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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성령을 위하여 씨를 뿌리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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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들에 나가보니 모내기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가뭄이 심해 논에 물을 대지 못한 곳을 빼고는 거의 모내기가 끝난 것을 보았습니다. 이번 비로 모든 논의 모내기는 완료될 것 같습니다. 농부들은 가을의 풍작을 소망하며 구슬땀을 마다하지 않고 이른 봄부터 씨를 뿌리고 벼를 심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오늘의 말씀 속에서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라” 노래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농경문화 시대에 기록된 책이기 때문에 ‘씨 뿌리는 비유’(마13:1-23, 막4:3-8, 눅 8:4-15)처럼 농사짓는 방법을 비유로 하여 천국복음과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설명하는 곳이 여러 군데 있습니다.
공관복음서에 다 기록되어 있는 ‘씨 뿌리는 비유’는 예수님께서 친히 설명까지 곁들이셔서 더욱 유명합니다. 예수님의 설명에 의하면 씨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즉 복음입니다. 이 말씀이 길가에 떨어졌다는 것은 마귀가 그들이 구원을 얻지 못하도록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을 말합니다.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졌다는 말은 말씀을 들을 때 기쁘게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간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 배반하는 자를 말합니다.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었으나 인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를 말합니다.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를 말한다고 예수님은 설명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설명에서는 씨(말씀)가 떨어지는 땅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천국복음의 말씀을 선포하실 때 그 씨를 받는 제자나 회중들의 듣는 자세가 길이나, 돌밭이나, 가시떨기 밭이 되어서는 안 되고 옥토, 즉 좋은 땅이 되어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가르침에 초점을 둔 해석입니다.
그런데 사실 씨를 뿌릴 때 밭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씨와 씨를 뿌리는 사람도 문제가 됩니다. 예수님이 하실 때는 이 두 가지가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예수님의 사역을 이어받은 우리가 할 때는 문제가 됩니다. 첫째는 제대로 된 씨를 뿌리느냐가 문제요, 둘째는 씨 뿌리는 자가 제대로 씨를 뿌리느냐도 문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후계자들로 예수님의 사역을 이어받아 복음의 씨를 뿌리는 사람들입니다.
즉 예수님처럼 우리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 전파하는 사역을 부여받은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제대로 된 씨를 뿌리는가”에 대해 늘 점검해야 할 것이며, “어디에 무슨 씨를 뿌리는가”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생명이 살아있는 알곡을 뿌리는지, 병들고 말라죽은 생명이 없는 씨를 뿌리는지가 중요합니다. 또 뿌리는 밭도 점검해야 합니다. 잘 갈아서 가꾼 옥토에 뿌리는지, 아무렇게나 여기저기 흩어 뿌리지는 않는지 살펴야 합니다.
오늘 봉독한 성경은 사도 바울의 말씀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씨와 그 씨를 뿌리는 사람에게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바울에 의하면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씨를 뿌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씨를 뿌리되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씨를 심는 사람이 있고 다른 하나는 성령을 위하여 씨를 뿌리는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육체를 위하여 씨를 뿌리는 사람은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씨를 심는 사람은 성령으로부터 영생(永生)을 거둔다는 가르침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육체를 위하여 씨를 뿌리는 사람은 씨를 뿌리는 사람도 문제요, 씨의 종류도 문제가 됨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는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타락한 육체의 본성을 따라 규모없이 살아간다면 육체적 부패와 도덕적 타락을 초래하게 되며 영적인 성품들을 잃게 됩니다. 따라서 육체를 위하여 심는 사람은 육신을 좇는 사람(롬8:4)이요, 육신의 일만 생각하는 사람이요(롬8:5), 육신의 욕망을 채우는 자(롬6:13)입니다.
