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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보혜사 성령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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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있는 책이 있습니다.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라는 책입니다. 저는 거기에 나오는 짤막한 이야기 한 토막, 아주 감동을 주는 이야기를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임종이 가까운 한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가 지금 병원에 입원되어 있으면서 사경 속에서 점점 악화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바로 몇 시간 전에 있었던 심장마비와 또 이에 따르는 강한 진통제로 인해서 정신이 몽롱해진 가운데 있었습니다. 들리는 것도 보이는 것도 다 희미하게, 감각이 희미해진 그런 상태입니다.
이제 간호사가 큰 소리로 이분에게 외쳤습니다. "할아버지, 아드님이 오셨습니다. " 이렇게 이야기 했지만은 간신히 눈을 돌릴 정도였습니다. 간호사는 또 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렇게 기다리던 아드님이 왔습니다. " 그때 건강하게 생긴 해병대 복장을 한 청년 하나가 문에 들어섰습니다.
노인은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하는 몽롱한 상태에서 자기를 찾아온 젊은이에게 힘없는 손을 내밀었습니다. 이 청년은 그 노인의 손을 두 손으로 꼭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서로 주고받는 말은 없었습니다. 이렇게 한밤을 꼬박 지냈습니다. 의사와 간호사가 간간이 들어와서 상태를 체크하고 갔습니다. 간호사는 정성스럽게 앉아있는 그 청년을 보고 이렇게 너무 피곤하게 지내지 말고 잠깐 눈이라도 좀 붙이라고 말했습니다 만은 이 청년은 머리를 저으면서 아니라고 여전히 그 노인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손을 꼭 쥐고 있었습니다.
한밤을 꼬박 세웠습니다. 새벽녘이 되었을 때 이 노인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간호사가 들어와 꽂아놓았던 산소 호흡기라던가 모든 주사바늘을 다 뽑고 있을 때 이 청년은 갑자기 이렇게 묻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 노인은 누구입니까" 간호사는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그러면 당시는 이 노인의 아들이 아니세요 이 노인이 당신의 아버지가 아니세요" 청년은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전혀 아닙니다. " "그런데 어떻게 해서 그 노인과 함께 밤을 세운 겁니까" "제가 아버지가 위독하시다는 급한 전화를 받고 이 병실 문을 여는 순간 '아차' 무슨 착오가 생겼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무언가 사무착오가 되어서 동명이인이 된 내가 여기에 왔구나,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그 노인의 눈빛을 보는 순간 그의 외로움에 사로잡혔고, 도저히 내가 당신의 아들이 아닙니다, 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대로 이 자리를 지켜야했고 끝까지 임종을 보아야 했습니다. 나는 도저히 이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목이 타는 듯한 갈증을 느끼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냉수 한 그릇입니다. 오직 냉수 그 외에 아무 것도 소원이 없습니다.
이처럼 사경을 헤매며 임종이 가까운 이 노인에게는 누군가가 옆에서 손을 잡아줄 바로 그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누군가 자기 곁에서 자기와 함께 해 줄 그런 동반자와 위로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청년이 바로 그런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누군가 나와 함께 해주는 존재가 필요합니다. 늘 내 곁에 있어주는 존재가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런 놀라운 축복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나는 이제 인류의 구원사역을 다 마치고 하늘로 올라간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인류와 함께 하시는 다른 보호자가 오실 것이다. 그는 나와 똑같은 본질의 위로자와 동반자로 오실 것이다.
그 동안 제자들이 어디를 가든지 여전히 함께 하시며 동행하셨듯이, 앞으로도 여전히 동행하시며 함께 하시는 성령님을 소개하고 계십니다. 그 이름, 보혜사!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라는 점을 세 번씩이나 거듭 주지시켜 줍니다.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는 분, 우리와 함께 사시는 분, 우리 안에 머무시는 분! 다시 말씀드려서 나를 결코 떠나지 않고 곁에 계시는 분, 지금 나와 함께 하시는 분, 그리고 내 안에 계속 머무르시며 나와 동행하시는 분이 곧 성령님이십니다.
그래서 성령님의 이름을 보혜사라고 합니다(요 14:16,26. 15:26. 16:7). 보혜사란 말은 헬라어로 Paracletos인데, 가장 넓은 의미에서 "돕는 자, 구원자, 조력자, 원조자"라는 뜻입니다.
요즘 영어 번역에서는 "도우시는 분(Helper), 위로자(Comforter), 상담자(Counsellor)"라고 번역합니다.
