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 성령이 주시는 평안
본문
“지금 평안하십니까, 지난 한 주간 살면서 마음이 불편하지 않았습니까, 지금도 해결하지 못하고 불편한 마음으로 교회에 나오지 않았습니까” 이런 질문으로 오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저의 이야기를 좀 하겠습니다. 지난주에도 몸이 불편해서 힘들었습니다. 병 같지도 않은 감기 몸살의 후유증으로 고생을 했습니다. 성경공부하고 예배 인도하고 심방하고, 최소한의 할 것은 했지만, 정말 해야 할 일이나 하고 싶은 일은 하지 못했습니다. 몸기 몸살이 2주째인데 할 일은 많고 시간이 아깝게 지난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비인후과와 안과 진료를 받았습니다. 다음달에는 캐나다에 가 있는 아이들 데리고 와야 하는데, 행복한 고민이지만 이것도 걱정입니다.
시간이나 경비나 몸을 생각하면 가는 것이 부담되고, 기다리는 아이들이나 신세를 진 최인희 집사님을 생각하면 당장에 가야 하는데, 며칠째 궁리를 해 보지만결론이 잘 나지 않습니다. 큰 아이는 학년이 바뀌고 첫 모의고사를 쳤습니다. 자기 깐에는 방학 때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결과가 충격인가 봅니다. 입을 다 물고 절대 말을 하지 않습니다. 시험 못 쳐서 충격을 받은 아이들은 그날 밤에 집단적으로 이불을 뒤집어쓰고 마음 앓이를 했답니다. 충격을 받은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시시한 이야기를 꺼낸 것은 “지금 평안하십니까” 라는 질문에 솔직히 답해 보자는 뜻에서 한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에 근심된 일이 많고 참 죽을 일 쌓였구나. ” 이 찬송가 가사처럼 세상에는 근심된 일이나 죽을 일이 많습니다. 우리의 평안을 빼앗아 가는 사건이 어디 한 둘입니까 우리에게 평안이 필요합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이 아니라 성령이 주시는 진정한 평안이 필요합니다.
1. 평안을 빼앗는 것이 무엇입니까
평안을 빼앗는 것이 무엇입니까 걱정과 근심과 두려움입니다. 27절의 말씀을 보십시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
왜 제자들은 근심과 두려움에 빠져있습니까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난다는 말씀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떠난다는 말씀은 십자가의 죽음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의 생각에는 예수님이 곧 이스라엘을 로마의 손에서 구원할 것이라고 기대가 컸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날벼락 같은 말씀입니까 “예수님이 죽으시다니!” 예수님의 죽음은 제자들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입니다. 당장에 자신들도 별 볼 일 없게 되었습니다. 스승이 없는 제자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3년 동안 예수님을 믿고 따랐는데, 아무 보상도 없이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허탈하기도 하고 장래가 두렵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죽으신다면 우리에게도 그런 일이 닥칠지 모른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들의 무지이고 불신앙입니다. 모든 근심과 두려움은 무지와 불신앙에서 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으셔야 영광입니다.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셔야 합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셔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발전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좋다고 늘 예수님 붙잡고 함께 살 수는 없습니다. 성령을 보내서 일하시는 예수님을 알아야 하빈다. 제자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을 알았다면 근심도 걱정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 걱정하고 근심합니다.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아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6:31-32). ”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생활을 책임지시고 우리의 생명을 책임진다는 것을 믿으면 마음 편할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곳에는 절대 안식이 없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서 마음이 편했습니다. 백성들에게 희망적인 보고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다른 열명의 정탐군이나 믿음이 없는 백성들은 낙담하고, 울고불고 난리를 치다가 여호와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순종하여 가나안이 아닌 광야로 가버렸습니다. 광야에서 방황하던 40년 동안 이들에게는 진정한 평안이 없었습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을 보십시오. 그는 사자굴에 던져졌지만, 여호와 하나님을 절대 신뢰함으로 사자와 함께 평안하게 지내고 무사히 나왔습니다. 빌립보 감옥에 던져진 바울도 기도하고 찬송하고 은혜 받고 나왔습니다. 우리는 교회 와서도 은혜받고 가기 어려운데, 매맞고 감옥에서도 은혜를 받지 않습니까 믿음의 사람에게는 주시는 평안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내일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께 맡깁시다. 좋은 결과를 주실 것으로 믿고, 그리하지 않더라도 여호와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을 믿읍시다. 내일 대수술을 앞두고 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께 맡깁시다. 의사의 손을 붙들고 여호와 하나님이 수술할 것을 믿고, 혹 회복이 더디더라도 여호와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을 믿읍시다. 지금 미국과 이라크의 전쟁으로 온 세계가 걱정하고 있습니다. 빨리 전쟁이 끝나고 평화하도록 기도합시다. 피 흘림이 결코 헛되지 않도록 여호와 하나님의 깊은 뜻이 이루어질 것을 믿읍시다.
