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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촛불을 끄면 성령의 사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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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어떤 학생이 밤늦게까지 글을 배우고 집에 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밖이 너무 어두운 것입니다. 그러자 선생님이 촛불을 주셨습니다.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집을 가려고 돌아서려는데 선생님이 촛불을 훅 끄셨습니다.
학생은 화가 났습니다. "지금 약 올리시는 것입니까" 그런데 조금 있다보니까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점차 어둠이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삼라만상이 다 보이더라는 것입니다. 만약 촛불만 있었다면 촛불 앞만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촛불을 끄니다 보이더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한 번 질문해 볼까요 여러분 낮이 밝을까요 밤이 밝을까요 물어볼 필요가 없습니까
정답은 밤입니다. 밤은 거짓이 없고 진짜입니다. 반면에 太陽(태양)은 ‘클 太’에 ‘거짓 陽’으로 한문이 쓰입니다. 보이는 것은 거짓이라고 하는 뜻이 숨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늘 보이는 것만 믿고 이것이 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사실 보이는 것은 거짓입니다. 사도바울조차도 보이지 않는 것이 영원이라고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촛불 때문에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합니다.
작은 촛불에 신경을 쓰니 큰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항상 많은 사람들이 작은 문제에 부딪힙니다. 그것 때문에 목숨을 겁니다. 포기할 것은 포기해야 합니다.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 촛불만 보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학력고사! 떨어질 수 있습니다. 저도 재수했는데 그때는 팔려서 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세상이 나를 다 우습게 생각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얼마나 훌륭한 사람이 되었습니까 ㅋㅋ
그래요. 사람들은 가짜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돈이 많으면 성공하는 줄 압니다.
공부 잘하면 모든 것이 잘 될 줄 압니다. 건강하면 최고인지 압니다. 그런데 죽어요.
촛불만 보입니까 속지 마시길 바랍니다.
문제는 촛불만 보면 어두움이 보이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가끔 혼자 미친 사람처럼 웃을 때가 있습니다. 저희교회는 아기들이 많습니다. 젊은 교회입니다. 아기도 많이 낳습니다. 그런데 임신한 엄마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처음에 아기를 갖았을 때 푹 쉽니다. 아주 푹 쉽니다. 교회 나오지 않을 것처럼 쉽니다.
그러나 조금 있으면 배불떼기 아줌마들이 열심히 예배를 드립니다. 그래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람은 육신이 좀 편해지면 영혼에 대한 갈망을 가질 수 밖에 없구나!“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는 다르지만 삶이 편안한 한 관원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누구입니까 네! 니고데모입니다. 1절"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관원이라는 것은 세상에서 보면 커다란 촛불입니다. 평생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왔습니다. 그 커다란 촛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무엇인가 부족해서 왔습니다. 이것이 삶이요 인생입니다.
오늘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성령의 사람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바로 이 니고데모는 ‘우리’입니다.
오늘 여러분들도 이 주님을 만날 수 있게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먼저 니고데모는 밤에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여호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왜 니고데모는 밤에 오게 되었을까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시죠.
1) 자신의 신분 때문에 밤에 올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유대인의 관원이면서 유대인들을 공격하는 예수님을 만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밤에 올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2) 반면 밤에 온다는 것은 진실한 니고데모의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낮에 바리새인으로 고관으로 인정을 받습니다. 많은 사람이 고관직 때문에 아첨하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존경하는 척의 모습도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혹시 예수님도 그럴 것이 아닌가 하여 밤에 예수님을 만날 수 도 있습니다.
3) 또 하나는 낮 보다 밤에 자기를 볼 수 있었기 때문 일 것입니다.
