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 성령으로 잉태되어
본문
이 세상에 하나의 생명이 태어난다는 것은 무척 놀라운 일이다. 그래서 무의미하게 태어난 생명은 하나도 없다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닭이 계란을 품고 있으면 부화의 과정은 시작된다. 보통 20일에서 21일이 지나면 부화하는데 더운 아프리카에서는 닭이 알를 품은지 10일이면 부화를 한다고 한다. 병아리가 겁질을 깨고 나오는 모습을 보면 참 힘들어 보이지만 신기하다. 영상을 한번 보자.
병아리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이 태어나는 것은 신비스럽다. 가장 신비한 탄생의 비밀은 무엇일까 나는 인간의 몸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 태어난 사건이라 생각한다. 사도신경으로 우리는 고백한다.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그래서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사도신경에서 가장 믿어지는 않는 부분이라고 말한다.
‘남자없이 여자 혼자서 아이를 낳을 수 있는가’ 라는 생물학적 문제에 많은 사람들이 넘어져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이 시간에 이 논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자는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이 왜 이런 방법으로 예수님을 보내셨을까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특별한 방법으로 이 세상에 들어오기를 원하셨다면 그렇게 하실 수 있음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문제가 되는 행위가 여호와 하나님의 행위라면 불가능을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천지를 만드신 여호와 하나님 앞에 이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믿든지, 안 믿든지 신라를 세운 박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났다고 배웠다. 박혁거세는 기원전 70년경에 태어나 13세에 왕위에 올라 국호를 서라벌(신라), 서울을 금성이라 정하고 궁성을 쌓아 국가의 기초를 세운 사람이다. 이것을 가지고 시비거는 사람도 별로 없다. 단군신화는 어떠한가 환인의 서자 환웅이 인간세계를 다스리고 싶어하자 허락했다. 그러던 어느날 같은 동굴에 사는 곰과 호랑이 한마리가 환웅을 찾아와 인간이 되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이들의 간청을 들은 환웅이 이들에게 신령(神靈)한 쑥 1자루와 마늘 20쪽을 주며 이것만 먹고 100일간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곰은 인내하고 근신하여 삼칠일(37, 21일)만에 인간 여자로 변하였으나 호랑이는 참지 못하고 뛰쳐나가 사람이 되지 못했다. 웅녀는 자신과 혼인하는 사람이 없자 신단수 아래에서 환웅에게 아이 갖기를 기원했다. 그러자 환웅은 잠시 인간으로 변해 웅녀와 혼인하였다. 그 후 웅녀가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단군왕검이다.
이 단군왕검이 세운 나라가 고조선이다. 학자들은 이렇게 해석한다. 전설처럼 내려오던 한민족의 단군신화(檀君神話)는 하늘과 태양을 숭배하는 천신족(天神族)이 곰을 부족의 상징으로 하는 맥족(貊族)과 호랑이를 부족의 상징으로 하는 예족(濊族)을 평정하고 복속시키는 사실을 설화로서 전해준 것이라고…
이런 고대설화는 사실이 아니라 신화를 도입하여 조상을 신비스런 존재로 만들려는 이야기라 볼 수 있다. 그렇다고 마리아의 동정녀탄생을 설화, 신화처럼 볼 것인가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너무 현실적이고, 사실적임을 알 수 있다. 단지 처녀가 남자없이 아이를 갖는 부분은 성령님께 맡겨라. 우리가 할 일은 여호와 하나님이 택하신 방법 그대로를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따지지 말자.
마태복음 1장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나는 과정을 정확히 묘사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18절)
마리아와 요셉이 약혼했는데 마리아가 아기를 가졌다는 것이다. 요셉은 마리아와 잠을 잔 적이 없기 때문에 자기 아이가 아님을 분명히 알았다. 그런데 만약에 공개적으로 말하면 어떻게 될까 마리아는 간음한 여자가 되어 돌에 맞아죽게 된다. 그래서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기에 사랑하는 사람과 이혼하기로 결심한다. 애 아빠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그 사람과 결혼하도록 허락하겠다는 의미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문화로 이 상황을 해석하면 안된다. 이스라엘의 결혼절차를 알아야 술술 이해된다. 요즘은 연애결혼을 많이 하는데, 당시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중매결혼을 했다. 중매에 의해 합의가 이루어지면 약혼을 하게 된다. 약혼을 하면 서로 왕래할 뿐 아니라 여행도 함께 할 수 있었다.