우리가 평안하지 못하는 다른 이유가 무엇입니까 죄입니다. 죄는 여호와 하나님과 우리를 원수되게 합니다. 죄가 가로막는 한 평안은 없습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남편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죽게 하였습니다. 얼마나 큰 죄입니까 다윗은 몸은 비록 궁궐에 있었지만 마음은 지옥에 있었습니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여름 가믐에 마름 같은 고통이 있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은 30에 팔았지만, 마음이 괴로워서 목을 매달아 죽었습니다. 죄를 짓고 여호와 하나님과 원수 되고 어떻게 평안할 수 있습니까
마음의 평안을 빼앗아 가는 어떤 죄라도 회개합시다.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씻어주실 것입니다. 주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집 나간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고 아버지 집에 돌아올 면목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객지에서 마음 고생하느니 차라리 아버지에게 돌아와서 “잘못했습니다” 하고 매를 맞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하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죄를 용서받으니까 마음만 편한 것이 아니라, 아들의 권리도 회복해 주었습니다. 아버지의 품안에 진정한 평안이 있습니다. 작은 병도 오래두면 큰 병이 됩니다. 아무리 무서운 병이라도 초기에 치료하면 고칠 수 있습니다. 스트레스도 빨리 풀어야 합니다. 마음의 병이 만병의 원인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마음속에 숨기고 있는 죄가 있다면 다 회개합시다. 여호와 하나님이 평안을 주실 것입니다.
2. 어떤 평안입니까
세상 사람들은 평안을 외부적인 환경이나 물질에서 찾습니다. 물론 일리가 있습니다. 가난해서 먹을 양식이 없는 가정은 땀 흘려 일해서 일용할 양식을 얻어야 합니다. 그래야 평안이 있습니다. 수험생은 자기가 목적하는 바를 이루어야 평안을 얻습니다. 다리 뻗고 잠을 잘 수 있습니다. 전쟁터에 있는 군인은 전쟁을 이겨야 평안을 얻습니다. 집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불면증으로 시달리는 사람은 잠을 자야 평안을 얻습니다. 직장에서 천대받는 사람은 중요한 직책을 맡아서 자기 존재를 인정받아야 평안을 얻습니다. 건강치 못한 사람은 건강을 얻어야 평안을 얻습니다. 눈에 보이는 문제가 해결되고 물질을 얻고 환경의 구체적인 변화가 와야 평안을 얻습니다. 물론 옳습니다.
그러나 이런 평안을 얻는데 몇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과연 그런 변화가 올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계절이나 시간은 세월이 가면 저절로 변한다지만, 능력이 없는 사람이 갑자기 능력을 발휘할 수도 없고, 물질이 없는 사람이 갑자가 갑부가 될 수도 없습니다. 키가 작은 사람이 갑자기 키가 클 수도 없습니다. 없는 인기를 어떻게 만들어 내며, 남이 싸우겠다는데 우리가 어떻게 말린단 말입니까 우리의 능력으로 해결 안 될 때에는 우리가 바라는 평안은 그림의 떡입니다. 영영 얻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평안은 얻는다 할지라도 일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수면제로 얻은 평안은 몇 시간 못갑니다. 내일 밤이면 또 괴롭습니다. 술로 얻은 평안은 술기운이 사라지면 형편은 더 악해집니다. 물질로 얻은 평안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물질이 없어지면 평안도 사라집니다. 집 안에 없던 돈이 한번에 많이 생기면 오히려 집안이 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 물질이 반드시 좋은 변화를 가져온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물질로 얻은 평안은 계속적인 물질을 요구합니다. 만약 물질이 지속적으로 공급이 끊어지면 그 평안은 사라집니다. 명예나 권세로 얻은 평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명예가 사라지고 권세가 사라지는 순간에 평안도 사라집니다. 젊음이 주는 평안도 그렇습니다. 20대는 자신만만합니다. 30대만 되면 다른 사람과 차이가 납니다. 40대는 벌써 밀려나고 퇴출되기 시작합니다. 50대가 지나면 돈 많이 받고 퇴직한 선배들을 원망합니다. 60대가 되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요즘 젊은이들이 뭐 알기나 하나” 하고 탄식합니다. 세대가 주는 평안은 한 세대를 뛰어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슨 평안을 줍니까 세상이 주는 것가 다른 내가 주는 평안이라고 합니다. 보혜사 성령을 통해서 평안을 줍니다. 지난날에는 예수님이 직접 평안을 주었지만, 이제는 보혜사 성령을 보내서 주십니다. 이것은 발전된 것입니다. 지난날 보다 더 강력한 평안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제자들은 예수님에게서 평안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 예수님의 한 걸음 한 걸음에서 기적을 보았고, 그것은 그들에게 하늘의 평안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예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셔서 여호와 하나님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대신 보혜사 성령을 우리 마음속에 충만하게 부어주심으로 더욱 심오하고 강력한 평안을 주십니다. 눈과 귀로 듣고 맛보던 평안이 아니라, 마음속에 느끼는 평안입니다. 손과 발로 감각적으로 맛보던 평안이 아니라, 영적으로 마음으로 맛보는 평안입니다. 일시적으로 지나가는 평안이 아니라, 마음속에 영원히 지속되는 평안을 맛봅니다.
