 해독제" 라고 썼습니다. 그는 또 말하기를 "만일 너희들이 주님의 만찬에 자주 모이면 사탄의 세력은 무너진다”고 썼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극심한 박해와 핍박 속에서도 모일 때마다 “마라나타(Maranatha),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기도하면서(고린도전서 16:22) 주님의 만찬을 나누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주님의 만찬을 나눔으로써 모든 불안과 공포와 고난과 시련을 이겨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도 주님의 만찬을 나눔으로써 우리가 안고 있는 삶의 실존적인 문제들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만찬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과 하나가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하나가 됨으로써 우리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들을 초월해 버립니다. 이것이 성만찬의 초월적인(transcendental) 의미입니다.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성령과 피로써 거듭나니 이 세상에서 내 영혼이 하늘의 영광 보리로다.
온전히 주께 맡긴 내 영 사랑의 음성 듣는 중에 천사들 왕래하는 것과 하늘의 영광 보리로다. 주 안에 기쁨 누리므로 마음의 풍랑이 잔잔하니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 F. J. Crosby가 쓴 찬송가 204장 가사입니다. 그녀는 이렇게 주님과 하나가 되는 경험을 통해서 앞을 못 보는 자신의 한계를 극복했습니다. 그녀의 육신의 눈은 어두웠지만, 그대신 그녀의 영혼의 눈은 밝았습니다. 주님의 성만찬을 받으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런 초월적인 은혜를 경험합니다.
셋째로, 우리는 성만찬을 통하여 주님과 맺은 새 언약(the new covenant)을 새롭게 깨닫습니다. 옛 언약(the old covenant)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의 율법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과 맺으신 약속입니다. “이 율법을 잘 지키면, 나는 너희의 여호와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이것이 옛 언약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약속이 잘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겼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새 언약을 맺겠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나의 법을 너희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너희의 여호와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예레미야 31:33)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만찬을 제자들과 나누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린도전서 11: 25). ”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서 약속하신 새 언약은 600년 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여호와 하나님과 맺은 언약입니다. 그러므로, 성만찬을 나눌 때마다 우리의 심장이 뛰어야 합니다. 성만찬을 받을 때 여러분과 저의 심장이 둥둥 고동소리를 내며 뛰어야 합니다. 이제는 내 마음에, 내 심장 속에 새겨진 그분과 맺은 새 약속 때문에 가슴이 뛰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주님의 만찬을 먹을 때마다 주님이 나를 위해서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고, 우리의 심장이 뛰는 한, 여호와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의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영원히 그분의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히 그분의 백성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성만찬을 할 때마다 우리의 사명(使命)을 새롭게 깨닫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만찬을 나눌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in remembrance of me,”라고, “나를 기억함으로” 혹은 “나를 회상함으로”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단순히 제사 지내듯이 나를 기억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행하신 일과 약속을 이 세상에 강력하게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말들이 위에서 말한 리마 문서에 나와 있습니다.
바울은 이미 2,000년 전에 “나를 기념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그렇게 해석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 (고린도전서 11:26) 오늘 우리는 리마 문서를 보면서 굉장한 선언이라고, 그 중요성에 있어서 루터의 95개 조항 과 맞먹을 정도라고 말하는데, 이미 바울은 2,000년 전에 그리스도인들이 나누는 성만찬의 의미를 그렇게 해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리마 문서는 새로운 선언이 아니라 성만찬의 의미에 대한 성경적인 재 발견이라고 해야 합니다.
오늘 전 세계의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주님의 만찬에 초대된 여러분, 이제 여러분에게 생의 메시지가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교회가 이 세상을 향해 외칠 메시지가 주어졌습니다.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할 말”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향해 해야 할 말, 그리고,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선포해야 할 말이 주어졌습니다. 그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나를 위하여, 아니 온 세상의 죄를 지시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 그 십자가 위에서 나타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 여러분과 제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세상을 향하여 선포해야 할 말은 바로 이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저에게 알렌 해피(Allen Happe)라는 친구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우리교회가 하바드 스퀘어 가든 스트리트에 있는 미국교회에서 14년 함께 있었는데, 그 교회의 담임 목사님이었습니다. 이름 그대로 성품이 매우 온화하고 친절한 분이었습니다. 우리가 1992년에 지금 이 교회로 이사 오고 난 후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교회에 함께 있을 때 해마다 10월 첫 주에 성만찬 예배를 같이 드렸습니다. 한번은 그 목사님이 설교하고, 한번은 제가 설교했습니다. 그 목사님은 성만찬 주일에 같이 부를 찬송가를 고르면서 꼭 526장 찬송을 부르자고 했던 생각이 납니다. 그 찬송가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1절) 주 예수 안에 동서나 남북이 있으랴! 온 세계 모든 민족이 다 형제 아닌가. (2절) 주 예수 계신 곳마다 참 사랑 사슬이 뭇 백성 함께 묶어서 한 가족 이루네. (3절) 다같이 손을 맞잡고 한 아버지 밑에 겉모양 인종 다르나 한 자녀 되도다. (4절) 주 예수 안에 동서와 남북이 합하여 주 예수 사랑 안에서 다 하나 되도다. ” 매우 짧고 간단한 찬송입니다만, 그 가사 하나 하나가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사람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자기 생의 사명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모두 내 형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으로 가족에 대한 우리들의 고정관념을 깨뜨리시고, 누구든지, 나라와 인종, 피부 색깔에 상관 없이,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모두 여호와 하나님의 가족이라고, 여호와 하나님의 가족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주셨습니다.
