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 성령은 누구에게 언제 인쳐 주시는가?
본문
요한복음 3장 31절에서부터 끝절까지 있는 말씀 중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성령은 누구에게 언제 인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성령은 이방 사람이나 은혜를 모르는 사람에게가 아니고 참 신자된 사람들 안에 인치십니다.
그런데 그 인을 언제 치신다 하는 것은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우리의 신앙이 언제 그것을 알 수 있느냐, 여호와 하나님이 인치셨다 하는 것을 우리 자신이 언제 인정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 여호와 하나님을 참되시다 하여 인을 치셨느니라.
먼저는 그의 증거를 받는 사람입니다. 교회에 언제부터 나왔든지 그것이 문제가 아니고 주님의 증거를 받는 사람에게 인을 치십니다. 또 증거도 육신으로 주님이 증거하신 게 아니고 성령으로 당신을 우리 마음 속에 증거해 주신 그 증거를 받는 사람에게 인치십니다.
나아가서 영접하는 사람입니다. 영접하는 사람에게 인을 치신다, 참 귀한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증거를 모르거나 받지 않는 사람, 믿지 않는 사람, 영접하지 않는 사람에게 인친다 하는 말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에 일곱 나팔이 있습니다. 일곱 인이 있습니다. 일곱 대접이 있습니다. 그것은 시대적인 사실, 역사적인 사실을 말합니다만 그 인과 달리 우리 마음 속에 신앙 안에 인쳐 주시는 인을 말씀합니다.
인은 '내 것이라, 아무도 손대지 못하는 내 것이라' 하는 것입니다. 야곱을 향해서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가 아름답고 귀해서 내 것이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 사람 자체가 흠이 없고 점이 없어서 주님이 내 것이라고 한다면 주님의 것이 될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는 내 것이라' 하는 말씀 가운데 참 귀한 의미가 있습니다.
앉아도 주님의 것이요, 누워도 주님의 것이요, 진행해도 멈추어도 주님의 것입니다. 이런 사실이 우리 마음 속에 이루어집니다. 내가 선한 일을 할 때에 주님의 것이라 하는 인정을 받는 것보다는 생활과 상관 없이 도덕과 윤리와 상관 없이 나는 주님의 것이라 하고 인치심을 받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가져야 할 것은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하는 말씀입니다. 성령을 알지 못하면 감화, 감동과 충만과 내주를 알지 못하면 '인치심을 받는다' 하는 말도 너무 어색한 말이 됩니다. 이 땅 위에 있는 수많은 신자들 대부분이 '성령의 내주하심이라, 인치심이라' 하는 말을 너무 어색한 말로 듣고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에게 유감이라고 하면 가장 큰 유감이요, 부족이라고 하면 더 이상 부족할 수 없는 부족입니다.
성령의 감화와 감동을 모르는 사람은 풍성에 대해서 절실하지 못합니다. 또 풍성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내주를 원하지 못합니다.
신앙의 초보일 때는 자기의 건강으로부터 자기에게 속한 모든 것을 원하게 됩니다. 그러나 신앙이 자라면서 주님 자신, 성령이 풍성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게 됩니다.
우리가 원하는 동시에 성령도 말씀도 이를 원하십니다. 우리 마음 속에 주님이 내주하시기를 우리가 원하면 주님 자신이 우리 마음 속에 내주하셔서 안에서 밖을 보고 일하시는 삶, 내 것과 네 것이 분별이 없는 한 삶을 살아 가십니다. 이런 진리입니다.
사람이 육신적으로도 한 가정을 이루고 살면 남편과 아내 사이에 내 것과 네 것이 없습니다. 그런 구별이 있다면 비정상적인 부부입니다. 내 것과 네 것이 없이 사는 부부라야 정상적인 부부입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주님의 것은 주님의 것대로 있고 내 것은 내 것대로 있다면 비정상적인 신앙입니다. 정상적인 신앙은 내가 주님을 영접해서 주님이 내 안에 계시고 주님의 것과 내 것이 없는 삶을 살다가 육신을 벗은 후에 아주 영광스러운 세계에 나가는 것이 사실입니다.
