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례] 성찬식에 참여하는 자
본문
기독교의 성례는 세례와 성찬입니다. 카톨릭은 7성례입니다. 영세, 성체 성사, 견진 성사, 고해성사, 결혼 성사, 신품 성사, 종유 성사 등입니다. 기독교와 카톨릭은 성례에서부터 확연히 다릅니다. 공통점은 기독교 행하는 성례 두 가지는 카톨릭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1년에 네 번 정도 성찬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성찬식의 의미와 어떻게 임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선은 오늘 본문이 기록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는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들이 많았음을 고린도전후서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 많은 문제 중의 하나가 성찬에 대한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성찬에 대해 시정하고자 하는 내용의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 상황을 말씀드리면 당시 헬라 사회에서는 친한 사람들이 서로 모여 식사를 하는 일이 자주 있었는데 그것이 관습처럼 되었습니다. 이를 ‘에바노스’라고 불렀습니다. 사람들은 만찬을 열기 위해 공동으로 기부금을 내기도 하였습니다.
고린도 교회도 성도의 교제를 위하여 ‘아가페 밀’이라는 이름의 애찬을 즐겼습니다. 이 애찬은 저마다 가져올 수 있을 만큼의 음식을 교회에 가지고 와서 함께 나누는 일종의 회식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도의 친교를 도모하는 애찬의 의도가 상실되고 오히려 성도가 분명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데 있었습니다.
자기들이 가지고 온 음식을 자기들만 먹음으로 인해 가난한 사람은 굶주리고 부자는 배가 부르게 먹고 마셔 취하기까지 했습니다. 또한 부자들은 그 저녁 식사식간을 이용하여 자신의 부를 자랑함으로써 가난한 형제에게 치욕적인 상처를 주기도 했습니다. 이런 일이 발생함으로써 자연적으로 갈등과 긴장이 생겨서 분쟁까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고린도 교인들의 큰 과오는 본래의 의도를 상실한 그러한 애찬을 성찬이라고 오해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성찬에 참여하는 자는 성찬에 바른 이해를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들 중에서도 성찬에 참여는 하지만 그 의미를 제대로 모를 수 있거나 모르는 성도들도 있을 줄 알고 오늘 이 말씀을 드립니다.
우선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찬식을 제정한 분은 예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 유월절 저녁식사를 준비해놓은 후에 제자들과 한 자리에 앉아 식사를 시작할 때 떡을 떼어 축복기도를 하신 후에 주시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떡을 다 떼신 후에 잔을 가지시고 말씀하시기를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두 가지 다 행하신 후에는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찬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기념하라고 하셨기에 우리는 이 예식을 거행하는 것입니다. 사실 카톨릭에서는 매 주일 미사 때마다 성찬예식을 거행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왠지 이 예식을 자주 하지 않습니다. 최근에는 매달 1회씩 하는 교회도 있고 우리교회의 경우는 분기별 1회씩 합니다. 우리가 성찬예식을 거행해야 하는 이유는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대로 주님의 죽으심을 전하는 의식이기 때문에 다시 오실 때까지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과 분부는 우리가 조금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요, 또한 지키기만 하면 우리에게 큰 유익을 가져다주는 것들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을 다하여 주님의 명령을 지켜 나가야 할 것이며, 성찬식을 통해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여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찬예식은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인간이란 늘 넘어지고 쓰러지는 죄인이지만, 성찬을 통하여 거룩하신 여호와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영적인 체험을 갖게 하며 또한 성찬을 함께 나누는 성도들끼리 비록 겉모습은 죄인들이지만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여함으로 우리는 하나이고 또 반드시 하나가 되어야 할 사람들임을 깨닫게 하는 거룩한 식사라는 것입니다. 이런 뜻을 분명히 알고 참여해야 합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떡과 피는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떡과 포도주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떡은 주님의 살, 포도주는 흘리는 보혈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예식을 거행할 때 주님의 죽으심, 즉 살이 찢기고 피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다 흘리신 보혈을 생각하면서 그것이 바로 나의 죄와 허물을 사하시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카톨릭 교리는 집례하는 사제가 떡과 잔을 위해 기도할 때 그것이 실제적으로 살과 피로 변한다는 화체설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분명히 그것을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제정된 거룩한 예식에 참여하는 자는 기본적인 성찬에 참여할 준비가 필요합니다. 준비 없이 참여하면 오히려 죄가 된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우선 성찬에 참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요한복음6:51절이하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52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58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9:22)의 말씀처럼 구약시대 때는 짐승의 피를 흘림으로 죄 사함을 받았으며, 지금은 우리의 대제사장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 한 번에 흘려주신 피로 죄 사람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된 음료요 주님의 피로 상징되는 성찬식 때의 포도주를 대할 때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속죄의 보혈을 상기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온전히 믿고 주님의 말씀 안에 들어가 살고 우리는 주님을 온전히 영접할 때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이 됩니다. 그럴 때에 영생을 얻게 됩니다.
