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 성령 오심의 중요성
본문
오늘은 세계 모든 교회들이 함께 지키고 있는 성령강림절입니다. 이 날은 구약의 맥추절이 의미하는 바가 성취된 날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나라에서는 이 성령강림절을 거의 지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지킨다고 할지라도 구약의 맥추절이 신약에 성취된 날로 지키지 않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대한 잘못된 이해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 나라는 "맥추감사절"()이라는 이름으로 지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바와 너무 다릅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우리 개역한글판 성경에 나타난 것처럼 보리 추수의 개념은 전혀 없고 단지 첫열매의 추수라고 하는 개념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맥추절이라고 번역한 것은 히브리어 성경에 "첫열매의 절기"라는 말에서 "첫열매"라는 말을 시간적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시간적인 문제가 아니라 대표성의 의미가 강조되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한국교회가 맥추절이라고 하는 이름으로 붙여지게 된 것은 아마도 우리 나라에 복음이 전파될 때의 상황과 관련된 것으로 보여집니다. 왜냐하면 복음이 우리 나라에 처음 전파될 당시 시기적으로 맨 처음에 추수하는 것이 밀과 보리를 거두는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옛날 우리 나라에 선교사들이 처음 와서 복음을 전할 당시에는 지금과는 달리 농경문화가 주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봄에는 밀과 보리를 추수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맥추절은 성경에서 나온 이름이 아닙니다. 성경이 번역되는 과정 가운데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붙여진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구약의 맥추절과 신약의 성령강림절이 같은 날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이해할 때 성령의 사역을 좀 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성령오심을 기념하면서 성령님의 중요한 사역과 우리 신자들의 삶의 연관성을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이러한 주제를 중심으로 첫 번째로는 맥추절과 성령강림절의 관계, 두 번째로는 성령님의 사역과 우리 신자의 삶에 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맥추절과 성령강림절
성령강림절은 구약의 맥추절이 예표하고, 의미하는 것이 신약에 성취된 날입니다. 구약의 맥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종되었던 곳에서 구원함을 받아서, 기업으로 받은 가나안 땅에서 누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운 통치를 기념하여 지키는 날이었습니다. 이 날은 유월절 이후 일곱 안식일이 지난 후에 지켜졌다고 하여서 칠칠절 또는 오순절, 첫열매를 드린다고 하여서 초실절이라고 불려졌습니다. 사실 원어에는 우리 번역에 있는 것처럼 맥추절이라고 하는 말은 없습니다만 편의상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개념을 그대로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구약의 초실절은 옛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을 주시고, 그 약속에 따라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여 가나안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운 통치를 받게 하신 사실을 기념하여 지키는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날은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구원받은 백성이 받게 될 기업을 예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예표가 보여주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사는 역사세계에 오셔서 우리의 모든 죄짐을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운 통치를 받는 그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루신 모든 구원을 우리에게 적용해 주시기 위하여 성령님을 보내어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님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50일째 되는 날, 즉 오순절에 임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성령강림절을 지키고 있는 것은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님이 교회 가운데 계셔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구원을 우리에게 적용해 주시는 것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구원을 우리에게 적용해 주신다고 하는 증거로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다는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고후1:22; 5:5). 이 말씀에 나타나고 있는 "보증"이라고 하는 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이 말씀이 의미하고 있는 것을 바르게 이해할 때 성령님이 오신 중요한 이유를 잘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보증"(헬. )이라고 하는 말은 전체의 부분을 이루고 있고, 앞으로 이루게 될 모든 것을 받게 된다는 것을 확실하게 하는 담보물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N4 성경은 이 "보증"이라는 말을 아주 길게 번역하여 "장차 있게 될 것을 보증하는 담보물"(a deposit, guaranteeing what is to come)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보증의 의미는 앞으로 전체를 소유하게 될 것을 전제로 하고 받는 것입니다. 구약에서의 "첫열매" 사상과 같은 개념입니다. 그래서 오순절에 오신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성취하신 구원의 전체를 얻게된다고 하는 것을 확증해 주는 담보물로 주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하신 모든 구원의 은혜를 성령을 통하여 알게 되고, 체험할 수 있고, 장래에 받게 될 영원한 나라에 대한 믿음도 확고하게 가질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모든 구원사역의 결과로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주시고, 그것을 확증하는 담보로 성령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모든 구원을 우리에게 적용시켜 주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이해한다면 오늘날 우리가 맥추절을 지켜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잠시 살펴본 바와 같이 구약의 맥추절은 신약의 오순절인 성령강림절로 전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의 유월절을 지키지 않는 것과 같이 맥추절을 지켜서는 안됩니다. 만약에 우리가 맥추절을 지킨다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미 구약성경에서 예표적으로 보여주신 것이 신약에 성취가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강림절은 구약성경에 맥추절이 예표하고 있는 대로 성령이 오심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모든 구원의 은혜를 우리에게 적용해 주시는 것을 기념하여 지키는 날입니다. 또한 성령오심은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게하고 체험하게 하는 담보물과 같은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성령강림절을 지킨다는 것은 이러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것을 기뻐하고 감사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2. 성령의 사역과 우리 신자의 삶의 관계
