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 보혜사 성령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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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부활절 후 50일째되는 주일이 성령강림주일인데 금년도에는 부활절이 빠른 바람에 가정의 달 사이에 지키게 되었습니다.
십자가 사건을 앞두고 제자들은 대단히 불안해하고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자기들을 돌봐주시던 예수님이 떠나신다면 자기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반대자들이 이어서 자기들도 모두 체포하고 처형할 것이 아닌가 하는 공포심에 사로잡혀 전전긍긍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이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여러번 반복하신 말씀이 몇 가지 있습니다. 기도에 대해서 가장 많이 반복하셨고, 그 다음으로 많이 반복 하신 내용은 성령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요14장부터 16장까지를 읽어보면 성령님에 관한 말씀이 네 번이나 반복해서 나오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님에 관해 네 번이나 반복하시는 이유는 너무 중요한 탓입니다. 성령님이 누구십니까 구약시대에는 성부 여호와 하나님께서 직접 사역을 행하셨고, 신약시대에는 성자 예수님이 사역을 행하셨다면,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는 성령님이 오셔서 사역을 감당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성도님들이 성부 여호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으면서도, 가장 가까이 계시는 성령님에 대해서는 너무 모르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 결과, 성령님의 도우심도 받지 못하고 성령님과 동행하지 못함으로 일상생활은 물론 신앙생활도 제대로 하지 못함으로 매우 어렵고 고통스럽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니 됩니다. 이 자리에 계신 성도님들은 성령님이 과연 어떠하신 분이가를 분명히 배우고 체험하심으로 성령님의 도우심과 능력을 체험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성령님은 어떠한 분이십니까
1. 성령님은 또 다른 보혜사 이십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라 했습니다. '보혜사'란 무슨 뜻입니까 헬라어로 '보혜사'란 '옆에서 돕기 위해서 함께 하시는 이'란 뜻입니다.
보혜사(保惠師)'를 한문으로 풀이하면 '보호하고 은혜를 주고 가르치는 자"란 말입니다. 영어로 표현하면 '헬퍼(helper)'로 그 뜻은 '돕는 자', 요즈음식으로 표현하면 '도우미'란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 성도들을 돕기 위해 성령님을 우리 곁에 보내 주셨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이 진리만 바로 깨달으면 우리는 세상에서 승리하며 살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여호와 하나님과 더불어 천지를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케 하셨고, 그를 죽음에서 일으키신 여호와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바로 이러한 분이 우리를 돕는 자로 와계신다니 우리가 무엇을 근심하고 두려워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서 한 가지 재미있는 표현이 나옵니다. '또 다른 보혜사'라는 말입니다. '또 다른'이라는 말은 성령님 외에 다른 보혜사가 또 있다는 말인데 그가 누구입니까 예수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이제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 가시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한 손에 쥐시고 여호와 하나님 우편에 앉으실 것입니다. 거기에 앉으셔서 주님은 보혜사의 일을 하실 것입니다. 요일서2:1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고 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연약하여 죄를 범할 때가 많습니다. 이래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육신이 약해서 또 죄를 짓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고 회개합니다. 이럴 때마다 여호와 하나님의 우편에 계시는 예수님은 자기 손의 못자국을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내어놓으면서 우리의 대언자가 되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대언자'라는 말과 '보혜사'라는 말이 원어로는 '파라 클레토스'라는 동일한 단어로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 우편에 계시면서 범죄 하는 우리를 돕는 분이십니다.
롬8:34에도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여호와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 우편에 계시는 보혜사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에게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님을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늘에서 우리를 돕는 보혜사시라면, 성령은 땅에 오셔서 우리를 돕는 보혜사십니다. 롬8:26에 보면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 하시느니라. "고 했습니다.