두 번째는 성찬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함을 의미합니다.
주님과의 일치된 삶을 원한다면 마땅히 우리를 위해 고난당하신 주님의 고난에 동참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지고 주를 좇아가려고 하기보다는 예수 믿고 축복받으려고만 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만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십자가는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끊임없는 자신과의 싸움이며, 여러 가지 형태로써 성도에게 나타나며, 이 십자가를 바로 질 때에 진정한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찬식에 임하여 주님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포도주를 대하면서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신 주님을 생각하며, 내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노르웨이 어느 시골마을 교회 종탑에 어린양의 조각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수많은 조각 가운데 왜 어린양의 조각을 세웠을까요 그 교회는 교인들이 교회를 건축할 때 돈이 많이 없어서 건축회사에 의뢰하지 못하고 교인들이 직접 예배당을 짓게 되었습니다.
교인들을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교회를 건축하고 거의 다 지어져 갈 즈음 한 교인에 교회 종탑을 세우다가 그만 실수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모두 그 사람은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기적같이 살았습니다. 때마침 그 아래에로 지나던 양떼 위에 떨어진 것입니다. 양 한 마리가 죽고 대신 그 사람을 살아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신분상 다 죄인이었고 마땅히 죽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죽어야 할 것을 예수님께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대신 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세 번째 성찬에 참여한다는 것은 주님과의 깊은 사귐과 동시에 성도들과의 사귐을 의미합니다.
우선 주님과의 사귐은 주님의 살과 피를 나누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몸을 나누어 주시고그의 생명의 피를 나누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영원하고 가장 큰 사랑을 인간의 삶속에서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은 자가 성찬을 받게 되는 이유는 적어도 교회 공동체가 되려면 주님의 살과 피를 먹은 자라야 합니다.
그것은 곧 주님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살과 피를 열두 제자들에게 먼저 나누어 주시면서 이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것을 기념하면서 떡과 잔을 나누어야 합니다. 아울러 성도들도 서로 함께 나누어 먹어야 합니다. 주님의 떡과 잔을 서로 나누어 먹었기에 우리 또한 주님의 살과 피를 생각하면서 어려운 이웃과 함께 나눔의 삶을 실천하는 것이 거룩한 성찬의 삶이 됩니다.
주님은 자신의 생명을 나누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생명처럼 여기는 그 무엇도 때로는 내어놓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필요한 자들을 섬기는 기회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성만찬은 나눔을 잘해야 하는데 당시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자기들이 갖고 온 것을 자기들이 먼저 먹어버림으로 인해 가난한 자들이 자기 집에서 가녀오지 못한 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업신여김을 받아야 했습니다. 예배가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실 성찬이 잘못되면 죄를 범하고 그 죄는 예배드리다 범하는 죄입니다. 이점을 오늘도 조심해야 합니다.
끝으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성찬에 참여할 때 반드시 자신을 먼저 살핀 후에 참여하여야 합니다.
우선 27절에 보면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28-29말씀에 보면,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여기서 자기를 살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합당치 않는 성찬참여는 어떤 경우를 말합니까 회개하지 않고 악한 양심을 가진 채로 참여하는 것, 즉 회개와 용서가 없는 상태에서 참여하는 것, 가난한 자들을 멸시하고 참여하는 것, 주어진 말씀에 대한 믿음이 없이 참여하는 것,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감사함으로 기념하지도 않고, 그를 경외하지도 않으며 타인들을 사랑하지 않고 참여하는 것, 죄인을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 기억함과 감사함이 없이 참여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하지만 예배를 통해 범하는 죄도 많습니다. 인간의 최초의 살인사건도 예배로 인해 발생된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 각기 예배를 드렸지만 가인의 예배를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예배는 여호와 하나님이 흠양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인이 알아차렸습니다. 화가 치밀었습니다.