이들은 호세아의 선언처럼 “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둘 것이며, 심은 것이 줄기가 없으며, 이삭은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며 설혹 맺힐지라도 이방사람이 삼킬 것입니다(호8:7). 이기적 욕망으로 자신의 유익만을 위해 판단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육체를 위하여 씨를 뿌리는 사람입니다. 흔히 흥부와 놀부 이야기 속의 놀부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이 중요하게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육체를 율법의 행위와 자유방임적 경향과 연관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내에 만연해 있는 율법주의자들의 냉대와(3:2-5, 14; 4:6,7; 5:5-6, 6:12-13) 자유방임주의자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이 결핍된 채 인간의 죄악된 성향과 그 성향대로 사는 삶을 연계시키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는 모두 여호와 하나님을 배제한 채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 살아가려는 바벨탑의 범죄를 반복하는 것으로 파멸의 결과를 맞이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육체를 위하여 심는 씨를 갈 5:19-21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 5:19-21)
그렇다면 성령을 위하여 심는다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은 구체적 행위로 나타납니다. 그 구체적 행위들을 “성령의 9가지 열매”로 바울은 설명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이 9가지 성령의 열매는 무엇을 심어야 맺을 수 있습니까
 첫째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구원의 확신의 씨를 심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는 로마서의 축소판이라고 말합니다. 구원은 율법의 행위로 얻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대속의 은총을 믿음으로 얻어진다는 진리를 분명히 밝히는 서신이 갈라디아서입니다. 인간의 의지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인간의 행위(율법의 행위)로도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값을 치르시기 위해 피흘려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믿어야 구원을 받습니다. 결코 율법을 완벽하게 지킴으로 구원의 의에 이를 수는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주시는 은총으로만 구원의 길로 인도될 수 있습니다. 이 믿음으로 구원받기를 축원합니다. 이 구원의 확신이 있는 사람은 영생의 열매를 풍성히 얻을 수 있습니다.
 둘째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씨를 심어야 성령의 열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감사는 믿음의 고백이요 표현입니다. 이 감사는 기억입니다. 은혜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기억하는 순간 그 속에 임재하시는 성령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습니다. 죄인인 나를 십자가의 은총으로 구원해 주셨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게 될 때에 여호와 하나님은 30배, 60배, 100배 이상의 기적의 열매를 만들어 냅니다. 맥추감사예배나 추수감사예배를 드릴 때 감사의 내용을 잘 적어서 여호와 하나님의 제단에 드리도록 여러분께 부탁을 드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감사를 할 수 없습니다.
감사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조건부 감사입니다. 만약(if)이라는 조건이 붙은 감사입니다. “만약 대학에 합격한다면” “만약 회사가 잘 된다면” “만약 돈을 벌게 된다면”, 감사하겠다는 조건부입니다. 드리는 감사를 말합니다. 제가 아는 분은 ‘백혈병’에 걸렸었습니다. 만약 여호와 하나님께서 백혈병을 고쳐주신다면 감사함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 큰일을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간절하게 여호와 하나님께 매달리던 그가 신앙생활이 뜸해집니다. 물었더니 여호와 하나님이 고쳐주셨다기 보다 의학이 고쳐주었고 자기는 치료비를 다 냈으니 더 이상 감사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불쌍한 사람입니다. 이 감사는 ‘만약’의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불평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둘째는 받은 것에 대한 보답의 감사입니다. 감사의 이유(because of)가 있습니다. 취직을 하게 했으니 보답의 감사를 하는 것입니다.
병이 나았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 감사의 수준에 오르기만 해도 여호와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시고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으니 그 은혜를 깨닫고 감사만 해도 여호와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10명의 문둥병자를 고쳐주셨는데 1명만이 와서 감사하게 될 때에 “아홉은 어디 갔느냐”고 섭섭해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한명의 감사에 예수님은 만족해 하셨습니다.