보혜사, 패러클레토스, 그렇습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마귀를 패러오신 분이십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영원한 파트너로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파트너를 잘 만나야 합니다. 파트너를 잘 만나야 시너지 효과를 누립니다.
찬양대의 파트너가 누구냐에 따라 함께 헤매이기도 하고, 자기 실력보다 훨씬 더 잘 부르기도 합니다. 운동 파트너가 누구냐에 따라 실력도 향상되고, 즐겁게 놀 수도 있습니다. 못하는 사람끼리 놀면 더 못하고, 재미도 없습니다.
신앙생활도 어떤 파트너를 만나느냐에 따라 성숙이 결정됩니다.
그런데 성령님은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는 파트너이십니다. 할렐루야!
1. 돕는 자(Helper)이십니다
성령님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분이십니다(롬 8:26).
그래서 스코필드는 오늘 본문 16절을 "도와주기 위해 옆에 서 계신 분"이라고 번안합니다.
어린아이의 걸음마를 도와주기 위해 옆에 서 계신 엄마와 같은 보호자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능력으로 도와주시겠다고 수없이 약속하시는데(시 89:19. 행 26:2
2. 히 4:16), 그 약속을 실행하시는 그분이 곧 성령님이십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성령님은 우리를 능력으로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날마다 새 힘을 주십니다. 꿈을 주시고, 비전을 심어주십니다. 때로는 쓰러지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역동적인 힘을 주십니다.
에스겔서 37장을 보면, 마치 공동묘지의 마른 뼈와도 같이 아무런 소망도 없이 처절한 절망 중에 있는 우리를 다시 일으켜주시는 능력의 영이십니다.
오늘 우리는 오직 성령님의 도우시는 능력을 힘입어 그 어떤 절망의 자리에서도 여전히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분은 내 곁에 나와 함께 동해하시다가 내가 힘을 잃고 넘어지고 쓰러질 때 나를 붙잡아 일으켜주시는 분이십니다.
또 성령님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도록 도와주십니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이룰 수 없지만, 성령님은 창조적인 능력으로 기적을 일으켜주십니다(슥 4:6).
그래서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자기 능력 이상의 삶을 살게 하여주십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당신은 요즘 어떤 한계상황의 벽에 부딪쳐 계신가요 어떤 절망감을 느끼고 계신가요
어떤 신학자는 성령님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그는 절망적인 자의 영원한 도움이시다(the everlasting helpof the helpless)"
오늘도 나의 삶의 현장에서 능력으로 나를 도와주시는 보혜사 성령님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2. 교사(Teacher)이십니다
성령님은 예수님과 똑같은 활동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다른 보혜사"라는 표현을 쓰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주된 사역 중 하나는 가르치시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길을 가르쳐주시고, 천국의 비밀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래서 성령님께서도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즉 복음의 비밀을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14:17. 15:26. 16:12-13).
특히 26절이나 16장 13절에서 이점을 강조합니다.
원래 깨닫는 다는 말은 "뿌리로부터 보다"라는 어원에서 나왔습니다.
즉 깨닫는다는 것은 근본을 터득한다는 뜻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내면세계 근본을 깨우쳐주시는 일을 하십니다.
내가 죄인인 것을 깨우쳐주시고, 여호와 하나님의 깊은 뜻을 헤아려 깨닫게 하십니다.
요즘 제가 Eugene Peterson의 "한 길가는 순례자"라는 책을 읽었는데, 그가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화가보다는, 안과의사가 필요하다. " 무슨 말이냐 하면, 화가는 붓과 팔레트를 이용해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의 그림을 그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안과의사는 우리로 하여금 본인의 시력을 따라 원래의 모습을 보도록 도와주는 자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님은 안과의사와 같이 우리의 본연의 모습을 보도록 깨닫게 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인간의 영은 죄로 어두워져서 잘 깨닫지 못합니다(17절). 그러기에 성령님은 우리 마음 속에 들어오셔서 우리의 영을 밝혀주시고, 진리를 깨우쳐주시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 가운데 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더욱 더 성령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오, 주님! 오늘도 잘 깨닫게 하옵소서!(설교 시간에 자꾸 졸리시는 분)
만일 깨달음이 더딘 사람이라면 시편 49:20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과 같도다
죽으러 도살장에 끌려가면서도 자신의 운명을 모르는 짐승처럼 불쌍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사람은 더디게 깨달을수록 헛고생을 많이 합니다.
그러므로 잘 깨닫는 사람일수록 행복합니다. 그만큼 성령님이 마음의 눈을 밝게 열어주시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미래가 불투명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 잘 깨달아지는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엡 1:17-18). 오, 주님! 오늘도 저에게 깨달음의 영을 주옵소서!