우리는 결혼식이 중요한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약혼식이 중요하다. 약혼식을 올림으로써 두 남녀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부부가 되는 것이다. 약혼식을 하고는 곧바로 호적신고를 하기 때문에 서로를 부를 때 아내, 남편으로 부르게 된다. 이스라엘의 풍속대로 하면 약혼한 여인이 아기를 갖는 것이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약혼을 했다가 결혼을 파기하면 이혼을 해야 한다.
나라마다 결혼풍습을 보면 다양하고 재미있다.
1)아프리카 사회에서 여성의 출산은 노동력의 확보라는 점에서 중요시 된다. 아내를 얻기 위해서는 적절한 신부대금이 필요한데 보통 소는 10마리 내외, 염소는 25마리 정도이다.
2)일본은 결혼식 당일, 집에서 신랑 신부가 예복을 차려입고 각자의 부모에게 작별인사를 한 뒤 결혼식장으로 향한다. 결혼식에는 양가 가족만 참가하고, 식이 끝난 다음에 피로연을 하는데 일반 하객은 피로연회장에 축의금을 들고 모이게 된다. 단, 피로연장에는 좌석에 이름이 적혀 있어서 미리 통보된 사람 50명에서 100명만 참가할 수 있다.
3)요르단은 결혼식날, 먼저 법정에서의 공식적인 결혼등록절차를 마치고 결혼파티를 연다. 손님들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손님들이 신부를 데리러 간다. 신부집에 도착한 신랑측 무리중에 연장자가 작은 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신부가 삼촌과 오빠에게 이끌려 신랑측에 인도되고 신부 어머니와 숙모들을 차에 태우고 신랑집으로 출발한다. 신부의 어머니는 그날 밤 신랑의 집에 머무르며 신부가 처녀라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4)말레이지아는 결혼식은 대게 약혼한 지 1년이나 2년 후에 하는 것이 통례이다. 이는 예비 신랑 신부에게 새로운 삶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주기 위한 것으로 이 기간 동안 신랑은 신부가 혼수감을 준비할 수 있는 돈을 매달 보내주게 된다.
5)프랑스는 결혼식보다 법률이 우선, 식을 치르고 결혼 신고를 하는 우리와는 다르게 법률혼을 통과한 후 결혼식을 치를 수 있다.
6)이집트의 남자는 네 명의 여자와 결혼이 허용되며, 이혼 절차도 간편하다보니 이혼이 심각한 사회적 문제다. 일부다처는 사회보장제도의 일종인데 페해가 더 심각하다.
7)독일의 결혼식은 세 단계로 나뉘어 3일동안 진행된다. 결혼식 전날에 파티를 한 후 결혼등록소로 가서 가족, 친척, 몇 명의 증인들 앞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그리고 종교에 따라 한번 더 결혼식을 치룬다. 결혼식이 끝난 후 차를 타고 시내를 돌아다니는데 결혼했음을 알리기 위해 차 뒤에 깡통을 매달고 요란하게 달린다.
마리아가 아기 가진 것을 알자 요셉은 조용히 끊고자 했다. (이혼) 그래야만 마리아가 죽음을 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그를 의로운 사람이라고 한다. 그런데 고민 고민하다가 그런 결정을 내렸는데 요셉의 꿈에 주의 사자가 나타났다.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1:20~21)
요셉은 이혼하려다가 천사의 말을 듣게 되고 생각을 바꿨다. 마리아를 통해 태어나는 아기가 자신의 아기는 아니지만 천사의 말을 듣고 마리아를 데려온 것이다.
예수님이 오시는 과정은 이처럼 아슬아슬했다. 요셉이 신중하지 않게 이 사실을 퍼트렸다면 마리아는 돌에 맞아 죽을 수 밖에 없었다.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이 말은 무척 중요하다. 요셉이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앞에 순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동정녀의 탄생을 못 믿는 사람은 이렇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약혼녀가 잠자리도 안 했는데 임신했다. 그런데도 결혼하겠다면 요셉에게 뭔가 대단한 사건이 일어났다고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이런 열린자세가 필요하다. 문제가 생기면 무조건 “더 이상 볼 것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거기에는 아무런 역사도 일어나지 않는다. 내가 만약 이런 상황에 처해 있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해보자. 예)나는 폐결핵에 걸렸는데 아기를 임신했다. 남편은 알콜중독자이며 폭력을 행사하는 무책임한 사람이다.
