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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성령님을 믿습니다

본문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경제가 어려워지면 거지가 많아진다. 거지의 종류가 다양한 것을 아는가
밥 먹은 후에만 나타나는 거지는 설거지
항상 폭행만 당하는 거지는 맞는 거지
언제나 고개만 끄덕이는 거지는 그런 거지
많이 먹고 복 받는 거지는 배부른 거지
무엇인가 열심히 한다. 이 거지는 하는 거지
타의 모범이 되는 거지는 바람직한 거지
약간 쑥스럽게 생각하는 거지는 미안한 거지
무지 무지 섹시한 거지는 야한 거지
설교 들으면서 아멘하고 끄덕이면 나는 행복한 거지.
설교 시간에 꾸벅구벅 졸기만 하면 당신은 야박한 거지.
이렇게 말하는데도 전혀 웃지 않고 쳐다만 보면 나 무지막지하게 삐질 거지.
참 거지 종류가 많다. 이 세상에 누구도 거지 되고 싶은 사람은 없다.
어떻게 살다보니 거지처럼 얻어 먹는 신세가 되었고, 주저앉아 버린 것이다.
나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도 거지처럼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왜 성령님을 의지하고 않고 내 힘으로 신앙생활하려고 하면 영적거지가 된다.
성령님을 보내주신 이유는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어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과 부유함을 누리며 영적부자로 살기 위함이다. 영적거지가 영적부자가 되는 비결은 성령님을 믿으면 된다. 성령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이다. 따라해보자.
“성령님을 믿습니다. 성령님을 신뢰합니다. 성령님을 의지합니다. ”
벌써 사도신경을 중심으로 말씀을 나눈지 10주가 되었다. 교리적인 설교가 되기에 딱딱할 수 있어 어떻게 하면 우리의 생활과 연관이 될 수 있을까 고민하며 준비해 왔다. 오늘부터 5주간은 성령님의 사역을 나누게 된다. 성령님을 통해 교회가 세워졌고 성도간에 서로 교제하며 죄용서함과 부활과 영생의 삶을 누리게 되었다.
 사도신경은 여호와 하나님은 삼위일체 이심을 고백하는 것이다.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의 사역을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다. 성부 여호와 하나님은 구원을 계획하시고, 성자 예수님은 실행하시고, 성령 여호와 하나님은 구원을 각 사람에게 적용하신다. 오늘 말씀을 통해 성령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인지 함께 나누려 한다.
아일랜드에는 유럽의 인디언이라 불리는 켈트인들이 살았는데 그들의 말 중에 '아남 카라'라는 말이 있다. ‘영혼의 동반자’라는 말이다. 여러분에겐 영혼의 동반자가 있는가인생의 동반자는 있는데, 영혼의 동반자도 있냐고 물을 수 있다. 내 영혼의 동반자가 있다. 성경은 그 분을 성령님이라 부르고 있다. C. E. 카우맨도 말하기를 “성령은 우리들의 심령에 거하시는 동반자이시다. ”라고 했다. 우리 모두에게는 영혼의 동반자가 있다. 아멘 여호와 하나님은 내 영혼의 동반자는 바로 성령님이시다.
여호와 하나님은 내 영혼의 동반자로 성령님을 보내주셨다. 우리 영혼이 외롭지 않도록, 우리 영혼이 곤고하지 않도록, 우리 영혼이 힘을 얻어 담대히 믿음의 삶을 살도록 말이다. 그래서 영적거장(부자)으로 살기를 원하신다. 방법은 하나이다. 영혼의 동반자인 성령님과 함께 하는 믿음의 삶을 사는 것! 개인뿐만 아니라 교회를 위해서도 영적인 가난뱅이로, 독불장군처럼 살지 말라고 성령님을 보내주셨다. 그런데도 교회가 자기 힘으로만 움직이면 교회도 가난뱅이로, 무능력한 공동체가 될 수 밖에 없다.
어떤 흑인이 백인들만 모이는 교회에 들어가서 예배를 드리려고 하다가 못 들어오게 제지당하자 문밖의 계단에 앉아 울면서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 때에 비몽사몽간에 예수님이 나타나서 "너 왜 여기서 울고 있느냐" 하고 물으시는 것이다.