그러면 성령님은 어떤 일을 하실까요 성령님이 하시는 일은 한 두 가지로 정의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본문에 기록된 성령님의 주된 사역만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본문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마지막 설교의 말씀 가운데 있는 말씀입니다(요14-16장). 이 고별설교의 핵심은 "내가 떠나도 항상 너희와 함께 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 그래서 염려하지 말고 온전히 내가 너희에게 부탁한 모든 것을 행하라. "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부탁하신 내용을 한 두 마디로 정리할 수 있는 것이 어렵습니다만 두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첫 번째로는 주님의 계명을 지키라고 하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복음을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명령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성령을 보내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성령의 오심은 이 일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이 행하신 고별설교의 말씀 가운데 다른 복음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 두드러진 특징이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이름과 사역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이름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번역성경에는 보혜사(保惠師)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헬라어 성경에는 파라클레이토스()라고 하는 말입니다. 이 의미는 단순하지는 않습니다만 위로자(Comforter KJV), 상담자(Counselor N4), 돕는 자(Helper NASB) 등으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이 이름이 의미하는 것처럼 성령은 인격적인 분으로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도우시는 분이심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문제는 성령님은 어떤 일을 하는데 위로해 주시고, 상담해 주시며, 도와주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본문에 두 가지로 나타나 있습니다.
(1) 주의 계명을 지키게 하심
우선적으로 주의 계명을 지키게 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가 연구할 이 말씀의 문맥에 잘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문맥을 잘 살펴보면 15절에서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헬라어 성경에서 의미하고 있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의 계명을 지키게 되어 있다는 당위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역한글판에는 분명하게 표현이 안되어 있습니다만 원문에는 세미콜론(;)이 있습니다. 우리가 세미콜론이 의미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상식적으로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사실을 비교하거나, 이유를 나타내거나, 앞의 말을 부연설명하고자 할 때 사용되는 말입니다. 여기서는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주님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당위성에 대한 이유나 설명을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앞의 절의 이유나 설명을 나타내는 세미콜론(;) 다음에 나오는 절이 성령오심과 그의 사역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결국 이 말씀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내용은 주님을 사랑하는 방법인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과 성령을 보내시는 사건이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성령오심의 중요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자는 이미 성령이 내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자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 계명을 지킬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주님을 사랑하는 자가 아니요, 구원받지 못한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말씀이 21절의 말씀입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 어떻게 주님을 사랑하며 그의 계명을 지킬 수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에게 보내어 주신 성령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주님을 알고, 그와 교제하는 자라면 거기에 합당한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것은 주님의 계명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자에게 있어서 계명을 지키며 사는 생활은 구원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합당한 삶의 내용이 따르지 않으면 그는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여러 차례 논의한 바가 있습니다만 구원과 행위는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위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여서 구원과 행위가 관계가 없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을 받았다면 합당한 행위들이 나타나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증거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국교회의 문제는 어디에 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거기에 합당한 삶의 내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솔직하게 구원함을 받고 주님의 계명을 지키려고 하지만 우리의 의지로는 잘 안된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구원과 행위의 이러한 연관성을 관념적으로는 이해가 되는데, 관념적으로 이해한 이 지식이 실천이 안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관념적으로 알고 있는 지식을 어떻게 실천적인 지식으로 바꿀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성령의 오심은 바로 이 문제와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어서 그 구원을 누리게 하고, 구원함을 받은 자들이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점이 성령오심의 가장 중요한 일 가운데 한가지입니다. 이것이 우리 기독교 윤리의 특이성입니다. 우리의 의지로 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을 의지하여 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나갈 수 있습니다.
특히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보혜사 성령님을 우리가 관념적으로 알고 있는 지식들, 그 가운데 계명 지키는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보내어 주시겠다고 하는 사상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자라면 그의 계명들을 지키게 되어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계명들을 잘 지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성령님을 보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성령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십니다. 16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성령님은 예수님의 구원사역의 결과로 우리 가운데 항상 내주해 계십니다. 보혜사 성령님은 우리가 큰 기쁨을 누리는 순간에만 임하는 것도 아니고, 극심한 환란이나 고통의 순간에만 임하는 것도 아닙니다. 보혜사 성령님은 항상, 그리고 영원히 우리와 함께 거하셔서 우리가 주의 계명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 주실 것입니다.
