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 성령이 말씀으로
본문
여호와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 살아 계시기에 말씀하신다. 그리고 영으로 하늘과 땅에 계시며 일을 하신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움직이지 못한다. 그래서 아무런 느낌이 없다. 여호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은 다 이루어졌다. 여호와 하나님 말씀하신 대로 지금 우리가 보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하늘과 땅의 만물이 생겼다. 여호와 하나님 말씀에 살리는 생명이 있고 되게 하는 능력이 있다. 인간으로 이해할 수 없는 여호와 하나님의 신비함이 있다..
여호와 하나님 하시는 말씀에 여호와 하나님이 계신다. 여호와 하나님이 말씀으로 어떤 분이신가 나타나고 여호와 하나님 하시려는 일이 뜻대로 이루어진다. 구약시대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선지자의 입을 통해 말씀하셔서 당신을 알리시고 사람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셨다. 신약시대에는 말씀 안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사람들에게 나타나셨다. 그 분이 오늘 말씀에 나온 니고데모가 만난 예수님이시다..
예수 당시 이스라엘 유대 사람들의 기다림과 공동의 관심사는 `여호와 하나님 나라`였다. 유대 나라는 로마의 지배를 받으면서 백성들 생활의 많은 부분을 세금으로 빼앗기고 로마 군인들에게 여러 가지 이유로 유대사람들은 학대를 당했다. 유대 사람들 모두가 다윗 왕의 시대처럼 잘 살아보는 것이 소원이요, 유대 나라가 강하여 로마에게서 해방되는 날을 기다렸다. 한가지 유일한 소망 줄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언제인가 다윗과 같은 왕, 메시야를 유대 사람들에게 보내 주신다는 약속이었다. 예수님은 유대 땅에서 여호와 하나님나라를 말씀하시면서도 죽은 자를 살리고 배고픈 자를 먹이며 병든 자를 치유하는 구원의 일을 하셨다. 가난에 찌들인 서민들은 예수 이 분이 먹고사는 경제문제를 해결하는 왕이요, 로마로부터 유대를 해방하여 자유를 주실 분이라 기대하고 따랐다..
그러나 바리새인을 중심한 유대교의 사람들은 예수의 소문에 놀라면서도 여호와 하나님나라의 왕으로서는 여러 의견과 궁금함이 많았다. 바리새(헬, )는 `분리된` 사람이란 뜻이다. 여호와 하나님 율법대로 온전히 살기 위해 죄의 세상과는 끊고 사는 사람들이라는 말이다. 그러기에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왕이 되려면 예수 그는 바리새인처럼 되어야지 율법을 어겨서는 안된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안식일을 범하고 감히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 분을 아버지라고 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 세계에서 `이 사람은 아니다` 하는 쪽으로 다수가 기울었다. 하지만 예수님의 입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권세 있는 말씀이 나온다. 죽은 자가 살고 병자가 낫는 여호와 하나님 선지자의 표적이 나타난다. `그러면 예수가 누구냐` 하는 것이 궁금하다..
니고데모(헬, -백성을 정복한 사람)는 바리새인으로서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선생이요, 그는 관원으로 산혜드린 공회의원이었다. 공회의원은 백성들의 종교생활을 감시 감독하면서 거짓 선지자를 찾아내서 조치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조용한 시간에 마음을 열은 대화로 자신이 답답하고 갈급한 것을 해결받기 위해서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과 관원으로서 자기의 자존심과 편견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만났다. 니고데모는 빛되신 예수를 만나 살길이 열리고 인간이 달라졌다. 밤에 예수님께 와서 들은 그 말씀이 니고데모를 달라지게 한다.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올라오신 예수를 유대교 사람들이 잡으려고 할 때 니고데모는 그들을 막아 예수님을 변호했다(요7:48-51).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때는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 100근을 들고 와서 같은 공회원인 아리마대 요셉과 함께 장례를 준비했다(요19:39)..
처음에 교회에 나오는 사람은 자신이 예수 믿는 것을 숨긴다. 사람들이 보는 눈과 하는 말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 말씀이 마음에 들어가면 그 안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신다. 믿음이 생기고 담대해져 그의 입으로 안에 계신 예수를 드러낸다. 예수를 마음에 숨기고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자존심과 편견을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 말씀을 받으면 답답한 마음은 시원해지고 어둡던 인생은 밝은 아침처럼 새로운 살길이 열린다..