성령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하시는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늘과 땅에 각각 우리를 돕는 보혜사를 가진 사람들이니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입니까 그렇습니다. 지금 성령님은 우리 옆에 계시면서 우리를 돕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분이 도와주시는 모든 은혜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다 받아 누리는 영광스러운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무슨 어려운 일만 만나면 고아나 된 것처럼 근심하고 두려워한다는 것은 바로 성령님을 슬프게 하고 말할 수 없이 탄식하게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의 자녀가 무슨 사고로 다쳤다고 합시다. 그래서 무엇인가 도와주려고 해도 믿지 못하고 근심하고 두려워하면서 마치 고아인 것처럼 탄식하고 있다면 부모는 너무나 슬플 것이요, 탄식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하늘과 땅에서 도우시는 보혜사들이 계신 것을 믿고 담대히 믿고 기도로 도움을 요청하십시오. 그러면 무엇이든지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어느 부흥사가 쓴 글에 의하면 경남 진주에 교회를 열심히 섬기며 충성하는 구 장로님이라는 분이 계시는데 그 분에게 점심을 대접받으며 들은 간증이라고 합니다. 그 분은 밤을 따서 일본에 수출을 하는 분이었습니다. 그 해에는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일본도 밤 풍년이 들어서 일본에서 온 사람이 밤값을 자꾸만 깎으려 했답니다. 그래서 밤을 팔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여호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면서 도우심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때 우리나라로 접근하던 태풍이 갑자기 제주도 근해에서 일본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일본을 강타했습니다.
이 태풍으로 인해 일본의 밤들이 모조리 떨어졌습니다. 그러자 일본 사람이 이 구장로님을 찾아 와서는 몇 배의 값으로라도 우리 밤을 사겠다고 간절히 요청하더라는 것입니다. 결국 그 분은 3억 원의 이윤을 남겼다는 간증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우리는 우리 만의 힘으로 승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어려움을 만난다 할지라도 성령님이 도와만 주신다면 승리할 줄 믿으시고 무슨 일이든지 성령님께 의논하고 도움을 요청하시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성령님은 우리 속에 영원토록 내주하시는 분이십니다.
성령님은 우리 옆에 계실 뿐 아니라,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16절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라 했습니다.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라는 약속이십니다. 또 17절을 보십시오.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고 했습니다.
성령님이 이 세상에 오셨지만 세상 사람들은 성령을 알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을 압니다. 성령님이 교회 곧 우리 안에 와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님이 내 안에 거하시는 사건은 신학적으로 '내주하심'이라고 표현합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이신 성령님이 내 마음속에 와서 거하시면서 영원토록 나를 떠나지 않고 나와 함께 하신다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너무나 감격적인 생각을 금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더욱 감격스러운 말씀은 18절로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라는 말씀입니다.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리라"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얼마나 가슴이 뜨거워지는지 모릅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외톨이로 내버려두지 않겠다고 하시는 약속입니다. 사실 제자들과 함께 했던 3년 동안 예수님은 어머니와 아버지 같았습니다. 제자들을 먹이고 입혔습니다. 가는 곳마다 그들을 데리고 다녔으며, 어려운 일을 만날 때 그들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떠나시게 되자, 남은 제자들은 자신들이 고아처럼 여겨져 한없이 슬퍼하며 두려움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을 보시고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고아가 아니다. 내가 가면 성령을 보내겠는데 그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내가 지금 있을 때 보다 너희가 훨씬 더 행복해 질 것이다. 너희들이 나와 함께 3년 동안 있을 때는 내가 육신의 몸을 입고 있으니까 내가 안 보이면 너희들이 찾아 다녔지 않느냐 내가 배를 타고 가다가 자면 너희들이 흔들고 깨웠지 않느냐 그러나 성령이 오시면 너희들이 그럴 필요가 없게 된다. 왜냐하면 내가 성령과 함께 너희 속에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 속에 있기 때문에 너희는 어느 때든지 내 이름만 부르고 기도하면 우리 아버지께서 다 들어주신다고 말했지 않느냐 내가 너희 속에 있기 때문에 내가 하는 일을 너희도 할 것이요. 그것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가 말했지 않느냐 그렇다면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는 행복이니라. 너희는 고아가 아니다. " 이것은 제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똑같이 해당되는 위로의 말씀입니다.