보혜사 성령이 주는 평안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보편적인 평안입니다. 조건을 갖춘 사람들에게만 임하는 평안이 아닙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주는 평안입니다. 병상에서나 지하철에서나 자동차 안에서나 궁궐이나 초가집이나 다 같이 누리는 평안입니다. 성령이 주시는 평안은 장소와 시간을 정해서 그럴듯한 환경적인 요인을 갖춤으로 맛보는 것이 아닙니다. 남들이 일어나지도 못하는 새벽에 임하는 평안이고 남들이 곤한 잠에 떨어진 밤중에 임하는 평안입니다. 머리로 얻는 평안이 아니고 가슴으로 얻는 평안입니다. 무슨 재료나 기회가 되어서 조건으로 얻는 평안이 아니라, 성령만 받으면 얻는 평안입니다. 돈이나 배경이나 아무 것도 없이 얻는 평안입니다. 분위기나 환경과 상관없이 얻는 평안입니다. 누구도 방해할 수 없고, 어떤 환경적인 요인도 빼앗을 수 없는 평안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우월한 평안을 주십니다. 어렵기도 하지만 쉽기도 한 평안입니다.
한나는 아들을 낳지 못해서 마음이 슬픈 여자였습니다. 세상은 아들을 낳지 못해서 마음 아픈 여자에게 평안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나는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고 수색이 없어졌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얻었습니다. 야곱은 형 에서를 피해 도망가다가 벧엘 광야에서 잠을 잤습니다. 광야의 들짐승 소리가 무서웠고, 부모를 떠난 마음에 외로웠습니다. 광야에서 잠을 자다가 깨서 마음에 평안을 얻는 일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꿈에 하늘로 통하는 사닥다리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고 평안을 얻었습니다. 잠을 깨서 일어난 그 자리에 제단을 쌓았습니다. 바울은 지중해에서 광풍을 만나서 탄 배가 파선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에서는 배선하는 배 안에서 평안을 얻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기도하다가 여호와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기가 받은 평안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피를 흘리고 죽었습니다. 세상에는 돌에 맞아 죽으면서 평안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얼굴은 마치 천사의 얼굴과 같이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가득하였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 하소서” 하고 마지막까지 평안하게 기도하다가 죽었습니다. 다 보혜사 성령의 주시는 평안을 맛본 신앙의 사람들입니다. 수가성의 여인이 물을 길으러 나왔다가 예수님에게 다시는 목마르지 않는 물을 달라고 간청한 것처럼, 우리도 세상에 줄 수 없는 평안을 얻어야 합니다. 세상에 평안이 없습니다. 평안을 구합시다. 세상의 평안이 아니라 성령이 주는 참된 평안을 얻읍시다. 신령한 평안을 사모하는 자에게 신령한 평안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어떻게 성령이 주시는 평안을 맛볼 수 있습니까
보혜사는 가르치는 영이고, 생각나게 하는 영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26절). ” 성령이 아니면 예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성령이 아니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할 수 없습니다. 기억하게 한다는 것은 단순한 암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을 깨닫고 적용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 예수님이 나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다는 것, 예수님은 항상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 예수님은 다시 오신다는 것 등등. 이전에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 말씀들이 생각납니다. 그것이 나를 위한 말씀임을 고백합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은 말이나 생각이나 행동을 새롭게 합니다. 내 것을 버리고 육신을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하고 영으로 살게 합니다. 성령 안에 여호와 하나님의 모든 비밀과 신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주시는 평안을 얻으려면 부지런히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연구해야 합니다. 돌부리에 넘어지면 가지 말라는 뜻인지, 돌부리를 조심해서 가라는 뜻인지 어떻게 받아들일 것입니까 겁쟁이는 돌아갈 것이고, 용감한 사람을 그래도 앞으로 나갈 것입니다. 어느 것이 맞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가라고 하면 가야 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가지 말라고 하면 가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성령이 주시는 평안은 말씀을 통해 임합니다.