니고데모는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다. 예수님을 찾아는 왔지만 처음 갖는 만남이기 때문에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랍비(헬, )곧 선생님이라 부르면서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부터 말을 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과 가시는 곳마다 일어나는 기적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되는 일이지 사람의 힘으로서는 될 수가 없는 일이라 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전혀 다르게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하셨다. 예수님은 니고데모가 무엇 때문에 왔는지 그 마음을 아셨다. 니고데모의 관심은 예수님이 보시는 여호와 하나님 나라는 어떤 것이고 예수님은 도대체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며,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서 살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거듭나야 한다` 고 하신다. 거듭난다(헬, 아노덴)는 말은 `처음부터, 근본적으로,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만들어진다`는 뜻이 있다..
거듭난다는 말은 예수님이 처음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유대 사람이면 다 알고 있는 익숙한 말이다. 이방 사람들이 자기들이 믿던 종교를 버리고 유대교로 개종을 하기 위해 기도하고 제사를 드리며 세례를 받았다. 그러면 유대교에서는 이들을 신생아처럼 거듭난 사람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것은 의식에 불과한 형식이다. 단순히 기도하고 제사하고 물에 들어갔다가 나왔다고 해서 인간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바리새인들도 자신들이 죄의 사람들과 분리되어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지킨다고 하지만 그것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좋은 시대가 온다고 보지 않는다.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유대 나라는 점점 부패해 가고 로마에 지배를 받는 유대 사람들은 사는 것이 아주 힘든다..
유대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한다는 데는 바리새인들, 공회의원들 모두 공감하고 있다. 하지만 인간이 근본적으로 바뀌고 세상이 새롭게 되는 여호와 하나님 나라 그 시대가 어떻게 오겠는가 하고 예수께 묻는다. 사람들에게 근본적인 변화가 생겨 새로 난 어린애처럼 마음이 깨끗해지는 그것은 어른이 자기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니고데모는 말한다. 이것이 율법으로 할 수 없는 인간 노력의 한계이다. 인간이 더러움을 씻기 위해 물 속에 수 없이 들어갔다 나와도 그 마음속에 있는 악은 없어지지 않는다. 인간이 지은 죄값으로 구약시대 수많은 양과 소가 죽었지만 사람들의 마음에 있는 죄는 그대로 있다. 바리새인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지킨다고 자기 몸을 계속 힘들게 해도 죄의 씨가 속에 있어 악독함이 삶으로 나오는데 어찌 하겠는가.
거듭남은 인간의 수고로 얻어지는 구원이 아니다. 인간이 노력해서 되는 성공이 아니다. 어떤 수고나 값어치가 없어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고치시고 만드시는 은혜이다. 예수 앞에 온 율법의 사람 니고데모의 모습은 무엇을 말하는가 내가 여호와 하나님 율법을 기준하여 온전해지려고 평생 힘쓰고 애썼지만 나로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내가 잘해보려고 하면 할수록 죄의 나를 감당 못해 지치고 절망한다. 죄를 벗어날 수 없는 실패한 나를 보며 이 사망에서 구원할 주를 찾는다(롬7:14,15,24). 거기에서 나를 위해 여호와 하나님 보내신 말씀을 만난다. 그 분이 누구이신가 말씀이 육신 되어 오신 예수이시다. 여호와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사람이 흑암과 사망과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이에 저희가 근심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시는도다`(시 107:10, 11,19,20). 율법에 실패한 니고데모가 예수를 만남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은혜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시듯 말씀이신 예수님이 잘못된 인간을 근본적으로 바꾸신다. 예수님은 우리가 실패한 인생을 성공으로 만드신다..
세례 요한은 선지자로서 유대 사람들에게 여호와 하나님 말씀을 전했다.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죄를 회개하라` 는 것이었다. 요한은 자신 앞에 와서 죄를 자복한 사람들에게 깨끗하게 된 표로 요단강 물에 잠겼다가 나오는 침례를 주었다. 물에 잠겼다가 나오는 침례나 세례는 죄에 대해 내가 죽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고 죄가 없어지거나 마음이 깨끗해지는 것은 아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만났다. 예수님은 `인간이 어떻게 거듭날 수 있느냐` 하는 니고데모의 질문에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다. 물은 무엇인가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물이 아니다. 이 물은 몸에 있는 때는 씻을 수 있지만 인간 마음에 있는 죄는 없애지 못한다. 세상의 세탁 비누로 옷에 묻은 것은 지울 수 있지만 인간이 살며 지은 죄는 깨끗하게 못한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말씀하신다.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구약시대 소와 양의 죽음으로는 지은 죄에 대해서는 용서를 받을지 모르지만 아담에게서 심겨진 인간의 원죄를 없애지 못한다. 짐승 제물의 피로서도 마음속에 있는 더러운 생각과 악한 마음을 깨끗하게 못한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 아들로 말씀이 육신 되어 인간으로 오셔서 온 인류의 죄값으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마음에 받아 믿어야 한다. 그러면 그 안에 예수님의 생명이 들어간다. 여호와 하나님 말씀을 받아 믿어 그 사람 속에 예수님이 들어가실 때는 여호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으로 들어가신다..