(2) 여호와 하나님과의 교제를 체험하게 함
이 본문에서 성령의 사역 가운데 또 한가지 중요한 부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계명을 지키게 하는 결과로 나타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교제하는 기쁨을 알게 해 주십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령님의 오심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구원을 우리의 실제 생활에 적용해 주시는 일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시는 성령님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하는 교제의 기쁨을 체험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요14:20) 이것은 성령이 오시는 날부터 성령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항상 교제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성령님이 우리 가운데 항상 거하셔서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우리가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님의 사역입니다(요14:18-20). 다른 말로 하면 여호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것을 체험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모든 구원의 은혜들을 우리에게 적용해 주시기 위하여 성령님을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은 주님의 계명을 지키게 하여서 결과적으로 여호와 하나님과 항상 교제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님과 우리 신자의 삶은 아주 밀접한 연관성이 있습니다. 성령을 의지하여 주님의 계명을 지키게 하시며, 그 결과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 안에,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 안에 있다는 교제의 기쁨을 알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성령님과 성령님의 사역에 대하여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미국의 종교문제 연구소인 바나 연구소에서 미국의 성인신자 1007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내용이 "기독신문"(1997. 5.4. )에 실렸습니다. 그 설문 가운데 "성령은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나 힘의 상징이다. 그러나 실재하지 않는다. "라는 설문에 "그렇다"라고 응답한 사람이 55%였습니다. 이것은 성령님의 존재도 사역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로 심각한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성령님의 존재와 사역을 믿습니까 우리 한국교회에도 많이 알려진 영국의 신학자 제임스 패커(James Packer)는 성령님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오늘날 신자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자신의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으심으로 구속함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의 죽으심으로 이 세상에 오신 성령과 그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다. " 우리는 이 말을 관심있게 들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성령강림절을 지키고 있는 이유는 이러한 성령오심을 기념하는데 있습니다. 성령오심은 구약의 맥추절이 의미하고 있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구원을 적용해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명령하신 모든 계명들을 지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성령님을 보내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성령강림절을 맞이하여 성령오심을 기념하여 지키고 있는 것은 우리 가운데 항상 내주해 계시는 성령님의 존재를 확신하고, 이 성령님을 의지하여 살려고 하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오심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이루신 모든 구원의 은혜를 우리의 삶에 적용해 주시기 위한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님은 항상 교회 가운데 거하십니다. 성령님이 우리 속에 항상 내주해 계신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우리 모두가 우리 속에 내주해 계시는 성령을 의지하여 주의 계명들을 지킴으로 주님이 우리 안에, 우리가 주님 안에서 서로 교제하는 기쁨을 배우시기를 바랍니다. 성령님을 의지하여 기도할 때 정말 신비스럽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놀라운 실재의 세계의 있습니다. 주님이 항상 우리 가운데 계시는 알게 될 것입니다. 성령을 의지하여 기도해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관념적으로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실천적인 지식으로 바꾸어 가는 것을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알게 될 것입니다. 이 신비를 배우십시오
1. 맥추절과 성령강림절
성령강림절은 구약의 맥추절이 예표하고, 의미하는 것이 신약에 성취된 날입니다. 구약의 맥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종되었던 곳에서 구원함을 받아서, 기업으로 받은 가나안 땅에서 누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운 통치를 기념하여 지키는 날이었습니다. 이 날은 유월절 이후 일곱 안식일이 지난 후에 지켜졌다고 하여서 칠칠절 또는 오순절, 첫열매를 드린다고 하여서 초실절이라고 불려졌습니다. 사실 원어에는 우리 번역에 있는 것처럼 맥추절이라고 하는 말은 없습니다만 편의상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개념을 그대로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구약의 초실절은 옛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을 주시고, 그 약속에 따라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여 가나안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운 통치를 받게 하신 사실을 기념하여 지키는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날은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구원받은 백성이 받게 될 기업을 예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예표가 보여주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사는 역사세계에 오셔서 우리의 모든 죄짐을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운 통치를 받는 그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루신 모든 구원을 우리에게 적용해 주시기 위하여 성령님을 보내어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님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50일째 되는 날, 즉 오순절에 임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성령강림절을 지키고 있는 것은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님이 교회 가운데 계셔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구원을 우리에게 적용해 주시는 것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구원을 우리에게 적용해 주신다고 하는 증거로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다는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고후1:22; 5:5). 이 말씀에 나타나고 있는 "보증"이라고 하는 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이 말씀이 의미하고 있는 것을 바르게 이해할 때 성령님이 오신 중요한 이유를 잘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보증"(헬. )이라고 하는 말은 전체의 부분을 이루고 있고, 앞으로 이루게 될 모든 것을 받게 된다는 것을 확실하게 하는 담보물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N4 성경은 이 "보증"이라는 말을 아주 길게 번역하여 "장차 있게 될 것을 보증하는 담보물"(a deposit, guaranteeing what is to come)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보증의 의미는 앞으로 전체를 소유하게 될 것을 전제로 하고 받는 것입니다. 구약에서의 "첫열매" 사상과 같은 개념입니다. 