아기를 낳아도 제대로 기를 자신이 없다. 이렇게 힘든 상황에서 나는 아기를 낳는 것이 좋을까 아기를 포기하는 것이 좋을까 여러분이 만약 절망감에 사로잡혀 아기 낳기를 포기했다면 월광소나타, 운명교향곡을 작곡한 베토벤은 이 세상에 태어날 수 없었을 것이며 그 아름다운 음악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역사는 받아들이기 힘든 일,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들 앞에 열린 마음으로 순종했던 사람들을 통해 만들어졌다. 그 길은 좁은 길이었다. 하지만 불가능한 길은 아니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7:13-14)
마리아와 요셉의 믿음과 순종이 있었기에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역사는 가능했다. 성령께서 잉태케 하심을 받아들이고 순종했기에 예수 그리스도는 베들레헴 마굿간에 태어나셨던 것이다.
행복의 문 하나가 닫히면 다른 문들이 열린다. 그러나 우리는 대게 닫힌 문들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우리를 향해 열린 문을 보지 못한다. (헬렌 켈러)
좁으냐 넓으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닫힌 문을 보느냐 열린 문을 바라보냐에 있다. 우리가 바라보는 태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노(no)'를 거꾸로 쓰면 전진을 의미하는 '온(on)'이 된다. 모든 문제에는 반드시 문제를 푸는 열쇠가 있다.
요셉이 생각했다는 것은 잔머리 굴리고 꾀를 부렸다는 말이 아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음을 의미한다.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태도를 말한다. 그때 닫힌 문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은 열린 문을 보여주셨다. 노(no)가 온(on)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미국인들이 하는 농담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이 지구상에서 가장 개발이 안된 암흑지대는 아프리카나 시베리아가 아니다. 바로 당신의 모자 밑이다. " 등잔 밑이 가장 어둡다는 우리의 속담과도 일맥상통한다. 모자 밑을 개발해야 한다. 마리아와 요셉처럼 “주의 종에게 말씀대로 이루어지길 원합니다. ”고 대답하는 믿음의 언어, 열린마음으로 개발되면 우리는 놀라운 여호와 하나님의 사명자로 쓰임받게 될 줄 믿는다.
내 책상 앞에 늘 붙어있는 말이 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위대한 사람들이 아니라 위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약한 사람들이다. ”우리가 관심 기울일 것은 내가 어떤 사람이냐에 있지 않고 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손에 붙들렸느냐에 있다. 모세가 늘 말라 비틀어진 지팡이를 꼭 잡고 기적을 일으켰다. 이것은 모세에게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모세 자신이 말라 비틀어진 지팡이 같은 연약한 사람이지만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붙드시는 한 나는 어떤 능력, 기적도 일으킬 수 있다고 모세의 고백의 표현이었다. 여호와 하나님께 붙들린 인생되길 축복한다.
이처럼 동정녀 마리와 요셉의 믿음의 결단을 사용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예수님을 알로 태어나든지, 뿅하고 ET처럼 비행물체를 타고 오게 하실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에수님은 우리와 다른 분이 되신다. 동정녀 탄생의 중요한 의미는 여호와 하나님이 순수한 인간이 되사 우리 가운데 찾아오셨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우리는 어려운 말로 성육신(incarnation)이라고 한다.
성육신을 이해하기 좋은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1873년 5월 10일, 벨기에 출신의 신부 한 사람이 문둥병자들만 모여살던 죽음의 섬, 모로카이섬에 갔다. 서른 세살의 신부는 묵묵히 나환자들을 위한 집을 짓고 손수 관을 짰다. 16년 동안 1천 6백명의 장례식을 치렀으며 1천여개의 관을 직접 만들었다. 대단하지 않는가 그는 다미안신부이다. 그런데 그 섬에 사는 문둥병자들은 비웃으며 말했다.
"자신은 건강한 몸이기 때문에 믿음을 가지고 살지만, 만약 우리들처럼 날마다 몸이 썩어간다면 그렇게 말하진 못할 것이다. " 그들의 마음은 처음부터 굳게 닫혀 있었다.
