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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성령으로 거룩해진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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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希望으로 맞이한 때가 이제 3년이 지났다. 그런데 그 희망은 모두 사라지고 우리의 주변은 너무나 혼탁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 나라에서 政治를 잘하지도 못하고 經濟的으로 너무나 어려워서 IMF 때보다도 더 심각하다. 이런 것들이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가장 어려운 것은 家庭이 파괴되고 있다는 것과 돈벌이가 안 되니까 家長들이 길거리 신세를 지게 된다. 어머니들이 돈을 벌러 나가니까 능력이 생기게 되었다. 男便에 대한 기대를 버리고 자녀들을 키운다. 이혼율이 높아지고 있다. 가정에 대한 사랑이 식어 가는 자녀들이 거리에서 범죄를 일삼고 있다. 카드 빚으로 생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자살 싸이트나, 마약이나, 해결사 등의 인터넷 범죄가 심각하다.
이러한 정황 속에 오늘 교회는 어떻습니까 거룩해야 할 교회가 한술 더 떠 사회의 문제보다 더 심각하다. 聖靈運動의 중단으로 교세는 감소하여 침체기에 접어들었고, 悔改運動이 사라지고 세상적인 방법이 교회 안으로 들어와 신성한 교회가 세속화되어 가고 있다. 敎會의 권위가 사라지고, 敎役者들의 신비성이 사라짐으로 교권적 분열, 교역자들의 권위의식이 없어졌다. 교회는 수가 많아야 되고, 예산이 풍부해야 되며, 목사가 많은 일을 하도록 능력이었어야 된다는 교회의 定義가 잘못되고 있는데 이런 것은 곧 罪입니다.
옛날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서 責望을 들은 교회가 다섯이었다. 그들이 책망을 받은 것은 작은 교회요, 예산이 적어서 일을 못해서요, 사회봉사를 못해서일까요 그 중에 에베소 교회는 작은 교회도 아니고 역사가 짧아서도 아니고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 교회도 7분의 5는 책망을 들어야 한다면, 그 중에 하나가 우리 교회가 아닌지도 모른다. 현대 교회가 책망을 받게 된 것은 교회가 작아서도 아니고, 역사가 짧아서도 아니고 예산이 없어 사회 봉사를 안 해서도 아니다. 現代敎會는 偶像과 罪를 용납하였고, 세상을 너무 사랑하여 世俗化되었으며,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人本主義로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를 비롯한 한국 교회는 悔改하고 聖靈으로 깨끗해져 거룩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자신이 회개하여 근본적인 변화를 추구하였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의 새 영인 성령을 사모하여 새롭게 되기를 원하였다. 그 이유는 자신의 신앙뿐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새로운 使役을 위하였다. 회개하면 새로운 존재가 된다. 이것이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사도 바울의 개념이다. 그렇다면 새롭다는 것은 깨끗하다는 것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거기에 새로운 것인 '정한 마음,' '정직한 영'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회개한 자신의 영혼에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聖神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51:11) 라고 간구했다. 이것은 성령의 臨在로 나의 영혼이 깨끗게 되는 것만이 아니라 계속 臨在 해 계시므로 새로워진 사람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하도록 여호와 하나님의 인도를 바라는 것이다.
聖靈으로 말미암지 않고 인간들이 행하는 모든 일은 죄악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국 교회를 更新하고 1致를 이루자고 아무리 머리를 짜 묘안을 내고 성명서를 발표해도 성령에 의해 우리의 중심이 근본적으로 거룩해지지 않고서는 교회의 갱신도 일치도 한낮 구호에 불구 할 것임을 깨우쳐 준다. 성령만이 우리를 변화시킬 것이며 인간의 욕심을 없애 주실 수 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세상으로부터 구별될 수 있으며 곧 거룩한 생활을 할 수 있다.
올 해 우리 교회의 표어가 '성령으로 거룩해진 교회'이다. 이를 위해 주님께로부터 받은 책망을 진심으로 회개하고 성령으로 말미암 거룩해진 교회가 되도록 하자. 이를 위해
1. 도덕적인 삶을 추구해야 한다.