제자들의 마음 속에 계시던 성령님이 지금 우리 마음에도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아가 아닙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성령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은 거의 날마다 고독을 느낍니다. 세상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느끼는 공허함과 고독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말씀하시기를 '현대인들은 젊은이들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한시도 가만히 혼자 있지를 못합니다. 인기척이 없는 적막이 죽음처럼 느껴져 혼자 있기 싫어합니다. '
'그래서 핸드폰을 들었다 놓았다, 켰다 껐다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혼자 가만히 있지를 못합니다. 혼자 있을 때면 음악을 틀든지, 텔레비전이라도 켜 놓고야 마음이 가라앉습니다. 이와 같이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어떤 방법으로든지 확인해야 마음이 놓이는 것이 바로 현대인들입니다. 현대인들은 모두 혼자의 고독을 견딜 힘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고아가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실존적인 고독에서 자유함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는 우리는 다릅니다. 물론, 우리 역시 인간인지라 때로 외로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외로워서 눈물을 흘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이 느끼는 실존의 고독은 느끼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속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 영혼의 빈곳을 가득히 채우고 계십니다. 그의 생명의 풍요로움이 우리 마음을 물댄 동산처럼 만들고 계십니다. 주님은 절대 우리를 혼자 두지 않습니다. 이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교회를 출석하면서 이런 놀라운 감격을 모르고 사는 교인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성령이 누구냐'고 물으면 대답을 너무나 잘합니다. '예수님이 누구냐'하면 역시 대답을 잘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고아처럼 울고, 고아처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여러분의 근심과 고독과 무기력은 어디에서 온다고 생각합니까 성경의 예수님은 그만큼 많이 알고 있는데 왜 이토록 무기력합니까
성령님을 내 마음에 모시지 않은 탓입니다. 성령님을 모실 때에 동시에 예수님도 우리 속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순간부터 고아라는 영적 고독감과 공허감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성령님 앞에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여, 나를 도와주옵소서. 내 안에 들어오셔서 이제는 거하여 주옵소서. 그러므로 내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알게 하시고 체험하게 하옵소서. "라고 해보십시오. 어느 순간부터 우리의 삶은 달라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어떤 유대인 청년이 액클레이라고 하는 사람을 찾아와서 이렇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아니, 왜 날 보고 예수 믿으라고 합니까 내가 무슨 이유로 예수를 믿습니까 십자가에 처형된 젊은이를 내가 왜 믿어요" 그러자 액클레이라는 분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 맞아요.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형 되셨어요. 그러나 그분은 지금도 살아 계셔요. 내 마음속에 계셔요. 나는 날마다 그분과 함께 동행하면서 그분과 이야기하고 그분과 함께 인생의 모든 문제를 다 극복하고 있어요. 지금 내 안에 계신데 안 보여요"
유대인 청년이 볼 리가 없지요. 믿음이 없는 사람인데 어떻게 그 말을 알아듣겠습니까 액클레이라는 사람이 집으로 돌아와 성령님의 감동을 받아서 찬송을 쓴 것이 바로 찬송가 151장입니다. "다시 사신 구세주 나 항상 섬기네/ 온 세상 조롱해도 주 정녕 사셨네/ 그 은혜로운 손길 부드러운 음성/ 내 평생 주님 함께 늘 계시네/ 예수 예수 늘 살아계시네/ 주 동행하여 주시며 늘 말씀 하시네/ 예수 예수 내 구세주 예수/ 내 맘에 살아 계시네 늘 살아 계시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아직도 마치 자기가 고아인 것처럼 고독과 공허를 느끼고 계신 분이 이 자리에 계십니까 보혜사 성령님을 마음에 모셔 드리십시오. 그 때에 성령님은 여러분의 마음에 거하시면서 부모처럼 영원토록 여러분과 함께 거하실 줄 믿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성령님은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성령님은 우리 옆에서 도우실 뿐 아니라, 우리 안에 영원토록 계시면서 도우십니다. 동시에 우리에게 자기의 능력까지 부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명하지만 않으십니다. 그것을 할 수 있는 능력도 주십니다. 그 능력을 성령님을 통해서 주십니다. 사람에게 육신의 힘도 중요하고 정신의 힘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영적인 능력이 필요합니다. 이 영적인 능력이 있어야 신앙생활도 바로 하고 선행도 할 수 있습니다. 더 나가서는 근심과 불안을 이길 수 있는 것도 성령님의 능력이 임하실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조건 "근심하지 말라 두려워 하지 말라"고만 명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보혜사 성령님만 마음에 모시기만 하면 그 능력을 통해서 근심과 두려움이 사라지고 오히려 하늘이 주시는 평안과 기쁨을 소유한다고 하셨습니다. 요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리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승천하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마지막 부탁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성령님이 주시는 능력을 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눅24: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과 120 문도들은 에수님의 이러한 말씀을 믿고 성령님의 능력을 받을 때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오순절날 성령님의 능력을 받고 그들의 삶이 180도로 달라졌습니다.