얼마 전 총리 지명을 받았다가 국회에서 총리 인준을 받는데 실패한 분의 이야기입니다. 여론의 공정치 못한 뭇매를 맞았다는 생각에 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한 달 동안 외출을 하지 않고 집 안에 칩거하였는데, 주로 성경을 읽었다고 합니다. 신문도 뉴스도 보지 않고 성경만 읽었답니다. 성경 말씀은 세상에 줄 수 없는 평안을 주기 때문입니다. 전쟁터에 나가는 여호수아와 그의 군대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이 전쟁터에서도 평안을 주기 때문입니다. 감옥에 들어가는 사람이 왜 성경책은 가지고 갑니까 세상에서 자유 할 때에는 읽지 않던 성경을 왜 감옥에서 읽습니까 성경이 마음의 평안을 주기 때문입니다. 직장에서 좋지 않은 일이 있을 때, 모함을 당하거나 승진에 누락되었을 때 주로 읽는 것이 성경입니다. 성경을 읽으면 어린아이와 같아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게 됩니다. 말씀 안에서 세상에서 얻지 못하는 평안을 얻습니다. 성경은 이상하게도 실패하고 낙심된 사람에게 더욱 강력한 평안을 줍니다. 보혜사 성령이 말씀 가운데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평안은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평안은 다른 세상적인 무엇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가 우리와 함께 할 때, 영생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을 때,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주시는 평안을 얻으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아뢰라. ” 기도는 대화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성령은 이미 우리 마음속에 와 계십니다. 기도로 성령님과 대화합시다. 마음에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말합시다. 엘리야는 기도합니다.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나이다 하고(왕상19:4). ” 힘들고 살기 싫다는 심정을 그대로 토로하고 있습니다. 그의 기도의 내용은 옳다고 할 수 없지만, 평안을 얻기 위해서는 이 정도로 솔직하게 마음을 열고 기도해야 합니다. 나의 약함을 인정하면 하나하나 치료하시고, 그 자리에 평안을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합니다.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 원합니다. ” 예수님도 인성을 가진 분이라 죽음을 피하고 싶다고 기도합니다. 다니엘은 사자굴에 던져지는 것을 알고도 기도의 무릎을 꿇었습니다. 기도하면서 얻는 평안은 알기 때문에 사자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사실 기도하기 전에는 고민도 많고 갈등도 많습니다. 그러나 기도하고 일어서면 달라집니다. 평안이 가득합니다. 풍랑과 파도가 잠잠해지는 이 맛에 기도합니다. 산을 오르거나 낚싯대를 던지고 얻는 평안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음악을 듣거나 운동을 하면서 얻는 평안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깊은 평안 오래가는 평안, 질적으로 우수한 평안을 맛볼 것입니다.
우리는 평안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매일 갈등과 다툼 속에 살고 있습니다. 전쟁과 피 흘림의 소식이 끊이지 않습니다. 배운 사람이나 가진 사람이나 잘 난 사람이나 할 것 없이 평안하지 못합니다.
어떻게 해결할 것입니다. 방법은 크게 둘입니다. 하나는 주변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제압해서 평안을 쟁취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힘듭니다. 미국과 이라크의 전쟁에서 보듯이, 힘으로 평안을 얻는다는 것은 많은 희생을 요구합니다. 근본적으로 되지도 않습니다.