다미안은 고민에 싸여 제단앞에 나아가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저에게도 문둥병을 주셔서 저들에게 주의 복음을 전하게 하여 주소서"
얼마후 다미엔은 감각이 점차로 무디어가고 눈썹이 빠지고 관절이 떨어져 나갔다. 죽음의병이 찾아온 것이다. 문둥에 걸린 다미안은 이렇게 감사기도를 올렸다.
"여호와 하나님 감사합니다. 여호와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제 나도 저 문둥병 자들에게 설교할 때에 여러분... 이라고 하지 아니하고 우리는... 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당신들 문둥병자가 아니라 우리 문둥병자들은... 이라고 설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이 기쁨의 문둥병을 주시오니 정말 감사합니다. "
상대방과 같은 아픔과 고난을 곁어보지 않고는 우리의 앎은 한계가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성육신사건은 우리처럼 되어, 우리를 사랑하시려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셨다. 성경에서 황금률이라 불리는 말씀이 뭔지 아는가 마태복음 7장 12절이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나는 이 말씀을 성육신의 입장에서 생각하며 ‘그래서 황금률이구나’ 생각했다. 이 말씀은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라는 말씀이다. 한자로는 역지사지(易地思之/易:바꿀역,地:따지/思:생각할사/之:갈지).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와 같아지심으로 우리를 이해하시고, 용서해주시고, 사랑해주신다. 만약에 성육신하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 이렇게 대들었을거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 뭘 아셔요 우리 입장에 서 보신 적이 있어요 내가 얼마나 힘들고 마음 아팠는지 아시겠어요”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와 같이 살아보고, 우리와 같이 느껴보고, 우리처럼 생각해 보시려고 사람되어 오셨다. 왕궁에서 사셨다면 또 그런 말을 들을 수 있기에 가장 낮은 곳 마굿간에서 태어나셨고, 가장 서민적으로 사셨던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역사 안에 들어오셨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 문화의 옷을 입고 오셨다.
마틴 루터는 “God makes him small. " 여호와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작게 만드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다니 얼마나 불편한 일인가 그렇게 크신 분이 보잘 것 없는 분이 되셨으니 얼마나 엄청난 희생인가 십자가의 희생 이상으로 인간이 되신 것이 엄청난 희생이요, 겸손이었던 것이다. 이게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예수님이 나셔야 했던 이유이다. 나를 가장 사랑하시기 위해!
그런데 가톨릭은 쓸데없는 데 신경을 쓰다가 이상한 교리를 만들었다. 동정녀 탄생을 잘못 적용한 예가 ‘무염시태’ 교리다. 무염시태라는 말은 마리아가 원죄 없이 예수님을 잉태했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낳은 마리아에 대한 존중심이 지나쳐서 나중에는 ‘마리아 승천설’로 발전했고, 더 나아가 죄 없는 마리아를 낳은 그녀의 어머니까지 신성시하게 되었다. 가톨릭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성 안나여, 이 망혼을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하는데, 안나가 바로 마리아의 어머니이다. 마리아도 우리와 같은 연약한 인간인데...
가끔 예배시간에 늦는 분들이 있다. 그러면 대부분 쑥스러워 조심스럽게 들어온다. 어떤 성도님도 그만 예배에 늦었다. 조용히 들어오며 이렇게 다짐했다. ‘조금만 더 서두를껄. 오다가 누구엄마하고 수다만 떨지 않았어도 늦지 않았을텐데... ’그렇게 송구한 마음으로 목사님 얼굴도 못 쳐다보고 고개숙이고 예배드리고 있는데 자기보다 더 늦게 들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도대체 누군데 늦는거야. ’하고 뒤돌아보니 장로님이다.
순간 너무 반갑다. 그동안 송구스러운 마음이 다 사라진다. ‘장로님도 늦는데 내가 늦은 것은 대수롭지 않지!’
장로님의 낮아짐이 어떤 성도에게는 이런 은혜가 될 수 있듯이, 여호와 하나님의 낮아지심은 오늘 모든 인간에게 여호와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게 하는 은혜가 된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 여호와 하나님이 되셨다. 우리를 가장 잘 아시고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우리의 편이 되어주시려고 인간의 몸을 입고 낮아지신 것이다. 오늘 내가 낮아지면 여호와 하나님은 새로운 역사를 쓰실 수 있다. 상대방의 입장에 서기 위해 노력해보자. 마리아와 요셉처럼 “말도 안되는 일” 앞에 열린 마음으로 겸손하게 순종해 보자. 오늘도 2000천년전의 그 일이 오늘 우리를 통해서 이뤄질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 삶의 낮은 자리로 찾아오시는 은혜를 경험하게 될 줄 믿는다. 그 주인공이 되길 축복한다.