전 세계의 그리스도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질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 이 시대를 구원할 것인가” “우리 시대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인가” “구원의 다른 대안은 없는가” 성경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 (사도행전 4:12)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분(another name)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외에 다른 복음(another gospel)은 없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도 구원을 위한 다른 대안(代案)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그런데, 교회 내부에서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말들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복음에 대한 확신을 독선(獨善)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이 많은 때에, 그들의 말은 상당히 매력적으로 그럴듯하게 들립니다. 저는 공개적으로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을 비난한 적이 없습니다만, 이 지역에도 그런 설교를 하는 목사들이 있습니다. 그런 설교도 하고 글도 쓰면서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을 더욱 부끄러워하게 만들고 복음의 능력을 약화 시키고 있습니다.
한국의 샘물교회 사건은 한국교회의 선교 방향을 다시 재조정 해야 한다는 교훈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제 자신에게도 많은 깨달음을 얻게 했습니다. 세계 교회들이 한국 교회를 비난했습니다. 아직도 한국교회는 16세기 식의 선교를 하고 있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미국의 크리스천들을 대상으로 한 여론 조사에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순교할 필요가 있는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그 결과 60% 이상이 순교는 가치 있는 일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미국교회는 겉으로는 한국식 선교 방식을 비난하면서도, 속으로는 은근히 한국 교회를 부러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한국교회는 큰 고민거리를 안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한국교회는 복음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복음을 위해서 순교했던 전통을 이어가야 합니다. 한편, 타 문화, 타 종교 지역에 선교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선교를 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복음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합니다. 복음은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입니다. 복음은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의 두나미스(dunamis)입니다. 복음에는 엄청난 폭발력이 있습니다. 복음의 위력 앞에서 인간이 만든 어떤 이론(theories)도, 어떤 견고한 사상 체계(ideologies)도 모두 무너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여러분의 생의 메시지로 삼으십시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기도로, 말씀으로, 사랑으로, 이해로, 관용으로 연합하여 세상을 향해 강력한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해야 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됨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여호와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 (에베소서4:1-6)
이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이유로든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분리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교파가 서로 다른 것도 분리의 이유가 될 수 없고, 교리(doctrine)가 서로 다른 것도 분리의 이유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우리는 주님의 만찬을 같이 나눈 한 가족입니다. (고린도전서 10:17)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생명의 떡(bread of life)을 먹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 생명의 떡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 (요한복음 6:35) 나의 제자들은 나로 말미암아 배부르고, 나로 말미암아 목마르지 않고, 나로 말미암아 만족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최권능이라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 목사님의 본명은 최봉석입니다. 한번은 그가 황해도 곡산군 어느 산골에서 화전민들에게 전도하던 때의 일이었습니다. 집이 드문드문 떨어져 있는 산골에서 사람을 모으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그 때는 농사 일에 바쁜 때여서 전도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최목사는 묘안을 냈습니다. "아이구 배야, 사람 살려!" 하면서 그는 산골짜기가 울리도록 큰 소리로 고함을 치면서 뒹굴었습니다. 그러자 근처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모두 뛰어와 물었습니다.
"아니, 배가 어떻게 아픕니까" 최목사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여러분을 놀라게 해서 죄송합니다. 사실은 배가 아픈 게 아니라 당신들이 앞으로 지옥에 갈 생각을 하니 하도 마음이 아파서 해본 소리입니다. 여러분 제발 예수를 믿고 천당에 가십시오. " 이 말을 들은 화전민들은 어이가 없어서 "그럼 우리더러 예수를 믿으라고 우리를 속였단 말입니까 예수가 밥 먹여 준답니까 떡대가리 같은 소리하지 마시오" 하면서 욕을 퍼부었습니다. 이 말에 최목사는 정색을 하면서 말했습니다. "참 좋은 말씀입니다.
