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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성령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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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포지방회 연합부흥회 때 일입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찾아와서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을 듣고 기도 중에 딸아이 시집보낼 통장이 있는데 그 통장을 바치라는 생각이 드는데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민감한 부분이기 때문에 어떤 교회를 다니시는지 물어보고, 그 교회 목사님이나 사모님과 상의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럴 마음이 전혀 없어 보이기에 이번 부흥회를 주관하는 홍목사님을 불러서 소개하면서‘이분과 이야기하시라고’했더니, 아랑곳하지 않고 저와 계속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옛날에도 몇 번 이런 감동이 있어서 적금도 깨어서 바치기도 하고, 큰 돈을 바쳤던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이제 딸아이가 결혼하기 위해 모아둔 적금을 깨어서 목사님들 선교헌금을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니까 참 입장 곤란하더라고요. 사실은 좀 골치가 아프니까 빠져나가려고 먼저 담임목사와 상담하십시오.
그래도 안 되어서 지방회 교육부장님인 홍목사님를 불러 소개를 했는데 결국 제가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 돈 집사님 돈 아니지요’ 그러니까 ‘예’하고 대답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집사님께 일차 권한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은 하나입니다. 우리는 동일한 성령을 믿습니다. 만일 집사님의 감동이 정말 성령이 주신 감동이라면 따님께 가서 이 사실을 말하고, 따님께 기도 한번 해 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따님도 동의하면 그때 집사님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런데 따님이 반대하면 안 됩니다. ’ 그렇게 하고 보냈습니다.
우리가 조심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것이 정말 성령님이 주신 음성이냐 성령님이 주신 감동이냐 하는 것입니다. 생각도 내 생각이 있고 여호와 하나님의 생각이 있고 사단의 생각이 있습니다. 뜻도 내 뜻이 있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있고 사단의 뜻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어떻게 구별하느냐하는 것이지요. 가장 큰 기준이 성경말씀이 되어야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장 일차적으로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성령이 해석한단 말입니다. 그리고 적용시키지요. 예수님의 사역을 보십시오. 철저히 말씀중심이며 여호와 하나님 중심입니다. 예수님께서 금식 후 마귀의 시험에서도 철저히 말씀으로 물리친 장면을 우리는 알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감정중심이란 말입니다. 성령의 음성을 듣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의 오류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오류도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분명히 성령의 음성을 듣는 것은 신앙생활에 매우 중요합니다. 저가 지금 말씀드리는 것은 성령의 음성이 위험하거나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니고 성령의 음성을 재대로 구별하자는 뜻입니다. 어떤 여자 청년이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 하는 남자 청년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혼자 짝사랑하다가 ‘구하라 그러면 주시리라’는 말씀에 의지해서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새벽기도부터 철야예배에까지, 그 청년과 결혼하게 해 달라고 매일같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습니다. 새벽에 기도하는데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
사랑하는 딸아! 내가 그 청년을 너의 남편감으로 예비하였느니라. ’ 그 소리를 듣고 얼마나 감격하고 고마웠는지 역시 여호와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고 살아계신 분이라고 고백하고,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보시기에 그 자매와 청년과는 전혀 안 맞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자매가 짝사랑하는 청년을 불러서 물어보았더니 이 청년은 이미 결혼할 여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가 바로 자기감정에 호소하고 응답을 생각하고 만들어 낸 것이지요.
슈퍼맨이 한창 유행할 때입니다. 어떤 아이가 영화도 슈퍼맨을 보고, 만화도 슈퍼맨만화만 보고, 그러다가 자기도 슈퍼맨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니까 어느 날 자기가 슈퍼맨이라고 느껴서 천호대교에서 뛰어내려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기준이 자기감정에 있지 말씀에 있지 않아서 나타난 현상이지요. 자기가 하고 싶은 것, 이루고 싶은 것에 집중하면 분명히 사단이 침범하게 되어있습니다. 미국에 있는 어떤 신학생이 학교를 위해서 기도를 합니다.
