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본문
본문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 빌립이 단도직입적으로 자기가 따르고 있는 스승에게 제출한 난제였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사제지간의 평범한 대 화로 만들어 넘길 수 없는 입장에 서 있습니다.
오늘의 많은 사람들이 오늘 한국교회를 향하여 똑같은 질문 "여호와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화살을 던지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화살이 나의 심장을 뚫고 지나가는 듯한 아픔을 느꼈습니다. "너희들이 섬기는 그 여호와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이제 우리들이 죽게 되었으니 그 여호와 하나님을 보여 달라"는 목메인 울부짖음이 무디어진 교회의 청각을 때리는 것 같습니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하는 빌립에게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자신이 넘치는 대답입니까? 정말로 부럽기가 한이 없는 대답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서 있는 교회로써 "여호와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는 세상을 향하여 "우리 교회를 보라. 그리고 우리 교회의 회원들이 하는 일을 보라. " 교회가 이렇게 자신 있는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문제는 오늘의 우리 교회들이 얼마나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여호와 하나님이 있다면 좀 보여 달라"는 비웃음을 당하는 교회의 어려움은 초대교회의 경우와는 다릅니다.
사도행전의 초대교회들처럼 언제나 어디서나 목숨을 걸고 구원의 복음을 증거하다가 당하는 욕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의 교회는 선의로 해석해도 전혀 명분을 찾아 낼 수 없는 집안싸움이나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교회의 현실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의 살아 있음을 볼 수 있는 그런 신앙생활이 절실히 요청됩니다. 우리는 이 본문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을 분명히 찾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만남이 없이는 선의 근거를 찾을 수 없고,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와 만남이 없이는 그 곳에는 사람과 사람의 참된 만남도 없습니다. 사람이 참된 인생의 길을 찾으려고 한다면 여호와 하나님과의 만남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여호와 하나님과의 만남이 어디에서 가능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즉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수 없다"고 확답을 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주님은 "빌립아 내가 너와 이같이 오래 있으되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믿지 못하느냐 믿지 못하였거든 내가 행하는 일을 보고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볼 수 있다면 그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1. 능력의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를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의 현실적인 육체적 고통의 문제를 능력으로 해결 해 주십니다. 앉은뱅이가 걷게 되고, 소경이 보게 되고, 마귀가 쫓겨나고, 배고픈 자가 배불리 먹게 되고, 죽은 자가 살고 하는 우리 인간의 육체적 고통을 직접 해결해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주님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육체적 고민을 가진 사람들이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구름같이 주님 의 앞뒤를 옹호해서 따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기적으로 보여주신 아버지를 만족할 수 없습니다. 기적은 아버지의 초보적인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 즉 철없는 어린 아이에게 보여주신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값 비싼 영양가 있는 반찬과 음식보다 임시 먹기 좋은 과자를 더 반갑고 고맙게 여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적을 베푸시고,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병 치료와 폭풍을 잔잔케 하는 기적을 보고 따르는 군중들을 향하여 '너희가 나를 찾아온 것은 떡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양식을 위하여 일을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줄 것이나 그것은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에게 권위의 인을 치셨기 때문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육신의 능력뿐 아니라 영원한 우리의 인을 쳐서 영원한 세계를 보장하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2. 사랑의 여호와 하나님임을 볼 수 있습니다
능력의 기적으로 인간고를 건져주시는 아버지뿐 아니라 높으시고, 참되시고 거룩하신 윤리와 도덕의 아버지를 아들을 통해 보여 주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빛과 사랑의 존재이고, 악을 미워하고 선을 기뻐하시며, 약한 자, 죄에 고민하는 자, 모든 악에 눌린 자를 건져 내셔서 잃어버린 죄인 하나 를 찾아 오셨으며, 당신의 지으신 세계가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신음하는 역사를 보시고 그대로 묵과하시지 않으시고, 죄와 사망의 역사에 신음하는 세상에서 자신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인류를 죄에서 사유하는 길을 여시고, 죽음에서 생명의 꽃을 열어주신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여호와 하나님의 모습은 진정 사랑의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의 눈물과 괴로움을 대하실 때마다 긍휼의 정을 일으키시는 예수를 본다면 여호와 하나님은 땅의 근심과 걱정을 보시고 마음 아파 괴로워하시는 사랑의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고, 세리와 죄인 같은 인간 찌꺼기들과 벗하시고 한 식탁에 앉으시며,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식을 무조건 용서하시고, 그에게 의의 색옷을 갈아 입히는 예수님을 본다면 모든 이를 아들로 맞아주는 사랑의 아버지를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품을 떠나 스스로 잃어버린 인간들을 되찾으시려는 안타까움에서 치욕의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하신 예수님의 크신 희생을 본다면 인간을 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의 결정적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을 믿는 성도들이 사랑의 뜻을 깨달아 이웃 사랑하기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는 생활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누가복음 10장에 기록된 마치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마치 여리고 도상에서 강도 만난 자의 참 이웃인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생활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삼십 삼 년간의 지상생활이 오로지 우리 인간들에게 우리들의 괴로움 속에 들어 오셔서 우리와 고락을 같이 하시는 사랑의 아버지이심을 보여주신 일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처럼 그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성도를 통해서 온 세상에 전파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3.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특수 계시로써 여호와 하나님을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은 육신으로 올 때는 마리아의 아들로 완전한 사람입니다. 그래 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부를 때 "인자"(사람의 아들)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완전한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완전한 여호와 하나님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어조, 여호와 하나님의 메시지,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 그리고 우리 인간을 위한 여호와 하나님의 생각을 지니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내셨기 때문에 오신 것입니다.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보내심 받은 예수님은 완전한 사람이요, 완전한 여호와 하나님이셨습니다.