병아리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이 태어나는 것은 신비스럽다. 가장 신비한 탄생의 비밀은 무엇일까 나는 인간의 몸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 태어난 사건이라 생각한다. 사도신경으로 우리는 고백한다.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그래서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사도신경에서 가장 믿어지는 않는 부분이라고 말한다.
‘남자없이 여자 혼자서 아이를 낳을 수 있는가’ 라는 생물학적 문제에 많은 사람들이 넘어져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이 시간에 이 논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자는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이 왜 이런 방법으로 예수님을 보내셨을까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특별한 방법으로 이 세상에 들어오기를 원하셨다면 그렇게 하실 수 있음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문제가 되는 행위가 여호와 하나님의 행위라면 불가능을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천지를 만드신 여호와 하나님 앞에 이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믿든지, 안 믿든지 신라를 세운 박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났다고 배웠다. 박혁거세는 기원전 70년경에 태어나 13세에 왕위에 올라 국호를 서라벌(신라), 서울을 금성이라 정하고 궁성을 쌓아 국가의 기초를 세운 사람이다. 이것을 가지고 시비거는 사람도 별로 없다. 단군신화는 어떠한가 환인의 서자 환웅이 인간세계를 다스리고 싶어하자 허락했다. 그러던 어느날 같은 동굴에 사는 곰과 호랑이 한마리가 환웅을 찾아와 인간이 되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이들의 간청을 들은 환웅이 이들에게 신령(神靈)한 쑥 1자루와 마늘 20쪽을 주며 이것만 먹고 100일간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곰은 인내하고 근신하여 삼칠일(37, 21일)만에 인간 여자로 변하였으나 호랑이는 참지 못하고 뛰쳐나가 사람이 되지 못했다. 웅녀는 자신과 혼인하는 사람이 없자 신단수 아래에서 환웅에게 아이 갖기를 기원했다. 그러자 환웅은 잠시 인간으로 변해 웅녀와 혼인하였다. 그 후 웅녀가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단군왕검이다.
이 단군왕검이 세운 나라가 고조선이다. 학자들은 이렇게 해석한다. 전설처럼 내려오던 한민족의 단군신화(檀君神話)는 하늘과 태양을 숭배하는 천신족(天神族)이 곰을 부족의 상징으로 하는 맥족(貊族)과 호랑이를 부족의 상징으로 하는 예족(濊族)을 평정하고 복속시키는 사실을 설화로서 전해준 것이라고…
이런 고대설화는 사실이 아니라 신화를 도입하여 조상을 신비스런 존재로 만들려는 이야기라 볼 수 있다. 그렇다고 마리아의 동정녀탄생을 설화, 신화처럼 볼 것인가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너무 현실적이고, 사실적임을 알 수 있다. 단지 처녀가 남자없이 아이를 갖는 부분은 성령님께 맡겨라. 우리가 할 일은 여호와 하나님이 택하신 방법 그대로를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따지지 말자.
마태복음 1장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나는 과정을 정확히 묘사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18절)
마리아와 요셉이 약혼했는데 마리아가 아기를 가졌다는 것이다. 요셉은 마리아와 잠을 잔 적이 없기 때문에 자기 아이가 아님을 분명히 알았다. 그런데 만약에 공개적으로 말하면 어떻게 될까 마리아는 간음한 여자가 되어 돌에 맞아죽게 된다. 그래서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기에 사랑하는 사람과 이혼하기로 결심한다. 애 아빠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그 사람과 결혼하도록 허락하겠다는 의미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문화로 이 상황을 해석하면 안된다. 이스라엘의 결혼절차를 알아야 술술 이해된다. 요즘은 연애결혼을 많이 하는데, 당시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중매결혼을 했다. 중매에 의해 합의가 이루어지면 약혼을 하게 된다. 약혼을 하면 서로 왕래할 뿐 아니라 여행도 함께 할 수 있었다.