그래서 오순절에 오신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성취하신 구원의 전체를 얻게된다고 하는 것을 확증해 주는 담보물로 주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하신 모든 구원의 은혜를 성령을 통하여 알게 되고, 체험할 수 있고, 장래에 받게 될 영원한 나라에 대한 믿음도 확고하게 가질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모든 구원사역의 결과로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주시고, 그것을 확증하는 담보로 성령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모든 구원을 우리에게 적용시켜 주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이해한다면 오늘날 우리가 맥추절을 지켜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잠시 살펴본 바와 같이 구약의 맥추절은 신약의 오순절인 성령강림절로 전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의 유월절을 지키지 않는 것과 같이 맥추절을 지켜서는 안됩니다. 만약에 우리가 맥추절을 지킨다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미 구약성경에서 예표적으로 보여주신 것이 신약에 성취가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강림절은 구약성경에 맥추절이 예표하고 있는 대로 성령이 오심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모든 구원의 은혜를 우리에게 적용해 주시는 것을 기념하여 지키는 날입니다. 또한 성령오심은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게하고 체험하게 하는 담보물과 같은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성령강림절을 지킨다는 것은 이러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것을 기뻐하고 감사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2. 성령의 사역과 우리 신자의 삶의 관계
그러면 성령님은 어떤 일을 하실까요 성령님이 하시는 일은 한 두 가지로 정의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본문에 기록된 성령님의 주된 사역만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본문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마지막 설교의 말씀 가운데 있는 말씀입니다(요14-16장). 이 고별설교의 핵심은 "내가 떠나도 항상 너희와 함께 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 그래서 염려하지 말고 온전히 내가 너희에게 부탁한 모든 것을 행하라. "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부탁하신 내용을 한 두 마디로 정리할 수 있는 것이 어렵습니다만 두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첫 번째로는 주님의 계명을 지키라고 하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복음을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명령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성령을 보내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성령의 오심은 이 일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이 행하신 고별설교의 말씀 가운데 다른 복음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 두드러진 특징이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이름과 사역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이름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번역성경에는 보혜사(保惠師)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헬라어 성경에는 파라클레이토스()라고 하는 말입니다. 이 의미는 단순하지는 않습니다만 위로자(Comforter KJV), 상담자(Counselor N4), 돕는 자(Helper NASB) 등으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이 이름이 의미하는 것처럼 성령은 인격적인 분으로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도우시는 분이심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문제는 성령님은 어떤 일을 하는데 위로해 주시고, 상담해 주시며, 도와주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본문에 두 가지로 나타나 있습니다.
(1) 주의 계명을 지키게 하심
우선적으로 주의 계명을 지키게 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가 연구할 이 말씀의 문맥에 잘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문맥을 잘 살펴보면 15절에서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헬라어 성경에서 의미하고 있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의 계명을 지키게 되어 있다는 당위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역한글판에는 분명하게 표현이 안되어 있습니다만 원문에는 세미콜론(;)이 있습니다. 우리가 세미콜론이 의미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상식적으로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사실을 비교하거나, 이유를 나타내거나, 앞의 말을 부연설명하고자 할 때 사용되는 말입니다. 여기서는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주님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당위성에 대한 이유나 설명을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앞의 절의 이유나 설명을 나타내는 세미콜론(;) 다음에 나오는 절이 성령오심과 그의 사역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결국 이 말씀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내용은 주님을 사랑하는 방법인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과 성령을 보내시는 사건이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성령오심의 중요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자는 이미 성령이 내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자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 계명을 지킬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주님을 사랑하는 자가 아니요, 구원받지 못한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말씀이 21절의 말씀입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 어떻게 주님을 사랑하며 그의 계명을 지킬 수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에게 보내어 주신 성령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주님을 알고, 그와 교제하는 자라면 거기에 합당한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것은 주님의 계명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자에게 있어서 계명을 지키며 사는 생활은 구원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합당한 삶의 내용이 따르지 않으면 그는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여러 차례 논의한 바가 있습니다만 구원과 행위는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위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여서 구원과 행위가 관계가 없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을 받았다면 합당한 행위들이 나타나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증거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국교회의 문제는 어디에 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거기에 합당한 삶의 내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솔직하게 구원함을 받고 주님의 계명을 지키려고 하지만 우리의 의지로는 잘 안된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구원과 행위의 이러한 연관성을 관념적으로는 이해가 되는데, 관념적으로 이해한 이 지식이 실천이 안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관념적으로 알고 있는 지식을 어떻게 실천적인 지식으로 바꿀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성령의 오심은 바로 이 문제와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어서 그 구원을 누리게 하고, 구원함을 받은 자들이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점이 성령오심의 가장 중요한 일 가운데 한가지입니다. 이것이 우리 기독교 윤리의 특이성입니다. 우리의 의지로 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을 의지하여 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나갈 수 있습니다.