그 때에 그 흑인은 대답하기를 "예, 제가 흑인이라고 교회에 못 들어가게 해서 웁니다. "
그랬더니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네가 그 교회에 못 들어갔다고 슬퍼하지 말아라. 사실은 나도 아직 이 교회에 못 들어가 보았다" 하고 말씀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여호와 하나님의 영이며 예수의 영인 성령님을 문 밖에 내어 쫓고 인간들만 모여서 종교의식과 조직화된 프로그램(program)만 가지고 운영해 나가기 때문에 교회가 생명을 잃고 능력을 잃고 점점 쇠퇴해 가는 것이다.
오늘날 성장하는 교회의 특징은 무엇인가 성령의 능력을 믿고, 성령의 역사를 사모하는 교회 공동체는 유럽, 아프리카, 미국, 아시아 어디에서든지 성장하고 있다. 교회의 동반자로, 성도들의 동반자로 성령님을 보내주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령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성령님을 영혼의 동반자로 모시고 살아가는 비결을 생각해 보자.
1. 우리는 성령 여호와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과거에는 성령님이라는 말을 들으면 대부분 부흥사, 방언, 예언기도, 신유, 부흥회, 통성기도와 같은 단어들을 말했다. 물론 이러한 것들도 성령님의 사역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령 사역의 아주 작은 부분일 뿐이다.
성령님은 부흥사들의 전유물도 아니다. 성령님은 인간을 흥분케 하며 뜨겁게 하며 울게 하는 어떤 존재도 아니다. 성령님은 방언과 각종 은사를 취급하는 파워도 아니다. 이 모든 것을 포괄적으로 말하면 성령님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삼위일체 교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을 완전한 여호와 하나님이심으로 믿고 고백하고 의지하라는 말이다.
성령님을 믿는다고 고백할 때 가장 중요한 의미는 성령님은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이다. 사도행전 5장 3절을 보면 베드로가 아나니아에게 “성령”을 속인 것을 지적한 후, 4절에서는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여호와 하나님께로다”고 말한다.
이 구절은 베드로가 성령님을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식했으며, 당시의 교회와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도 이 사실을 인정했음을 말해준다. 성령님은 비인격적인 어떤 능력도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보다 조금은 못한 분도 아니다. 성령님은 그 존재와 영광과 능력에 있어서 여호와 하나님과 온전히 동등한 분이시다. 그래서 성령이라 부르기보다 성령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왜 성령 여호와 하나님을 우리는 오해하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성령님의 초자연적인 역사와 우리의 이성 사이에 괴리가 생겼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난다. 때론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는 신비한 일들이 많이 생긴다. 그래서 이성으로 판단하고 성령님을 제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예를 들면, 보수적인 신앙인들은 ‘방언은 초대교회에만 일어났던 현상’이라고 무시했다. 그리고는 방언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하며 폄하했다. 오늘 우리가 성령 여호와 하나님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파스칼처럼 이성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이성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 신앙이다” 이성주의에 빠지면 인본주의가 된다.
여호와 하나님의 신비한 영역을 인정해야 한다. 내가 경험하지 않은 것은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그것이 성령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마틴 루터는 ‘Let God be God'(여호와 하나님을 여호와 하나님되게 하라)고 했다. 성령님이 하시는 일을 너무 나의 잣대로 제한하지 말아야 한다. 성령님은 우리의 이성 안에서만 역사하시고, 기이한 일을 행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령님의 다양한 역사를 기대하는 열린 마음이 성령님의 능력과 은혜를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신앙이 좋고 선정을 베풀었던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은 종종 궁궐을 빠져나가서 서민들과 사귀고 대화하는 것을 즐겼다. 한번은 믿음이 좋은 한 여인의 집을 찾아갔다. 여왕은 과부와 함께 신앙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화 중에 여인의 믿음에 감동을 받은 여왕은 "부인을 찾은 손님 중에 가장 고귀한 분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다. 여왕은 그 여인이 "예수님입니다" 라고 대답할 것을 기대했는데, 전혀 뜻밖의 대답을 들었다.
"가장 귀한 손님은 두말할 것도 없이 여왕 폐하이십니다. 제 생애 최고의 손님이십니다. "
그러자 실망한 여왕은 "부인을 찾아주신 최고의 손님은 예수님이 아닐까요" 하고 물었다. 그 말에 여인은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했다.
"여왕 폐하, 예수님께서는 결코 손님이 아니십니다. 제 주인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 집에 처음부터 계신 분이십니다. 저는 그 분을 위해 존재합니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성령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성령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 되시고, 나의 여호와 하나님이 되심을 말한다. 순간 순간 이렇게 고백해야 한다.