나 예수는 교회를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 하시더라.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원하는 자는 값 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요한계시록 22:16~17)
'나 예수는 교회를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성령과 말씀을 보내서' 또 '전도자를 보내서' 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전도자라는 말에 모든 전도자가 해당된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또 전도자 자신이 아니고 전도자가 전하는 그 말씀에 성령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과 말씀과 전도자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 언제부터 언제까지 초대 교회로부터 마지막 교회에 이르기까지 성령과 말씀은 오라고 하십니다.
그 대상은 듣는 자, 목마른 자, 원하는 자입니다. 무엇을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잘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여기에 참석하지 않으면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세계에 참석하지 못합니다. 듣는 자의 반열에, 원하는 자의 반열에 참석하는 사람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그 심령 속에 인쳐 주십니다. 듣기를 원치 않고 안 듣는 자, 목마르지 않고 배부른 자, 원하지 않고 갈망이 없는 자에게 그 안에 성령으로 인치신다는 말은 있을 수 없습니다.
'듣는 자, 목마른 자, 원하는 자는 값 없이 생명수를 받으라'-생명수 자체가 곧 주님입니다. 물로 말하면 주님은 곧 생명수를 의미하는데 그 생명수를 받으라 하는 말씀입니다. 뭐를 하라고 받으라는 것입니까 생명수는 빨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살림에 보태는 생수가 아닙니다. 내 자신이 직접 흡수하는 생명수입니다. 생명수가 갖다 주는 이 내용을 교회가 입어야 됩니다. 목마른 자는 값 없이 생수를 받으라 그 말입니다.
전 시간에도 말씀했습니다만 성경 끝에 있는 계시록에서 외치는 이 고함 소리는 온 교회가, 구원 얻는 사람들이 들어야 하는 외침입니다. 이 외침을 듣지 않으면, 들어서 목마르지 않으면, 들어서 원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돈이 없으면 그대로 포도주와 젖을 사라 하는 말씀입니다.
오늘도 이 말씀이 말씀하고 있는 성령의 인치심을 우리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누구에게, 언제 인치시는가 그의 증거를 받는 자, 그의 증거를 믿는 자-남자든지 여자든지 교회의 직위가 이렇든지 저렇든지 그것은 불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좋은 자리에서 말씀을 듣든지 사형 언도를 받고 사형 집행 직전에 이 말씀을 듣든지 이 말씀을 듣는 자, 받는 자는 여호와 하나님을 의롭다 하여 인을 치셨습니다. 이 사실을 여러분들이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조금 달리 말씀하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12지파 중에서 인 맞은 사람, 십사만 사천이 나옵니다. (요한계시록 7:5~8) 우리는 육신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아닙니다. 이방 사람들입니다. 그 인 맞은 사람들, 십사만 사천 이후에 나라와 백성에서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등장하는데 (요한계시록 7:9) 이 흰 옷 입은 무리에 참석하면 그들과 동일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지파에는 참석하지 못하지만 흰 옷 입은 무리에는 들어가야 합니다.
계시록 14장 3절을 보면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사만 사천인'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땅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말합니다. 또 시간적으로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때를 말씀합니다. 이 시간 안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구속에 참석해야 됩니다.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사만 사천인'-새 노래를 부를 사람들이 이 사람들이고 가르칠 사람들도 이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본래 정결하지 않았습니다만 정결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본래 정결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신부로 부르심을 입으면서 정결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또 그들은 자신을 더럽히지 않았습니다.
사데 교회에 흰 옷 입은 사람 몇 명이 있어서 그 옷을 더럽히지 않았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3:4) 그런데 사데 교회의 그 몇 명은 흰 옷을 언제 입었습니까 타고난 옷이 아닙니다. 윤리와 도덕에 속한 옷이 아닙니다. 윤리와 도덕에 속한 옷이라고 하면 흠이 없는 옷을 못 입습니다. 책망할 것이 없는 옷으로 입지 못합니다. 따라서 은혜의 옷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의 옷입니다.