여러분, 예수가 밥 먹여 줍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입니다. 떡 중의 떡이요, 떡 중에 제일 머리가 되는 떡대가리가 되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으면 죽어도 죽지 않는 천당에 갈 수 있습니다. " 예수가 밥 먹여 준다는 말에 솔깃한 이 사람들은 어느 새 최목사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 깊은 산골짜기에도 주님의 복음이 들어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생명의 떡입니다. 우리는 이 생명의 양식을 함께 먹는 사람들입니다. 이 생명의 떡을 먹는 사람은 배고프지 않습니다. 여러분, 성만찬 떡을 받으실 때 바로 예수님께서 생명의 떡이신 것을 고백하십시오. 이것이 성만찬의 첫 번째 의미입니다. 그분 안에서 그분과 교제하고 그분과 관계를 맺게 될 때 우리는 풍성한 생명(abundant life)을 누립니다.
둘째로, 우리는 성만찬에 참가함으로써 예수님과의 깊은 교제를 경험합니다. 우리는 성만찬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참가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참가합니다. 포도주와 떡의 의미는 단순히 물질적인 의미에서 포도주와 떡이 아니라 “a participation in the blood of Christ and a participation in the body of Christ”입니다. 여기서 참가한다(participate)는 말은 “…..... 와 같이 나눈다(share with)”는 뜻도 있고 “……의 한 부분이 된다(to have a part)”는 뜻도 있습니다. 우리는 포도주와 떡을 먹음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예수 그리스도의 살을 나누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엄청난 일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요한 웨슬레(John Wesley) 는 성만찬의 중요성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만찬은 성령의 모든 은총이 모든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혼에 전달되는 큰 통로이다. ” 그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자주 성만찬에 참여해야 되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는, 이것이 그리스도의 명령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많은 유익을 주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주님의 성만찬을 받는 사람은 "주님의 성육신과 고난이 주는 모든 은혜를 받을 수 있으며,” 동시에 “지금 여기에서(hear and now) 우리의 영혼이 그분의 은혜로 강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초대교회 안디옥 교회의 감독이었던 이그나티우스(Ignatius)는 97년경 로마로 붙잡혀 가면서 모두 일곱 편의 편지를 썼습니다. 그는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주님의 만찬을 "불사(不死)의 약(藥)이요, 죽음의 해독제" 라고 썼습니다. 그는 또 말하기를 "만일 너희들이 주님의 만찬에 자주 모이면 사탄의 세력은 무너진다”고 썼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극심한 박해와 핍박 속에서도 모일 때마다 “마라나타(Maranatha),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기도하면서(고린도전서 16:22) 주님의 만찬을 나누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주님의 만찬을 나눔으로써 모든 불안과 공포와 고난과 시련을 이겨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도 주님의 만찬을 나눔으로써 우리가 안고 있는 삶의 실존적인 문제들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만찬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과 하나가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하나가 됨으로써 우리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들을 초월해 버립니다. 이것이 성만찬의 초월적인(transcendental) 의미입니다.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성령과 피로써 거듭나니 이 세상에서 내 영혼이 하늘의 영광 보리로다.
온전히 주께 맡긴 내 영 사랑의 음성 듣는 중에 천사들 왕래하는 것과 하늘의 영광 보리로다. 주 안에 기쁨 누리므로 마음의 풍랑이 잔잔하니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 F. J. Crosby가 쓴 찬송가 204장 가사입니다. 그녀는 이렇게 주님과 하나가 되는 경험을 통해서 앞을 못 보는 자신의 한계를 극복했습니다. 그녀의 육신의 눈은 어두웠지만, 그대신 그녀의 영혼의 눈은 밝았습니다. 주님의 성만찬을 받으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런 초월적인 은혜를 경험합니다.
셋째로, 우리는 성만찬을 통하여 주님과 맺은 새 언약(the new covenant)을 새롭게 깨닫습니다. 옛 언약(the old covenant)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의 율법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과 맺으신 약속입니다. “이 율법을 잘 지키면, 나는 너희의 여호와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이것이 옛 언약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약속이 잘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겼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새 언약을 맺겠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나의 법을 너희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너희의 여호와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예레미야 31:33)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만찬을 제자들과 나누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린도전서 11: 25). ”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서 약속하신 새 언약은 600년 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여호와 하나님과 맺은 언약입니다. 그러므로, 성만찬을 나눌 때마다 우리의 심장이 뛰어야 합니다. 성만찬을 받을 때 여러분과 저의 심장이 둥둥 고동소리를 내며 뛰어야 합니다. 이제는 내 마음에, 내 심장 속에 새겨진 그분과 맺은 새 약속 때문에 가슴이 뛰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주님의 만찬을 먹을 때마다 주님이 나를 위해서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고, 우리의 심장이 뛰는 한, 여호와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의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영원히 그분의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히 그분의 백성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성만찬을 할 때마다 우리의 사명(使命)을 새롭게 깨닫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만찬을 나눌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in remembrance of me,”라고, “나를 기억함으로” 혹은 “나를 회상함으로”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단순히 제사 지내듯이 나를 기억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행하신 일과 약속을 이 세상에 강력하게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말들이 위에서 말한 리마 문서에 나와 있습니다.