(1) 주님은 "너희가 내 말하는 것을 들을 때 즉시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 자신의 진리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신 말씀은 주님의 말씀이 여호와 하나님의 진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2) 또한 예수님의 행하시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은 빌립에게 "내가 하는 말로서 너희가 나를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대답은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도 같은 대답을 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들의 제자들을 예수님에게 보내면서 예수님께서 진짜 메시야이신지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찾아야 할 것인지 물어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매우 단순했습니다. "돌아가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요한에게 고하라 그러면 요한이 납득하리라"(마 11:1-6)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향한 신앙은 예수님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오늘날의 세상은 어떤 면에서는 교회를 증오합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고 화살을 던질 때가 흔히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어디 있냐는 말씀은 우리들의 심장부를 찌르는 화살입니다. 이 화살을 어떻게 처리하겠습니까? 우리는 외면당하는 사회의 구석구석에 시선을 던져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내 이웃에게 베푸는 길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보이는 길입니다. 우리가 베푸는 사랑은 예수님의 사랑이요, 예수님의 사랑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며,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은 큰 세상을 사랑하며, 내 이웃을 긍휼히 여기는 것에 귀결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많은 사람들이 오늘 한국교회를 향하여 똑같은 질문 "여호와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화살을 던지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화살이 나의 심장을 뚫고 지나가는 듯한 아픔을 느꼈습니다. "너희들이 섬기는 그 여호와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이제 우리들이 죽게 되었으니 그 여호와 하나님을 보여 달라"는 목메인 울부짖음이 무디어진 교회의 청각을 때리는 것 같습니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하는 빌립에게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자신이 넘치는 대답입니까? 정말로 부럽기가 한이 없는 대답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서 있는 교회로써 "여호와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는 세상을 향하여 "우리 교회를 보라. 그리고 우리 교회의 회원들이 하는 일을 보라. " 교회가 이렇게 자신 있는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문제는 오늘의 우리 교회들이 얼마나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여호와 하나님이 있다면 좀 보여 달라"는 비웃음을 당하는 교회의 어려움은 초대교회의 경우와는 다릅니다.