나아가서 그들은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요한계시록 14:4) 이 사람들이 십사만 사천에 속했는데 이 십사만 사천은 처음 익은 열매입니다. 다음에 익은 열매는 얼마가 되는지 모릅니다. 다만 말씀대로 나라와 방언과 백성에서 아무도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될 것입니다. 십사만 사천이 아닙니다.
요한이 본 것은 십사만 사천인데 처음 익은 열매로 보았습니다. 여러분, 만일 내게 즐거움이 있다면, 교회에게 소망이 있다면 이런 내용이 내 소망이 되고 즐거움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 저물어 가는 해와 같습니다. 육의 것은 소망될 것이 없습니다. 내 육으로 얻을 소망이 없습니다. 교회를 향해서도 얻을 소망이 없고 가정으로도 소망을 얻을 수 없고 개인으로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 소망이 낡아지고 쇠하여지고 헌 옷같이 썩을 뿐이지, 아름다운 소망이 안됩니다. 내 소망만 그런 것이 아니고 여러분의 소망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신령한 것이 갖다 주는 소망, 우리의 믿음이 갖다 주는 소망이 아니면 다른 것은 소망될 일이 없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가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증거를 받는 사람이 없도다. (요한복음 3:32)
요한복음 1장 10절의 말씀과 동일한 내용입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주님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증거를 받는 이가 신자요, 주님의 증거를 받는 사람이 신부요, 주님의 증거를 받는 사람이 주님의 사람입니다.
여러분, 교회에 와서 듣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는 것이 무엇입니까 교회에 와서 반드시 들어야 할 것이 무엇이며 알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만일 그 들어야 될 것이나 알아야 될 것을 모른다고 하면 교회에 와서 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나 극장에 가서 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교회에 와서 세상에서 들을 수 없는 아름다운 내용을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영접하지 못한다면 다른 모임과 교회가 차이가 없습니다.
주님을 믿는 자, 영접하는 자는 참 귀합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 주님의 신부가 됩니다.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거역 없이 따라가는 신부가 됩니다. 새 사람이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나니 (고린도후서 1:20~23)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를 향해서 하신 약속은 그 분량이 얼마가 되었든지 예가 됩니다. 어디서요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예가 됩니다. 참 귀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향하신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예로 받아들이는 사람과 받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목사라도 예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믿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든지 예가 되므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영광을 돌리는데 누구에게 돌립니까 여호와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립니다.
이 성경 말씀을 넘어가지 마십시오. 또 다른 것이 있다고 더듬지 마십시오. 이 성경 말씀을 그대로 소화해야 됩니다. 이 말씀 외에 또 있는가, 어떤 말씀이 또 있는가 하고 방황하지 마십시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약속하신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예가 됩니다. 그리스도 밖에서는 예가 안됩니다. 절대 안됩니다. 왜 약속을 예라고 받지 못하는가 하면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 밖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 말씀을 소화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사 (고린도후서 1:21) 우리는 누구입니까 누가 말씀합니까 '우리'는 말씀하는 분들이고 '너희'는 말씀을 듣는 분들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바울이나 말씀을 듣는 고린도 교회들을 함께, 똑같이 견고케 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사' 아주 견고케 하십니다. 좀처럼 헐 수 없습니다. 견고케 하신 다음에 무엇을 하십니까 무엇을 붓는다고요 기름을 부으십니다.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 속에 주셨느니라. (고린도후서 1:22)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시고 인치십니다. 이제는 그런 의문이 사라졌습니다만 성경과 함께 생활하는 가운데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이나 기름을 부으시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이해하지 못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본래 알고 구속에 나가거나 성결에 나가거나 의에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 여러분의 마음 속에 구속과 성결과 의와 인치심이 허락되었습니다. 바로 그런 내용 외에는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스스로 생각하기를 이런 것이 이런 시간이 이런 내용이 성령으로 기름 부으신 것이 아니라면 무엇을 기름 부으심이라고 할 수 있을까 성령으로 인치시는 것이 이런 것이 아니라면 무엇을 가지고 인친다고 할 수 있을까 많이 생각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 속에 주셨느니라. '-기름을 붓고, 또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 속에 성령을 주셨습니다. 이 말을 듣기가 좀 어색한 분이 많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이 어색하지 않은 주님 앞에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약속이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어야 됩니다. 예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이런 사실이 성립됩니다.