다른 하나는 내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여름을 겨울로 변화시켜서 평안을 얻을 수도 있지만, 다 쉽고 근본적인 것은 여름에는 여름 날씨에, 겨울에는 겨울 날씨에 적응하는 것입니다. 내 속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이 이미 있습니다. 이 평안을 믿음으로 누리면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환경이나 나 자신이나 사단이 누르고 있다면 그것을 폅시다. 성령의 충만 만이 평안을 보장합니다. 없는 평안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성령이 이미 주신 그 평안을 우리 것으로 만듭시다. 성령이 주시는 평안의 부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의 다락방으로 모입시다. 말씀을 읽고 묵상합시다.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평안을 누릴 것입니다.
시간이나 경비나 몸을 생각하면 가는 것이 부담되고, 기다리는 아이들이나 신세를 진 최인희 집사님을 생각하면 당장에 가야 하는데, 며칠째 궁리를 해 보지만결론이 잘 나지 않습니다. 큰 아이는 학년이 바뀌고 첫 모의고사를 쳤습니다. 자기 깐에는 방학 때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결과가 충격인가 봅니다. 입을 다 물고 절대 말을 하지 않습니다. 시험 못 쳐서 충격을 받은 아이들은 그날 밤에 집단적으로 이불을 뒤집어쓰고 마음 앓이를 했답니다. 충격을 받은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시시한 이야기를 꺼낸 것은 “지금 평안하십니까” 라는 질문에 솔직히 답해 보자는 뜻에서 한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에 근심된 일이 많고 참 죽을 일 쌓였구나. ” 이 찬송가 가사처럼 세상에는 근심된 일이나 죽을 일이 많습니다. 우리의 평안을 빼앗아 가는 사건이 어디 한 둘입니까 우리에게 평안이 필요합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이 아니라 성령이 주시는 진정한 평안이 필요합니다.
1. 평안을 빼앗는 것이 무엇입니까
평안을 빼앗는 것이 무엇입니까 걱정과 근심과 두려움입니다. 27절의 말씀을 보십시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
왜 제자들은 근심과 두려움에 빠져있습니까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난다는 말씀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떠난다는 말씀은 십자가의 죽음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의 생각에는 예수님이 곧 이스라엘을 로마의 손에서 구원할 것이라고 기대가 컸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날벼락 같은 말씀입니까 “예수님이 죽으시다니!” 예수님의 죽음은 제자들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입니다. 당장에 자신들도 별 볼 일 없게 되었습니다. 스승이 없는 제자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3년 동안 예수님을 믿고 따랐는데, 아무 보상도 없이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허탈하기도 하고 장래가 두렵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죽으신다면 우리에게도 그런 일이 닥칠지 모른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들의 무지이고 불신앙입니다. 모든 근심과 두려움은 무지와 불신앙에서 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으셔야 영광입니다.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셔야 합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셔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발전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좋다고 늘 예수님 붙잡고 함께 살 수는 없습니다. 성령을 보내서 일하시는 예수님을 알아야 하빈다. 제자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을 알았다면 근심도 걱정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 걱정하고 근심합니다.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아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6:31-32). ”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생활을 책임지시고 우리의 생명을 책임진다는 것을 믿으면 마음 편할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곳에는 절대 안식이 없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서 마음이 편했습니다. 백성들에게 희망적인 보고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다른 열명의 정탐군이나 믿음이 없는 백성들은 낙담하고, 울고불고 난리를 치다가 여호와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순종하여 가나안이 아닌 광야로 가버렸습니다. 광야에서 방황하던 40년 동안 이들에게는 진정한 평안이 없었습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을 보십시오. 그는 사자굴에 던져졌지만, 여호와 하나님을 절대 신뢰함으로 사자와 함께 평안하게 지내고 무사히 나왔습니다. 빌립보 감옥에 던져진 바울도 기도하고 찬송하고 은혜 받고 나왔습니다. 우리는 교회 와서도 은혜받고 가기 어려운데, 매맞고 감옥에서도 은혜를 받지 않습니까 믿음의 사람에게는 주시는 평안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내일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께 맡깁시다. 좋은 결과를 주실 것으로 믿고, 그리하지 않더라도 여호와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을 믿읍시다. 내일 대수술을 앞두고 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께 맡깁시다. 의사의 손을 붙들고 여호와 하나님이 수술할 것을 믿고, 혹 회복이 더디더라도 여호와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을 믿읍시다. 지금 미국과 이라크의 전쟁으로 온 세계가 걱정하고 있습니다. 빨리 전쟁이 끝나고 평화하도록 기도합시다. 피 흘림이 결코 헛되지 않도록 여호와 하나님의 깊은 뜻이 이루어질 것을 믿읍시다.
