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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비와 같은 성령

본문

오늘은 교회력으로 볼 때 성령강림 주일입니다. 2000년 전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강림했던 사건을 기념하여 지키는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면서 홀로 남겨지게 될 제자들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을 대신해서 저들을 이끌어주시고, 저들에게 능력을 공급해 주실 여호와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제자들은 이 약속을 믿고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정말 그 약속대로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고 있던 120명의 제자들에게 성령이 강림하셨습니다. 성령 강림을 체험한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변화되었습니다. 마치 새 술에 취한 것처럼 전혀 다른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변화된 사람들이 모여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성령강림 사건으로 비로소 그리스도인들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이 성령강림 사건으로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이 땅에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거룩한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오늘 우리 교회가 바로 이 놀라운 사건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 뿌리가 바로 이 사건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 강림주일을 지키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가 누구이며 우리의 존재 근거가 무엇인지 다시금 재확인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 교회다운 교회가 되기 위해 새롭게 다짐하고 노력하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성령이 강림하셔서 이루어 내시는 놀라운 변화를 하나의 비유로 설명합니다. 바로 성령을 비로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내용을 보다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비 같은 성령
우선 두 표현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는 '벤 풀'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벤 풀이란 풀을 다 베어 낸 초장을 뜻합니다. 이제 새로운 싹이 나와서 초장에 가축을 먹일 풀이 자라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상황을 말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주로 목축을 했습니다. 그들에게 풀은 생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초장에 새 싹이 돋고 풀이 자라 나와야 할 텐데 작열하는 태양 아래 풀의 뿌리까지 말라 타들어 갑니다. 목동들의 마음까지 타들어 갑니다.
다른 하나는 '땅'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땅이란 밭을 말합니다. 이제 농사를 지을 준비가 끝났습니다. 씨앗도 준비가 됐습니다. 밭도 다 갈아놓았습니다. 이제 비가 와서 그 밭을 적셔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상황을 말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목축 외에 농사를 졌습니다. 밀과 보리 농사를 졌습니다. 그런데 뜨거운 태양 아래 밭이 타들어 갑니다. 씨를 뿌려도 싹이 나지 않습니다. 줄기가 나도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농부들의 애간장이 타들어 갑니다.
이 두 표현 벤 풀과 땅은 우리의 심령을 비유로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실 때 우리의 심령이 저 타들어 가는 초장처럼, 저 거북 등처럼 갈라진 논과 밭처럼 메마르고 타들어 가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코에 불어넣으신 생기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풍성한 생명의 역사가 소멸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기갈입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심각한 목마름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그 목마름을 채우기 위해서 쾌락에 몰입해 보기도 합니다. 성적인 쾌락에 자기 몸을 던져보기도 합니다. 레저와 오락에 광적으로 빠져보기도 합니다. 어떤 분들은 술이나 마약에 푹 빠져보기도 합니다. 또 어떤 분들은 인터넷이나 컴퓨터 게임에 몰입해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로 그 목마름을 채울 수 없다는 것을 나중에 가서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모든 것이 헛되다고 소리를 질러댑니다.
그래서 일부의 사람들은 그 목마름을 영적인 것에서 찾아보려고 참선을 한다, 요가를 한다, 동양의 신비적인 종교에 몰입하기도 해 봅니다. 이런 흐름을 영성운동 또는 뉴에이지 운동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포스트모던이즘의 한 현상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도 어느 정도 목마름을 채워주는 것 같으나 근본적인 해결책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 55:1을 보면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 인간이 목말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목마름을 해결할 방법이 무엇인지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 목마름을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초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 보면 '벤 풀에 비 같이, 땅을 적시는 소낙비 같이 임하리니'라고 약속해 주고 계십니다. 메마른 초장에 불타는 논밭에 비를 내리시고 소낙비를 내려주셔서 풀이 싹이 나게 해 주시고 곡식이 열매를 맺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심령의 목마름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여호와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결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 여호와 하나님의 방법이 바로 성령의 강림인 것입니다.