道德이란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 할 道理이다.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어긴다면 짐승이나 다를 바가 없다. 짐승은 윤리와 도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올해는 우리 교회가 도덕적인 삶을 살아 신자가 되기 전에 먼저 사람다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부모를 공경하고 이웃 어르신들을 존경하고, 長幼有序와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하고, 사회질서와 법을 지키고 살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세상적인 사람보다 인간으로써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짐승같이 욕심을 부리고 本能으로 산다면 거룩한 교회가 될 수 없고 올해도 실패로 끝나고 말 것이다.
한국 교회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도덕성의 缺如라고 할 것이다. 사회 곳곳이 부패되어 있고, 부패의 현장에는 반드시 기독교인들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다. 검찰과 경찰이나 언론이 들추는 곳마다 부정이 없는 곳이 없으며, 부정과 부패의 고리는 끊어질 줄 모르게 위에서 아래로 연결되어 있다. 도덕성의 문제에 한국 교회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현실이다. 교회의 도덕적 수준이 사회를 능가해야 하고 사회의 도덕적 기준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사회로부터 도덕성의 문제로 말미암아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교회는 사회 앞에 도덕적 기준이 될 수 있도록 스스로를 깨끗게 하는 자정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교회의 지도자들이 이런 엄격한 기준을 유지할 수 있도록 성령으로 충만해야 한다.
성경은 道德性을 강조한다. 성경이 요구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의 자격에 도덕성은 빠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교회와 성도들이 갖추어야 할 첫째가 도덕성이다. 일 국의 대통령도 도덕성이 결여되어 下野 한 자들이 있지 않은가 하물며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한 우리들이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다면 법에 의하여 治理를 받기 전에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직분을 내놓고 사죄를 해야 한다. 그래야 양심적인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의 일꾼을 세우는 예를 전하고 있다.
舊約에서는 애굽에서 출애굽 한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할 때에 처음 모세를 도와 함께 일한 일꾼들을 선택한다. 이들의 資格은 才德이 兼全한 자 곧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眞實無妄하며 不義한 利를 미워하는 자(출 18:21)이였다.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무망한 것은 靈性이며, 불의한 이를 미워하는 것은 道德性이다. 新約에서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행 6:3)이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것은 靈性이며, 칭찬 듣는 것은 道德性이다. 이처럼 신구약을 막론하고 聖經이 要求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일꾼의 자격은 한결같이 영성과 도덕성이니, 스스로를 깨끗게 하여 사람의 도리를 다하여 살 때에 개인의 人格이 드러날 것이요, 敎會가 인정을 받아 거룩해지는 역사가 있을 것이다.
2. 아름다운 환경을 만들어 가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環境은 인간이 살아가야 할 바탕이요, 분위기이다. 그래서 좋지 못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은 비뚜러지고 잘 못되지만, 좋은 환경에 자란 사람은 健全하고 誠實한 삶을 살아간다. 그러므로 우리는 좋은 家庭 환경을 만들어 가야 되고, 敎會도 좋은 환경으로 만들어 감싸주고 인정을 베풀며 용서하고 협력하는 교회가 되어 하며, 社會도 좋은 사회가 되도록 좋은 분위기를 조성하고, 생태계를 파괴한다거나 불순한 저의와 불법을 저질러 淫亂하고 더러운 사회를 만들지 않도록 조심하여 아름다운 風土를 만들어 가야 한다.
"인간의 자연에 대한 오류는 그리스도교적 세계관에서 비롯되었다"고 화이트라는 사람은 그의 글 생태학적 위기의 역사적 뿌리에서 말하였다. 인간이 創造의 중심이라는 그릇된 세계관은 다른 피조물을 征服하는 창조신학으로 발전하였으며, 생태계의 주범이 되었다. 특히 산업 사회를 지내면서 이러한 지배의 논리는 자연 정복을 미화하고 심지어 자연 파괴까지 정당화하게 되었다.
성경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인간에게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고 하신 것을 마음껏 파괴하고 지배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保存이라는 의미보다 지배라는 의미로 이해하여 자연 세계에 대하여 인간의 난폭한 힘을 가하여 파괴하였다. 그 결과 새들이 없어지고 물고기가 떠나갔으며, 개구리가 없어지고 메뚜기가 사라졌습니다. 산은 잔인하게 파헤쳐 저 앙상한 뼈가 들어 났고 시내와 강둑은 세멘트로 도배되어 삭막하기 그지없고, 해마다 홍수로 말미암아 수많은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를 내고 있는데 이는 인간 스스로가 자연을 파괴하고 환경을 오염시켜서 받은 災殃이다.