우리가 평안하지 못하는 다른 이유가 무엇입니까 죄입니다. 죄는 여호와 하나님과 우리를 원수되게 합니다. 죄가 가로막는 한 평안은 없습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남편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죽게 하였습니다. 얼마나 큰 죄입니까 다윗은 몸은 비록 궁궐에 있었지만 마음은 지옥에 있었습니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여름 가믐에 마름 같은 고통이 있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은 30에 팔았지만, 마음이 괴로워서 목을 매달아 죽었습니다. 죄를 짓고 여호와 하나님과 원수 되고 어떻게 평안할 수 있습니까
마음의 평안을 빼앗아 가는 어떤 죄라도 회개합시다.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씻어주실 것입니다. 주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집 나간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고 아버지 집에 돌아올 면목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객지에서 마음 고생하느니 차라리 아버지에게 돌아와서 “잘못했습니다” 하고 매를 맞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하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죄를 용서받으니까 마음만 편한 것이 아니라, 아들의 권리도 회복해 주었습니다. 아버지의 품안에 진정한 평안이 있습니다. 작은 병도 오래두면 큰 병이 됩니다. 아무리 무서운 병이라도 초기에 치료하면 고칠 수 있습니다. 스트레스도 빨리 풀어야 합니다. 마음의 병이 만병의 원인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마음속에 숨기고 있는 죄가 있다면 다 회개합시다. 여호와 하나님이 평안을 주실 것입니다.
2. 어떤 평안입니까
세상 사람들은 평안을 외부적인 환경이나 물질에서 찾습니다. 물론 일리가 있습니다. 가난해서 먹을 양식이 없는 가정은 땀 흘려 일해서 일용할 양식을 얻어야 합니다. 그래야 평안이 있습니다. 수험생은 자기가 목적하는 바를 이루어야 평안을 얻습니다. 다리 뻗고 잠을 잘 수 있습니다. 전쟁터에 있는 군인은 전쟁을 이겨야 평안을 얻습니다. 집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불면증으로 시달리는 사람은 잠을 자야 평안을 얻습니다. 직장에서 천대받는 사람은 중요한 직책을 맡아서 자기 존재를 인정받아야 평안을 얻습니다. 건강치 못한 사람은 건강을 얻어야 평안을 얻습니다. 눈에 보이는 문제가 해결되고 물질을 얻고 환경의 구체적인 변화가 와야 평안을 얻습니다. 물론 옳습니다.
그러나 이런 평안을 얻는데 몇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과연 그런 변화가 올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계절이나 시간은 세월이 가면 저절로 변한다지만, 능력이 없는 사람이 갑자기 능력을 발휘할 수도 없고, 물질이 없는 사람이 갑자가 갑부가 될 수도 없습니다. 키가 작은 사람이 갑자기 키가 클 수도 없습니다. 없는 인기를 어떻게 만들어 내며, 남이 싸우겠다는데 우리가 어떻게 말린단 말입니까 우리의 능력으로 해결 안 될 때에는 우리가 바라는 평안은 그림의 떡입니다. 영영 얻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평안은 얻는다 할지라도 일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수면제로 얻은 평안은 몇 시간 못갑니다. 내일 밤이면 또 괴롭습니다. 술로 얻은 평안은 술기운이 사라지면 형편은 더 악해집니다. 물질로 얻은 평안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물질이 없어지면 평안도 사라집니다. 집 안에 없던 돈이 한번에 많이 생기면 오히려 집안이 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 물질이 반드시 좋은 변화를 가져온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물질로 얻은 평안은 계속적인 물질을 요구합니다. 만약 물질이 지속적으로 공급이 끊어지면 그 평안은 사라집니다. 명예나 권세로 얻은 평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명예가 사라지고 권세가 사라지는 순간에 평안도 사라집니다. 젊음이 주는 평안도 그렇습니다. 20대는 자신만만합니다. 30대만 되면 다른 사람과 차이가 납니다. 40대는 벌써 밀려나고 퇴출되기 시작합니다. 50대가 지나면 돈 많이 받고 퇴직한 선배들을 원망합니다. 60대가 되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요즘 젊은이들이 뭐 알기나 하나” 하고 탄식합니다. 세대가 주는 평안은 한 세대를 뛰어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슨 평안을 줍니까 세상이 주는 것가 다른 내가 주는 평안이라고 합니다. 보혜사 성령을 통해서 평안을 줍니다. 지난날에는 예수님이 직접 평안을 주었지만, 이제는 보혜사 성령을 보내서 주십니다. 이것은 발전된 것입니다. 지난날 보다 더 강력한 평안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제자들은 예수님에게서 평안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 예수님의 한 걸음 한 걸음에서 기적을 보았고, 그것은 그들에게 하늘의 평안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예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셔서 여호와 하나님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대신 보혜사 성령을 우리 마음속에 충만하게 부어주심으로 더욱 심오하고 강력한 평안을 주십니다. 눈과 귀로 듣고 맛보던 평안이 아니라, 마음속에 느끼는 평안입니다. 손과 발로 감각적으로 맛보던 평안이 아니라, 영적으로 마음으로 맛보는 평안입니다. 일시적으로 지나가는 평안이 아니라, 마음속에 영원히 지속되는 평안을 맛봅니다.
