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납시다
본문
성령 충만을 받읍시다.
당신은 어떤 존재입니까 인간은 저마다 추구하는 목적에 따라 그 존재와 삶의 가치가 달라집니다. 이 땅에 많은 인생이 살고 있으나 크게 세가지 유형의 사람으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생물학적 존재(Biological Being)요, 둘째는 철학적 존재(Philosophical Being)요, 셋째는 신학적 존재(Theolocal Being)입니다. 물질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정신문명은 점점 더 퇴보하고 영적인 상태는 소멸되어 갑니다. 세인들의 경우를 보면 생물학적 존재가 많은 고통을 당할 때 비로소 도덕적, 철학적 인간이 되는 것을 봅니다. 더 나아가서 위기에 직면하면 영적인 세계에 눈이 열리게 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건강할 때는 육체적으로 부자유한 장애자들의 아픔을 잘 모릅니다. 그러다가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를 당하여 두 다리를 잃게 되면 그때 비로소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사람의 심정을 이해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서 뇌의 충격을 받아 산소호흡기를 코에 꼽아 숨을 몰아 쉴 때 비로소 전능하신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당신의 영적인 상태는 어떠한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영성 (Spirituality)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성이 회복되면 자연히 이성이 구원을 받게 되고, 이성이 구원을 받을 때 육체가 강건해 집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말하기를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 하노라"(요삼1:2)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의 최우선 순위에 영적인 것을 두어야 합니다. 거룩한 영, 진리의 성령이 우리의 정신세계와 이성을 지배할 때 범사가 형통하고 이로 인해 우리의 육체가 강건해 지는 법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생물학적 존재만 비대해질 때 비인간화가 되어 야수와 같이 짐승같은 존재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날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 세우는 일을 게을리 하면 안됩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와 사건을 접할 때 수평적인 안목으로 일을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수직적인 안목으로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신전의식의 인격을 가지는 코오람 데오(Coram Deo) 신앙이 곧 기독교의 영성입니다.
니고데모의 목마름
본문에 나오는 니고데모는 어떤 사람인가 그는 당시 유대 사회에 엘리트 그룹에 속하는 모든 사람의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첫째, 그는 혈통적으로 선택받은 유대인이었습니다. 당시 유대가 정치적으로는 로마의 지배를 받고, 문화적으로는 헬라의 영향권 아래 있지만 민족의 정체성을 그대로 유지하는 국가가 유대민족 밖에 없었습니다. 둘째, 그는 바리새파 출신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는 친 로마파인 헤롯당파와 금욕주의자들인 엣센파와 자유주의적 성향을 가진 사두개파와 보수주의적 성격을 가진 바리새파 그룹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 백성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는 그룹이 바리새파 사람들입니다. 셋째, 산헤드린 공회원입니다. 당시 산헤드린은 대제사장이 회장이 되고 유대의 장로들과 사두개파 출신과 바리새파 출신으로 구성된 70명의 회원으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선민들 중에서 다시 선택받은 특수한 자들입니다. 그가 젊었으니 건강을 가졌고, 바리새인이었으니 도덕적으로 흠이 없고, 산헤드린 공회 관원이었으니 권력까지 잡은 풍운아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목마름이 있었습니다. 그가 육신의 건강으로 세상의 쾌락을 누리고, 도덕적인 삶으로 세인으로 부터 칭송을 받고, 세상 권력으로 영화를 누려 보았으나 심령은 점점 더 공허해져 갔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느 날 예수를 찾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자신의 체면과 바리새인의 신분을 생각하여 밤에 찾아갔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예수에 대한 소문을 많이 들었습니다. 자신이 속한 바리새파 무리들과 산헤드린 공회원들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여호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2)고 했습니다. 