신학교가 많이 힘든지라 학생모집도 잘 되고, 좋은 신학교로 성장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기도하는데 이런 음성이 들러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옥상에서 떨어지면 이 학교를 높이 세우리라’ 그래서 3층에서 뛰어내렸다고 합니다. 여러분 예를 들어서 아버지께 ‘학교에 비품이 필요하니까 아버지가 좀 사주세요. ’ 그러면 ‘3층에서 뛰어내리면 사줄게’ 그렇게 말하는 부모도 없지만 그렇다고 뛰어내릴 자식이 어디 있습니까 상식에 맞지 않는 것이지요.
성령의 음성은 우리에게 기쁨을 줍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된 삶으로 인도하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일들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게 하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하고 주님의 뜻을 따라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음성은 우리의 잘못을 깨닫게 해서 결국 주님께로 인도한다는 것이지요.
예수 안 믿을 때는 몰랐든 죄가 예수 믿고 난 후에 그것이 죄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말씀을 거울로 삼아 성령의 깨우침이란 말입니다. 히브리서 3:7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팍하게 하지 말라.... ’ 13절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성령의 인도하심은 죄에서 강팍한 삶에서 벗어나 예수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심을 알아야합니다.
누구든지 이런 생각을 한두 번 해 보셨을 것입니다. ‘어떻게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느냐’ 성령님이 말씀하시면 무조건 다 따라하겠는데 성령이 도통 말씀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고 싶은데 주님이 우리를 만나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가 성령의 음성을 듣고 싶은데 말씀을 하지 않으신데요. 사실 이해시키기 어려운 문제지만 예를 들어 우리가 말씀 안에서 주님을 만납니다. 기도하면 말씀이 생각나게 하실 때를 경험해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께 이야기하면 여호와 하나님도 이야기하십니다. 그것이 대화지요. 성경공부 때 계속 강조하는 내용 중에 하나인데 주님은 성경말씀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께 이야기합니다. 서로 대화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간구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해 주시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요한복음 10: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 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우리는 다 양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목자로 한 양들이란 말입니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구별합니다. 우리도 그런 차원에서 구별할 수 있는 능력과 분별력을 주셨습니다. 이단교회 가서 예배를 드려보십시오. 이상합니다. 박옥수 교회가 침례교 간판이 붙어 있어서 우리 성도가 들어가서 예배를 드리는데 이상하더랍니다. 예, 이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다가 예수님 목소리를 흉내 내면서 우리를 유혹해서 넘어지는 성도들이 있는데요, 그래도 결국은 구별됩니다.
요한복음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성령께서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신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기도하면 생각나게 하십니다. 이것이 지금 여호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대화를 많이 한 사람이 성령의 인도를 민감하게 받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하신 말씀을 기억하지 않고 한번도 들어보지 않았다면 생각날 것이 없겠지요. 어떤 어려움이나 시련이나 고통이나 환란이나 아니면 선택해야할 부분이나 결정해야 될 일이나 이런 여러 가지 일들과 사건 앞에서 분명히 성령께서 가르쳐 주시고 생각나게 하십니다. 다만 생각나게 하시고 가르쳐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이 불순종한 것이지요. 성경말씀을 알면서 못하고 있는 부분은 성령의 말씀에 불순종한 것에 해당됩니다. 그 생각은 어디서 왔느냐가 중요한데 성령의 생각이냐 아니면 사단의 생각이냐 아니면 자기 생각이냐 하는 기준은 성경말씀에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 되는 것에 있습니다. 또한 그것은 기쁨입니다. 이 세 가지가 맞으면 성령의 음성으로 인정해도 됩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말씀에 있느냐, 말씀으로 조명되지 않는 부분은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느냐하는 것을 물어보십시오. 그리고 분명히 행하면 기쁨이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성령께서 직접음성으로 말씀하시는 것을 듣기 원합니다. 