흙으로 만든 아담의 몸 안에 여호와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가 살 듯이 예수 믿고 여호와 하나님의 성령이 오시면 죄에 죽은 그 사람을 살게 한다. 그래서 죄에 살던 나에 대하여는 죽은 것이 된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흘리신 피의 능력이 더러운 생각을 깨끗하게 한다. 죄에 대한 욕망을 없애준다. 이제 성령은 그 사람의 주인이 되셔서 집을 고치듯 그 사람의 병든 부분을 고치신다. 연약한 것을 강하게 하신다.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하신다. 잘못된 것을 바르게 만드신다. 부족한 것을 온전케 채우신다. 지금까지 나를 위해 살며 죄에 매인 삶을 이제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 살며 모든 눌린 것과 매인 것에서 자유케 하신다..
인간이 사는 세상은 죄악이 가득하지만 말씀이 육신되어 오신 예수를 믿어 여호와 하나님의 성령을 모신 사람은 자기 안에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룬 것이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기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21). 사랑하는 성도 여려분! 여러분이 사는 환경이 문제가 아니다. 사람의 생김새가 중요하지 않다. 예수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 문제요, 여호와 하나님의 성령이 안에 계시느냐 계시지 않느냐 하는 문제이다. 여호와 하나님 아들 예수가 성령으로 안에 계신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어 그를 책임지신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나로 사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 산다. 세상에 먹고 입는 것으로 살지 않는다. 모두가 여호와 하나님 주시는 은혜로 산다. 내 안에 주인으로 계신 성령, 그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 나를 자녀로 변화시키고 인생을 새롭게 살도록 만드신다. 나를 위해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께서 준비하신 하늘 나라의 그 영원한 삶이 앞에 기다리고 있다. 할렐루야
여호와 하나님 하시는 말씀에 여호와 하나님이 계신다. 여호와 하나님이 말씀으로 어떤 분이신가 나타나고 여호와 하나님 하시려는 일이 뜻대로 이루어진다. 구약시대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선지자의 입을 통해 말씀하셔서 당신을 알리시고 사람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셨다. 신약시대에는 말씀 안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사람들에게 나타나셨다. 그 분이 오늘 말씀에 나온 니고데모가 만난 예수님이시다..
예수 당시 이스라엘 유대 사람들의 기다림과 공동의 관심사는 `여호와 하나님 나라`였다. 유대 나라는 로마의 지배를 받으면서 백성들 생활의 많은 부분을 세금으로 빼앗기고 로마 군인들에게 여러 가지 이유로 유대사람들은 학대를 당했다. 유대 사람들 모두가 다윗 왕의 시대처럼 잘 살아보는 것이 소원이요, 유대 나라가 강하여 로마에게서 해방되는 날을 기다렸다. 한가지 유일한 소망 줄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언제인가 다윗과 같은 왕, 메시야를 유대 사람들에게 보내 주신다는 약속이었다. 예수님은 유대 땅에서 여호와 하나님나라를 말씀하시면서도 죽은 자를 살리고 배고픈 자를 먹이며 병든 자를 치유하는 구원의 일을 하셨다. 가난에 찌들인 서민들은 예수 이 분이 먹고사는 경제문제를 해결하는 왕이요, 로마로부터 유대를 해방하여 자유를 주실 분이라 기대하고 따랐다..