보혜사 성령이 주는 평안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보편적인 평안입니다. 조건을 갖춘 사람들에게만 임하는 평안이 아닙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주는 평안입니다. 병상에서나 지하철에서나 자동차 안에서나 궁궐이나 초가집이나 다 같이 누리는 평안입니다. 성령이 주시는 평안은 장소와 시간을 정해서 그럴듯한 환경적인 요인을 갖춤으로 맛보는 것이 아닙니다. 남들이 일어나지도 못하는 새벽에 임하는 평안이고 남들이 곤한 잠에 떨어진 밤중에 임하는 평안입니다. 머리로 얻는 평안이 아니고 가슴으로 얻는 평안입니다. 무슨 재료나 기회가 되어서 조건으로 얻는 평안이 아니라, 성령만 받으면 얻는 평안입니다. 돈이나 배경이나 아무 것도 없이 얻는 평안입니다. 분위기나 환경과 상관없이 얻는 평안입니다. 누구도 방해할 수 없고, 어떤 환경적인 요인도 빼앗을 수 없는 평안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우월한 평안을 주십니다. 어렵기도 하지만 쉽기도 한 평안입니다.
한나는 아들을 낳지 못해서 마음이 슬픈 여자였습니다. 세상은 아들을 낳지 못해서 마음 아픈 여자에게 평안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나는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고 수색이 없어졌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얻었습니다. 야곱은 형 에서를 피해 도망가다가 벧엘 광야에서 잠을 잤습니다. 광야의 들짐승 소리가 무서웠고, 부모를 떠난 마음에 외로웠습니다. 광야에서 잠을 자다가 깨서 마음에 평안을 얻는 일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꿈에 하늘로 통하는 사닥다리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고 평안을 얻었습니다. 잠을 깨서 일어난 그 자리에 제단을 쌓았습니다. 바울은 지중해에서 광풍을 만나서 탄 배가 파선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에서는 배선하는 배 안에서 평안을 얻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기도하다가 여호와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기가 받은 평안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피를 흘리고 죽었습니다. 세상에는 돌에 맞아 죽으면서 평안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얼굴은 마치 천사의 얼굴과 같이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가득하였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 하소서” 하고 마지막까지 평안하게 기도하다가 죽었습니다. 다 보혜사 성령의 주시는 평안을 맛본 신앙의 사람들입니다. 수가성의 여인이 물을 길으러 나왔다가 예수님에게 다시는 목마르지 않는 물을 달라고 간청한 것처럼, 우리도 세상에 줄 수 없는 평안을 얻어야 합니다. 세상에 평안이 없습니다. 평안을 구합시다. 세상의 평안이 아니라 성령이 주는 참된 평안을 얻읍시다. 신령한 평안을 사모하는 자에게 신령한 평안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어떻게 성령이 주시는 평안을 맛볼 수 있습니까
보혜사는 가르치는 영이고, 생각나게 하는 영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26절). ” 성령이 아니면 예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성령이 아니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할 수 없습니다. 기억하게 한다는 것은 단순한 암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을 깨닫고 적용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 예수님이 나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다는 것, 예수님은 항상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 예수님은 다시 오신다는 것 등등. 이전에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 말씀들이 생각납니다. 그것이 나를 위한 말씀임을 고백합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은 말이나 생각이나 행동을 새롭게 합니다. 내 것을 버리고 육신을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하고 영으로 살게 합니다. 성령 안에 여호와 하나님의 모든 비밀과 신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주시는 평안을 얻으려면 부지런히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연구해야 합니다. 돌부리에 넘어지면 가지 말라는 뜻인지, 돌부리를 조심해서 가라는 뜻인지 어떻게 받아들일 것입니까 겁쟁이는 돌아갈 것이고, 용감한 사람을 그래도 앞으로 나갈 것입니다. 어느 것이 맞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가라고 하면 가야 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가지 말라고 하면 가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성령이 주시는 평안은 말씀을 통해 임합니다.