여러분, 행여라도 습관에 의해서 예배를 드리거나 습관에 의해서 교회를 섬기지 마십시오. 예배를 드리거나 교회를 섬기는 시간 시간마다 여러분의 생명이 동참해서 여러분의 신앙이 진행되고 장성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하는 것은 성령은 누구에게 인치시는가, 언제 인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또 왜 인치시고 보장해 주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먼저 그의 증거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의 증거를 듣는 사람, 받는 사람, 영접하는 사람에게 이 성령의 풍성이나 보장이나 기름 부으심이나 내주하심이 필요합니다. 그의 증거를 안 받는 사람, 안 믿는 사람들에게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에게는 '성령의 풍성을 받으라, 아버지의 성령을 기다리라, 몇 날이 못되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는 말씀들이 아주 뼈저린 말씀, 귀한 말씀이 못됩니다. 단 그의 증거를 받고 믿고 영접하는 사람들에게 귀한 말씀이 되며 또한 성령은 그들에게 먼저 말씀한 대로 그의 칭호, 호칭을 따라서 일하십니다.
여러분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 들은 바 말씀이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된 사람이 있고 아직 예가 되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아멘 되는 사람이 있고 아멘 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나 아멘으로 받는 사람은 더할 나위 없는 존귀한 사람이지만 만일 아멘으로 예로 받지 못하는 사람은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아무리 들어도 또 남이 하는 일을 다 하는 것 같아도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는 외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외인이면 성령에 대해서도 외인입니다. 성령에 대해서 외인이라 하는 말은 아주 심각하고 무서운 말입니다.
성령의 충만도 기름 부으심도 보증도 인치심도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예로 받아 들이는 사람에 한해서입니다. 똑똑한 사람이 아닙니다. 약속의 말씀을 받아 들이는 사람에 한해서 성령은 오셔서 그에게 감화와 감동과 풍성과 내주, 인치심, 기름 부으심을 시행하십니다. 따라서 원하는 사람에게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까 여러분, 그 필요를 느끼십니까 그 이유를 여러분의 마음 속에서 확실히 발견하지 못하면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하는 말이나 주님의 요구가 마음 속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왜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하는 것입니까 뭐 하려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하십니까
'아버지의 허락하신 성령을 기다리라'-다른 것보다도 (기다려야 할 것이 아무리 많아도) 먼저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성령을 기다리라는 말씀입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또 우리가 기다리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는 것도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몇 날이 못되면 너희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지금까지 지내 왔지만 몇 날이 못되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는 말씀입니다. 그 세례가 무엇인데 이렇게 중요하게 말씀하고 계십니까 우리가 세례를 받아도 우리의 겉사람은 별로 달라지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는 말씀을 했습니까 몇 날이 못되면 네가 건강해질 것이다, 몇 날이 못되면 네 생활이 안정될 것이다, 그런 조건이 아닙니다.
그러나 반드시 받아야 될 성령이요, 필연적으로 받아야 될 성령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교회에게 신자에게 반드시 주셔야 될 성령입니다. 안 주면 안 될 성령입니다. 또 신자는 안 받으면 안 될 성령입니다.
다른 것은 없어도 없는 대로 살아 갑니다.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살고 집이 없으면 집이 없는 대로 삽니다. 그러나 신앙은 성령의 세례가 아니면 그 신앙 자체가 살아 갈 수도 없으려니와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이 말이, 우리 개인과 약속된 말씀이 우리 교회 안에 무엇보다도 가장 귀한 언약입니다. 이 언약은 실천되어야 합니다. 내가 이 약속과 이 말씀 자체와 무관한 채로 교회 생활을 한다면 크게 후회할 날이 옵니다. 그러나 이 단어가 나에게 무관하지 않고 절실히 필요한 사실이 되고 또 절실히 목말라서 구해서 '주시마' 하시는 선물이 나의 것이 된다고 하면 그 이상 귀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인을 언제 치신다 하는 것은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우리의 신앙이 언제 그것을 알 수 있느냐, 여호와 하나님이 인치셨다 하는 것을 우리 자신이 언제 인정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 여호와 하나님을 참되시다 하여 인을 치셨느니라.