그것을 제대로 절제하지 못한채 미운 생각이 최고조에 이르러 결국 동생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예배를 잘 드려야 합니다. 민수기16장에 보면 고라자손이 예배를 소홀히 여기고 모세의 지도력에 항거하다가 250명이 불에 타 죽었습니다. 염병으로 죽은 자가 14,700명입니다.
미국 보스턴의 교외에 위치한 병원의 목사로 봉사하고 있던 패트 노벡 목사는 어느 여름, 병명이 밝혀지지 않은 질병으로 입원한 한 환자를 방문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존이라는 60대의 이 남자는 어떤 검사를 해보아도 이상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날로 쇠약해졌으며, 벌써 2주일 동안이나 아무것도 삼킬 수조차 없었습니다.
간호사들은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시도하다가 실패하고, 결국 목사의 사무실을 두드렸던 것입니다. 패트는 존을 찾아가서 대화를 나누던 중 주님께서 자신에게 무엇인가 특별한 일을 시키려 하심을 느꼈습니다. 존에게 성찬을 받고 싶은지 물어야 한다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패트는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했습니다.
그 순간 존이 울음을 터뜨리며 소리쳤습니다. “그럴 수 없어요! 내 죄는 용서받을 수가 없어요!” 패트는 ‘누구든지 올바른 마음가짐 없이 성찬에 참여하면 자기 자신을 정죄하는 것과 같다’는 바울의 경고를 알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존에게 죄를 고백하기를 원하는지 물었습니다. 존은 감사한 표정으로 끄덕였습니다. 패트가 기억하기로 존의 고백이 특별히 엄청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죄는 존의 인생을 비참하게 만들었습니다. 존은 회개하고 흐느꼈으며, 패트는 그를 껴안으며 그의 죄가 사함 받았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성찬을 나누었습니다. 패트는 고린도전서 11장을 인용하면서 엄숙하게 성찬 예식을 거행했습니다. 존은 빵을 입에 넣고 천천히 씹었습니다. 그리고 포도주를 받아 마셨습니다. 그는 이미 자유로워졌습니다. 3일 만에 존은 병원을 자기 발로 걸어서 나갔습니다. 할렐루야!
이 성찬식의 의미와 어떻게 임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선은 오늘 본문이 기록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는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들이 많았음을 고린도전후서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 많은 문제 중의 하나가 성찬에 대한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성찬에 대해 시정하고자 하는 내용의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 상황을 말씀드리면 당시 헬라 사회에서는 친한 사람들이 서로 모여 식사를 하는 일이 자주 있었는데 그것이 관습처럼 되었습니다. 이를 ‘에바노스’라고 불렀습니다. 사람들은 만찬을 열기 위해 공동으로 기부금을 내기도 하였습니다.
고린도 교회도 성도의 교제를 위하여 ‘아가페 밀’이라는 이름의 애찬을 즐겼습니다. 이 애찬은 저마다 가져올 수 있을 만큼의 음식을 교회에 가지고 와서 함께 나누는 일종의 회식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도의 친교를 도모하는 애찬의 의도가 상실되고 오히려 성도가 분명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데 있었습니다.
자기들이 가지고 온 음식을 자기들만 먹음으로 인해 가난한 사람은 굶주리고 부자는 배가 부르게 먹고 마셔 취하기까지 했습니다. 또한 부자들은 그 저녁 식사식간을 이용하여 자신의 부를 자랑함으로써 가난한 형제에게 치욕적인 상처를 주기도 했습니다. 이런 일이 발생함으로써 자연적으로 갈등과 긴장이 생겨서 분쟁까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고린도 교인들의 큰 과오는 본래의 의도를 상실한 그러한 애찬을 성찬이라고 오해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성찬에 참여하는 자는 성찬에 바른 이해를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들 중에서도 성찬에 참여는 하지만 그 의미를 제대로 모를 수 있거나 모르는 성도들도 있을 줄 알고 오늘 이 말씀을 드립니다.