얼마 전 총리 지명을 받았다가 국회에서 총리 인준을 받는데 실패한 분의 이야기입니다. 여론의 공정치 못한 뭇매를 맞았다는 생각에 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한 달 동안 외출을 하지 않고 집 안에 칩거하였는데, 주로 성경을 읽었다고 합니다. 신문도 뉴스도 보지 않고 성경만 읽었답니다. 성경 말씀은 세상에 줄 수 없는 평안을 주기 때문입니다. 전쟁터에 나가는 여호수아와 그의 군대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이 전쟁터에서도 평안을 주기 때문입니다. 감옥에 들어가는 사람이 왜 성경책은 가지고 갑니까 세상에서 자유 할 때에는 읽지 않던 성경을 왜 감옥에서 읽습니까 성경이 마음의 평안을 주기 때문입니다. 직장에서 좋지 않은 일이 있을 때, 모함을 당하거나 승진에 누락되었을 때 주로 읽는 것이 성경입니다. 성경을 읽으면 어린아이와 같아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게 됩니다. 말씀 안에서 세상에서 얻지 못하는 평안을 얻습니다. 성경은 이상하게도 실패하고 낙심된 사람에게 더욱 강력한 평안을 줍니다. 보혜사 성령이 말씀 가운데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평안은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평안은 다른 세상적인 무엇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가 우리와 함께 할 때, 영생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을 때,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주시는 평안을 얻으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아뢰라. ” 기도는 대화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성령은 이미 우리 마음속에 와 계십니다. 기도로 성령님과 대화합시다. 마음에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말합시다. 엘리야는 기도합니다.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나이다 하고(왕상19:4). ” 힘들고 살기 싫다는 심정을 그대로 토로하고 있습니다. 그의 기도의 내용은 옳다고 할 수 없지만, 평안을 얻기 위해서는 이 정도로 솔직하게 마음을 열고 기도해야 합니다. 나의 약함을 인정하면 하나하나 치료하시고, 그 자리에 평안을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합니다.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 원합니다. ” 예수님도 인성을 가진 분이라 죽음을 피하고 싶다고 기도합니다. 다니엘은 사자굴에 던져지는 것을 알고도 기도의 무릎을 꿇었습니다. 기도하면서 얻는 평안은 알기 때문에 사자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사실 기도하기 전에는 고민도 많고 갈등도 많습니다. 그러나 기도하고 일어서면 달라집니다. 평안이 가득합니다. 풍랑과 파도가 잠잠해지는 이 맛에 기도합니다. 산을 오르거나 낚싯대를 던지고 얻는 평안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음악을 듣거나 운동을 하면서 얻는 평안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깊은 평안 오래가는 평안, 질적으로 우수한 평안을 맛볼 것입니다.
우리는 평안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매일 갈등과 다툼 속에 살고 있습니다. 전쟁과 피 흘림의 소식이 끊이지 않습니다. 배운 사람이나 가진 사람이나 잘 난 사람이나 할 것 없이 평안하지 못합니다.
어떻게 해결할 것입니다. 방법은 크게 둘입니다. 하나는 주변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제압해서 평안을 쟁취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힘듭니다. 미국과 이라크의 전쟁에서 보듯이, 힘으로 평안을 얻는다는 것은 많은 희생을 요구합니다. 근본적으로 되지도 않습니다.
다른 하나는 내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여름을 겨울로 변화시켜서 평안을 얻을 수도 있지만, 다 쉽고 근본적인 것은 여름에는 여름 날씨에, 겨울에는 겨울 날씨에 적응하는 것입니다. 내 속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이 이미 있습니다. 이 평안을 믿음으로 누리면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환경이나 나 자신이나 사단이 누르고 있다면 그것을 폅시다. 성령의 충만 만이 평안을 보장합니다. 없는 평안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성령이 이미 주신 그 평안을 우리 것으로 만듭시다. 성령이 주시는 평안의 부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의 다락방으로 모입시다. 말씀을 읽고 묵상합시다.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평안을 누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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