그러나 바리새인을 중심한 유대교의 사람들은 예수의 소문에 놀라면서도 여호와 하나님나라의 왕으로서는 여러 의견과 궁금함이 많았다. 바리새(헬, )는 `분리된` 사람이란 뜻이다. 여호와 하나님 율법대로 온전히 살기 위해 죄의 세상과는 끊고 사는 사람들이라는 말이다. 그러기에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왕이 되려면 예수 그는 바리새인처럼 되어야지 율법을 어겨서는 안된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안식일을 범하고 감히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 분을 아버지라고 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 세계에서 `이 사람은 아니다` 하는 쪽으로 다수가 기울었다. 하지만 예수님의 입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권세 있는 말씀이 나온다. 죽은 자가 살고 병자가 낫는 여호와 하나님 선지자의 표적이 나타난다. `그러면 예수가 누구냐` 하는 것이 궁금하다..
니고데모(헬, -백성을 정복한 사람)는 바리새인으로서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선생이요, 그는 관원으로 산혜드린 공회의원이었다. 공회의원은 백성들의 종교생활을 감시 감독하면서 거짓 선지자를 찾아내서 조치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조용한 시간에 마음을 열은 대화로 자신이 답답하고 갈급한 것을 해결받기 위해서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과 관원으로서 자기의 자존심과 편견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만났다. 니고데모는 빛되신 예수를 만나 살길이 열리고 인간이 달라졌다. 밤에 예수님께 와서 들은 그 말씀이 니고데모를 달라지게 한다.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올라오신 예수를 유대교 사람들이 잡으려고 할 때 니고데모는 그들을 막아 예수님을 변호했다(요7:48-51).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때는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 100근을 들고 와서 같은 공회원인 아리마대 요셉과 함께 장례를 준비했다(요19:39)..
처음에 교회에 나오는 사람은 자신이 예수 믿는 것을 숨긴다. 사람들이 보는 눈과 하는 말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 말씀이 마음에 들어가면 그 안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신다. 믿음이 생기고 담대해져 그의 입으로 안에 계신 예수를 드러낸다. 예수를 마음에 숨기고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자존심과 편견을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 말씀을 받으면 답답한 마음은 시원해지고 어둡던 인생은 밝은 아침처럼 새로운 살길이 열린다..
니고데모는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다. 예수님을 찾아는 왔지만 처음 갖는 만남이기 때문에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랍비(헬, )곧 선생님이라 부르면서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부터 말을 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과 가시는 곳마다 일어나는 기적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되는 일이지 사람의 힘으로서는 될 수가 없는 일이라 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전혀 다르게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하셨다. 예수님은 니고데모가 무엇 때문에 왔는지 그 마음을 아셨다. 니고데모의 관심은 예수님이 보시는 여호와 하나님 나라는 어떤 것이고 예수님은 도대체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며,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서 살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거듭나야 한다` 고 하신다. 거듭난다(헬, 아노덴)는 말은 `처음부터, 근본적으로,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만들어진다`는 뜻이 있다..
거듭난다는 말은 예수님이 처음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유대 사람이면 다 알고 있는 익숙한 말이다. 이방 사람들이 자기들이 믿던 종교를 버리고 유대교로 개종을 하기 위해 기도하고 제사를 드리며 세례를 받았다. 그러면 유대교에서는 이들을 신생아처럼 거듭난 사람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것은 의식에 불과한 형식이다. 단순히 기도하고 제사하고 물에 들어갔다가 나왔다고 해서 인간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바리새인들도 자신들이 죄의 사람들과 분리되어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지킨다고 하지만 그것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좋은 시대가 온다고 보지 않는다.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유대 나라는 점점 부패해 가고 로마에 지배를 받는 유대 사람들은 사는 것이 아주 힘든다..
유대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한다는 데는 바리새인들, 공회의원들 모두 공감하고 있다. 하지만 인간이 근본적으로 바뀌고 세상이 새롭게 되는 여호와 하나님 나라 그 시대가 어떻게 오겠는가 하고 예수께 묻는다. 사람들에게 근본적인 변화가 생겨 새로 난 어린애처럼 마음이 깨끗해지는 그것은 어른이 자기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니고데모는 말한다. 이것이 율법으로 할 수 없는 인간 노력의 한계이다. 인간이 더러움을 씻기 위해 물 속에 수 없이 들어갔다 나와도 그 마음속에 있는 악은 없어지지 않는다. 인간이 지은 죄값으로 구약시대 수많은 양과 소가 죽었지만 사람들의 마음에 있는 죄는 그대로 있다. 바리새인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지킨다고 자기 몸을 계속 힘들게 해도 죄의 씨가 속에 있어 악독함이 삶으로 나오는데 어찌 하겠는가.
