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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성령이여 임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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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절을 보면 ‘명절 끝날’이라고 하였는데, 이 명절은 초막절()을 말한다(요7:2).
이 초막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대광야에서, 40년 간 방황할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시고, 반석에서 생수로 갈증을 해결해 주신 사건을 기억하고, 감사 드리는 절기다.
이 절기는 8일 동안 계속되는데, 유대 백성들은 광야에 초막을 치고 지내다가, ‘큰 날’이라고 하는 마지막 날에는, 제사장이 금주전자를 들고 실로암 연못에 가서, 물을 떠다 제단을 7바퀴 돌며, 물과 포도주를 제단에 함께 붓는다. 많은 사람들이 2줄로 같이 물을 길어 와서, 성전 제단에 부었다.
이때 제단에 물을 부으며, 여호와 하나님께 비를 내려 주시기를 기도한다.
물을 쏟으며 비는 내려달라는 말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달라는 말이다.
욜2:28-30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모든 예배자는 “여호와 하나님!, 주님의 성령을 이제 우리들에게 내려주소서!”라고 기도 드렸다.
제사장이 금 주전자에 물을 길어와, 제단에 물을 부을 때, 주님께서는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37)하셨다.
1. 누구든지 목마르거든(37)
지금 비를 내려 달라고, 간절히 기도드릴 때, 예수님께서는 육체적인 목마름만 생각하는 그들에게, 실물교육을 통하여, 사람들이 영적으로 목마른 상태에 있음을 지적하셨다.
사람들은 누구든지, 영적으로 목마른 상태에 있다.
세상이 주는 물은 마시면, 조금 있다가 다시 목마르게 된다. 세상이 주는 만족은 순간적이다.
돈도 명예도 모두가 순간적이다. 그래서 더 갈증만 느끼게 된다.
시대가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사람들은 평안하기보다는 불안함을 느낀다. 갈증을 느끼게 된다.
현대인은 도태되거나 낙오되지 않기 위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생존경쟁을 하며 살아야 한다.
그래서 피곤하고 불안한 마음과 육신을 달래기 위해, 쉴 곳을 찾지만 쉴 곳이 없다.
며칠 전 교회에서 기도를 하는데, 한밤 2시경쯤, 요란한 오토바이 소리가 밖에서 났다.
밖을 내다보니, 일명 ‘폭주족’이라고 하는 자들이, 여자아이들을 하나씩 뒤에 태우고, 요란한 소음을 내면서, 마치 곡예를 하듯이, 미친 듯이 달리고 있었다.
왜 이들은, 한밤중에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돌아다닐까요 영혼이 불안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인간은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어서, 여호와 하나님의 생명이 그 속에 들어 있어야 평안함을 느낀다.
여호와 하나님 없이는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뻥 뚫린 가슴을 누구나 다 가지고 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계셔야 할 자리가, 텅텅 비어 있기에 불안하다.
통계를 보면, 무속인이 40만 명이 넘었고, 서점에서 팔리는 책들 중에서, 5권 중 하나가 무속인이 쓴 책이다. 지식인이 쓴 책보다, 무속인들이 쓴 책을 읽는 이유는, 영혼이 불안하기 때문이다.
목마른 영혼을 마실 것을 찾는데, 한국 사람은 수입의 많은 부분을, 술값으로 지불한다.
1인당 술 소비량은 세계 최고이다. 왜 술을 마시는가 이 험한 세상을 제정신으로는, 도저히 살아갈 자신이 없으니까, 술을 마신다. 영혼의 갈증을 잊어보려고, 술을 마셔댄다.
요즘 노래하는 사람들을 보면, 괴성을 질러대고 미친 듯 흔들어 댄다. 그 이유는 그렇지 않으면 미칠 것 같기에, 몸부림을 친다. 이렇게 영혼의 몸부림을 치는 사람들이 늘어간다.
현대인들은 물질적으로 전보다 훨씬 풍요로워졌지만, 좀처럼 마음에 만족함이 없다.
마음이 공허한 사람일수록, 감추려고 겉치레를 화려하게 하고, 술과 마약 같이 순간적인 쾌락을 주는, 그 무엇으로 잊어보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으로는 절대 채워질 수 없다.
세계적인 문호 헤밍웨이가, 자살한 이유는, 영혼에 대한 갈증을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갈증의 원인을 발견하지 못했기에,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
교회를 다녀도 마음이 허전하고, 광야의 외로운 한 마리 낙타처럼, 고독함을 느끼는 이유는,
주님의 영으로, 우리 영혼을 온전히 채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도들이 자신의 영혼을 채울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주님께 나아가서 생수를 마셔야 한다(37).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이시기에,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목마른 사람에게 도덕, 철학, 종교를 이야기한다고 목마름이 가시지 않는다.