가끔 병원 응급실에 심방을 갈 때면 누워있는 환자들을 보면서, 더욱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함을 느낍니다. 사고로 팔다리가 절단된 사람들의 신음소리, 불치의 병으로 진단받고 하염없이 울고 있는 사람들, 뇌졸증 같은 병으로 쓰러져 죽어가는 사람을 붙들고 당황해 하는 사람들, 그 상황 속에서 나는 늘 “여호와 하나님 감사합니다. ”를 연발하곤 합니다. 걸어만 다녀도 병원에 누워있는 사람을 볼 때 감사가 나옵니다. 먹을 수만 있어도 먹지 못하여 튜브로 영양을 공급받는 환자를 볼 때 감사하게 됩니다. 폐암환자는 숨만 편히 쉬어도 감사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이 요구하는 감사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의 감사입니다. 어떤 조건이 붙거나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더 많이 갖고, 좋을 때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고 좋은 조건이 아니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는 것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하는 감사입니다. 이것을 무조건적 감사라고도 합니다. 합3:17에 보면 모범적 감사의 찬양기도가 나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여호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
자식이 백혈병으로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부모가 과연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태어나자마자 장애아의 판정을 받고 이 병원 저 병원으로 옮겨 다니면서 고통을 받는 아이를 안고 있는 엄마가 어떻게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평생 남편과 자녀를 위해 헌신하던 아내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의식을 잃은 채 병상에 누워 있어 몇 년 동안 대소변을 받아내야 하는 남편이 누구에게 어떤 감사를 할 수 있을까요 인간의 의지나 감정만으로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감사를 발견하는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을 감동시킵니다. 전쟁터로 나간 아들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접한 부부가 교회에 나와 거액의 감사헌금을 드렸습니다. 헌금봉투에는 이런 감사내용이 적혀 있더랍니다. “좋은 아들을 20년간 우리 곁에 두셨음을 감사합니다. 그리고 아들의 영혼을 받아주심을 감사합니다. ” 아들을 잃은 이 부부는 조국과 여호와 하나님께 원망할 수도 있었지만 아들과 함께 했던 시간 속에서 감사를 발견하고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사람들을 감동시켰습니다.
미국 오하이오주의 신시내티에는 ‘프록터 갬블 비누회사’가 있습니다. 할레이 프록터가 세운 회사입니다. 할레이 프록터는 신앙이 좋은 사람으로 늘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하며 철저히 십일조 생활을 한 사람입니다. 한번은 직원의 실수로 기계 작동시간을 잘못 맞추어 엉뚱한 비누제품이 생산되었습니다. 회사는 이일로 막대한 손실을 입어 위기에 접했습니다. 그러나 프록터는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며 잘못된 비누제품을 분석했습니다.
그 결과 특이한 점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 비누가 가벼워서 물에 뜬다는 점입니다. ‘비누가 물에 뜨면 목욕할 때 얼마나 좋을까’ 여기에 초점을 두고 개발한 비누가 오늘날 우리가 즐겨 쓰는 ‘아이보리’라는 비누입니다. 이 비누는 세계적 선풍을 일으키며 비누계의 새 역사를 만들었습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불평하지 않고 감사하게 될 때에 여호와 하나님은 기적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셋째는 소망의 씨를 심으면 영생의 열매를 맺습니다. 제단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늘 소망을 갖게 합니다.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이 무덤에서 살아나셔서 부활의 소망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다니엘은 언제든지 소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사자의 굴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 소망은 결국 사자의 입을 봉하는 기적을 얻게 합니다. 소망이 있는 사람은 언제나 많은 열매를 맺게 마련입니다. 윌리암 케리는 어린 시절 구두를 닦던 영국소년이었습니다. 이 소년은 구두를 닦으며 헬라어, 히브리어, 라틴어를 공부했습니다. 교회생활도 열심히 했습니다. 훗날 이 소년은 인도선교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가슴에 큰 꿈과 비전의 희망을 안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시도하 라”(Expect great things from God. Attempt great things for God)
그는 인도어를 공부하여 영인사전을 만들었고, 8년간 각고의 노력 끝에 인도성경을 번역했습니다. 책을 출판하기 위해 인쇄기를 도입하고 기술자를 모았습니다. 그런데 지방순회 전도를 나갔다 오니 화재가 나서 모든 것이 불타버렸습니다. 모든 꿈이 무너진 순간임에도 그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가슴에 희망을 가졌습니다. “제게 믿음과 용기를 주십시오. ” 다시 일어서서 번역하기 시작합니다. 드디어 1801년 벵갈어 성경을 번역했고, 평생 24종의 인도방언으로 성경을 번역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성령을 위하여 씨를 심는 사람들입니다. 성령을 위하여 씨를 뿌리는 사람은 영생의 열매를 30배, 60배, 100배로 얻는 축복을 받습니다. 구원의 씨를 심읍시다. 감사의 씨를 심읍시다. 소망의 씨를 심읍시다. 우리는 놀라운 행복의 열매, 영생의 열매를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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