먼저는 그의 증거를 받는 사람입니다. 교회에 언제부터 나왔든지 그것이 문제가 아니고 주님의 증거를 받는 사람에게 인을 치십니다. 또 증거도 육신으로 주님이 증거하신 게 아니고 성령으로 당신을 우리 마음 속에 증거해 주신 그 증거를 받는 사람에게 인치십니다.
나아가서 영접하는 사람입니다. 영접하는 사람에게 인을 치신다, 참 귀한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증거를 모르거나 받지 않는 사람, 믿지 않는 사람, 영접하지 않는 사람에게 인친다 하는 말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에 일곱 나팔이 있습니다. 일곱 인이 있습니다. 일곱 대접이 있습니다. 그것은 시대적인 사실, 역사적인 사실을 말합니다만 그 인과 달리 우리 마음 속에 신앙 안에 인쳐 주시는 인을 말씀합니다.
인은 '내 것이라, 아무도 손대지 못하는 내 것이라' 하는 것입니다. 야곱을 향해서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가 아름답고 귀해서 내 것이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 사람 자체가 흠이 없고 점이 없어서 주님이 내 것이라고 한다면 주님의 것이 될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는 내 것이라' 하는 말씀 가운데 참 귀한 의미가 있습니다.
앉아도 주님의 것이요, 누워도 주님의 것이요, 진행해도 멈추어도 주님의 것입니다. 이런 사실이 우리 마음 속에 이루어집니다. 내가 선한 일을 할 때에 주님의 것이라 하는 인정을 받는 것보다는 생활과 상관 없이 도덕과 윤리와 상관 없이 나는 주님의 것이라 하고 인치심을 받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가져야 할 것은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하는 말씀입니다. 성령을 알지 못하면 감화, 감동과 충만과 내주를 알지 못하면 '인치심을 받는다' 하는 말도 너무 어색한 말이 됩니다. 이 땅 위에 있는 수많은 신자들 대부분이 '성령의 내주하심이라, 인치심이라' 하는 말을 너무 어색한 말로 듣고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에게 유감이라고 하면 가장 큰 유감이요, 부족이라고 하면 더 이상 부족할 수 없는 부족입니다.
성령의 감화와 감동을 모르는 사람은 풍성에 대해서 절실하지 못합니다. 또 풍성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내주를 원하지 못합니다.
신앙의 초보일 때는 자기의 건강으로부터 자기에게 속한 모든 것을 원하게 됩니다. 그러나 신앙이 자라면서 주님 자신, 성령이 풍성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게 됩니다.
우리가 원하는 동시에 성령도 말씀도 이를 원하십니다. 우리 마음 속에 주님이 내주하시기를 우리가 원하면 주님 자신이 우리 마음 속에 내주하셔서 안에서 밖을 보고 일하시는 삶, 내 것과 네 것이 분별이 없는 한 삶을 살아 가십니다. 이런 진리입니다.
사람이 육신적으로도 한 가정을 이루고 살면 남편과 아내 사이에 내 것과 네 것이 없습니다. 그런 구별이 있다면 비정상적인 부부입니다. 내 것과 네 것이 없이 사는 부부라야 정상적인 부부입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주님의 것은 주님의 것대로 있고 내 것은 내 것대로 있다면 비정상적인 신앙입니다. 정상적인 신앙은 내가 주님을 영접해서 주님이 내 안에 계시고 주님의 것과 내 것이 없는 삶을 살다가 육신을 벗은 후에 아주 영광스러운 세계에 나가는 것이 사실입니다.