사도행전의 초대교회들처럼 언제나 어디서나 목숨을 걸고 구원의 복음을 증거하다가 당하는 욕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의 교회는 선의로 해석해도 전혀 명분을 찾아 낼 수 없는 집안싸움이나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교회의 현실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의 살아 있음을 볼 수 있는 그런 신앙생활이 절실히 요청됩니다. 우리는 이 본문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을 분명히 찾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만남이 없이는 선의 근거를 찾을 수 없고,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와 만남이 없이는 그 곳에는 사람과 사람의 참된 만남도 없습니다. 사람이 참된 인생의 길을 찾으려고 한다면 여호와 하나님과의 만남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여호와 하나님과의 만남이 어디에서 가능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즉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수 없다"고 확답을 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주님은 "빌립아 내가 너와 이같이 오래 있으되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믿지 못하느냐 믿지 못하였거든 내가 행하는 일을 보고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볼 수 있다면 그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1. 능력의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를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의 현실적인 육체적 고통의 문제를 능력으로 해결 해 주십니다. 앉은뱅이가 걷게 되고, 소경이 보게 되고, 마귀가 쫓겨나고, 배고픈 자가 배불리 먹게 되고, 죽은 자가 살고 하는 우리 인간의 육체적 고통을 직접 해결해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주님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육체적 고민을 가진 사람들이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구름같이 주님 의 앞뒤를 옹호해서 따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기적으로 보여주신 아버지를 만족할 수 없습니다. 기적은 아버지의 초보적인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 즉 철없는 어린 아이에게 보여주신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값 비싼 영양가 있는 반찬과 음식보다 임시 먹기 좋은 과자를 더 반갑고 고맙게 여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적을 베푸시고,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병 치료와 폭풍을 잔잔케 하는 기적을 보고 따르는 군중들을 향하여 '너희가 나를 찾아온 것은 떡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양식을 위하여 일을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줄 것이나 그것은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에게 권위의 인을 치셨기 때문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육신의 능력뿐 아니라 영원한 우리의 인을 쳐서 영원한 세계를 보장하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2. 사랑의 여호와 하나님임을 볼 수 있습니다
능력의 기적으로 인간고를 건져주시는 아버지뿐 아니라 높으시고, 참되시고 거룩하신 윤리와 도덕의 아버지를 아들을 통해 보여 주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빛과 사랑의 존재이고, 악을 미워하고 선을 기뻐하시며, 약한 자, 죄에 고민하는 자, 모든 악에 눌린 자를 건져 내셔서 잃어버린 죄인 하나 를 찾아 오셨으며, 당신의 지으신 세계가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신음하는 역사를 보시고 그대로 묵과하시지 않으시고, 죄와 사망의 역사에 신음하는 세상에서 자신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인류를 죄에서 사유하는 길을 여시고, 죽음에서 생명의 꽃을 열어주신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여호와 하나님의 모습은 진정 사랑의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의 눈물과 괴로움을 대하실 때마다 긍휼의 정을 일으키시는 예수를 본다면 여호와 하나님은 땅의 근심과 걱정을 보시고 마음 아파 괴로워하시는 사랑의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고, 세리와 죄인 같은 인간 찌꺼기들과 벗하시고 한 식탁에 앉으시며,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식을 무조건 용서하시고, 그에게 의의 색옷을 갈아 입히는 예수님을 본다면 모든 이를 아들로 맞아주는 사랑의 아버지를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품을 떠나 스스로 잃어버린 인간들을 되찾으시려는 안타까움에서 치욕의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하신 예수님의 크신 희생을 본다면 인간을 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의 결정적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을 믿는 성도들이 사랑의 뜻을 깨달아 이웃 사랑하기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는 생활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누가복음 10장에 기록된 마치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마치 여리고 도상에서 강도 만난 자의 참 이웃인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생활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삼십 삼 년간의 지상생활이 오로지 우리 인간들에게 우리들의 괴로움 속에 들어 오셔서 우리와 고락을 같이 하시는 사랑의 아버지이심을 보여주신 일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처럼 그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성도를 통해서 온 세상에 전파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3.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특수 계시로써 여호와 하나님을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은 육신으로 올 때는 마리아의 아들로 완전한 사람입니다. 그래 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부를 때 "인자"(사람의 아들)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완전한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완전한 여호와 하나님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어조, 여호와 하나님의 메시지,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 그리고 우리 인간을 위한 여호와 하나님의 생각을 지니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내셨기 때문에 오신 것입니다.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보내심 받은 예수님은 완전한 사람이요, 완전한 여호와 하나님이셨습니다.
(1) 주님은 "너희가 내 말하는 것을 들을 때 즉시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 자신의 진리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신 말씀은 주님의 말씀이 여호와 하나님의 진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2) 또한 예수님의 행하시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은 빌립에게 "내가 하는 말로서 너희가 나를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대답은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도 같은 대답을 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들의 제자들을 예수님에게 보내면서 예수님께서 진짜 메시야이신지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찾아야 할 것인지 물어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매우 단순했습니다. "돌아가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요한에게 고하라 그러면 요한이 납득하리라"(마 11:1-6)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향한 신앙은 예수님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오늘날의 세상은 어떤 면에서는 교회를 증오합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고 화살을 던질 때가 흔히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어디 있냐는 말씀은 우리들의 심장부를 찌르는 화살입니다. 이 화살을 어떻게 처리하겠습니까? 우리는 외면당하는 사회의 구석구석에 시선을 던져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내 이웃에게 베푸는 길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보이는 길입니다. 우리가 베푸는 사랑은 예수님의 사랑이요, 예수님의 사랑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며,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은 큰 세상을 사랑하며, 내 이웃을 긍휼히 여기는 것에 귀결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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