그때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이 어떻게 내가 여호와 하나님께로서 온 줄을 아느냐 지금 당신이 속해 있는 바리새적 지식으로는 여호와 하나님을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 나라도 볼 수 없습니다. 만약 당신이 나를 알려면 거듭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때 니고데모가 물었습니다. 한번 태어난 사람이 늙어서 어떻게 다시 태어납니까 그때 주님이 물과 성령으로 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성령으로 나야 한다고 하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인데 물과 성령이라고 하니 많이 헷갈리는 것입니다. 특히 물에 대한 여러 가지 많은 견해가 있습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 두 가지만 소개하면 첫째, 물을 말씀이라고 보는 견해입니다. 요4:14절에 보면 "내가 주는 물은 다시 목마르지 아니하리니"고 했습니다. 이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 자신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엡5:26에는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라고 하심을 보면 물을 말씀으로 보기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둘째, 회개의 세례로 보는 것입니다. 딛3:5에서 "...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고 했습니다. 여기서 물은 회개의 세례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보다 더 적합한 해석입니다. 주님이 물과 성령으로라고 말씀하심은 성부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원리가 육으로 인간을 지으시고 영으로 생기를 불어넣으신 것처럼, 성자 예수님의 구속의 원리도 꼭 같습니다. 육적으로 보이는 물세례를 통해서 죄를 씻고 회개하여 돌아서서 성령으로 새롭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바람의 비유를 들어서 중생의 역사를 말씀하셨습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8)고 했습니다. 바람이 부는 것을 눈으로 볼 수는 없으나 나타나는 현상을 통해서 바람의 존재, 방향, 풍속들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성령의 충만을 받으면 그로 인하여 변화된 모습을 통하여 성령의 역사를 알게 됩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이므로 우리가 모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잘못된 이단자들은 거듭나는 시와 때를 강조하고 성령의 새롭게 하는 역사보다는 나타나는 물의 역사만 주장하는 무리들도 있습니다.
갈보리에 달린 놋뱀
이제 우리는 원망하지 맙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간 광야에서 방황할 때 호르산에서 북진하여 가나안으로 나아가지 않고 다시 남쪽으로 홍해로 되돌아 가려할 때 백성들의 원성이 폭발했습니다(민21:4). 그들은 원망과 불평으로 모세를 대적하고 그의 인도를 잘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때 아라바와 시내산 지역에 서식하는 붉은 반점이 있는 치명적인 독소를 가진 불뱀이 나와서 모세의 인도를 거부하는 원망하는 무리들을 다 물어서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때 백성들이 탄식하자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높은 장대에 놋 뱀을 매 달게 했습니다. 이제 뱀에게 물린 자들은 원망과 불평과 시비를 거치고 돌아서서 놋 뱀을 바라보는 자는 다 나음을 입었던 것입니다.
광야에 매달린 그 놋 뱀이 바로 주님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4-16) 주님은 인류의 모든 죄짐을 지고 갈보리 십자가에서 높이 달려 여호와 하나님의 버림을 받아 저주의 죽음을 죽었습니다. 누구든지 이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는 사단의 뱀에게 물린 사망권세로부터 자유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고 했습니다.
당신은 이 십자가의 비밀을 아십니까 첫째, 십자가는 당신의 죄를 완전히 청산했습니다. "...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24). 주님은 자신을 못박고 희롱하는 무리들의 죄까지 다 짊어지신 것입니다. 둘째, 십자가는 세상을 이기는 무기입니다. "...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고 했습니다. 그래서 찬송가 214장 4절에 "십자가 든든히 붙잡고 날마다 이기며 나가세"라고 했습니다. 셋째, 십자가는 부활의 새 소망을 주십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신 것이라"(갈2:20)고 했습니다.