욜 2:28을 보면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부어준다 라는 단어를 히브리어 동사 샤파크(&p'v))를 쓰고 있습니다. 이 말이 바로 소낙비가 내리는 모습을 표현한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생의 목마름, 인생의 이 갈증을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성령을 소낙비처럼 우리의 심령에 부어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영적인 존재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흙으로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만드신 생령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갈증은 표면적인 육적인 갈증 뿐 아니라 내면적인 영적인 갈증이 있습니다. 이 영적 갈증은 물을 마신다고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욕망을 채운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정욕을 불태운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생령으로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의 심령에 성령을 부어주실 때만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성령이 우리 심령에 부어질 때 일어나는 구체적인 현상을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성경에서 말씀하는 비를 이해하려면 이스라엘 지방의 기후부터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입니다. 그래서 건기와 우기가 뚜렷하게 구분됩니다. 10-11월부터 이듬해 3-4월까지가 비가 내리는 우기입니다. 그리고 4-5월에서부터 9-10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는 건기입니다. 그리고 우기 때 비가 내리는 것도 일정한 기후 패턴을 보이고 있습니다. 우기가 시작되는 10-11월경에 비가 내리는데 이것을 이른 비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우기가 끝나는 3-4월경에도 비가 내리는데 이것을 늦은 비라고 부릅니다.
이른 비 같은 성령
이른 비는 우기가 시작되는 10-11월 경에 내리는 비를 말합니다. 이 이른 비는 건기인 여름철을 지나면서 극도로 메마른 대지를 적셔줍니다. 이 비로 여름철 동안 메마른 땅은 부드러워 지고 농부들은 땅을 기경하여 파종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초장에는 다시 파릇파릇 새싹들이 돋아나 가축들이 먹을 풀들이 자라게 합니다
그러니까 이 이른 비는 새롭게 새 생명이 싹트게 만들어주는 놀라운 역할을 합니다. 이 이른 비가 없다면 대지에 새 생명은 형성될 수 없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이 이른 비처럼 우리 심령에 부어주십니다. 그러면 우리 심령 속에 새로운 생명 영생이 마치 대지에 새 싹이 돋아나듯이 움트게 됩니다.
행 2장을 보면 처음 교회가 생길 때 마치 이른 비처럼 성령이 각 심령 위에 부어졌습니다. 저들이 새롭게 변화되었습니다. 저들의 심령에 영생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저들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고 영생을 얻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우리 교우 가운데 한 분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특별하신 역사로 우리 교회에 나오시게 됐습니다. 이분이 크고 좋다고 소문난 교회도 가봤지만 교회에 들어서면서 '이 교회다!' 그런 마음이 들더랍니다. 첫 번째 예배드리는 날 마음이 뜨거워지고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더랍니다. 설교 말씀을 듣는데 정말 자기 들으라고 하는 말씀이더랍니다. 그래서 전도한 분이 자기 형편을 시시콜콜 다 보고 했는 줄 알았을 정도랍니다.
그 날 이후로 정말 예수를 뜨겁게 영접하고는 생활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답니다. 과거 즐기던 것 다 재미없어지고 정말 심령에 기쁨이 넘치고 인생이 즐겁고 행복해 지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로 이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른 비와 같은 성령을 그 심령 속에 부어주신 것입니다. 이른 비와 같은 성령이 그 심령에 부어지니까 새 생명이 그 심령 속에서 싹트기 시작합니다. 그동안 몸부림치며 찾아 헤메던 인생의 목마름이 해갈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른 비와 같은 성령이 지금 이 시간 임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진정 예수 영접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심령 속의 영적인 목마름이 다 해결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늦은 비 같은 성령
봄비라고도 부르는 늦은 비는 3-4월경에 내립니다. 겨울 우기 동안 자란 농작물이 마지막 결실을 위해 또 다른 목마름이 있습니다. 이 때 비가 내리지 않으면 제대로 곡식이나 과일들이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때 정말 적절한 비를 내려 주십니다. 이것을 늦은 비라 부릅니다. 이 늦은 비는 곡식의 작황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비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늦은 비를 축복의 단비라고 부릅니다.
예수 믿고 영생을 얻고 영적 갈증을 푼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또 다른 형태의 갈증을 만나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 열매를 드리고 싶은 갈증입니다. 두 가지 열매를 맺고 싶은 간절한 소원이 생겨나게 됩니다.