답답하십니까! 피곤하십니까! 예수님을 만나면 해결되는데, 만날 수 있는 조건은 아무 것도 없다.
누구든지 나와서 만날 수 있고, 만나면 우리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친다.
그러므로 오늘, 영적이고, 육적인 문제를 해결하시는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란다.
2.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어떻게 만나야 하나 주경 학자들은 요7:38의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는 말씀과,
19:34의 “…한 군병이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는 말씀과 연결시켜서 해석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 십자가에 높이 달리셨다.
그때 군병 한 사람이, 예수님의 옆구리에 창으로 찔렀을 때, ‘물과 피’가 쏟아져 나왔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위에서, 물과 피를 한 방울도 남김없이 다 쏟으셨다.
이 예수님의 물과 피가, 우리의 영혼의 갈증을 해결한다는 말이다.
광야에서 사람들이 물이 없어서 갈증에 시달릴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켜서 반석을 치게 하시고, 그 반석에서 물이 쏟아져 나와, 갈증을 해결하게 되었다.
바울은 광야의 반석에서 물이 나와 갈증을 해결한 사건은, 반석 되신 ‘그리스도’(고전10:4)로 설명했다. 생수가 저절로 생겨나지 않고, 반석되신 예수님의 몸이 깨짐으로 주어졌다.
예수님을 만나면 선물을 주신다. 그 선물이 생수이다. 생수는 바로 성령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이 성령이 흘러 넘쳐야 한다. 생수의 강이 흘러 넘쳐야 다시 살아난다.
문명의 발생은 강을 끼고 나타났다. 이처럼 성령께서 우리에게 임하시면, 복음을 깨닫고, 무능하고 구제불능의 사람들도, 다시 살아나게 된다.
삶의 의미를 느끼기 시작한다. 삶에 기쁨이 넘쳐나기 시작한다.
그런데 예수님의 보혈과 성령의 능력이, 이론만 있지 실체가 없기에 삶이 비참하다.
목마른 사람이 찾아왔을 때, 이 물은 당신의 오장육부를 시원하게 만들어주는 생수라고 소개할 뿐, 생수는 먹지 못하고 돌아간다. 그래서 목마른 사람은, 약이 올라 돌아가게 된다.
성령 충만하면 된다. 말씀 충만하면 된다. 기도하면 된다…, 이론은 있다.
기도가 중요하다 하지만, 기도를 체험하지 못하고, 성령이 중요하다 하지만, 성령을 맛보지 못한다. 말씀으로 세상을 이겨야 하는데, 말씀을 체험하지 못한다.
교회가 오아시스처럼 되어야 하는데, 오아시스가 되기보다는 신기루처럼 되어 버렸다.
주님을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 예배를 통해서 만날 수 있다.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를 드려야 한다. 그림만 보고가지 말고, 신령과 진정한 예배를 통해, 성령님을 만나서 갈급함을 채우자.
18세기 유럽의 교회는, 예배의 생명을 잃어 버렸다. 그때 “어떻게 하면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할 수 있는가” 진지하게 고민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로 ‘진젠돌프’ 백작이었다. 그는 예배의 부흥을 위해 간구했고, 28세에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모라비안 교파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모라비안 교파는 예배를 드릴 때마다,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
모라비안 교파가 중요한 이유는, 요한 웨슬레 때문에 그렇다.
요한 웨슬레는 옥스퍼드 대학을 나와, Holy club을 만들어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미국 조지아 주의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대서양을 건너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큰 풍랑을 만나게 되었다. 돛대가 부러지고 난파의 위험 지경에 도달하였다.
‘내가 죽으면 천국에 갈 것인가 지옥에 갈 것인가’ 확신이 없었다.
목사였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확신이 없었다. 이것만큼 안타까운 것이 어디 있습니까
웨슬레는 신성회 규칙에 따라 열심히 성경을 암송하고 기도를 하였다.
그러나 자기 목숨을 잃을 것 같은 공포 때문에, 그의 경건 훈련은 아무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런데 배 한구석에서, 모라비안 교도들이 예배를 드리는데, 얼굴에 평강이 있었다.
웨슬리는 고민을 하게 되었다. 나는 이렇게 두려워 떨고 있는데, 저들은 평강으로 채워져 있구나
웨슬레는, 모라비안 형제단원인 고틀립 스팽겐베르그와 신앙에 관한 대화를 나눴다.
