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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보혜사 성령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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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성령께서 우리들에게 넘치는 은혜를 주시고 계십니다. 인간에게 견디기 힘든 것은 고독과 소외 감정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사실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공생에 동안 열심으로 주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3년이 지난후 예수님께서 갑자기 이 세상을 떠나서 하늘 아버지께로 돌아가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에 제자들은 너무나 충격을 받고 아예 망연자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 예수님은 조금도 동요하지 아니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요14:16)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16:7).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다른 보혜사를 보내겠다고 말씀하시는지 그 이유를 전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슬픔에 꽉 들어찼습니다. 급기야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고 사흘만에 다시 부활하셨지만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나타나셨다가 사라지시기 때문에 제자들은 마음에 안정함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뿔뿔이 헤어지기도 하고 또 유대인이나 관원들을 두려워 해서 숨어서 지냈습니다. 그러던 오순절이 가까운 어느날 제자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한 열흘동안 주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강한 바람같은 소리가 나고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각 사람의 머리에 임하였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성경이 말하심을 좇아 다른 방언으로 말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임재하심이 그들의 마음을 꽉 잡았습니다.
제자들은 그들 안에 임재하신 성령님을 필연적으로 알게 되자 그들은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절망에서 소망으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죽음에서 삶으로 놀라운 변화의 역사가 그들 속에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 부활하신 그 의미를 깊이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성령을 받기 전에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시자 마자 성령께서 그들의 눈을 밝히시고 마음의 깨달음을 주시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의미를 깊이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은 우리의 저가 악을 대속하기 위함이요, 우리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기 위함이요, 성령을 받아서 세속을 이기고 마귀와 싸워 승리할 수 있음을 가르쳐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연약함과 질병을 대신 짊어지셨고 모든 저주를 다 대속하시고 아브라함의 축복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깨닫게 되면 우리에게 기쁨이 넘쳐납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면 거대한 변화가 다가오게 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이전 것은 다 지나고 새 것이 된다는 사실을 그들은 마음 속에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자신들이 고아와 같이 버림받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되고, 그들과 함께 예수님께서 끊임없이 임재하여 계신다는 것을 깨달을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가져오는 온천하 역사적인 우주적인 구속의 의미를 깨닫게 되자 그들은 지혜와 총명을 얻어서 담대하게 일어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된 것입니다.
오순절인 그날에 베드로가 일어나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성령을 체험한후 이후 일어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주되심을 선포할 때 하루에 3천명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고 앉은뱅이를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으켰으며 장정만 5천명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1. 다른 보혜사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다르다"는 의미가 헬라어에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알로스"라는 말이고 또 하나는 "헤피로스"라는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4장에 예수께서 다른 보헤사라고 말한 그 헬라어는 알론 파라크레톤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알로스"라는 말은 전부 똑같은 것이 두개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다른 것을 말할 때 알로스라는 어휘를 씁니다. 그러나 헤피로스라는 말은 전혀 다른 두개가 있을 때 첫째고 그 다음 다른 것을 말할 땐 헤피로스라는 말을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다른 보혜사를 보낸다는 의미를 헤피렌 파라클로레톤이라고 말하지 아니하시고 알론 파라크레톤을 보낸다고 말씀하시므로 내가 첫 보혜사인데 나와 꼭같은 다른 보혜사를 보내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강림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강림이요 성령임재하심은 예수님의 임재하심이요 성령의 사역은 바로 예수께서 사역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면 성령님도 여호와 하나님이시요 예수님이 사랑이시면 성령님도 사랑하시고 예수님이 권능이시면 성령님도 권능이시고 예수님이 구원사역을 하신 것처럼 성령님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사역을 하시고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낸 것처럼 성령님도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시고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신 것처럼 성령님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을 고치시고 예수님의 가르치신 것처럼 성령님도 가르치시고 예수님이 일을 한 것처럼 성령님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을 하시고 오히려 성령 강림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행한 일을 제자들이 할 것이요 이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보혜사라는 말은 파라클라투스라는 말인데 그 의미는 여호와 하나님께 보내심을 받아 우리를 돕기 위해서 항상 곁에 계시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오순절 다락방에 강림하신 성령님은 2000년의 세월을 지났지만은 조금도 변치 아니하시고 주님께서는 초대교회 주의 백성들과 같이 있으셨던 것처럼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영원이라는 것은 무한한 과거와 무한한 미래를 창조적으로 표하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우리와 같이 계신 성령님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우리와 같이 계신 성령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들은 절대로 고아와 같이 버림을 받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대신하실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신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와 같이 계심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함께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됨으로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소리 안들리며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두렵지가 않습니다. 