세례요한의 증거
세례요한은 복음의 등불입니다. 구약의 수많은 선지자들이 메시야 오실 것을 예언했습니다. 구약의 말라기 이후에 한 사백년 동안 세상이 캄캄했습니다. 묵시가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이때 한 제사장 가문에서 한 선지자가 태어났습니다. 그는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친히 광야로 가서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메시야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구약의 율법종교의 최후 개혁자요, 주님의 첩경을 평탄케 한 광야의 소리입니다. 어두운 세상에 주님이 오기 위하여 불을 밝힌 자입니다. 그러나 참 빛 되신 주님이 오시자 그는 소리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광야의 소리라고 했습니다.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1:23)고 했습니다. 모양도 없고, 빛깔도 없고, 냄새도 없이 복음만 들려주고는 사라져 버리는 소리였습니다. 그는 최후에 가장 아름다운 선지자 상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변화산상에서 천국을 소개하기 위해서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다가 천국을 소개하고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제자들이 눈을 들어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마17:8) 오늘날 우리 시대에 사명자들이 광야의 소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의 신앙고백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그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광야로 나올 때 수많은 무리들이 그에게로 몰려 와서 메시야로 추대하려고 했습니다. 수차에 걸쳐서 물었으나 그는 결코 승낙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메시야가 아니고 메시야를 증거하고 사라질 소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오는 모든 자들을 다 예수께로 보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그는 흥해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30)고 했습니다. 주님은 흥해야 합니다. 그러나 나는 쇠해도 됩니다. 당신에게 이러한 신앙고백이 있는가 나는 쇠해도 목자는 흥해야 합니다. 나의 산업은 쇠해도 주님의 교회는 흥해야 합니다. 이 세상은 망해도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는 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일본의 가가와 도요히꼬 목사의 유언입니다. 그가 임종시 남긴 말이 "사선을 넘어서"라는 책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는 석가, 공자, 예수를 다 좋아합니다. 이유는 석가는 자비를 말하고, 공자는 인을 말하고, 예수는 사랑을 말하는 인격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를 용서해 주는 속죄의 은혜는 석가나 공자에게는 없고 오직 예수에게만 있습니다. 나같이 죄 많은 사람은 예수 십자가 용서의 복음 없이는 절대로 천국 갈 수 없습니다. 나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고 천국으로 갑니다. "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영원한 생명입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36)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복음의 신실한 증인이 됩시다.
당신은 어떤 존재입니까 인간은 저마다 추구하는 목적에 따라 그 존재와 삶의 가치가 달라집니다. 이 땅에 많은 인생이 살고 있으나 크게 세가지 유형의 사람으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생물학적 존재(Biological Being)요, 둘째는 철학적 존재(Philosophical Being)요, 셋째는 신학적 존재(Theolocal Being)입니다. 물질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정신문명은 점점 더 퇴보하고 영적인 상태는 소멸되어 갑니다. 세인들의 경우를 보면 생물학적 존재가 많은 고통을 당할 때 비로소 도덕적, 철학적 인간이 되는 것을 봅니다. 더 나아가서 위기에 직면하면 영적인 세계에 눈이 열리게 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건강할 때는 육체적으로 부자유한 장애자들의 아픔을 잘 모릅니다. 그러다가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를 당하여 두 다리를 잃게 되면 그때 비로소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사람의 심정을 이해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서 뇌의 충격을 받아 산소호흡기를 코에 꼽아 숨을 몰아 쉴 때 비로소 전능하신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당신의 영적인 상태는 어떠한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영성 (Spirituality)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성이 회복되면 자연히 이성이 구원을 받게 되고, 이성이 구원을 받을 때 육체가 강건해 집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말하기를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 하노라"(요삼1:2)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의 최우선 순위에 영적인 것을 두어야 합니다. 거룩한 영, 진리의 성령이 우리의 정신세계와 이성을 지배할 때 범사가 형통하고 이로 인해 우리의 육체가 강건해 지는 법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생물학적 존재만 비대해질 때 비인간화가 되어 야수와 같이 짐승같은 존재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날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 세우는 일을 게을리 하면 안됩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와 사건을 접할 때 수평적인 안목으로 일을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수직적인 안목으로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신전의식의 인격을 가지는 코오람 데오(Coram Deo) 신앙이 곧 기독교의 영성입니다.