거듭남은 인간의 수고로 얻어지는 구원이 아니다. 인간이 노력해서 되는 성공이 아니다. 어떤 수고나 값어치가 없어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고치시고 만드시는 은혜이다. 예수 앞에 온 율법의 사람 니고데모의 모습은 무엇을 말하는가 내가 여호와 하나님 율법을 기준하여 온전해지려고 평생 힘쓰고 애썼지만 나로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내가 잘해보려고 하면 할수록 죄의 나를 감당 못해 지치고 절망한다. 죄를 벗어날 수 없는 실패한 나를 보며 이 사망에서 구원할 주를 찾는다(롬7:14,15,24). 거기에서 나를 위해 여호와 하나님 보내신 말씀을 만난다. 그 분이 누구이신가 말씀이 육신 되어 오신 예수이시다. 여호와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사람이 흑암과 사망과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이에 저희가 근심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시는도다`(시 107:10, 11,19,20). 율법에 실패한 니고데모가 예수를 만남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은혜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시듯 말씀이신 예수님이 잘못된 인간을 근본적으로 바꾸신다. 예수님은 우리가 실패한 인생을 성공으로 만드신다..
세례 요한은 선지자로서 유대 사람들에게 여호와 하나님 말씀을 전했다.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죄를 회개하라` 는 것이었다. 요한은 자신 앞에 와서 죄를 자복한 사람들에게 깨끗하게 된 표로 요단강 물에 잠겼다가 나오는 침례를 주었다. 물에 잠겼다가 나오는 침례나 세례는 죄에 대해 내가 죽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고 죄가 없어지거나 마음이 깨끗해지는 것은 아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만났다. 예수님은 `인간이 어떻게 거듭날 수 있느냐` 하는 니고데모의 질문에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다. 물은 무엇인가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물이 아니다. 이 물은 몸에 있는 때는 씻을 수 있지만 인간 마음에 있는 죄는 없애지 못한다. 세상의 세탁 비누로 옷에 묻은 것은 지울 수 있지만 인간이 살며 지은 죄는 깨끗하게 못한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말씀하신다.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구약시대 소와 양의 죽음으로는 지은 죄에 대해서는 용서를 받을지 모르지만 아담에게서 심겨진 인간의 원죄를 없애지 못한다. 짐승 제물의 피로서도 마음속에 있는 더러운 생각과 악한 마음을 깨끗하게 못한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 아들로 말씀이 육신 되어 인간으로 오셔서 온 인류의 죄값으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마음에 받아 믿어야 한다. 그러면 그 안에 예수님의 생명이 들어간다. 여호와 하나님 말씀을 받아 믿어 그 사람 속에 예수님이 들어가실 때는 여호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으로 들어가신다..
흙으로 만든 아담의 몸 안에 여호와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가 살 듯이 예수 믿고 여호와 하나님의 성령이 오시면 죄에 죽은 그 사람을 살게 한다. 그래서 죄에 살던 나에 대하여는 죽은 것이 된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흘리신 피의 능력이 더러운 생각을 깨끗하게 한다. 죄에 대한 욕망을 없애준다. 이제 성령은 그 사람의 주인이 되셔서 집을 고치듯 그 사람의 병든 부분을 고치신다. 연약한 것을 강하게 하신다.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하신다. 잘못된 것을 바르게 만드신다. 부족한 것을 온전케 채우신다. 지금까지 나를 위해 살며 죄에 매인 삶을 이제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 살며 모든 눌린 것과 매인 것에서 자유케 하신다..
인간이 사는 세상은 죄악이 가득하지만 말씀이 육신되어 오신 예수를 믿어 여호와 하나님의 성령을 모신 사람은 자기 안에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룬 것이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기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21). 사랑하는 성도 여려분! 여러분이 사는 환경이 문제가 아니다. 사람의 생김새가 중요하지 않다. 예수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 문제요, 여호와 하나님의 성령이 안에 계시느냐 계시지 않느냐 하는 문제이다. 여호와 하나님 아들 예수가 성령으로 안에 계신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어 그를 책임지신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나로 사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 산다. 세상에 먹고 입는 것으로 살지 않는다. 모두가 여호와 하나님 주시는 은혜로 산다. 내 안에 주인으로 계신 성령, 그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 나를 자녀로 변화시키고 인생을 새롭게 살도록 만드신다. 나를 위해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께서 준비하신 하늘 나라의 그 영원한 삶이 앞에 기다리고 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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