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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 삼위일체의 하나님

본문

사도신경은 우리가 믿는 신조에 대해 요약하고 있습니다.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
성자 예수 그리스도, 성령에 대한 고백을 차례로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한 분에 대한 고백을 하면 될 것을 왜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하여 고백하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에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께서 이루어주시는 친교”라는 구절이 나와 있습니다만,
우리는 왜 꼭 이런 식으로 축복기도를 하는 걸까요?
삼위일체의 교리를 이론적으로
설명하자면 아주 어려운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으로
교회가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을 신앙고백으로 채택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이 교회력으로 삼위일체주일인데,
그 의미를 오늘 함께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기독교의 독특한 신앙고백입니다.
유대교는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같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에서 기독교와 달리합니다.
유대교는 예수를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
알려준 예언자 정도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호멧교나 힌두교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기독교인들 가운데서도,
실제로는 이들과 별 차이없는 신앙고백을 하고 있는
사람이 꽤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대상은 여호와 하나님이고,
예수는 우리에게 신앙의 길을 일러준 위대한 성인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라면,
우리는 유대교도나 마호멧교도와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요즘에, 종교간의 대화를 강조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을 고수하는 ‘그리스도 중심 모델’을 가지고는
대화가 안 되니까, 대화가 되는 방식으로 하자.
즉 차이점 가지고 얘기하지 말고,
공통점을 가지고 하자, 그게 뭐냐?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믿는 여호와 하나님이나,
유대교도들이 믿는 여호와 하나님,
그리고 마호멧교도들이 믿는 알라나 결국은 한 분 아니냐?
그러니 여호와 하나님 중심 모델,
즉 신중심모델로 대화하자, 그런 얘기입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근본적인 한계를 안고 있습니다.
대화를 위해서는 공통점도 중요하지만 차이도 중요합니다.
대화를 위해서 나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해야 대화의 내용이 풍성해지고
뭔가 기여할 바가 있는 것이지, 나의 정체성을 일방적으로 포기하는 것은
대화의 의미를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요즘,
가장 local한 것이 가장 global한 것이라는 말과도 통합니다.
지구화가 좋다고 해서 우리의 말과
문화를 버리는 것이 길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문화를 다 내버리고 나면,
그러면 우리 모두가 다 서구사람이 되자는 건데,
과연 그게 바람직한 것입니까? 결코 아니지요.
서구적인 것이 다 옳고 좋은 것은 아닙니다.
서구문화는 그들만의 독특한 역사적 경험을 거치면서 형성된 것이고,
그런 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이듯이,
아시아문화는 아시아의 독특한 역사적 경험을
거치면서 형성된 것으로 그 고유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사도행전 17장에서 말했듯이
모든 민족의 경계와 문화는 여호와 하나님이 정하신 것으로
나름대로의 존재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 논리로, 기독교는 기독교의 특별한 존재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유대교로 충분하다면 여호와 하나님이 왜 예수를 보내셨겠습니까? 기독교의 독특성은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섬기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의 대상으로 섬긴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특별한 고백이기도 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가 가장 명확하고 완전하게 나타났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빼버리면 여호와 하나님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이 빠져버리게 되므로 결코 이것을 양보할 수 없다는
고백 위에 기독교는 서있습니다.
흔히 구약성서에서 말하는 여호와 하나님, 그러면 갖게 되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 심판자, 전쟁의 신, 질투의 신, 역사의 주관자…
대체로 이러한 여호와 하나님이지요. 물론 다른 측면이 없는 것이 아니지만,
이러한 여호와 하나님은 대체로 인간보다 우월한 위치에서 내려다보면서 명령하고
주관하고 구원하고 심판하며,
자기 외의 다른 어떤 신도 용납하지 않는 제왕적 이미지의 신,
이런 것입니다. 이러한 신 앞에서 인간은 한갓 미천한 존재일 뿐이며,
그 앞에서 인간은 언제나 두려워 떨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러한 신관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저 높은 곳에서 인간의 잘못을 책망하고
호령하고 군림하고 지배하고 심판하는 제왕적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과 함께 고통당하고 짐을 나누어지며, 스스로 피흘리며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의 종이셨습니다. 인간이 여호와 하나님처럼 되기 위해 스스로 자기를
높이는 길을 걸어갔다면,
예수님은 빌립보서 2장에 있는 말씀대로, 교만으로 인하여
죽음에 떨어진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친히 인간이 되시고 철저하게
자신을 비우는 섬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예수님의 삶 속에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가 가장 완전하게
나타났다는 것이 바로 삼위일체론의 핵심입니다.