니고데모의 목마름
본문에 나오는 니고데모는 어떤 사람인가 그는 당시 유대 사회에 엘리트 그룹에 속하는 모든 사람의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첫째, 그는 혈통적으로 선택받은 유대인이었습니다. 당시 유대가 정치적으로는 로마의 지배를 받고, 문화적으로는 헬라의 영향권 아래 있지만 민족의 정체성을 그대로 유지하는 국가가 유대민족 밖에 없었습니다. 둘째, 그는 바리새파 출신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는 친 로마파인 헤롯당파와 금욕주의자들인 엣센파와 자유주의적 성향을 가진 사두개파와 보수주의적 성격을 가진 바리새파 그룹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 백성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는 그룹이 바리새파 사람들입니다. 셋째, 산헤드린 공회원입니다. 당시 산헤드린은 대제사장이 회장이 되고 유대의 장로들과 사두개파 출신과 바리새파 출신으로 구성된 70명의 회원으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선민들 중에서 다시 선택받은 특수한 자들입니다. 그가 젊었으니 건강을 가졌고, 바리새인이었으니 도덕적으로 흠이 없고, 산헤드린 공회 관원이었으니 권력까지 잡은 풍운아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목마름이 있었습니다. 그가 육신의 건강으로 세상의 쾌락을 누리고, 도덕적인 삶으로 세인으로 부터 칭송을 받고, 세상 권력으로 영화를 누려 보았으나 심령은 점점 더 공허해져 갔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느 날 예수를 찾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자신의 체면과 바리새인의 신분을 생각하여 밤에 찾아갔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예수에 대한 소문을 많이 들었습니다. 자신이 속한 바리새파 무리들과 산헤드린 공회원들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여호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2)고 했습니다. 그때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이 어떻게 내가 여호와 하나님께로서 온 줄을 아느냐 지금 당신이 속해 있는 바리새적 지식으로는 여호와 하나님을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 나라도 볼 수 없습니다. 만약 당신이 나를 알려면 거듭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때 니고데모가 물었습니다. 한번 태어난 사람이 늙어서 어떻게 다시 태어납니까 그때 주님이 물과 성령으로 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성령으로 나야 한다고 하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인데 물과 성령이라고 하니 많이 헷갈리는 것입니다. 특히 물에 대한 여러 가지 많은 견해가 있습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 두 가지만 소개하면 첫째, 물을 말씀이라고 보는 견해입니다. 요4:14절에 보면 "내가 주는 물은 다시 목마르지 아니하리니"고 했습니다. 이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 자신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엡5:26에는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라고 하심을 보면 물을 말씀으로 보기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둘째, 회개의 세례로 보는 것입니다. 딛3:5에서 "...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고 했습니다. 여기서 물은 회개의 세례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보다 더 적합한 해석입니다. 주님이 물과 성령으로라고 말씀하심은 성부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원리가 육으로 인간을 지으시고 영으로 생기를 불어넣으신 것처럼, 성자 예수님의 구속의 원리도 꼭 같습니다. 육적으로 보이는 물세례를 통해서 죄를 씻고 회개하여 돌아서서 성령으로 새롭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바람의 비유를 들어서 중생의 역사를 말씀하셨습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8)고 했습니다. 바람이 부는 것을 눈으로 볼 수는 없으나 나타나는 현상을 통해서 바람의 존재, 방향, 풍속들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성령의 충만을 받으면 그로 인하여 변화된 모습을 통하여 성령의 역사를 알게 됩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이므로 우리가 모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잘못된 이단자들은 거듭나는 시와 때를 강조하고 성령의 새롭게 하는 역사보다는 나타나는 물의 역사만 주장하는 무리들도 있습니다.