그리고 직접 말씀하셔야 성령의 음성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구약에 보면 거의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삶을 누렸습니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특별히 선택한 사람으로부터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여호와 하나님이 특별히 음성을 들려주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진리가 이미 선포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요한복음 16: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여기서 ‘자의로 말하지 않고’ 이 뜻은 예수님도 자기의 의도대로 말씀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자기 임의로 말씀하시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씀하신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다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예수님은 자신이 해야 할 일과 모든 말씀을 다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하시는 일은 예수님이 선포한 말씀에 대한 단순한 보충이 아니라 성부께서 계획하셨고 성자예수께서 선포하고 실행하셨던 전 구속! 사역에 관한 말씀의 의미를 다시 말하면 해석을 풍부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이미 말씀하신 것을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고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1:20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시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어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그러니까 설교말씀도 성령이 가르치는 것입니다. 설교가 내 이야기라고 생각되시면 성령이 지금 가르치고 계신 것이라 이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살하기 위해서 차를 몰고 바다를 향해 돌진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극동방송을 채널을 맞추어 놓았는데 설교자가 하는 말이 ‘자살하면 지옥 갑니다. ’하는 소리를 듣고 회개하고 주님 품으로 돌아왔다는 간증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그 설교자를 통해서 들러주는 성령의 가르침입니다.
문제는 아무리 목사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 할지라도 성경에 어긋나면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분이 2년 전에 유방암에 걸렀습니다. 물론 수술을 했지요. 그런데 암이 재발했는지 이제 골수까지 암이 전이된 상태였습니다. 치유와 예언에 은사가 있으신 목사님이 부흥회를 해서 그 부흥회에 참석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목사님께 상의를 했더니 ‘여호와 하나님께서 치유해 주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교회 건축헌금으로 700만원을 하십시오. ’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저는 목사님을 판단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이 그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 분이 돈이 전혀 없다는 사실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믿음을 보시기위해 그런 요구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가 아니 여호와 하나님이 돈 있는 자만 치유하십니까 성경에 어디 돈을 내야 치유해 주셨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은 조건을 거실 때 말씀에 순종하라고 했습니다. 믿고 구하라고 했습니다. 이장림목사가 1992년 10월 28일에 주님이 재림한다는 근거로 영이 아주 맑은 아이들의 예언을 믿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 아이는 북한에 가서 최초로 순교자가 될 것이라고 했는데 지금 회사에 다니고 있습니다.
여러분 아무 목사의 이야기를 믿지 마십시오. 예언은 그냥 기도한다고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아무나 예언이 나오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13:32-33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여호와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여호와 하나님이시니라’ 그러니까 예언하는 자들의 성령의 감화력은 인정하나 이것은 질서로 해야 된다고 합니다. 의식 없는 사람처럼 하지 말라고 분명히 경고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은 오직 화평이라고 했습니다. 예언은 점치듯이 그리고 점보듯이 하는 것이 아니라 화평을 위해서입니다. 예언을 통해서 주님과 화목하는 화평이 있느냐는 말이지요. 그런 차원에서 예언은 담임목사가 하는 경우가 최선책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설교자로 세우셨으니까 가장 적절하고 귀한 말씀을 전할 것입니다. 그리고 예언은 기도를 통해서 나오는 것인데 가장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이 담임목사입니다. 예언은 동시에 사랑으로 나옵니다. 성도들을 가장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목사입니다.