기독교의 이단 가운데 종속론(subordinationism)이라는 게 있는데,
이 입장에 따르면 여호와 하나님이 전체 집합이라면 예수는 부분집합입니다.
성자 예수는 성부 여호와 하나님께 종속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삼위일체론은 이러한 입장을 거부합니다. 예수는 부분집합이 아니라,
만약에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이 빠지면 여호와 하나님이 다른 신이 되어버리는
생명이요 알짬, 온집합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말씀하신대로,
우리가 성경에서 구원얻는 줄로 알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성경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 5:39)
이것을 쉬운 말로 하면 이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님 중에서
누가 더 친근하게 느껴지시나요? 당연히 예수님이시지요.
그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고, 우리와 대화하시고, 존중하시고, 사랑하시며,
또한 우리의 사랑을 구하시고 우리에게 의지하기도 하시며
참여와 협력을 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삼위일체론은 이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가장 완전한 모습이라는 겁니다.
구약에서 증거하는 바,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과 당신을 비우시고 사랑하시고 내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느 한 분이 다른 한분을 포섭하고,
어느 한 분이 다른 한 분에게 종속되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본질이 같은 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이지요.
요컨대, 삼위일체론은 제왕적 신관을 따르지 않고,
철저하게 온유하고 겸손하시며 쌍방적인 신관을 견지합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론을 믿는 기독교와 전체주의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삼위일체론을 믿는 기독교와 일방적 지배,
군림, 전쟁과 폭력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당신을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과 땅을 지으신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과 본질이 동일한 여호와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기독교가 전파되는 곳에서는,
그래서, 결국에는 전체주의가 극복되고 민주주의가 싹틀 수밖에 없으며,
일방주의가 사라지고 대화와 협력,
사랑과 나눔의 공동체문화가 꽃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것은 우리 삶을 은혜롭게 합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절대적으로 높고 거룩한 분이 군림하지 않고 나를 존귀하게 여겨주고
조건없이 나를 사랑해줄 때,
그 사랑 앞에서 갖게 되는 변화의 경험을 은혜롭다고 말합니다.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여호와 하나님은 군림의 신이 아니라 은혜의 신이십니다.
당신의 힘을 동원해 억지로 굴복하게 만드는 신이 아니라,
조건 없는 사랑과 용서를 통해
스스로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존경심을 가지고
그 앞에 옷깃을 여미고 마음과 뜻을 다해 헌신하고 싶은 마음을 들게 하는
사랑의 신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이 사랑이 우리를 철들게 하고,
이 사랑이 우리의 영혼의 눈을 뜨게 합니다. 사랑을 하면,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인다는 말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경험한
은혜의 체험은 우리로 하여금 주변 모든 사람들과 사물들에 대해
새로운 감성을 가지고 느끼고 반응하도록 만들어줍니다.
은혜를 깨닫고 난 뒤, 세상 만물을 보면 은혜 아닌 것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에는 모든 것이 사랑으로 느껴지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값없이 주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의 눈에는
여기에도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요 저기에도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가 스며들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따스한 햇살 한 줌,
풀 한 포기, 바람 한 줄기, 그 어디에도, 높은 곳에 군림하지 않고
스스로 낮아져서 우리에게 다가와 말을 걸고 우리를 위로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운 마음이 묻어있습니다.
창조의 여호와 하나님이 곧 구속의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성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우주만물에
우리를 위하여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다 깃들어 있습니다.
이처럼 우주만물을 은혜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우리의 눈과 마음을 열어주는 것이 또한 삼위일체론입니다.
여러분, 미켈란젤로(1475-1564)라는 미술가 아시지요?
이분은 자기의 작품에 결코 서명을 남기지 않았는데,
여기에는 다음의 이유가 있었다고 합니다. 시스틴 성당의 천정벽화를
그려줄 것을 요청받은 미켈란젤로는 자기의 열과 성의를 다하여
작품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몇 달을 벽화그리기에 몰두했던
그는 마침내 불후의 명작 ‘천지창조’를 완성했습니다.
흡족한 마음으로 서명을 한 뒤 성당 문을 나서는 순간 그는 눈부신 햇살과
푸른 자연의 아름다움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습니다. 세상에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대자연의 아름다움!