나 예수는 교회를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 하시더라.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원하는 자는 값 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요한계시록 22:16~17)
'나 예수는 교회를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성령과 말씀을 보내서' 또 '전도자를 보내서' 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전도자라는 말에 모든 전도자가 해당된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또 전도자 자신이 아니고 전도자가 전하는 그 말씀에 성령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과 말씀과 전도자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 언제부터 언제까지 초대 교회로부터 마지막 교회에 이르기까지 성령과 말씀은 오라고 하십니다.
그 대상은 듣는 자, 목마른 자, 원하는 자입니다. 무엇을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잘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여기에 참석하지 않으면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세계에 참석하지 못합니다. 듣는 자의 반열에, 원하는 자의 반열에 참석하는 사람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그 심령 속에 인쳐 주십니다. 듣기를 원치 않고 안 듣는 자, 목마르지 않고 배부른 자, 원하지 않고 갈망이 없는 자에게 그 안에 성령으로 인치신다는 말은 있을 수 없습니다.
'듣는 자, 목마른 자, 원하는 자는 값 없이 생명수를 받으라'-생명수 자체가 곧 주님입니다. 물로 말하면 주님은 곧 생명수를 의미하는데 그 생명수를 받으라 하는 말씀입니다. 뭐를 하라고 받으라는 것입니까 생명수는 빨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살림에 보태는 생수가 아닙니다. 내 자신이 직접 흡수하는 생명수입니다. 생명수가 갖다 주는 이 내용을 교회가 입어야 됩니다. 목마른 자는 값 없이 생수를 받으라 그 말입니다.
전 시간에도 말씀했습니다만 성경 끝에 있는 계시록에서 외치는 이 고함 소리는 온 교회가, 구원 얻는 사람들이 들어야 하는 외침입니다. 이 외침을 듣지 않으면, 들어서 목마르지 않으면, 들어서 원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돈이 없으면 그대로 포도주와 젖을 사라 하는 말씀입니다.
오늘도 이 말씀이 말씀하고 있는 성령의 인치심을 우리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누구에게, 언제 인치시는가 그의 증거를 받는 자, 그의 증거를 믿는 자-남자든지 여자든지 교회의 직위가 이렇든지 저렇든지 그것은 불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좋은 자리에서 말씀을 듣든지 사형 언도를 받고 사형 집행 직전에 이 말씀을 듣든지 이 말씀을 듣는 자, 받는 자는 여호와 하나님을 의롭다 하여 인을 치셨습니다. 이 사실을 여러분들이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조금 달리 말씀하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12지파 중에서 인 맞은 사람, 십사만 사천이 나옵니다. (요한계시록 7:5~8) 우리는 육신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아닙니다. 이방 사람들입니다. 그 인 맞은 사람들, 십사만 사천 이후에 나라와 백성에서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등장하는데 (요한계시록 7:9) 이 흰 옷 입은 무리에 참석하면 그들과 동일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지파에는 참석하지 못하지만 흰 옷 입은 무리에는 들어가야 합니다.
계시록 14장 3절을 보면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사만 사천인'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땅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말합니다. 또 시간적으로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때를 말씀합니다. 이 시간 안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구속에 참석해야 됩니다.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사만 사천인'-새 노래를 부를 사람들이 이 사람들이고 가르칠 사람들도 이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본래 정결하지 않았습니다만 정결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본래 정결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신부로 부르심을 입으면서 정결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또 그들은 자신을 더럽히지 않았습니다.
사데 교회에 흰 옷 입은 사람 몇 명이 있어서 그 옷을 더럽히지 않았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3:4) 그런데 사데 교회의 그 몇 명은 흰 옷을 언제 입었습니까 타고난 옷이 아닙니다. 윤리와 도덕에 속한 옷이 아닙니다. 윤리와 도덕에 속한 옷이라고 하면 흠이 없는 옷을 못 입습니다. 책망할 것이 없는 옷으로 입지 못합니다. 따라서 은혜의 옷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의 옷입니다.