우리는 결혼식이 중요한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약혼식이 중요하다. 약혼식을 올림으로써 두 남녀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부부가 되는 것이다. 약혼식을 하고는 곧바로 호적신고를 하기 때문에 서로를 부를 때 아내, 남편으로 부르게 된다. 이스라엘의 풍속대로 하면 약혼한 여인이 아기를 갖는 것이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약혼을 했다가 결혼을 파기하면 이혼을 해야 한다.
나라마다 결혼풍습을 보면 다양하고 재미있다.
1)아프리카 사회에서 여성의 출산은 노동력의 확보라는 점에서 중요시 된다. 아내를 얻기 위해서는 적절한 신부대금이 필요한데 보통 소는 10마리 내외, 염소는 25마리 정도이다.
2)일본은 결혼식 당일, 집에서 신랑 신부가 예복을 차려입고 각자의 부모에게 작별인사를 한 뒤 결혼식장으로 향한다. 결혼식에는 양가 가족만 참가하고, 식이 끝난 다음에 피로연을 하는데 일반 하객은 피로연회장에 축의금을 들고 모이게 된다. 단, 피로연장에는 좌석에 이름이 적혀 있어서 미리 통보된 사람 50명에서 100명만 참가할 수 있다.
3)요르단은 결혼식날, 먼저 법정에서의 공식적인 결혼등록절차를 마치고 결혼파티를 연다. 손님들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손님들이 신부를 데리러 간다. 신부집에 도착한 신랑측 무리중에 연장자가 작은 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신부가 삼촌과 오빠에게 이끌려 신랑측에 인도되고 신부 어머니와 숙모들을 차에 태우고 신랑집으로 출발한다. 신부의 어머니는 그날 밤 신랑의 집에 머무르며 신부가 처녀라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4)말레이지아는 결혼식은 대게 약혼한 지 1년이나 2년 후에 하는 것이 통례이다. 이는 예비 신랑 신부에게 새로운 삶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주기 위한 것으로 이 기간 동안 신랑은 신부가 혼수감을 준비할 수 있는 돈을 매달 보내주게 된다.
5)프랑스는 결혼식보다 법률이 우선, 식을 치르고 결혼 신고를 하는 우리와는 다르게 법률혼을 통과한 후 결혼식을 치를 수 있다.
6)이집트의 남자는 네 명의 여자와 결혼이 허용되며, 이혼 절차도 간편하다보니 이혼이 심각한 사회적 문제다. 일부다처는 사회보장제도의 일종인데 페해가 더 심각하다.
7)독일의 결혼식은 세 단계로 나뉘어 3일동안 진행된다. 결혼식 전날에 파티를 한 후 결혼등록소로 가서 가족, 친척, 몇 명의 증인들 앞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그리고 종교에 따라 한번 더 결혼식을 치룬다. 결혼식이 끝난 후 차를 타고 시내를 돌아다니는데 결혼했음을 알리기 위해 차 뒤에 깡통을 매달고 요란하게 달린다.
마리아가 아기 가진 것을 알자 요셉은 조용히 끊고자 했다. (이혼) 그래야만 마리아가 죽음을 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그를 의로운 사람이라고 한다. 그런데 고민 고민하다가 그런 결정을 내렸는데 요셉의 꿈에 주의 사자가 나타났다.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1:20~21)
요셉은 이혼하려다가 천사의 말을 듣게 되고 생각을 바꿨다. 마리아를 통해 태어나는 아기가 자신의 아기는 아니지만 천사의 말을 듣고 마리아를 데려온 것이다.
예수님이 오시는 과정은 이처럼 아슬아슬했다. 요셉이 신중하지 않게 이 사실을 퍼트렸다면 마리아는 돌에 맞아 죽을 수 밖에 없었다.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이 말은 무척 중요하다. 요셉이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앞에 순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동정녀의 탄생을 못 믿는 사람은 이렇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약혼녀가 잠자리도 안 했는데 임신했다. 그런데도 결혼하겠다면 요셉에게 뭔가 대단한 사건이 일어났다고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이런 열린자세가 필요하다. 문제가 생기면 무조건 “더 이상 볼 것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거기에는 아무런 역사도 일어나지 않는다. 내가 만약 이런 상황에 처해 있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해보자. 예)나는 폐결핵에 걸렸는데 아기를 임신했다. 남편은 알콜중독자이며 폭력을 행사하는 무책임한 사람이다.