그때 문득 그에게 한 가지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렇듯 아름다운 자연을 창조하시고도 그 어디에
서명 같은 것을 남기지 않으셨는데 기껏 작은 벽화를 그려놓고는
나를 자랑하려 했다니…” 그는 즉시 되돌아가 천정 벽화에서
자신의 서명을 지워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는 어떠한 작품에도
서명을 남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진정,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한 사람이기에 자연을 보면서도
이와 같이 자신을 온전히 비우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된 줄 믿습니다.
삼위일체론을 말할 때 또 한 분 빼어놓을 수 없는 분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여호와 하나님의 영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알려져 있기도 한 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만물을 창조하실 때 성령이 참여하셨으며,
사사들이나 선지자들을 불러 쓰실 때도 성령을 통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성령은 돕는 분이시지만, 그분이 없으면 우리 인간이 여호와 하나님의 깊은 생각을
알 수도 없고 관계 맺을 수도 없는 절대적인 인격이시기도 합니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가 하신 일과 그분들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하고
깨닫게 하며 소통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성령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이 이 우주만물을 지으신 뜻과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하시고 행하신
그 모든 일들의 의미가 오늘 우리에게 살아있는 말씀으로 깨달아집니다.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이 없이는, 성경의 모든 기록도,
역사 속의 모든 사건도, 죽어있는 화석에 불과할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소통케 하시는 역사가 있음으로 인해서 우리가 말씀을 읽고
역사를 대할 때 깨닫고 감동하며, 거기서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성령은 소통의 영이십니다.
그런데 삼위일체론은 이 성령을 또한
성부 여호와 하나님 성자 예수님과 본질을 같이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다른 위격이라고 말합니다.
성자 예수를 성부 여호와 하나님에게 종속시키지
않는 것이 삼위일체론이듯이,
성령을 또한 종속시키지 않는 것이 삼위일체론입니다.
삼위일체론은 그만큼 소통을 중시하고,
대화와 사귐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계시도다. ” 사랑의 나눔,
참여와 대화 없이는 여호와 하나님도 없고 그리스도도 없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신앙은 본질적으로 과거에 대한 회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 내 곁에 있는 사람들과 사랑하는 것이요 대화하는 것이요
나누는 것이요 그러한 과정에 마음을 모아서 참여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경우에라도,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울수록 더욱 모이기에 힘쓰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히 10:25), 마음을 함께 하여 기도하고 떡을 떼는 것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행 2:43-47).
요즘의 추세는 성령을 강조하는 것이 흐름입니다.
그 동안 성령을 우리가 달라고 하면
받을 수 있는 무슨 물질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성령은 물질이 아니라
우리의 예배의 대상이 되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이 말은 가령,
성령을 무엇을 이루기 위한 방편으로 이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찬양이든지,
기도든지, 성도의 교제든지 그 어느 것도
더 가치있는 그 무엇을 위한 수단으로
여겨 가볍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
여호와 하나님이신 성령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것은 그 자체로 거룩한 것입니다.
말과 행실이 일치하고, 깨달음이 사랑의 나눔이나
실천과 분리되지 않도록 하는 것,
그래서 모든 일을 주께 하듯 하라는 것입니다(골 3:23).
그리고 궁극적으로 우리 자신의 몸이 성령의 전이므로
(고전 3:16, 고후 6:16)
우리의 모든 생활에서 우리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것이
바른 신앙이라는 것입니다(롬 12:1)
요컨대, 삼위일체론은 그것을 사변적으로 이야기하면 우리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것이지만, 그것을 우리의 현실과 관련시켜
생각하면 자칫 편향적으로 흐르기 쉬운 우리의 삶을 균형있게 바로잡아주는
아주 중요한 교리입니다. 삼위일체론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를 설명하고,
그것을 지금 여기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생동하는 역사가 되도록 하기 위한 교리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오류와 복잡한 시대상황 속에서 신앙의 본질을 지켜내고
교회를 교회되게 하기 위한 치열한 영적 싸움의 결과물입니다.
모쪼록, 아버지, 아들, 성령이 서로가 연결되고 하나가 되고 서로 통하면서
존재하였듯이, 우리의 삶 역시 이 여호와 하나님의 신비하신 교통 가운데서
서로가 연결되고 하나가 되어서 점점 퇴색되어져가는 이 시대의 정의, 평화,
생명 공동체를 바로 세우고 부활시키는
창조적 노력으로 이어질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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