그 때부터 그들을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누가 그들 속에서 솟구치는 담대한 용기를 꺾을 수 있었습니까 누가 그들 속에서 솟구치는 기쁨을 억누를 수 있었습니까 누가 그들의 입에서 찬송을 빼앗아 갈 수 있었습니까 아무도 할 수 없었 습니다. 아무리 채찍을 들고 때려도, 감옥에 투옥시켜도, 맹수나 검투사 앞에 끌고 가도 막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들 안에 계시는 성령님이 그들을 강하게 붙들고 계셨기 때문에 아무도 상대를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은 300년도 안되어 로마 제국이, 단 한명의 군대도 없는 그 초라해 보이는 그리스도인들 앞에 굴복을 하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그래서 롬8:35 이하에서 바울은 고백하기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했습니다. 또 빌4:12-13에서는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고 했습니다.
성령님에게 사로잡힌 사람은 바로 이러한 존재입니다. 이왕지사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려면 이 정도의 수준은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합시다. "주님, 살아 계신 주님을 모시고 세상을 살고 싶습니다. 그 성령님의 손에 붙들려 세상을 살고 싶습니다. 나 혼자 너무 외로운 고아와 같습니다. 나는 자신이 없습니다. 어떻게 세상 유혹과 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일어서야 될지 잘 모르습니다. 나를 도와주세요. 내 안에 오세요. 내가 믿기를 원합니다. "라고 계속 기도해 보십시오. 그러면 어느 순간에 성령님이 임하시면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고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실 줄 믿습니다.
박금출 목사님이 쓰신실화사전제 4권에는 이런 간증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한 남편의 변화된 이야기입니다. 이 남편은 심한 술 중독으로 수입을 몽땅 술로 마셔 버렸습니다. 그러니 집세도 못 내고 그와 가족은 생활이 말이 아닙니다. 이래선 안되겠다는 생각이 든 남편은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병원 문마다 두드려 보았으나 알코올 중독에서 놓여나지 못했습니다. 어려운 중에도 가정을 지켜오던 부인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여 어느 날 아이를 데리고 나가겠다면서 남편에게 결별을 선언했습니다.
막다른 골목에 서게 된 남편이 부인에게 사정을 했습니다. "여보 내 힘으로 안 되지 않소. 한번만 봐 주구려. " 그래도 부인은 지쳐서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면서 헤어지기를 고집했습니다. 하는 수 없어서 남편은 교회에 가서 여호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술 중독에서 놓여나게 해 달라고 기도한 다음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집에 오니 부인이 집을 다 꾸려서 응접실에 내 놓고 남편이 집에 들어가도 본체 만체 합니다.
부인과 자식을 한꺼번에 잃게 되어 지자 급해진 남편이 자기 침실에 들어가 꿇어앉아 침대를 부여잡고 "여호와 하나님,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지금까지 여호와 하나님을 외면했던 저는 죽일 놈입니다.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 알코올 중독에 걸렸습니다. 이 알코올중독이 저의 가족을 빼앗아 가려고 합니다. 나의 인생은 이제 파멸입니다. 이것이 그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올 리가 없습니다. 저를 알코올 중독에서 구해 주십시오. 살려 주십시오. "하고, 고함을 치며 기도하는데 어느 새 그의 기도는 자기 나라의 말이 아닌 이상한 말로 바꾸어져 있었습니다.
그가 성령님의 능력으로 방언을 받은 것입니다. 기도를 마치고 나자 뱃속의 창자가 꼬이듯 하더니 커다란 덩어리가 속으로부터 올라오면서 한참동안 입에서 더러운 물을 토해 내었습니다. 그리고 나니 속이 시원하면서 하늘을 나는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그는 알코올중독에서 놓여난 확신을 가져왔습니다. 응접실로 나가자 부인이 "흥 이젠 완전히 미쳐버렸군. 방안에서 돼지 멱따는 소리를 다하고"라고 합니다. 귀신이 나가면서 소리 지른 것을 부인은 돼지 멱따는 소리로 들은 것입니다.