바울은 이미 2,000년 전에 “나를 기념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그렇게 해석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 (고린도전서 11:26) 오늘 우리는 리마 문서를 보면서 굉장한 선언이라고, 그 중요성에 있어서 루터의 95개 조항 과 맞먹을 정도라고 말하는데, 이미 바울은 2,000년 전에 그리스도인들이 나누는 성만찬의 의미를 그렇게 해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리마 문서는 새로운 선언이 아니라 성만찬의 의미에 대한 성경적인 재 발견이라고 해야 합니다.
오늘 전 세계의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주님의 만찬에 초대된 여러분, 이제 여러분에게 생의 메시지가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교회가 이 세상을 향해 외칠 메시지가 주어졌습니다.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할 말”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향해 해야 할 말, 그리고,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선포해야 할 말이 주어졌습니다. 그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나를 위하여, 아니 온 세상의 죄를 지시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 그 십자가 위에서 나타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 여러분과 제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세상을 향하여 선포해야 할 말은 바로 이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저에게 알렌 해피(Allen Happe)라는 친구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우리교회가 하바드 스퀘어 가든 스트리트에 있는 미국교회에서 14년 함께 있었는데, 그 교회의 담임 목사님이었습니다. 이름 그대로 성품이 매우 온화하고 친절한 분이었습니다. 우리가 1992년에 지금 이 교회로 이사 오고 난 후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교회에 함께 있을 때 해마다 10월 첫 주에 성만찬 예배를 같이 드렸습니다. 한번은 그 목사님이 설교하고, 한번은 제가 설교했습니다. 그 목사님은 성만찬 주일에 같이 부를 찬송가를 고르면서 꼭 526장 찬송을 부르자고 했던 생각이 납니다. 그 찬송가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1절) 주 예수 안에 동서나 남북이 있으랴! 온 세계 모든 민족이 다 형제 아닌가. (2절) 주 예수 계신 곳마다 참 사랑 사슬이 뭇 백성 함께 묶어서 한 가족 이루네. (3절) 다같이 손을 맞잡고 한 아버지 밑에 겉모양 인종 다르나 한 자녀 되도다. (4절) 주 예수 안에 동서와 남북이 합하여 주 예수 사랑 안에서 다 하나 되도다. ” 매우 짧고 간단한 찬송입니다만, 그 가사 하나 하나가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사람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자기 생의 사명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모두 내 형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으로 가족에 대한 우리들의 고정관념을 깨뜨리시고, 누구든지, 나라와 인종, 피부 색깔에 상관 없이,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모두 여호와 하나님의 가족이라고, 여호와 하나님의 가족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주셨습니다.
전 세계의 그리스도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질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 이 시대를 구원할 것인가” “우리 시대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인가” “구원의 다른 대안은 없는가” 성경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 (사도행전 4:12)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분(another name)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외에 다른 복음(another gospel)은 없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도 구원을 위한 다른 대안(代案)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그런데, 교회 내부에서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말들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복음에 대한 확신을 독선(獨善)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이 많은 때에, 그들의 말은 상당히 매력적으로 그럴듯하게 들립니다. 저는 공개적으로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을 비난한 적이 없습니다만, 이 지역에도 그런 설교를 하는 목사들이 있습니다. 그런 설교도 하고 글도 쓰면서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을 더욱 부끄러워하게 만들고 복음의 능력을 약화 시키고 있습니다.
한국의 샘물교회 사건은 한국교회의 선교 방향을 다시 재조정 해야 한다는 교훈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제 자신에게도 많은 깨달음을 얻게 했습니다. 세계 교회들이 한국 교회를 비난했습니다. 아직도 한국교회는 16세기 식의 선교를 하고 있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미국의 크리스천들을 대상으로 한 여론 조사에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순교할 필요가 있는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그 결과 60% 이상이 순교는 가치 있는 일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미국교회는 겉으로는 한국식 선교 방식을 비난하면서도, 속으로는 은근히 한국 교회를 부러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한국교회는 큰 고민거리를 안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한국교회는 복음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복음을 위해서 순교했던 전통을 이어가야 합니다. 한편, 타 문화, 타 종교 지역에 선교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선교를 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복음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합니다. 복음은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입니다. 복음은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의 두나미스(dunamis)입니다. 복음에는 엄청난 폭발력이 있습니다. 복음의 위력 앞에서 인간이 만든 어떤 이론(theories)도, 어떤 견고한 사상 체계(ideologies)도 모두 무너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여러분의 생의 메시지로 삼으십시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기도로, 말씀으로, 사랑으로, 이해로, 관용으로 연합하여 세상을 향해 강력한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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