아기를 낳아도 제대로 기를 자신이 없다. 이렇게 힘든 상황에서 나는 아기를 낳는 것이 좋을까 아기를 포기하는 것이 좋을까 여러분이 만약 절망감에 사로잡혀 아기 낳기를 포기했다면 월광소나타, 운명교향곡을 작곡한 베토벤은 이 세상에 태어날 수 없었을 것이며 그 아름다운 음악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역사는 받아들이기 힘든 일,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들 앞에 열린 마음으로 순종했던 사람들을 통해 만들어졌다. 그 길은 좁은 길이었다. 하지만 불가능한 길은 아니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7:13-14)
마리아와 요셉의 믿음과 순종이 있었기에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역사는 가능했다. 성령께서 잉태케 하심을 받아들이고 순종했기에 예수 그리스도는 베들레헴 마굿간에 태어나셨던 것이다.
행복의 문 하나가 닫히면 다른 문들이 열린다. 그러나 우리는 대게 닫힌 문들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우리를 향해 열린 문을 보지 못한다. (헬렌 켈러)
좁으냐 넓으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닫힌 문을 보느냐 열린 문을 바라보냐에 있다. 우리가 바라보는 태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노(no)'를 거꾸로 쓰면 전진을 의미하는 '온(on)'이 된다. 모든 문제에는 반드시 문제를 푸는 열쇠가 있다.
요셉이 생각했다는 것은 잔머리 굴리고 꾀를 부렸다는 말이 아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음을 의미한다.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태도를 말한다. 그때 닫힌 문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은 열린 문을 보여주셨다. 노(no)가 온(on)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미국인들이 하는 농담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이 지구상에서 가장 개발이 안된 암흑지대는 아프리카나 시베리아가 아니다. 바로 당신의 모자 밑이다. " 등잔 밑이 가장 어둡다는 우리의 속담과도 일맥상통한다. 모자 밑을 개발해야 한다. 마리아와 요셉처럼 “주의 종에게 말씀대로 이루어지길 원합니다. ”고 대답하는 믿음의 언어, 열린마음으로 개발되면 우리는 놀라운 여호와 하나님의 사명자로 쓰임받게 될 줄 믿는다.
내 책상 앞에 늘 붙어있는 말이 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위대한 사람들이 아니라 위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약한 사람들이다. ”우리가 관심 기울일 것은 내가 어떤 사람이냐에 있지 않고 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손에 붙들렸느냐에 있다. 모세가 늘 말라 비틀어진 지팡이를 꼭 잡고 기적을 일으켰다. 이것은 모세에게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모세 자신이 말라 비틀어진 지팡이 같은 연약한 사람이지만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붙드시는 한 나는 어떤 능력, 기적도 일으킬 수 있다고 모세의 고백의 표현이었다. 여호와 하나님께 붙들린 인생되길 축복한다.
이처럼 동정녀 마리와 요셉의 믿음의 결단을 사용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예수님을 알로 태어나든지, 뿅하고 ET처럼 비행물체를 타고 오게 하실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에수님은 우리와 다른 분이 되신다. 동정녀 탄생의 중요한 의미는 여호와 하나님이 순수한 인간이 되사 우리 가운데 찾아오셨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우리는 어려운 말로 성육신(incarnation)이라고 한다.
성육신을 이해하기 좋은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1873년 5월 10일, 벨기에 출신의 신부 한 사람이 문둥병자들만 모여살던 죽음의 섬, 모로카이섬에 갔다. 서른 세살의 신부는 묵묵히 나환자들을 위한 집을 짓고 손수 관을 짰다. 16년 동안 1천 6백명의 장례식을 치렀으며 1천여개의 관을 직접 만들었다. 대단하지 않는가 그는 다미안신부이다. 그런데 그 섬에 사는 문둥병자들은 비웃으며 말했다.
"자신은 건강한 몸이기 때문에 믿음을 가지고 살지만, 만약 우리들처럼 날마다 몸이 썩어간다면 그렇게 말하진 못할 것이다. " 그들의 마음은 처음부터 굳게 닫혀 있었다.
다미안은 고민에 싸여 제단앞에 나아가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저에게도 문둥병을 주셔서 저들에게 주의 복음을 전하게 하여 주소서"
얼마후 다미엔은 감각이 점차로 무디어가고 눈썹이 빠지고 관절이 떨어져 나갔다. 죽음의병이 찾아온 것이다. 문둥에 걸린 다미안은 이렇게 감사기도를 올렸다.