“성령님, 진정 제 주인이 되셔서 저를 다스려주소서. " “당신이 나의 주인님이십니다. ”
“성령님을 믿습니다. 성령님을 신뢰합니다. 성령님을 의지합니다. ”
우리가 성령님을 내 영혼의 동반자로 모실 수 있는 두 번째 비결은…
2. 성령님이 내 안에 오셔서 하신 일을 믿는 것이다.
성령님은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내가 알지 못하는 엄청난 일들을 이루셨고 지금도 하고 계신다. 그런데 내가 알지 못해, 성령님을 의지하지 못한 채 내 힘으로 믿음의 삶을 살려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억하라.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신다. 내가 할 일이 있고 여호와 하나님이 하실 영역이 구분되어 있다.
예를 들면, 오병이어 기적을 행하실 때를 보자. 예수님은 5개의 보리떡과 2마리의 물고기까지 만들어 기적을 행하시지 않으셨다. 예수님의 두 손에 보리떡과 물고기를 가져다 드리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다. 그럼 주님이 하실 일은 무엇인가 5개의 보리떡과 2마리의 물고기로 5천명을 먹이는 기적을 행하시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성령님이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알고, 내가 할 일은 무엇인지 구분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게 된다. 이것은 내가 조금도 행할 수 없는 전적인 성령님의 영역이다.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1)성령님은 나에게 믿음을 주셨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그런데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구원의 사역을 통해 내가 거듭나게 하시는 일은 성령께서 하신다. 성령님은 구원을 적용시켜 주신다. 성령님이 도와 주시지 않으면 나는 거듭날 수 없다. (요3:5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고전12:3).
뿐만아니라 구원받은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에게 “너는 내 것이다”하고 도장을 꽝 찍어 주신다. 이 성령도장이 찍혀있지 않으면 우린 구원받지 못한 것이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인침을 받은 자가 14만 4천명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이단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14만 4천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엄청난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들을 상징하는 것이다.
구원받은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이 쓰여있다고 한다. 옆에 있는 사람을 보자. 이마에 찍혀있는가 성령께서 찍었기에 보이지 않는다. 그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내 안에 성령님이 계신지 확인해 보면 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롬8:9) 성령님이 첫 번째로 나를 거듭나게 하셨다. 이것은 전적인 성령님의 하시는 일이다.
2) 성령님은 우리의 위로자가 되신다.
성령님은 우리를 위로해 주신다. 우리에겐 나를 위로해 줄 사람이 많은 것 같지만 어떨 때는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내가 낳고 기른 자식도, 늘 함께 먹고 자고 살아가는 사랑하는 남편도, 같은 배에서 나온 형제들도 내 마음을 몰라 줄 때가 있다. 아니 내가 정말 믿었던 사람들로부터 배신을 받을 수도 있다. 어쩌면 모두 각자 자기 방식으로 살기 때문에 진정한 위로자가 될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절망하지 말라. 왜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진정한 위로자로 성령님을 보내주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는다고 하자, 근심과 슬픔과 두려움에 쌓여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 주시겠다고 말씀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14:16)
여기 “또 다른 보혜사”란 성령님을 가리킨다. 그리고 예수님도 한가지 약속을 더 추가하는데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라”는 거다. 누구도 잠깐은 잘 할 수 있다. 그건 쉽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반복적으로, 변함없이, 사람들이 알아주든 상관없이 계속 하는 것은 정말 어렵다. 이게 진정한 헌신이고 사랑이다. 이게 우리를 향한 여호와 하나님의 헌신적인 사랑이다. 성령님을 보내주시되 영원히 함께 하라고 보내주신 것이다.
이를 신학적 용어로 “성령의 내주”라고 한다. 나와 같은 집에 사신다는 말이다. 아파트 몇 동, 몇 호가 아니라 내 인생과 삶에 영원히 함께 하신다는 약속의 말씀이다. 즉 상황에 따라, 형편에 따라 계시기도 하고 부재중이기도 한 그런 분이 아니라 한번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구원함을 얻은 모든 성도들에게 영원토록 내주하시는 분이 성령임이라는 말이다.