미래 교회는 환경에 대한 시각이 새롭게 전환되어야 하며, 환경에 대한 지배가 아닌 환경과 인간의 共存의 倫理를 정립해야 한다. 環境에 대한 교회의 관심은 단순히 인간학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신학적 의미, 즉 인간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이 명령이라는 차원이어야 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세계는 "여호와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창 1:31)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였다. 요즈음의 환경 용어로 말한다면, 에덴은 완벽한 生態系였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이 지향하는 나라는 완벽한 생태계인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이며, 이 나라를 회복해야 하는 지구적 책임을 가지고 있다.
汚染되고 呻吟하는 지구의 환경을 회복하고 깨끗케 하는 일은 여호와 하나님이 인간에 주신 신적 명령이다. 그러나 오염되고 파괴된 인간의 양심으로 지구는 회복될 수 없다. 地球가 여호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親環境的인 작업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고 깨끗케 하시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가능하다. 보혜사 聖靈님은 인간의 영을 깨끗케 하시며 지구적 환경을 깨끗케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이 먼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자연을 사랑하고 환경을 아름답게 만들며 오염이나 공해나 파괴를 몰아내어 스스로를 지키고 재앙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어야 한다.
3. 영성이 회복된 교회가 되어야 한다.
인간이 동물과 다르다는 것은 영이 있고, 윤리와 도덕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인간은 만물의 靈長이다. 靈性이란 인간의 성품 중의 하나인 영적 성품을 말하는데, 이것이 있기에 여호와 하나님을 敬畏하고, 來世를 바라보며, 여호와 하나님께 禮拜하며 죄악을 悔改하는 것이다. 그런데 뮬질문명의 발달과 문명의 利器로 사람들의 삶의 질이 향상되고 편하고 잘살게 되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믿으로 살기보다는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더 앞세우고, 세상 부귀와 향락에 치우쳐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을 욕을 하고 여호와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참람한 말을 하면서 자기가 모든 저주와 재앙을 지고 가겠노라고 罪를 짖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한국 교회의 문제가 무엇인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와 義보다는 인간의 慾心과 名譽와 權勢에 더 역점을 두고, 物質의 욕심, 快樂의 욕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헛된 영광을 구하느라고 경쟁과 질시와 다툼과 분쟁과 분열을 일으키고 있다. 그리하여 그 도가 노아시대와 소돔 고모라시대를 방불케 하고 있다.
그러나 여러 가지 문제가 있겠지만, 신앙인으로써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영성이 더러워지고 무디어 졌다는 사실이다. 그러기에 교회를 사랑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물질의 풍요나 행복이나 평화를 말하지 않고, 이구동성으로 영성이 회복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더러워지고 무디어진 영성이 회복되어야 여호와 하나님과 교통할 수가 있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 있으며,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의 뜻을 따라 살 수가 있다.
우리의 영성이 회복되지 않은 이상, 어떠한 制度와 口號는 소용이 없다. 어느 나라나 교회나 가정이 멸망을 당한 것이 제도가 잘 못되고 조직이나 구호가 잘 못되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잘 못되어서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바뀌지 않은 이상 인간의 모든 수고와 노력은 헛되고 헛될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變化되고 사람다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이것은 새로운 사람, 거듭난 사람이라고 하였다. 예수님도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늘 나라를 볼 수 없고, 救援받아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다고 하였다.
인간을 변화시켜 새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비결, 곧 영성이 회복되어 새로운 사람이 되는 비결이 무엇인가 바로 그것이 聖靈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 인간들이 행하는 계교나 맹약을 가지고는 죄에 죄를 더할 뿐이다. 한국 교회를 更新하고 1致를 이루자고 아무리 머리를 짜고 묘안을 끄집어내어 합의문을 작성을 해도 성령에 의하여 우리의 중심인 영성이 근본적으로 깨끗해지지 않은 이상 교회 更新도, 復興도 한낮 理想과 口號에 불과할 것이다. 성령만이 우리를 변화시키시고 새사람이 되게 하실 수 있다. 올해는 우리 모두 성령으로 말미암 새로운 사람, 거듭난 새사람이 되기 위하여 성령으로 우리의 영성을 회복하여 내가 살고 교회가 살고 우리 민족이 사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란다.