3. 위로자(Comforter)이십니다
우리 예수님의 주된 사역은 위로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상처받고, 슬픔을 당한 사람들을 찾아가서 위로해주셨습니다.
이제는 우리 안에 계신 보혜사 성령님께서 우리의 외로움과 아픔을 위로해주십니다.
성령님은 우리 내면세계 속에서 우리를 깊이 위로해주십니다. 따뜻하게 위로해주십니다.
특별히 환난과 핍박을 받은 초대교회 성도들은 "성령님의 위로를 힘입어 진군함으로 교회를 계속 부흥시켜 나갔습니다"(행 9:31). Com + Fortis(Fortress) 강한 요새가 되시는 성령님
그래서 어거스틴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가장 매혹적인 위로자이시다. "
이처럼 성령님은 우리의 고통과 연관된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그분은 우리에게 진정한 상담자로 찾아오셔서 모든 번민과 갈등의 문제를 풀어주십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성령님은 우리를 능력으로 도우시고, 우리를 깨우쳐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 계셔서 위로해주시는 너무나 좋으신 상담자이십니다.
우리의 깨어진 마음, 상한 마음, 낙심한 마음, 침체된 마음, 어두운 마음을 위로해주십니다.
특별히 성령님께서는 내 속에서 울며 간구하시는 사랑의 중보자로 활동하십니다(롬 8:26-27).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위해 변호하시는 중보자시라면(요일 2:1), 성령님은 우리 속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중보자이십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입장을 대변해주시는 변호사(Advocate)로서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십니다.
그분은 나를 대신하여 기도해주시고, 또 나의 딱한 사정을 옹호해주시며, 변호해주십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님께서 육체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동안 훌륭한 상담자(Wonderful Counsellor)이셨듯이, 성령님은 영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진정한 상담자이십니다(Comfortable Counsellor).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령님을 자신의 일을 대신하러 오신 "또 다른 보혜사"(another of the same kind)라고 소개하시는 것입니다. 동일한 위로자라는 뜻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내 속 사람을 위로하시는 성령님의 은혜를 힘입어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님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어려움과 역경에 처할 때 힘을 주시고, 굳건하게 설 수 있도록 세워주십니다(행 4:31, 9:31).
특히 상담자 성령님은 우리에게 이런 위로를 약속해주십니다.
우리가 염려에 빠질 때(사 43:1-13. 마 6:25-34. 빌 4:4-7. 벧전 5:7) 위로하십니다.
우리가 고독에 빠질 때(시 73:23-24. 사 41:10. 49:14-16. 요 14:15-21) 위로하십니다.
우리가 지치고 약할 때(사 40:28-31. 마 11:28-30. 고후 4:16-18. 빌 4:12-13) 위로하십니다
우리가 실의에 빠질 때(시 34:18. 42:5. 애 3:20-23. 롬 8:28-29) 위로하십니다.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아침마다 새 힘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위로의 성령님이시여, XZ, 우리 안예 계셔서 위로하세네, 위로의 성령님이시여!"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보혜사 성령님께서는 오늘도 연약한 나를 도우시고, 또 더욱 깊은 진리로 깨우쳐주시며, 나를 진정으로 위로해주시려고 지금 어디에 계시며 활동하실까요
오늘 본문 17절을 자세히 보면, 두 번씩이나 강조하는 점이 있습니다.
나와 함께 계시며, 내 속에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가요!
1)개인적으로(Personal) 내주하십니다
"그가 너희 안에 반드시 계시리라. " 성령님의 신비로운 내주하심입니다.
2)영구적으로(Permanent) 내주하십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실 때는, 계속 머무시려고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와 함께 영원히 거하십니다(요 14:16).
그분의 거룩한 거주(the holy inhabitant)는 우리가 죽을 때까지 계속됩니다.
그분은 우리의 가슴에 거하시되, 완전히 정착하시고 계속 머무시므로 결코 떠나시지 않습니다(엡 3:16). 오히려 날마다 새 기운을 북돋아주십니다(행 11:12. 롬 8:16).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는 분, 우리와 함께 사시는 분, 우리 안에 머무시는 분!
다시 말씀드려서 나를 결코 떠나지 않고 곁에 계시는 분, 지금 나와 함께 하시는 분, 그리고 내 안에 계속 머무르시며 나를 위로하시는 분, 곧 그 성령님과 동행하며 사는 역동적인 삶의 현장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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