나아가서 그들은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요한계시록 14:4) 이 사람들이 십사만 사천에 속했는데 이 십사만 사천은 처음 익은 열매입니다. 다음에 익은 열매는 얼마가 되는지 모릅니다. 다만 말씀대로 나라와 방언과 백성에서 아무도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될 것입니다. 십사만 사천이 아닙니다.
요한이 본 것은 십사만 사천인데 처음 익은 열매로 보았습니다. 여러분, 만일 내게 즐거움이 있다면, 교회에게 소망이 있다면 이런 내용이 내 소망이 되고 즐거움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 저물어 가는 해와 같습니다. 육의 것은 소망될 것이 없습니다. 내 육으로 얻을 소망이 없습니다. 교회를 향해서도 얻을 소망이 없고 가정으로도 소망을 얻을 수 없고 개인으로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 소망이 낡아지고 쇠하여지고 헌 옷같이 썩을 뿐이지, 아름다운 소망이 안됩니다. 내 소망만 그런 것이 아니고 여러분의 소망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신령한 것이 갖다 주는 소망, 우리의 믿음이 갖다 주는 소망이 아니면 다른 것은 소망될 일이 없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가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증거를 받는 사람이 없도다. (요한복음 3:32)
요한복음 1장 10절의 말씀과 동일한 내용입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주님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증거를 받는 이가 신자요, 주님의 증거를 받는 사람이 신부요, 주님의 증거를 받는 사람이 주님의 사람입니다.
여러분, 교회에 와서 듣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는 것이 무엇입니까 교회에 와서 반드시 들어야 할 것이 무엇이며 알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만일 그 들어야 될 것이나 알아야 될 것을 모른다고 하면 교회에 와서 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나 극장에 가서 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교회에 와서 세상에서 들을 수 없는 아름다운 내용을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영접하지 못한다면 다른 모임과 교회가 차이가 없습니다.
주님을 믿는 자, 영접하는 자는 참 귀합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 주님의 신부가 됩니다.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거역 없이 따라가는 신부가 됩니다. 새 사람이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나니 (고린도후서 1:20~23)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를 향해서 하신 약속은 그 분량이 얼마가 되었든지 예가 됩니다. 어디서요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예가 됩니다. 참 귀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향하신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예로 받아들이는 사람과 받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목사라도 예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믿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든지 예가 되므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영광을 돌리는데 누구에게 돌립니까 여호와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립니다.
이 성경 말씀을 넘어가지 마십시오. 또 다른 것이 있다고 더듬지 마십시오. 이 성경 말씀을 그대로 소화해야 됩니다. 이 말씀 외에 또 있는가, 어떤 말씀이 또 있는가 하고 방황하지 마십시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약속하신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예가 됩니다. 그리스도 밖에서는 예가 안됩니다. 절대 안됩니다. 왜 약속을 예라고 받지 못하는가 하면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 밖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 말씀을 소화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사 (고린도후서 1:21) 우리는 누구입니까 누가 말씀합니까 '우리'는 말씀하는 분들이고 '너희'는 말씀을 듣는 분들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바울이나 말씀을 듣는 고린도 교회들을 함께, 똑같이 견고케 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사' 아주 견고케 하십니다. 좀처럼 헐 수 없습니다. 견고케 하신 다음에 무엇을 하십니까 무엇을 붓는다고요 기름을 부으십니다.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 속에 주셨느니라. (고린도후서 1:22)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시고 인치십니다. 이제는 그런 의문이 사라졌습니다만 성경과 함께 생활하는 가운데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이나 기름을 부으시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이해하지 못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본래 알고 구속에 나가거나 성결에 나가거나 의에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 여러분의 마음 속에 구속과 성결과 의와 인치심이 허락되었습니다. 바로 그런 내용 외에는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스스로 생각하기를 이런 것이 이런 시간이 이런 내용이 성령으로 기름 부으신 것이 아니라면 무엇을 기름 부으심이라고 할 수 있을까 성령으로 인치시는 것이 이런 것이 아니라면 무엇을 가지고 인친다고 할 수 있을까 많이 생각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 속에 주셨느니라. '-기름을 붓고, 또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 속에 성령을 주셨습니다. 이 말을 듣기가 좀 어색한 분이 많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이 어색하지 않은 주님 앞에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약속이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어야 됩니다. 예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이런 사실이 성립됩니다.