갈보리에 달린 놋뱀
이제 우리는 원망하지 맙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간 광야에서 방황할 때 호르산에서 북진하여 가나안으로 나아가지 않고 다시 남쪽으로 홍해로 되돌아 가려할 때 백성들의 원성이 폭발했습니다(민21:4). 그들은 원망과 불평으로 모세를 대적하고 그의 인도를 잘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때 아라바와 시내산 지역에 서식하는 붉은 반점이 있는 치명적인 독소를 가진 불뱀이 나와서 모세의 인도를 거부하는 원망하는 무리들을 다 물어서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때 백성들이 탄식하자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높은 장대에 놋 뱀을 매 달게 했습니다. 이제 뱀에게 물린 자들은 원망과 불평과 시비를 거치고 돌아서서 놋 뱀을 바라보는 자는 다 나음을 입었던 것입니다.
광야에 매달린 그 놋 뱀이 바로 주님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4-16) 주님은 인류의 모든 죄짐을 지고 갈보리 십자가에서 높이 달려 여호와 하나님의 버림을 받아 저주의 죽음을 죽었습니다. 누구든지 이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는 사단의 뱀에게 물린 사망권세로부터 자유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고 했습니다.
당신은 이 십자가의 비밀을 아십니까 첫째, 십자가는 당신의 죄를 완전히 청산했습니다. "...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24). 주님은 자신을 못박고 희롱하는 무리들의 죄까지 다 짊어지신 것입니다. 둘째, 십자가는 세상을 이기는 무기입니다. "...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고 했습니다. 그래서 찬송가 214장 4절에 "십자가 든든히 붙잡고 날마다 이기며 나가세"라고 했습니다. 셋째, 십자가는 부활의 새 소망을 주십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신 것이라"(갈2:20)고 했습니다.
세례요한의 증거
세례요한은 복음의 등불입니다. 구약의 수많은 선지자들이 메시야 오실 것을 예언했습니다. 구약의 말라기 이후에 한 사백년 동안 세상이 캄캄했습니다. 묵시가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이때 한 제사장 가문에서 한 선지자가 태어났습니다. 그는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친히 광야로 가서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메시야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구약의 율법종교의 최후 개혁자요, 주님의 첩경을 평탄케 한 광야의 소리입니다. 어두운 세상에 주님이 오기 위하여 불을 밝힌 자입니다. 그러나 참 빛 되신 주님이 오시자 그는 소리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광야의 소리라고 했습니다.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1:23)고 했습니다. 모양도 없고, 빛깔도 없고, 냄새도 없이 복음만 들려주고는 사라져 버리는 소리였습니다. 그는 최후에 가장 아름다운 선지자 상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변화산상에서 천국을 소개하기 위해서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다가 천국을 소개하고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제자들이 눈을 들어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마17:8) 오늘날 우리 시대에 사명자들이 광야의 소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의 신앙고백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그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광야로 나올 때 수많은 무리들이 그에게로 몰려 와서 메시야로 추대하려고 했습니다. 수차에 걸쳐서 물었으나 그는 결코 승낙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메시야가 아니고 메시야를 증거하고 사라질 소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오는 모든 자들을 다 예수께로 보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그는 흥해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30)고 했습니다. 주님은 흥해야 합니다. 그러나 나는 쇠해도 됩니다. 당신에게 이러한 신앙고백이 있는가 나는 쇠해도 목자는 흥해야 합니다. 나의 산업은 쇠해도 주님의 교회는 흥해야 합니다. 이 세상은 망해도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는 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일본의 가가와 도요히꼬 목사의 유언입니다. 그가 임종시 남긴 말이 "사선을 넘어서"라는 책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는 석가, 공자, 예수를 다 좋아합니다. 이유는 석가는 자비를 말하고, 공자는 인을 말하고, 예수는 사랑을 말하는 인격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를 용서해 주는 속죄의 은혜는 석가나 공자에게는 없고 오직 예수에게만 있습니다. 나같이 죄 많은 사람은 예수 십자가 용서의 복음 없이는 절대로 천국 갈 수 없습니다. 나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고 천국으로 갑니다. "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영원한 생명입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36)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복음의 신실한 증인이 됩시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