"여보 그게 아니요 나 이제 새 사람 되었어. 알코올중독에서 놓여났단 말이오. 이젠 다시 술을 입에 대지 않을게. " "당신 술 안 먹는다는 결심을 몇 번이나 했어요. 너무 많이 속아서 이젠 금주란 말은 신물이 나요. " "여보 이젠 진짜란 말이요. " 하고 애원을 하자 부인은 간절히 애원을 하자 남편을 며칠 두고 보기로 했습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 사흘 지나도 술을 입에 대지 않습니다. 전 같으면 몇 시간도 견디지 못하여 술을 먹었습니다. 남편이 변화되어 새 사람이 되자 그 가정은 다시 웃음꽃이 피어 행복한 가정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성령님의 능력을 가지고 삽시다. 우리가 처한 형편이 어떠하냐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무엇이나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성령님을 우리 마음에 모셔드림으로 승리적인 삶을 사는 자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십자가 사건을 앞두고 제자들은 대단히 불안해하고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자기들을 돌봐주시던 예수님이 떠나신다면 자기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반대자들이 이어서 자기들도 모두 체포하고 처형할 것이 아닌가 하는 공포심에 사로잡혀 전전긍긍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이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여러번 반복하신 말씀이 몇 가지 있습니다. 기도에 대해서 가장 많이 반복하셨고, 그 다음으로 많이 반복 하신 내용은 성령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요14장부터 16장까지를 읽어보면 성령님에 관한 말씀이 네 번이나 반복해서 나오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님에 관해 네 번이나 반복하시는 이유는 너무 중요한 탓입니다. 성령님이 누구십니까 구약시대에는 성부 여호와 하나님께서 직접 사역을 행하셨고, 신약시대에는 성자 예수님이 사역을 행하셨다면,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는 성령님이 오셔서 사역을 감당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성도님들이 성부 여호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으면서도, 가장 가까이 계시는 성령님에 대해서는 너무 모르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 결과, 성령님의 도우심도 받지 못하고 성령님과 동행하지 못함으로 일상생활은 물론 신앙생활도 제대로 하지 못함으로 매우 어렵고 고통스럽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니 됩니다. 이 자리에 계신 성도님들은 성령님이 과연 어떠하신 분이가를 분명히 배우고 체험하심으로 성령님의 도우심과 능력을 체험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성령님은 어떠한 분이십니까
1. 성령님은 또 다른 보혜사 이십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라 했습니다. '보혜사'란 무슨 뜻입니까 헬라어로 '보혜사'란 '옆에서 돕기 위해서 함께 하시는 이'란 뜻입니다.
보혜사(保惠師)'를 한문으로 풀이하면 '보호하고 은혜를 주고 가르치는 자"란 말입니다. 영어로 표현하면 '헬퍼(helper)'로 그 뜻은 '돕는 자', 요즈음식으로 표현하면 '도우미'란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 성도들을 돕기 위해 성령님을 우리 곁에 보내 주셨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이 진리만 바로 깨달으면 우리는 세상에서 승리하며 살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여호와 하나님과 더불어 천지를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케 하셨고, 그를 죽음에서 일으키신 여호와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바로 이러한 분이 우리를 돕는 자로 와계신다니 우리가 무엇을 근심하고 두려워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서 한 가지 재미있는 표현이 나옵니다. '또 다른 보혜사'라는 말입니다. '또 다른'이라는 말은 성령님 외에 다른 보혜사가 또 있다는 말인데 그가 누구입니까 예수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이제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 가시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한 손에 쥐시고 여호와 하나님 우편에 앉으실 것입니다. 거기에 앉으셔서 주님은 보혜사의 일을 하실 것입니다. 요일서2:1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고 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연약하여 죄를 범할 때가 많습니다. 이래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육신이 약해서 또 죄를 짓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고 회개합니다. 이럴 때마다 여호와 하나님의 우편에 계시는 예수님은 자기 손의 못자국을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내어놓으면서 우리의 대언자가 되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대언자'라는 말과 '보혜사'라는 말이 원어로는 '파라 클레토스'라는 동일한 단어로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 우편에 계시면서 범죄 하는 우리를 돕는 분이십니다.
롬8:34에도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여호와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 우편에 계시는 보혜사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에게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님을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늘에서 우리를 돕는 보혜사시라면, 성령은 땅에 오셔서 우리를 돕는 보혜사십니다. 롬8:26에 보면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 하시느니라. "고 했습니다.
성령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하시는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늘과 땅에 각각 우리를 돕는 보혜사를 가진 사람들이니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입니까 그렇습니다. 지금 성령님은 우리 옆에 계시면서 우리를 돕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분이 도와주시는 모든 은혜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다 받아 누리는 영광스러운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무슨 어려운 일만 만나면 고아나 된 것처럼 근심하고 두려워한다는 것은 바로 성령님을 슬프게 하고 말할 수 없이 탄식하게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의 자녀가 무슨 사고로 다쳤다고 합시다. 그래서 무엇인가 도와주려고 해도 믿지 못하고 근심하고 두려워하면서 마치 고아인 것처럼 탄식하고 있다면 부모는 너무나 슬플 것이요, 탄식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하늘과 땅에서 도우시는 보혜사들이 계신 것을 믿고 담대히 믿고 기도로 도움을 요청하십시오. 그러면 무엇이든지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어느 부흥사가 쓴 글에 의하면 경남 진주에 교회를 열심히 섬기며 충성하는 구 장로님이라는 분이 계시는데 그 분에게 점심을 대접받으며 들은 간증이라고 합니다. 그 분은 밤을 따서 일본에 수출을 하는 분이었습니다. 그 해에는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일본도 밤 풍년이 들어서 일본에서 온 사람이 밤값을 자꾸만 깎으려 했답니다. 그래서 밤을 팔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여호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면서 도우심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때 우리나라로 접근하던 태풍이 갑자기 제주도 근해에서 일본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일본을 강타했습니다.