고린도전서 13:1-2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리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그러니까 초자연적인 방언과 예언이라 할지라도 사랑이 바탕이 되지 않고 사랑의 결과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란 말입니다. 아무 기도원이나 아무 목사들이 예언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하는 것보다 이들이 사랑으로 하는 것이며, 사랑의 결과를 가져왔느냔 말입니다. 이런 예언을 통해 가정이 깨어지고 시험에 들고 갈등하게 만드는 일이 수없이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사랑 없이 하는 예언은 아무효과를 내지 못한다는 것을 고린도전서에서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것에 감사해야 됩니다. 우리는 연약한 존재라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이는 마귀의 밥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돕는 분이십니다. 로마서 8:26에 성령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고 하셨습니다. 보혜사 즉 파라클레토스는 돕는 자라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말씀 그대로 도와주기 위해서 옆에 서 계신분입니다. 아이가 걸음마를 못해서 언제 넘어질지 모르는 그런 상황에 어머니가 옆에 서 있듯이 서 계시는 분이십니다. 불가능을 가능하도록 도와주시고 내 능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없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적인 능력으로 우리를 도우십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우리의 위로자가 되십니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님은 가장 매혹적인 위로자다’ 우리의 깨진 마음, 상한마음, 낙심한 마음, 침체된 마음, 어두움마음을 위로하십니다. 그리니까 평화를 주신단 말이지요. 그 평화는 위에서 내려오는 평화 성령이 주시는 평화입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치유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고린도전서 12:4-9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성령을 통해 여러 가지 역사가 일어나는데 반드시 치유의 역사도 일어납니다. 치유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깨닫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공급받는 것입니다. 치유를 통해서도 성령님은 우리를 향해 쉬지 않고 이런 일을 하십니다.
세상은 자기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살아가면서 자꾸 느낍니다. 자식교육도 미래도 내 마음대로 안 되는 법입니다. 자식이 좀 똑똑하면 바쳐줄 돈이 별로 없고 돈이 많아서 자식 뒷바라지 하려면 자식들이 말을 안 듣습니다. 건강도 마음대로 안 됩니다. 코미디언 김형곤씨도 건강유지하려고 헬스장에 갔다가 화장실에서 죽었습니다. 가정의 행복도, 인간관계도, 전도도 그렇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일수록 자기 마음대로 안 되는 법입니다. 정말 세상 살려면 은혜가 있어야하고 인도하심이 있어야하고 보살핌이 있어야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셨을 뿐만 아니라 삶 속에서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늘 보호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진리의 영으로 새롭게 하시고 기적을 베푸십니다. 이런 성령님과 함께 동행한다는 것이 기쁨이요, 성령님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것이 은혜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늘 걱정되고 염려되는 것을 기도로 성령님께 부탁하고 맡기면 됩니다. 이런 삶이 믿음의 삶이지요.
우리가 지나고 보면 이것이 다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였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될 때가 참 많지 않습니까 다 성령님의 인도하심 이였고 보살핌이었다는 것을 알 때가 많습니다. 어린아이가 자전거를 연습하기 위해 아버지가 자전거 뒤를 붙잡고 있어도 영원히 붙잡을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언젠가는 놓아야지요. 하지만 언제 넘어질까 잘 탈 수 있을까 염려하며 바라보는 아버지처럼 성령님이 우리의 삶을 지키고 계십니다. 넘어지거나 쓰러지면 당장이라도 달려와서 부추기는 것처럼 성령의 사랑이 우리 주위를 끊임없이 맴돌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영적인 감각을 가지고 성령의 말씀에 민감하게 반응을 하느냐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19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여기서 ‘감각 없는’은 영적인 감각을 말합니다. 영적감각이 없으면 자신을 방탕에 방임되어 더러운 것에 욕심을 내면서 살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히브리서 5:14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지각이 감각입니다. 영적인 감각을 가지고 살아가면 선악을 구별한단 말입니다. 성령에 민감하게 반응하기위해서는 먼저 말씀드린 것처럼 말씀대로만 살면 됩니다. 말씀에 거하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고 말씀으로 들러주시고 보여주시고 감동하시고 기쁨을 주십니다. 말씀에 집중하면 영적인 감각이 연단으로 강해지고 민감해집니다. 선악을 구별하고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알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성령이 우리를 보호하시며 인도하시며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살아가시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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