촛불을 바라보고 살다 보면 자기를 볼 수 없습니다. 촛불만 보면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두움을 보면 자신을 보게 되고 주님을 만나려고 하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저는 목사입니다. 그래서 항상 성도들이 어떻게 해야 해피한 신앙생활을 할 것인지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을 경험했습니다. 소위 기도 많이 하는 분들이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눌려 있는 것입니다. 뺀질 뺀질하게 믿음 생활을 하는 분들은 도리어 기도도 안하는데 얼굴이 환해요. 왜 그런가 간단하더군요. 사람들은 고난을 받아야 기도를 합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분들이 힘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것 아닙니까 그래서 고난당하는 것을 기도로 풀려고 하는 것을 막았습니다. 고난이 기도는 아니지 않습니까 고난도 내 것입니다. 내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 말씀을 전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고난이 끝나면 기도 생활이 끝납니다. 마치 촛불과 같은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씀을 준비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요사이 저는 기도에 소명을 느끼고 있습니다. 특히 필리핀을 갔다 온 후에 중보기도의 주요성을 느끼고 있습니다. 기도도 촛불을 보지 말고 어둠을 보고 기보하실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저는 니고데모가 밤에 왔다는 것을 그렇게 느끼는 것입니다. "촛불을 끄고 예수님을 만나러 왔다. 진짜 기도의 사람으로 왔다.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에 있어서 밤이 왔습니까 그렇다면 진짜를 보게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빛이 보이지 않을 때 작은 촛불을 의지하는 것은 허상입니다. 허구입니다. 거짓입니다.
밤이 되면 진짜 빛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이 전등이 진짜 빛입니까 아니오! 사실 진짜 빛은 달빛입니다.
그래서 많은 시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달빛을 칭송했습니다. 달빛은 그 형체를 있는 그대로 있게 하고 더러운 것을 덮어주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촛불만 있으면 달빛을 볼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인생의 밤이 되었습니까 찬스입니다. 니고데모처럼 밤에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둘째 니고데모는 삶의 질문을 가졌습니다.
자, 계속해서 보십시오. 니고데모는 밤에 예수님께로 와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네. 니고데모는 묻고 있습니다. 2절을 보세요. 당신은 여호와 하나님께로 왔습니다. 당신의 표적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어떻게 하면 여호와 하나님께로 갈 수 있습니까 이런 물음입니다. 그렇습니다.
제자가 되려면 물음을 가져야 합니다. 성령의 사람들은 질문을 가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나는 왜 이 교회를 나오는지 나는 왜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있는지
뭐하고 살아가야 하는지 이렇게 살다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질문이 있어야 합니다.
짐승들은 질문이 없습니다. 분명히 없습니다. 돼지가 왜 먹는지 고민을 하지 않습니다.
아십니까 돼지는 평생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볼 수 없다고 합니다.
하도 하늘을 보지 않고 먹을 땅만 보니 촛불만 쳐다보게 되고 근육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하늘을 우러러보며 슬픈 눈물을 짓고 있는 돼지를 본적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보셨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이 왜 이 땅에 살고 있는지 목적이 있는 질문을 가질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여기서 질문은 문제를 가지고 있어야 나옵니다. 그래서 고난을 당한 사람에게는 질문이 만들어집니다. 내가 왜 이렇게 고난을 당할 까 무슨 잘못한 것이 있을까
사실 고난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질문을 주시기 위해서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형에서 에게 쫓기고 외삼촌 라반에게 배반을 당한 야곱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의 아픔과 외로움이 여호와 하나님과 씨름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뼈가 골절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야곱이 그냥 씨름을 했겠습니까 아닙니다. 이유 없는 아픔과 고난이 그를 질문하게 하였고
그것을 가지고 씨름을 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물음,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까 그것이 중요합니다.
심방을 하다보면 어느 집에 가면 말씀이나 기도와 예배가 술술 풀리는 경험을 합니다. 참 은혜요 감사입니다. 그런데 어느 집에서는 답답합니다. 왜 그럴까요 심방하기 가장 힘든 집은 문제가 많은 가정이 아닙니다. 기도제목이 있는지, 힘든 일은 없으신지, 어떻게 지내시는지 묻는데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하는 집입니다. 힘든 것도 없답니다. 그런데 무슨 말씀이 있겠습니까 땡이지요, 기도가 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문제가 있다는 것은 풀릴 것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묻지 않는 다는 것은 기도를 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깨어있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 문제를 풀려면 물음을 가져야 합니다. 성경을 읽는 비결도 그렇습니다. 문제를 가질 때 성경이 자기 것이 됩니다. 이 시간 다시 인생의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가 바로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문제를 가지고 묻고 묻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물음이 여러분을 여호와 하나님께로 인도하실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셋째, 니고데모는 촛불을 꺼야 성령의 사람이 됩니다.