4. 역동적인 예배를 드리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禮拜란, 인간이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고, 우리 삶의 전체를 여호와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며,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恩惠를 받고 感激하며, 여호와 하나님과 交通하고 交際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예배는 祝祭이고, 우리에게 보여주신 여호와 하나님 사랑과 능력에 대한 慶祝이며, 十字架의 은혜로 赦罪의 선포를 받는 容恕이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恩惠를 받는 迎接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배란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며 여호와 하나님의 뜻대로 실천하며 사는 생활 자체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에서 이끌어 내어 여호와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게 하신 이유도 예배에 있다. 禮拜는 여호와 하나님의 救贖의 목적이며 여호와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인간의 행위이다.
禮拜의 根據는 예수님이 昇天하시고 5旬節의 체험을 통하여 모인 제자들은 家庭에서 예배하기 시작하였고, 가정뿐 아니라 聖殿이나 會堂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하는 예수님의 모범을 따랐다. 오랫동안 그들에게 친숙하였던 예배의 형식을 그대로 이어받아 오늘 우리도 그 예배 모범을 예배를 드리고 있다. 그래서 예배는 基督敎人들의 生活이다. 禮拜를 드리지 않으면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가 없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반드시에 예배에 참여해야 한다. 그래서 이 예배를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고, 信仰을 배우고 成熟시키며, 德性을 함양하여 성도로써의 자질을 쌓고 영적생활을 하는 것이다.
우리 한국교회 만큼 예배를 많이 드리는 나라도 없다. 주일 예배, 오후예배 삼일 예배, 구역에배, 새벽기도 예배, 무슨무슨 감사예배, 득남예배 사업예배, 환자예배 등 셀수 없이 너무너무 많다. 그래서 한국교회 목사가 세계에서 제일 수고를 많이 한다고 한다. 수고를 많이 하면 받을 상도 많겠지요. 그러나 그만큼 피곤하고 고생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예배를 많이 드린다는 것은 그만큼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된다. 아무리 예수님을 오래 믿었어도 예배 참석을 게을리 한다거나 예배에 열심을 내지 못한다면 信仰의 進步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은 예배에 觀心을 갖고 계신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교회가 수많은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禮拜의 형식이 意識化되면서 역동성이 사라지고 말았다. 예배 의식이 중요하기도 하지만 의식화 되면 예배의 참여자는 구경꾼으로 전락하게 되고 신앙적 硬直性을 만들고 예배의 感激이 사라지게 된다. 그런데 최근에 들어 시대의 변화와 교인들의 요구로 예배의 更新이 일어나고 있다. 진정한 예배라면 예배를 통하여 기쁨을 누리는 祝祭가 되어야 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는 感激이 있어야 하며, 말씀을 받거나 예물을 드리면서 感動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그러한 모습들이 사라지면서 형식적인 예배, 어쩔 수 없어 몸은 교회에 있어도 마음은 다른 곳에 있는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고 있다.
禮拜가 살아야 信仰이 산다. 그리스도인이 살아 있는 신앙을 가지기 위해서는 역동적인 예배를 드려야 한다. 禮拜는 恩惠가 넘쳐야 한다. 가쁨이 충만하고, 죄가 고백되고, 감격이 살아나야 한다. 禮拜에 感激이 없으면 신앙이 쇠퇴하고 감격이 사라지며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의심이 시작된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신앙은 예배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준비하고 은혜를 받으려고 노력을 해야 한다.
또한 우리가 역동적인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예배 의식에 얽매이지 않고, 먼저 懺悔와 罪 容恕의 확인이 있어야 하고, 罪의 告白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리고 말씀을 통한 赦罪의 선포가 예배를 통하여 울려 퍼져야 하고, 내 自身과 내 物質을 드림으로 感謝와 感激에 있어야 한다. 우리는 올해 역동적인 예배를 드려 신앙이 살고, 교회에 가고 싶고, 무엇인가 주님께 드리고 싶으며, 주님을 만나 예배를 성공시켜 신앙의 놀라운 역사와 변화가 일어나는 한해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금년 우리 교회의 標語는 聖靈으로 거룩해진 교회입니다. 聖靈으로 거룩해진 교회가 되기 위해서 道德的인 삶을 追求하고, 아름다운 環境을 만들어가며, 靈性을 회복하여 성도다워지고, 역동적인 예배를 드려 신앙의 革命이 일어나고 거듭나고 새로워진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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