이 태풍으로 인해 일본의 밤들이 모조리 떨어졌습니다. 그러자 일본 사람이 이 구장로님을 찾아 와서는 몇 배의 값으로라도 우리 밤을 사겠다고 간절히 요청하더라는 것입니다. 결국 그 분은 3억 원의 이윤을 남겼다는 간증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우리는 우리 만의 힘으로 승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어려움을 만난다 할지라도 성령님이 도와만 주신다면 승리할 줄 믿으시고 무슨 일이든지 성령님께 의논하고 도움을 요청하시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성령님은 우리 속에 영원토록 내주하시는 분이십니다.
성령님은 우리 옆에 계실 뿐 아니라,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16절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라 했습니다.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라는 약속이십니다. 또 17절을 보십시오.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고 했습니다.
성령님이 이 세상에 오셨지만 세상 사람들은 성령을 알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을 압니다. 성령님이 교회 곧 우리 안에 와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님이 내 안에 거하시는 사건은 신학적으로 '내주하심'이라고 표현합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이신 성령님이 내 마음속에 와서 거하시면서 영원토록 나를 떠나지 않고 나와 함께 하신다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너무나 감격적인 생각을 금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더욱 감격스러운 말씀은 18절로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라는 말씀입니다.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리라"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얼마나 가슴이 뜨거워지는지 모릅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외톨이로 내버려두지 않겠다고 하시는 약속입니다. 사실 제자들과 함께 했던 3년 동안 예수님은 어머니와 아버지 같았습니다. 제자들을 먹이고 입혔습니다. 가는 곳마다 그들을 데리고 다녔으며, 어려운 일을 만날 때 그들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떠나시게 되자, 남은 제자들은 자신들이 고아처럼 여겨져 한없이 슬퍼하며 두려움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을 보시고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고아가 아니다. 내가 가면 성령을 보내겠는데 그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내가 지금 있을 때 보다 너희가 훨씬 더 행복해 질 것이다. 너희들이 나와 함께 3년 동안 있을 때는 내가 육신의 몸을 입고 있으니까 내가 안 보이면 너희들이 찾아 다녔지 않느냐 내가 배를 타고 가다가 자면 너희들이 흔들고 깨웠지 않느냐 그러나 성령이 오시면 너희들이 그럴 필요가 없게 된다. 왜냐하면 내가 성령과 함께 너희 속에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 속에 있기 때문에 너희는 어느 때든지 내 이름만 부르고 기도하면 우리 아버지께서 다 들어주신다고 말했지 않느냐 내가 너희 속에 있기 때문에 내가 하는 일을 너희도 할 것이요. 그것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가 말했지 않느냐 그렇다면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는 행복이니라. 너희는 고아가 아니다. " 이것은 제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똑같이 해당되는 위로의 말씀입니다.