"여호와 하나님 감사합니다. 여호와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제 나도 저 문둥병 자들에게 설교할 때에 여러분... 이라고 하지 아니하고 우리는... 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당신들 문둥병자가 아니라 우리 문둥병자들은... 이라고 설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이 기쁨의 문둥병을 주시오니 정말 감사합니다. "
상대방과 같은 아픔과 고난을 곁어보지 않고는 우리의 앎은 한계가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성육신사건은 우리처럼 되어, 우리를 사랑하시려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셨다. 성경에서 황금률이라 불리는 말씀이 뭔지 아는가 마태복음 7장 12절이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나는 이 말씀을 성육신의 입장에서 생각하며 ‘그래서 황금률이구나’ 생각했다. 이 말씀은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라는 말씀이다. 한자로는 역지사지(易地思之/易:바꿀역,地:따지/思:생각할사/之:갈지).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와 같아지심으로 우리를 이해하시고, 용서해주시고, 사랑해주신다. 만약에 성육신하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 이렇게 대들었을거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 뭘 아셔요 우리 입장에 서 보신 적이 있어요 내가 얼마나 힘들고 마음 아팠는지 아시겠어요”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와 같이 살아보고, 우리와 같이 느껴보고, 우리처럼 생각해 보시려고 사람되어 오셨다. 왕궁에서 사셨다면 또 그런 말을 들을 수 있기에 가장 낮은 곳 마굿간에서 태어나셨고, 가장 서민적으로 사셨던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역사 안에 들어오셨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 문화의 옷을 입고 오셨다.
마틴 루터는 “God makes him small. " 여호와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작게 만드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다니 얼마나 불편한 일인가 그렇게 크신 분이 보잘 것 없는 분이 되셨으니 얼마나 엄청난 희생인가 십자가의 희생 이상으로 인간이 되신 것이 엄청난 희생이요, 겸손이었던 것이다. 이게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예수님이 나셔야 했던 이유이다. 나를 가장 사랑하시기 위해!
그런데 가톨릭은 쓸데없는 데 신경을 쓰다가 이상한 교리를 만들었다. 동정녀 탄생을 잘못 적용한 예가 ‘무염시태’ 교리다. 무염시태라는 말은 마리아가 원죄 없이 예수님을 잉태했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낳은 마리아에 대한 존중심이 지나쳐서 나중에는 ‘마리아 승천설’로 발전했고, 더 나아가 죄 없는 마리아를 낳은 그녀의 어머니까지 신성시하게 되었다. 가톨릭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성 안나여, 이 망혼을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하는데, 안나가 바로 마리아의 어머니이다. 마리아도 우리와 같은 연약한 인간인데...
가끔 예배시간에 늦는 분들이 있다. 그러면 대부분 쑥스러워 조심스럽게 들어온다. 어떤 성도님도 그만 예배에 늦었다. 조용히 들어오며 이렇게 다짐했다. ‘조금만 더 서두를껄. 오다가 누구엄마하고 수다만 떨지 않았어도 늦지 않았을텐데... ’그렇게 송구한 마음으로 목사님 얼굴도 못 쳐다보고 고개숙이고 예배드리고 있는데 자기보다 더 늦게 들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도대체 누군데 늦는거야. ’하고 뒤돌아보니 장로님이다.
순간 너무 반갑다. 그동안 송구스러운 마음이 다 사라진다. ‘장로님도 늦는데 내가 늦은 것은 대수롭지 않지!’
장로님의 낮아짐이 어떤 성도에게는 이런 은혜가 될 수 있듯이, 여호와 하나님의 낮아지심은 오늘 모든 인간에게 여호와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게 하는 은혜가 된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 여호와 하나님이 되셨다. 우리를 가장 잘 아시고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우리의 편이 되어주시려고 인간의 몸을 입고 낮아지신 것이다. 오늘 내가 낮아지면 여호와 하나님은 새로운 역사를 쓰실 수 있다. 상대방의 입장에 서기 위해 노력해보자. 마리아와 요셉처럼 “말도 안되는 일” 앞에 열린 마음으로 겸손하게 순종해 보자. 오늘도 2000천년전의 그 일이 오늘 우리를 통해서 이뤄질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 삶의 낮은 자리로 찾아오시는 은혜를 경험하게 될 줄 믿는다. 그 주인공이 되길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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