세상은 변화에 변화를 가져오고 엄청난 속도로 소용돌이 치고 있습니다. 이 불확실한 시대속에 몇분 후에 무엇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사할린에 일어난 천재지변을 보십시요. 밤1시에 사람들이 잠 속에 깊이 빠진 시간 순식간에 천지가 진동하고 건물이 무너져내려 앉고 땅이 갈라지고 삼천여명의 사람들이 일순간 객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현실적인 세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사람들은 모두다 불안하고 공포에 떨고 있으며 순간을 예측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불확실한 시대에 살면서도 우리가 마음속에 평안과 확신을 가지고 살수 있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속에 임재하셨기 때문에 강하고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체를 가지고 오셨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아 소수의 사람과 같이 계셨지만은 성령은 바람처럼 우리 속에 들어와 계시고 시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2. 성령께서 하시는 일
이사여서 11장 2절에 보면 "야웨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야웨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성령을 통하지 않고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령은 여호와 하나님의 영이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십니다. 또한 성령은 지혜의 영이십니다. 지혜는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여러가지 문제에 부딪히고 고통당할 때 성령께서 문제를 해결할 지혜를 주십니다. 성령은 지혜의 영이기 때문에 우리와 같이 계셔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며 성령은 또한 총명의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총명함을 주셔서 모든 것을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특별히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하시며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마음에 총명을 주셔서 여호와 하나님의 진리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또한 모략의 영이십니다. 모략이라는 것은 나쁜 의미로서 모략이 아니라 카울셀링이라는 말인 것입니다. 어떤 일을 당했을 때 이것을 어떻게 이것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것을 조언해 주어 가르치는 것이 카운셀링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될 것인가를 성령은 가르쳐 주십니다. 범사에 우리가 기도하고 성령의 가르침을 기다리면 성령은 마음속에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또한 재능의 영이십니다. 재능이라는 것은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능력은 여러가지로 나타납니다. 기도하는 것과 복음을 증거하는 것, 그리고 가르치고 구제하는 능력 등으로 나타납니다. 특별히 성령을 통해서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영분별, 그리고 방언과 방언통역, 예언, 믿음, 기도, 병고침의 은사 등이 나타납니다.
성령은 또한 지식의 영인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오셔서 진리를 가르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심으로 우리가 깨달아서 많은 지식을 얻게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오시기전에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하시는 의미를 전혀 몰랐습니다. 패배로 알았습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음은 하나의 비극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셔서 깨닫게 하심은 이것이 일대의 우주적인 구속의 대 역사임을 알게 된것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지식을 주신 것입니다. 용서의 의미와 순결하겠다는 지식을 주시며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병이 고쳐졌다는 지식을 주시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복을 받고 저주에서 해방됐다는 지식을 주시며, 사망과 음부에서 해방되어 천국과 영생을 얻게되었다는 새로운 지식을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절대로 깨달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성령님께서 오셔서 야웨를 경외하는 일이어서 우리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을 참으로 공경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여호와 하나님의 성령은 거룩한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오셔서 우리의 죄 속에서 분리되어서 생각이 거룩하고 말이 거룩하고 행동이 거룩하게 만드는 역사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또한 미래의 영이십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질때도 있고 논쟁에 부딪힐 때도 있고 큰 슬픔에 들때도 상처 될때도 있습니다. 그럴때 성령은 오셔 우리 마음을 붙잡아서 위로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그 큰 충격과 고통과 상처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또한 인도하는 영으로서 우리의 삶의 길을 인도하십니다. 목자가 양을 이끌어 주듯이 성령은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 연약함을 도우십니다.
성령은 또한 책망하는 영으로서 우리와 같이 계셔 우리의 잘못된 일을 준엄하게 꾸짖습니다.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했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성령이 죄책, 책망을 듣고 우리는 통회하고 자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여호와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와 같이 계셔서 놀라운 많은 역사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3. 성령의 교통하심을 배워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13장 13절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인격적인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지식을 가지고 계시고 감정을 가지고 계시고 의지를 가지고 계십니다. 비록 눈에 보이는 육체를 안 가지고 있지만 성령은 바람과 같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인격자이신 것입니다. 인격자는 인격자로서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드리고 의지하고 감사하고 찬양하고 대접해야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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