우선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찬식을 제정한 분은 예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 유월절 저녁식사를 준비해놓은 후에 제자들과 한 자리에 앉아 식사를 시작할 때 떡을 떼어 축복기도를 하신 후에 주시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떡을 다 떼신 후에 잔을 가지시고 말씀하시기를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두 가지 다 행하신 후에는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찬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기념하라고 하셨기에 우리는 이 예식을 거행하는 것입니다. 사실 카톨릭에서는 매 주일 미사 때마다 성찬예식을 거행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왠지 이 예식을 자주 하지 않습니다. 최근에는 매달 1회씩 하는 교회도 있고 우리교회의 경우는 분기별 1회씩 합니다. 우리가 성찬예식을 거행해야 하는 이유는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대로 주님의 죽으심을 전하는 의식이기 때문에 다시 오실 때까지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과 분부는 우리가 조금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요, 또한 지키기만 하면 우리에게 큰 유익을 가져다주는 것들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을 다하여 주님의 명령을 지켜 나가야 할 것이며, 성찬식을 통해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여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찬예식은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인간이란 늘 넘어지고 쓰러지는 죄인이지만, 성찬을 통하여 거룩하신 여호와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영적인 체험을 갖게 하며 또한 성찬을 함께 나누는 성도들끼리 비록 겉모습은 죄인들이지만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여함으로 우리는 하나이고 또 반드시 하나가 되어야 할 사람들임을 깨닫게 하는 거룩한 식사라는 것입니다. 이런 뜻을 분명히 알고 참여해야 합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떡과 피는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떡과 포도주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떡은 주님의 살, 포도주는 흘리는 보혈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예식을 거행할 때 주님의 죽으심, 즉 살이 찢기고 피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다 흘리신 보혈을 생각하면서 그것이 바로 나의 죄와 허물을 사하시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카톨릭 교리는 집례하는 사제가 떡과 잔을 위해 기도할 때 그것이 실제적으로 살과 피로 변한다는 화체설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분명히 그것을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제정된 거룩한 예식에 참여하는 자는 기본적인 성찬에 참여할 준비가 필요합니다. 준비 없이 참여하면 오히려 죄가 된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우선 성찬에 참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요한복음6:51절이하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52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58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9:22)의 말씀처럼 구약시대 때는 짐승의 피를 흘림으로 죄 사함을 받았으며, 지금은 우리의 대제사장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 한 번에 흘려주신 피로 죄 사람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된 음료요 주님의 피로 상징되는 성찬식 때의 포도주를 대할 때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속죄의 보혈을 상기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온전히 믿고 주님의 말씀 안에 들어가 살고 우리는 주님을 온전히 영접할 때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이 됩니다. 그럴 때에 영생을 얻게 됩니다.
두 번째는 성찬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함을 의미합니다.
주님과의 일치된 삶을 원한다면 마땅히 우리를 위해 고난당하신 주님의 고난에 동참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지고 주를 좇아가려고 하기보다는 예수 믿고 축복받으려고만 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만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십자가는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끊임없는 자신과의 싸움이며, 여러 가지 형태로써 성도에게 나타나며, 이 십자가를 바로 질 때에 진정한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찬식에 임하여 주님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포도주를 대하면서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신 주님을 생각하며, 내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노르웨이 어느 시골마을 교회 종탑에 어린양의 조각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수많은 조각 가운데 왜 어린양의 조각을 세웠을까요 그 교회는 교인들이 교회를 건축할 때 돈이 많이 없어서 건축회사에 의뢰하지 못하고 교인들이 직접 예배당을 짓게 되었습니다.
교인들을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교회를 건축하고 거의 다 지어져 갈 즈음 한 교인에 교회 종탑을 세우다가 그만 실수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모두 그 사람은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기적같이 살았습니다. 때마침 그 아래에로 지나던 양떼 위에 떨어진 것입니다. 양 한 마리가 죽고 대신 그 사람을 살아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신분상 다 죄인이었고 마땅히 죽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죽어야 할 것을 예수님께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대신 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세 번째 성찬에 참여한다는 것은 주님과의 깊은 사귐과 동시에 성도들과의 사귐을 의미합니다.
우선 주님과의 사귐은 주님의 살과 피를 나누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몸을 나누어 주시고그의 생명의 피를 나누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영원하고 가장 큰 사랑을 인간의 삶속에서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은 자가 성찬을 받게 되는 이유는 적어도 교회 공동체가 되려면 주님의 살과 피를 먹은 자라야 합니다.