아프리카에 밴자민 수리라는 새가 있답니다. 독수리과 에 속하는 새니까 무척 높이 납니다. 눈도 좋아서 1500미터 위에서도 쥐가 땅에 기어가는 것을 보고 쏜살같이 내려와 잡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밴자민 수리가 내려와서 쥐를 잡아먹다가 족제비에게 잡힌다고 합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쥐를 잡으려면 족제비가 쫓아오는데 발로 막 뛰어 도망가는 겁니다.
그 순간에 이 새는 자기가 날 수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뛰기만 하는 겁니다.
꼭 우리가 그렇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믿음을 잃고 살아갑니다. 날개가 있는데 매일 빨리 뛰지 못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짜증을 냅니다. 족제비하고 사는 방법이 다른데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촛불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성령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촛불을 보고 살기 때문입니다. 오늘 니고데모도 자기 혼자서 무엇인가를 해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만족은커녕 혼자 지쳐만 갔습니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날개를 잃고 땅을 기어 다니면 힘이 듭니다. 나 혼자 사는 것은 힘이 듭니다.
지난주 사역에 대한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내 힘으로 사역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힘이 들어요. 지칩니다. 깨어나야 합니다. 거듭나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3절을 보세요.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거듭나지 않으면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가 없다고 말씀합니다. 사람은 거듭나야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온 나는 육신의 나입니다. 그러나 내가 낳은 나는 거듭난 나, 영으로 사는 나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고 그 안에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촛불을 보고 살아가는 사람은 어떻게 이야기합니까 보이는 것이 전부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두 번 태어납니까 어머니 뱃속에 두 번 들어갈 수 있습니까 그렇게 질문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알지 않습니까 거듭났다는 것을 다른 말로 한다면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도 살아야 한다는 것 아닙니까 그 비밀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오늘 5절에 무엇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소리입니까
성령은 불을 의미하고 있지 않습니까 즉 물과 불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그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좋은 예화 인 것 같습니다.
쌀은 쌀쌀맞다고 해서 쌀입니다. 우리가 거듭나지 않기 전에는 쌀과 같다고 그럽니다. 쌀쌀맞게 부딪히고 서로 싸웁니다. 그런데 그 쌀에 물을 붓고, 불을 때면 어떻게 되지요 뚜껑을 덮어 압력이 차고 적당한 시간이 지나면 쌀은 밥이 됩니다. 그렇게 쌀쌀맞던 쌀이 밥이 되어 이제는 시키지 않아도 엉겨 붙습니다. 풀을 대신해서 쓸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그 밥을 먹으면 사람들이 힘을 얻고 생명을 얻습니다.
그렇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도 그렇게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예전의 나는 죽습니다. 내 생각과 가치로 사는 나는 십자가에 못 박고 이제 새로운 내가 사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보이던 육신만 위해 살았습니다. 보이지 않는 영혼을 돌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바로 이 내 영혼을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입니다. 성령의 사람입니다.
방언만 하고 예언만 하는 사람만이 성령의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령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니고데모처럼 성령의 사람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가능합니까
희미한 촛불을 꺼야 합니다. 우리의 눈을 가리는 나의 촛불을 꺼버리고 성령으로 마음을 비추는 빛을 밝혀야겠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니고데모처럼 촛불이 없는 밤에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캄캄한 고난 속에서 질문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질문이 해답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촛불을 끄면 성령의 사람이 됩니다.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함께 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힘든 이유는 무엇입니까 희미한 촛불만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촛불을 끄십시오. 그리고 성령의 사람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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