제자들의 마음 속에 계시던 성령님이 지금 우리 마음에도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아가 아닙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성령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은 거의 날마다 고독을 느낍니다. 세상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느끼는 공허함과 고독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말씀하시기를 '현대인들은 젊은이들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한시도 가만히 혼자 있지를 못합니다. 인기척이 없는 적막이 죽음처럼 느껴져 혼자 있기 싫어합니다. '
'그래서 핸드폰을 들었다 놓았다, 켰다 껐다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혼자 가만히 있지를 못합니다. 혼자 있을 때면 음악을 틀든지, 텔레비전이라도 켜 놓고야 마음이 가라앉습니다. 이와 같이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어떤 방법으로든지 확인해야 마음이 놓이는 것이 바로 현대인들입니다. 현대인들은 모두 혼자의 고독을 견딜 힘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고아가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실존적인 고독에서 자유함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는 우리는 다릅니다. 물론, 우리 역시 인간인지라 때로 외로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외로워서 눈물을 흘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이 느끼는 실존의 고독은 느끼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속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 영혼의 빈곳을 가득히 채우고 계십니다. 그의 생명의 풍요로움이 우리 마음을 물댄 동산처럼 만들고 계십니다. 주님은 절대 우리를 혼자 두지 않습니다. 이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교회를 출석하면서 이런 놀라운 감격을 모르고 사는 교인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성령이 누구냐'고 물으면 대답을 너무나 잘합니다. '예수님이 누구냐'하면 역시 대답을 잘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고아처럼 울고, 고아처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여러분의 근심과 고독과 무기력은 어디에서 온다고 생각합니까 성경의 예수님은 그만큼 많이 알고 있는데 왜 이토록 무기력합니까
성령님을 내 마음에 모시지 않은 탓입니다. 성령님을 모실 때에 동시에 예수님도 우리 속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순간부터 고아라는 영적 고독감과 공허감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성령님 앞에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여, 나를 도와주옵소서. 내 안에 들어오셔서 이제는 거하여 주옵소서. 그러므로 내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알게 하시고 체험하게 하옵소서. "라고 해보십시오. 어느 순간부터 우리의 삶은 달라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어떤 유대인 청년이 액클레이라고 하는 사람을 찾아와서 이렇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아니, 왜 날 보고 예수 믿으라고 합니까 내가 무슨 이유로 예수를 믿습니까 십자가에 처형된 젊은이를 내가 왜 믿어요" 그러자 액클레이라는 분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 맞아요.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형 되셨어요. 그러나 그분은 지금도 살아 계셔요. 내 마음속에 계셔요. 나는 날마다 그분과 함께 동행하면서 그분과 이야기하고 그분과 함께 인생의 모든 문제를 다 극복하고 있어요. 지금 내 안에 계신데 안 보여요"
유대인 청년이 볼 리가 없지요. 믿음이 없는 사람인데 어떻게 그 말을 알아듣겠습니까 액클레이라는 사람이 집으로 돌아와 성령님의 감동을 받아서 찬송을 쓴 것이 바로 찬송가 151장입니다. "다시 사신 구세주 나 항상 섬기네/ 온 세상 조롱해도 주 정녕 사셨네/ 그 은혜로운 손길 부드러운 음성/ 내 평생 주님 함께 늘 계시네/ 예수 예수 늘 살아계시네/ 주 동행하여 주시며 늘 말씀 하시네/ 예수 예수 내 구세주 예수/ 내 맘에 살아 계시네 늘 살아 계시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아직도 마치 자기가 고아인 것처럼 고독과 공허를 느끼고 계신 분이 이 자리에 계십니까 보혜사 성령님을 마음에 모셔 드리십시오. 그 때에 성령님은 여러분의 마음에 거하시면서 부모처럼 영원토록 여러분과 함께 거하실 줄 믿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성령님은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성령님은 우리 옆에서 도우실 뿐 아니라, 우리 안에 영원토록 계시면서 도우십니다. 동시에 우리에게 자기의 능력까지 부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명하지만 않으십니다. 그것을 할 수 있는 능력도 주십니다. 그 능력을 성령님을 통해서 주십니다. 사람에게 육신의 힘도 중요하고 정신의 힘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영적인 능력이 필요합니다. 이 영적인 능력이 있어야 신앙생활도 바로 하고 선행도 할 수 있습니다. 더 나가서는 근심과 불안을 이길 수 있는 것도 성령님의 능력이 임하실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조건 "근심하지 말라 두려워 하지 말라"고만 명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보혜사 성령님만 마음에 모시기만 하면 그 능력을 통해서 근심과 두려움이 사라지고 오히려 하늘이 주시는 평안과 기쁨을 소유한다고 하셨습니다. 요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리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승천하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마지막 부탁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성령님이 주시는 능력을 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눅24: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과 120 문도들은 에수님의 이러한 말씀을 믿고 성령님의 능력을 받을 때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오순절날 성령님의 능력을 받고 그들의 삶이 180도로 달라졌습니다.
그 때부터 그들을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누가 그들 속에서 솟구치는 담대한 용기를 꺾을 수 있었습니까 누가 그들 속에서 솟구치는 기쁨을 억누를 수 있었습니까 누가 그들의 입에서 찬송을 빼앗아 갈 수 있었습니까 아무도 할 수 없었 습니다. 아무리 채찍을 들고 때려도, 감옥에 투옥시켜도, 맹수나 검투사 앞에 끌고 가도 막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들 안에 계시는 성령님이 그들을 강하게 붙들고 계셨기 때문에 아무도 상대를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은 300년도 안되어 로마 제국이, 단 한명의 군대도 없는 그 초라해 보이는 그리스도인들 앞에 굴복을 하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그래서 롬8:35 이하에서 바울은 고백하기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했습니다. 또 빌4:12-13에서는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고 했습니다.