여러분, 행여라도 습관에 의해서 예배를 드리거나 습관에 의해서 교회를 섬기지 마십시오. 예배를 드리거나 교회를 섬기는 시간 시간마다 여러분의 생명이 동참해서 여러분의 신앙이 진행되고 장성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하는 것은 성령은 누구에게 인치시는가, 언제 인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또 왜 인치시고 보장해 주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먼저 그의 증거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의 증거를 듣는 사람, 받는 사람, 영접하는 사람에게 이 성령의 풍성이나 보장이나 기름 부으심이나 내주하심이 필요합니다. 그의 증거를 안 받는 사람, 안 믿는 사람들에게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에게는 '성령의 풍성을 받으라, 아버지의 성령을 기다리라, 몇 날이 못되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는 말씀들이 아주 뼈저린 말씀, 귀한 말씀이 못됩니다. 단 그의 증거를 받고 믿고 영접하는 사람들에게 귀한 말씀이 되며 또한 성령은 그들에게 먼저 말씀한 대로 그의 칭호, 호칭을 따라서 일하십니다.
여러분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 들은 바 말씀이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된 사람이 있고 아직 예가 되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아멘 되는 사람이 있고 아멘 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나 아멘으로 받는 사람은 더할 나위 없는 존귀한 사람이지만 만일 아멘으로 예로 받지 못하는 사람은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아무리 들어도 또 남이 하는 일을 다 하는 것 같아도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는 외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외인이면 성령에 대해서도 외인입니다. 성령에 대해서 외인이라 하는 말은 아주 심각하고 무서운 말입니다.
성령의 충만도 기름 부으심도 보증도 인치심도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예로 받아 들이는 사람에 한해서입니다. 똑똑한 사람이 아닙니다. 약속의 말씀을 받아 들이는 사람에 한해서 성령은 오셔서 그에게 감화와 감동과 풍성과 내주, 인치심, 기름 부으심을 시행하십니다. 따라서 원하는 사람에게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까 여러분, 그 필요를 느끼십니까 그 이유를 여러분의 마음 속에서 확실히 발견하지 못하면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하는 말이나 주님의 요구가 마음 속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왜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하는 것입니까 뭐 하려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하십니까
'아버지의 허락하신 성령을 기다리라'-다른 것보다도 (기다려야 할 것이 아무리 많아도) 먼저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성령을 기다리라는 말씀입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또 우리가 기다리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는 것도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몇 날이 못되면 너희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지금까지 지내 왔지만 몇 날이 못되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는 말씀입니다. 그 세례가 무엇인데 이렇게 중요하게 말씀하고 계십니까 우리가 세례를 받아도 우리의 겉사람은 별로 달라지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는 말씀을 했습니까 몇 날이 못되면 네가 건강해질 것이다, 몇 날이 못되면 네 생활이 안정될 것이다, 그런 조건이 아닙니다.
그러나 반드시 받아야 될 성령이요, 필연적으로 받아야 될 성령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교회에게 신자에게 반드시 주셔야 될 성령입니다. 안 주면 안 될 성령입니다. 또 신자는 안 받으면 안 될 성령입니다.
다른 것은 없어도 없는 대로 살아 갑니다.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살고 집이 없으면 집이 없는 대로 삽니다. 그러나 신앙은 성령의 세례가 아니면 그 신앙 자체가 살아 갈 수도 없으려니와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이 말이, 우리 개인과 약속된 말씀이 우리 교회 안에 무엇보다도 가장 귀한 언약입니다. 이 언약은 실천되어야 합니다. 내가 이 약속과 이 말씀 자체와 무관한 채로 교회 생활을 한다면 크게 후회할 날이 옵니다. 그러나 이 단어가 나에게 무관하지 않고 절실히 필요한 사실이 되고 또 절실히 목말라서 구해서 '주시마' 하시는 선물이 나의 것이 된다고 하면 그 이상 귀한 것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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