그것은 곧 주님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살과 피를 열두 제자들에게 먼저 나누어 주시면서 이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것을 기념하면서 떡과 잔을 나누어야 합니다. 아울러 성도들도 서로 함께 나누어 먹어야 합니다. 주님의 떡과 잔을 서로 나누어 먹었기에 우리 또한 주님의 살과 피를 생각하면서 어려운 이웃과 함께 나눔의 삶을 실천하는 것이 거룩한 성찬의 삶이 됩니다.
주님은 자신의 생명을 나누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생명처럼 여기는 그 무엇도 때로는 내어놓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필요한 자들을 섬기는 기회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성만찬은 나눔을 잘해야 하는데 당시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자기들이 갖고 온 것을 자기들이 먼저 먹어버림으로 인해 가난한 자들이 자기 집에서 가녀오지 못한 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업신여김을 받아야 했습니다. 예배가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실 성찬이 잘못되면 죄를 범하고 그 죄는 예배드리다 범하는 죄입니다. 이점을 오늘도 조심해야 합니다.
끝으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성찬에 참여할 때 반드시 자신을 먼저 살핀 후에 참여하여야 합니다.
우선 27절에 보면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28-29말씀에 보면,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여기서 자기를 살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합당치 않는 성찬참여는 어떤 경우를 말합니까 회개하지 않고 악한 양심을 가진 채로 참여하는 것, 즉 회개와 용서가 없는 상태에서 참여하는 것, 가난한 자들을 멸시하고 참여하는 것, 주어진 말씀에 대한 믿음이 없이 참여하는 것,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감사함으로 기념하지도 않고, 그를 경외하지도 않으며 타인들을 사랑하지 않고 참여하는 것, 죄인을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 기억함과 감사함이 없이 참여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하지만 예배를 통해 범하는 죄도 많습니다. 인간의 최초의 살인사건도 예배로 인해 발생된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 각기 예배를 드렸지만 가인의 예배를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예배는 여호와 하나님이 흠양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인이 알아차렸습니다. 화가 치밀었습니다.
그것을 제대로 절제하지 못한채 미운 생각이 최고조에 이르러 결국 동생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예배를 잘 드려야 합니다. 민수기16장에 보면 고라자손이 예배를 소홀히 여기고 모세의 지도력에 항거하다가 250명이 불에 타 죽었습니다. 염병으로 죽은 자가 14,700명입니다.
미국 보스턴의 교외에 위치한 병원의 목사로 봉사하고 있던 패트 노벡 목사는 어느 여름, 병명이 밝혀지지 않은 질병으로 입원한 한 환자를 방문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존이라는 60대의 이 남자는 어떤 검사를 해보아도 이상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날로 쇠약해졌으며, 벌써 2주일 동안이나 아무것도 삼킬 수조차 없었습니다.
간호사들은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시도하다가 실패하고, 결국 목사의 사무실을 두드렸던 것입니다. 패트는 존을 찾아가서 대화를 나누던 중 주님께서 자신에게 무엇인가 특별한 일을 시키려 하심을 느꼈습니다. 존에게 성찬을 받고 싶은지 물어야 한다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패트는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했습니다.
그 순간 존이 울음을 터뜨리며 소리쳤습니다. “그럴 수 없어요! 내 죄는 용서받을 수가 없어요!” 패트는 ‘누구든지 올바른 마음가짐 없이 성찬에 참여하면 자기 자신을 정죄하는 것과 같다’는 바울의 경고를 알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존에게 죄를 고백하기를 원하는지 물었습니다. 존은 감사한 표정으로 끄덕였습니다. 패트가 기억하기로 존의 고백이 특별히 엄청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죄는 존의 인생을 비참하게 만들었습니다. 존은 회개하고 흐느꼈으며, 패트는 그를 껴안으며 그의 죄가 사함 받았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성찬을 나누었습니다. 패트는 고린도전서 11장을 인용하면서 엄숙하게 성찬 예식을 거행했습니다. 존은 빵을 입에 넣고 천천히 씹었습니다. 그리고 포도주를 받아 마셨습니다. 그는 이미 자유로워졌습니다. 3일 만에 존은 병원을 자기 발로 걸어서 나갔습니다. 할렐루야!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