성령님에게 사로잡힌 사람은 바로 이러한 존재입니다. 이왕지사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려면 이 정도의 수준은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합시다. "주님, 살아 계신 주님을 모시고 세상을 살고 싶습니다. 그 성령님의 손에 붙들려 세상을 살고 싶습니다. 나 혼자 너무 외로운 고아와 같습니다. 나는 자신이 없습니다. 어떻게 세상 유혹과 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일어서야 될지 잘 모르습니다. 나를 도와주세요. 내 안에 오세요. 내가 믿기를 원합니다. "라고 계속 기도해 보십시오. 그러면 어느 순간에 성령님이 임하시면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고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실 줄 믿습니다.
박금출 목사님이 쓰신실화사전제 4권에는 이런 간증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한 남편의 변화된 이야기입니다. 이 남편은 심한 술 중독으로 수입을 몽땅 술로 마셔 버렸습니다. 그러니 집세도 못 내고 그와 가족은 생활이 말이 아닙니다. 이래선 안되겠다는 생각이 든 남편은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병원 문마다 두드려 보았으나 알코올 중독에서 놓여나지 못했습니다. 어려운 중에도 가정을 지켜오던 부인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여 어느 날 아이를 데리고 나가겠다면서 남편에게 결별을 선언했습니다.
막다른 골목에 서게 된 남편이 부인에게 사정을 했습니다. "여보 내 힘으로 안 되지 않소. 한번만 봐 주구려. " 그래도 부인은 지쳐서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면서 헤어지기를 고집했습니다. 하는 수 없어서 남편은 교회에 가서 여호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술 중독에서 놓여나게 해 달라고 기도한 다음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집에 오니 부인이 집을 다 꾸려서 응접실에 내 놓고 남편이 집에 들어가도 본체 만체 합니다.
부인과 자식을 한꺼번에 잃게 되어 지자 급해진 남편이 자기 침실에 들어가 꿇어앉아 침대를 부여잡고 "여호와 하나님,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지금까지 여호와 하나님을 외면했던 저는 죽일 놈입니다.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 알코올 중독에 걸렸습니다. 이 알코올중독이 저의 가족을 빼앗아 가려고 합니다. 나의 인생은 이제 파멸입니다. 이것이 그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올 리가 없습니다. 저를 알코올 중독에서 구해 주십시오. 살려 주십시오. "하고, 고함을 치며 기도하는데 어느 새 그의 기도는 자기 나라의 말이 아닌 이상한 말로 바꾸어져 있었습니다.
그가 성령님의 능력으로 방언을 받은 것입니다. 기도를 마치고 나자 뱃속의 창자가 꼬이듯 하더니 커다란 덩어리가 속으로부터 올라오면서 한참동안 입에서 더러운 물을 토해 내었습니다. 그리고 나니 속이 시원하면서 하늘을 나는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그는 알코올중독에서 놓여난 확신을 가져왔습니다. 응접실로 나가자 부인이 "흥 이젠 완전히 미쳐버렸군. 방안에서 돼지 멱따는 소리를 다하고"라고 합니다. 귀신이 나가면서 소리 지른 것을 부인은 돼지 멱따는 소리로 들은 것입니다.
"여보 그게 아니요 나 이제 새 사람 되었어. 알코올중독에서 놓여났단 말이오. 이젠 다시 술을 입에 대지 않을게. " "당신 술 안 먹는다는 결심을 몇 번이나 했어요. 너무 많이 속아서 이젠 금주란 말은 신물이 나요. " "여보 이젠 진짜란 말이요. " 하고 애원을 하자 부인은 간절히 애원을 하자 남편을 며칠 두고 보기로 했습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 사흘 지나도 술을 입에 대지 않습니다. 전 같으면 몇 시간도 견디지 못하여 술을 먹었습니다. 남편이 변화되어 새 사람이 되자 그 가정은 다시 웃음꽃이 피어 행복한 가정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성령님의 능력을 가지고 삽시다. 우리가 처한 형편이 어떠하냐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무엇이나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성령님을 우리 마음에 모셔드림으로 승리적인 삶을 사는 자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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