특히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보혜사 성령님을 우리가 관념적으로 알고 있는 지식들, 그 가운데 계명 지키는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보내어 주시겠다고 하는 사상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자라면 그의 계명들을 지키게 되어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계명들을 잘 지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성령님을 보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성령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십니다. 16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성령님은 예수님의 구원사역의 결과로 우리 가운데 항상 내주해 계십니다. 보혜사 성령님은 우리가 큰 기쁨을 누리는 순간에만 임하는 것도 아니고, 극심한 환란이나 고통의 순간에만 임하는 것도 아닙니다. 보혜사 성령님은 항상, 그리고 영원히 우리와 함께 거하셔서 우리가 주의 계명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 주실 것입니다.
(2) 여호와 하나님과의 교제를 체험하게 함
이 본문에서 성령의 사역 가운데 또 한가지 중요한 부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계명을 지키게 하는 결과로 나타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교제하는 기쁨을 알게 해 주십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령님의 오심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구원을 우리의 실제 생활에 적용해 주시는 일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시는 성령님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하는 교제의 기쁨을 체험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요14:20) 이것은 성령이 오시는 날부터 성령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항상 교제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성령님이 우리 가운데 항상 거하셔서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우리가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님의 사역입니다(요14:18-20). 다른 말로 하면 여호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것을 체험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모든 구원의 은혜들을 우리에게 적용해 주시기 위하여 성령님을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은 주님의 계명을 지키게 하여서 결과적으로 여호와 하나님과 항상 교제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님과 우리 신자의 삶은 아주 밀접한 연관성이 있습니다. 성령을 의지하여 주님의 계명을 지키게 하시며, 그 결과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 안에,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 안에 있다는 교제의 기쁨을 알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성령님과 성령님의 사역에 대하여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미국의 종교문제 연구소인 바나 연구소에서 미국의 성인신자 1007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내용이 "기독신문"(1997. 5.4. )에 실렸습니다. 그 설문 가운데 "성령은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나 힘의 상징이다. 그러나 실재하지 않는다. "라는 설문에 "그렇다"라고 응답한 사람이 55%였습니다. 이것은 성령님의 존재도 사역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로 심각한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성령님의 존재와 사역을 믿습니까 우리 한국교회에도 많이 알려진 영국의 신학자 제임스 패커(James Packer)는 성령님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오늘날 신자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자신의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으심으로 구속함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의 죽으심으로 이 세상에 오신 성령과 그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다. " 우리는 이 말을 관심있게 들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성령강림절을 지키고 있는 이유는 이러한 성령오심을 기념하는데 있습니다. 성령오심은 구약의 맥추절이 의미하고 있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구원을 적용해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명령하신 모든 계명들을 지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성령님을 보내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성령강림절을 맞이하여 성령오심을 기념하여 지키고 있는 것은 우리 가운데 항상 내주해 계시는 성령님의 존재를 확신하고, 이 성령님을 의지하여 살려고 하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오심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이루신 모든 구원의 은혜를 우리의 삶에 적용해 주시기 위한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님은 항상 교회 가운데 거하십니다. 성령님이 우리 속에 항상 내주해 계신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우리 모두가 우리 속에 내주해 계시는 성령을 의지하여 주의 계명들을 지킴으로 주님이 우리 안에, 우리가 주님 안에서 서로 교제하는 기쁨을 배우시기를 바랍니다. 성령님을 의지하여 기도할 때 정말 신비스럽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놀라운 실재의 세계의 있습니다. 주님이 항상 우리 가운데 계시는 알게 될 것입니다. 성령을 의지하여 기도해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관념적으로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실천적인 지식으로 바꾸어 가는 것을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알게 될 것입니다. 이 신비를 배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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