힘들 때 성령님을 찾으라. 말을 안 해도 좋다. “성령님! 위로해 주세요” 한만디만 해라. 성령님의 전공은 위로이기 때문이다. 보혜사 즉 ‘파라클레토스’란 ‘옆에서 나를 부르는 분이다. 즉 내 옆에서 속삭이면서 나를 위로하고 나를 도와 주고 내 대신 나를 변호도 하고 나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는 분이시다. 위로도 해주시고, 억울할 때는 변호사도 되어 주시고, 답답할 때는 상담도 해 주시는 분이시다. 당신은 결코 혼자가 아니다. 영원토록 나를 위로해주고, 상담해 주고, 변호해 주시는 성령님이 계신다. 아멘!
3) 성령님은 우리를 가르치시는 교사가 되신다.
예수님께서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실 때에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신다고 말씀하셨다. 과외 선생처럼 돈받고, 공부만 가르쳐주는 게 아니다. 내 인생, 모든 알아야 할 것을 가르쳐주시는 개인 담당 과외선생님이 성령님이시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14:26)
성령님은 우리를 가르치실 때 강제적으로, 지시적인 방법보다는 바람직한 방법으로 부드럽게 유도하신다. 이걸 넛지Nudge라 한다. '팔꿈치로 쿡쿡 찌르다'라는 뜻의 '넛지Nudge'는 일종의 자유주의적인 개입, 혹은 간섭이다. 즉, 사람들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부드럽게 유도하되, 선택의 자유는 여전히 개인에게 열려있는 상태를 말한다. 예를 들면 학교 급식을 하며 몸에 좋은 과일을 눈에 잘 띄는 위치에 놓는 것은 넛지지만, 인스턴트 푸드를 금지하는 것은 넛지가 아니다.
단지 '내일 투표할 거냐'고 묻는 것만으로도 실제 투표율을 높일 수 있다. 휴대폰이나 자동차 같은 특정 제품의 구매율을 높이는 것이 목표일 때, 사람들에게 “향후 6개월 안에 새 차를 구매할 의사가 있습니까”라는 간단한 질문만 해도 구매율을 35%나 높일 수 있다고 한다. 사람들은 다음 주에 몇 번이나 치실을 사용하여 양치질을 하겠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치실을 보다 자주 사용하게 되고, 다음 주에 기름진 음식을 섭취할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기름진 음식의 소비를 줄이게 된다.
이처럼 넛지는 사람들의 선택에 부드럽게 간섭하지만 여전히 개인에게 선택의 자유가 열려 있는 방법이다. 오늘 성령님은 우리에게 넛지의 방법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들려주신다. 한 대 맞고 정신차리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조용하게 말할 때 알아듣고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교회 다닌다고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일까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무릇 여호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라(롬8:14)
여호와 하나님의 영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시는 성령님의 마음을 알고 스순종하는 사람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이다.
성령님은 내 삶에 오셔서 나를 구원해 주셨고, 위로해 주시고, 가르쳐 주신다.
3. 오늘 성령님을 믿는 사람이 매일 해야 할 일이 있다. 성령충만을 간구하는 거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가 악하니 술취해 방탕하지 말고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 5:18)고 하신다. 충만을 받는 것은 계속적으로 받아야 하는 일이다. 성령님을 믿는 사람들이 매일, 순간마다 반복해야 할 일이다. 어떻게 성령충만을 받을 수 있는가
①성령충만을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요 7:37). 엎어놓은 항아리에는 소나기가 쏟아져도 들어가지 않는다. ②죄를 회개하여 깨끗함을 받아야 한다(행 2:38). ③믿고 구해야 한다. 여호와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눅 11:13). 믿음이 없이는 무엇이든 받을 수 없다. ④성령충만을 받고 싶은 동기가 옳아야 한다(약 4:3). 시몬은 성령의 권능을 받으려 했지만 오히려 책망을 받았다(행 8:18-24). 성령 충만한 사람들에게는 성령의 열매가 나타난다. (갈라디아 5:22-23)
마귀는 폭력을 쓰는 깡패와 같아서 허락 없이 사람에게 침투해 들어와서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을 하지만 성령님은 신사적이어서 사모하고 환영해야 우리 안에 찾아오신다. 성령충만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 부유하게 한다. 능력있게 한다. 내가 죽고 주님이 주인되시는 인생으로 가게 한다. 이 시간 성령충만을 기도하자.
성령님 나의 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의 생각과 의지와 마음과 감정과 영혼을 예수의 피로 씻고 덮어주소서 성령님! 나는 성령님이 갈급합니다. 성령님을 초청합니다. 환영합니다. 성령님을 영접합니다. 성령님 내게 능력으로 임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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