“형제여! 그대의 가슴속에 계신 성령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하는가”
이때 웨슬레는 대답을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가’
웨슬레는 ‘물론 예수님이 온 세상의 구주임을 압니다’
그러자 그는 ‘내가 묻는 것은, 온 세상의 구주인 것을 묻는 것이 아니라, 그대 자신의 구세주라고 믿느냐’는 말이요 웨슬레는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하기 위해, 죽으셨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그는 대학에서 성경도 가르치고, 기도도 인도하며 경건한 지도자로 10년 간 헌신했지만,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는 단지, 각종 종교 프로그램에 익숙한, 종교인에 지나지 않았다.
다시 묻습니다. 예수님이 분명히 나의 구주와 주님 되심을 믿습니까
그 다음 웨슬리는 충격을 받고, 1738년 모라비안 교회 처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난 다음 예배의 능력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리고 난 다음,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이 무엇인가
광부들에게 나아가, 예수만이 참 생명이라고 외쳤다.
참된 예배의 회복 없이, 나가서 외칠 수 없다. 복음을 증거 할 수 없고, 선교도 할 수 없다.
우리에게도 예배의 회복이 일어나기 원한다.
3. 받을 성령을 가리킨다(39).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이는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임할, 성령을 가리키는 말씀이다.
성령님께서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않았다는 말은,
성령님께서 창세 전부터 계시며 활동하셨지만(창1:2, 시51:1), 성령의 내주하심이 없었다는 말이다.
성령의 사역은 구약에도 있었지만, 특별한 사람에게만 제한되어 있었다.
모든 믿는 자들에게 성령이 허락되는 성령의 내주하심은, 오순절 때부터이다(요16:7, 행2:1-4).
예수님께서는 지상에서 사역하시는 동안,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후, 성령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보혜사를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요14:16).
왜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셨는가
예수님의 구속사역이 불완전해서가 아니라, 우리 안에 넘치는 축복과 기쁨이 있게 하기 위해서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의 전파하는 자들에게, 권능을 부어주시기 위함이다.
아직 영광을 얻지 못하셨다는 말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을 통해, 죄에 대하여 사단에 대하여 승리를 얻으시며,
하늘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모든 자들 위에, 존귀와 영광을 얻게 됨을 말한다.
그런데 아직 영광을 얻지 않으셨기에,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임하지 않았고, 이 말씀은 성령의 사역을 말씀해 준다.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우리는 예수님을 믿을 수도 없고, 생수의 강도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이 초막절 행사를 하러 왔지만, 초막절의 주인이시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초막절의 주인이 예수님임을 충분히 알려주셨지만, 그들은 믿지 않았다.
이들이 지금 초막절 행사, 종교적인 갈증 때문에 올라왔다.
그러나 종교적인 행사를 통해, 환희와 흥분과 감격의 도가니 속에서 하고 있으면서도,
그 행사의 주인공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몰라보았다
그러나 초막절 행사에 온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지 못해서 수군거림이 많았다.
12절을 보면, 예수님을 미혹케 하는 자, 사기꾼이라고 말하는 자도 있었다.
15절을 보면, 배우지 못한 자라고 하고, 20절을 보면, 귀신이 들렸다고 했다.
41 ,52을 보면, 갈릴리 출신 - 시골 촌뜨기라고 했다.
초막절 행사를 하러 온 사람들이, 초막절의 주인 되신 예수님을 이렇게 몰라보았다.
그 이유는 그들이 성령을 아직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의 시대를 성령의 시대라고 한다.
성령이 없이는 예수님을 알 수도 없고, 심령에 만족함도 없다. 그러므로 성령을 사모하시기 바란다.
성령께서 내 안에서 흘러 넘칠 때, 만족함이 있다. 갈증이 해결된다. 허전한 마음이 풍만해 진다.
제자들도 예수님을 따라다녔지만, 성령을 받기 전에는 배반하고 도망쳤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하셨지만, 죽음의 위협 속에서, 문을 박차고 나갈만한 용기가 없어서 모두 문을 걸어 잠그고 앉아서, 고민하고,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그러나 성령께서 임하시자 비겁한 제자들은, 두려움은 사라지고, 담력이 생겼다.
성령을 받고 나자, 모두다 자신 있고, 확신 있는 사람들로 바뀌었다. 혁명이 일어났다.
다락방을 박차고 나가, 부활을 전하고, 십자가를 전하고, 예수를 전했다.
우리에게 성령의 은혜가 넘치게 되면, 이런 용기와 자신감이 생긴다. 사망 권세를 이길 수 있다.
따라서 성령의 능력이 임해야 한다. 성령은 사모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령을 간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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