 첫째, 인격과 성품의 열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은 하고 있지만 여전히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삽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만 최근의 대통령 아들들의 비리 문제가 불거져 나왔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은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성경을 읽고 있다, 기도했다'라고 소개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주먹 계의 대부라는 김태촌이라는 사람이 교도소에서 회심하고 예수를 믿게 됐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출소한 뒤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보도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 가서 다시 교도소에 재수감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현상을 보면서 한 가지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저 사람들이 정말 예수를 믿기는 믿었는가 궁금하시죠 제가 본인에게 확인해 본 것은 아니지만 저들이 예수를 믿기는 믿었고, 은혜도 받기는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이 이른 비의 은혜만 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런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사는 삶을 완전히 청산하고 인격과 그 성품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려면 또 다른 성령의 비를 맞아야 합니다. 바로 늦은 비를 그 심령에 충만히 받아야 합니다. 그럴 때 성령의 열매가 그 심령 속에 풍성하게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갈 5:22을 보면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늦은 비로 임하시는 성령을 충만히 받으면 그 인격과 성품 안에 이런 9가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전도와 봉사의 열매입니다.
많은 분들이 예수를 믿으면서도 교회에서 봉사의 삶을 살지 못합니다. 세상에 나가서 전도하지 못합니다.
이번에 태신자 전도 운동의 열매를 살펴보니까 태신자 작정하는 일도 제대로 참여하지 못한 분들이 많더라구요. 어떤 분은 장로요, 권사요, 안수집사 항존직인데도 태신자 작정조차 못한 분들이 있더라구요. 태신자를 작정할 뿐 아니라 전도해서 예수 믿게 까지 인도한 사람은 더 적더라구요.
사도행전은 여호와 하나님의 일꾼들이 성령의 능력을 받아 귀한 열매를 거두는 내용을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읽어보면 결정적인 순간에 사역자들의 모습을 소개하면서 공통된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행 4:8을 보면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복음을 전하다 체포되어 말하자면 종교재판에 회부된 상태에서 담대하게 증거할 때의 모습입니다. 행 7:55을 보면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라고 했습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담대하게 순교 당할 때의 모습입니다. 행 13:9을 보면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박수 엘루마를 대적할 때의 모습입니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주님을 위해 사역의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모두가 늦은 비로 임하시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예수 믿고 주를 위해 봉사하고 헌신된 삶을 살려면 늦은 비로 임하시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봉사의 열매, 전도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성령을 받으려면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른 비로 임하시는 성령, 늦은 비로 임하시는 성령을 우리 심령 속에 받을 수 있을까요
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비가 올 때 빗물을 받으려면 장독 뚜껑을 열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을 열면 됩니다. 계 3:20을 보면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음엇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마음의 문을 활짝 열면 성령이 우리의 심령 속에 이른 비로 임하시고 또 늦은 비로 임하십니다.
그러면 마음의 문을 열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시 42:1 말씀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라고 말씀했습니다. 사모하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오는 사람들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둘째, 기도하십시오. 눅 11:13을 보면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말씀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약속하신 것처럼 내 입으로 기도하면 우리 마음 문이 활짝 열려서 성령을 받을 수 있습니다.
 셋째, 열중하십시오.
일부 교인들 가운데 기도회나 예배에 참석해서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몇 몇 유형이 있습니다. 우선 교정파가 있습니다. 예배 시간에 주보 교정보는 사람입니다. 주보 앞뒤를 꼼꼼히 살피고 꼭 빠뜨리지 않는 것은 헌금자 명단입니다. 다음으로 정서불안파가 있습니다. 예배 시간에 안절부절하지 못합니다. 시계도 봤다가 화면도 봤다가 옆 사람도 봤다가... 또 줄반장파가 있습니다. 예배 시간에 사람들 찾습니다. 우리 구역식구가 다 왔나 우리 여전도회원들 다왔나 장로님들은 다 장로석에 앉아있나... 몽유병파가 있습니다. 정말 불가사이한 일입니다. 찬양대 찬양까지는 그렇게 생생하던 분이 설교만 시작되면 갑자가 깊은 수면에 빠집니다. 옆에서 헛기침을 해도 소용없습니다. 아내가 허벅지를 꼬집어도 막무가네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예배드릴 때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집중하고 열중해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 문이 열리고 성령을 받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갈급함을 해결해 주시려고 오늘도 우리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로 성령을 보내주십니다. 우리가 심령의 문을 활짝 열고 이른 비로 임하시는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 새 생명이 싹트게 됩니다. 우리 안에 영적인 갈증을 해소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심령의 문을 활짝 열고 늦은 비로 임하시는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인격과 성품의 열매 그리고 봉사와 전도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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