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

TOP
DOWN

[성령강림] 성령과 진실

본문

현대 자연과학분야 발전된 모습 중에서 우리 질병치료와 직결된 의학기술의 발달은 참으로 놀라운바가 있습니다. 최첨단 의학기자재에 제작기술과 고도로 숙련된 의료시술이라는 전문기술이 협동하여 이뤄지지만, 여하튼 복잡다단한 심장이식수술이나 뇌수술을 하는 의사선생님들을 우리는 존경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의학이 아직 오늘처럼 발전하기전인 지금부터 2000년전에 쓰여진 히브리서 본문에 여호와 하나님의 영이 활동하는 말씀의 역동성을 설명하는 가운데서 우리는 오늘날 뇌수술보다도 더 섬세한 놀라운 표현을 듣게 됩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의 말씀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양칼보다도 날카로워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한다. "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체구조를 섬세한 데까지 수술칼처럼 헤집고 들어가 갈라놓을 뿐만 아니라, 외과적 수술칼로서는 불가능한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향까지를 성령님과 여호와 하나님 말씀은 가려낸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증언하기를 인간은 진실을 말하지도 않고 진실을 추구하지도 않으며, 진실을 바르게 분별해 낼만큼 그 마음이 순수하지 않은 상태라고 말합니다. 죄로 인해 심령이 너나 나 할 것 없이 모두 흐려져있고, 구부러져있고, 심지어 도착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관점은 항상 모호성에 휩싸여있기 때문에 사람은 종말의 날이 이르기 전 까지는 항상 부분밖에 보지 못하며 희미하게 밖에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역사적 한계성이나, 상황인식능력의 한계성 때문만이 아닙니다. 사람은 어리석게도 작은 권력만 가져도 우쭐되며, 작은 상처에도 위축되며, 매우 이기적이며, 나태함과 탐욕이 사람 심성을 항상 유혹한다고 성경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약간의 의로운 요소를 자기 안에 지니기만 하면 자기는 절대선과 절대 의로움을 지켜 가는 여호와 하나님의 대리인이나 되는 것처럼 위선에 빠지기 일쑤이며, 자기 변명에 능숙한 죄로 물든 존재가 현실적 인간의 적나라한 한 모습이라고 성경은 고발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먹고 입고 쓰는 모든 물질적, 정신적 재화가 동료인간들의 피땀의 결실임을 애써 부인하고 사치와 낭비를 자랑하듯 탐닉하면서 혹자가 사람의 사회적 책임성을 강조하면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인가"라고 저 옛날 가인의 시침떼는 변명을 능사로 합니다.
그런데 세상이 온통 부진실과 위선으로 넘쳐흘러도 끝까지 여호와 하나님의 진실성과 그 분이 내리신 계명과 말씀은 의롭고 순수하므로 끝까지 그것을 지키며 그 안에 살기를 다짐하는 한 신앙시인이 있었습니다. 시편 119편 140절에서 시인은 "주의 말씀은 정련되어 참으로 순수하므로, 주의 종이 그 말씀을 사랑합니다. 내가 미천하여 멸시를 당하지만, 주의 법도만은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다짐합니다. 시인은 사회적 신분이 낮아서 거대한 권력구조와 사회의 잘 나간다는 사람들이 일으키는 먼지바람에 시달리고 고통받았음을 숨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때일지라도, 아니 세상에서 표준과 진짜가 다 없어지는 듯하고, 힘있는 자들이 이것이 표준이다라고 제멋대로 인생의 도리를 규정할 지라도 경건한 시인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러면 그럴수록 정금된 금처럼 변하지 않고 빛나는 여호와 하나님의 법도, 말씀 계명의 순수함을 깨달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의는 영원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법은 진실하기 때문에 재난과 고통이 자기에게 닥쳐왔을 때에도, 이 세상에 진실의 법도가 있는 것일까 하고 회의심이 든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계명이 자기에게 기쁨이 되고 위로와 용기의 원천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결론처럼 말하기를 "주의 말씀 가운데서 으뜸이 되는 것은 진실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를 올무에 빠뜨리려고 물었던 질문, "율법 중에 가장 위대한 계명이 무엇이냐 "는 질문에 대하여 "마음, 뜻, 정성을 다하여 주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과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라고 총괄적으로 압축하여 주신 것을 기억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여호와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 곧 '경천애인'을 항상 최고의 계명으로 알고 살고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중에 으뜸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가지를 분명하게 집고 넘어가지 안됩니다. 아가페 사랑이 무엇인가를 증언하는 고린도 전서 13장 6절에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라는 구절입니다. 여기에서 진리란 무슨 형이상학적 철학적 진리를 말한다기보다 진실한 도리 곧 진실을 의미합니다. 거꾸로 말한다면, 진실하지 않은 사랑은 사랑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한민족에게 요구되는 여호와 하나님의 절대계명은, "서로 사랑하라"이기 전에 "너희가 살고자 할진대, 진실하라"는 말씀인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한국교회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교회 개척도 많이 하고, 교회봉사에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열심하고, 부흥집회 은혜집회에서 은혜도 많이 받았다는 사람들 중에서 '진실'이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판단잣대에 그만 불합격되어 자신만이 아니라, 교회와 여호와 하나님 이름에까지 누를 끼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성령은사 받는 일과 진실 하는 것, 기독교 교세 넓히는 일과 진실하는 것이 별도의 일이나 되는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한국 사회 속에서 개신교인들의 도덕적 영적 신뢰도는 급전직하로 떨어지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세상사람들 가운데서 조롱을 당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진실의 실종은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뉴스에 의하면, 보훈의달을 맞아 그 동안 육이오 한국전쟁에 참여했다가 행방불명되거나, 군번도 없이 죽어간 무명용사 명단 2만여명의 이름이 국방부 장관의 이름으로 전사자로서 확정되고 유가족에게 일부 통보되었는데, 놀랍게도 이러한 조사발표를 수신자 주소불확실이라는 이유만으로 오랫동안 유가족에게 정식 통보를 해주지 않았다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국방장관의 전사통지서를 받은 가족들이 보훈처에 등록을 하러갔는데 보훈처는 전사자라는 확실한 증거를 댈 때까지는 보훈대상자로서 등록 받을 수 없다는 보훈처 대표자의 말입니다.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까 남편을 전쟁터로 내보내어 잃고, 창상과부가 되어 유복자나 남겨둔 어린 자녀를 45년간 눈물로 길러낸 그 아내들의 마음에 이다지도 매몰찬 행정적 조치가 왜 일어납니까 우리나라 공직사회에 진실에로의 용기, 진실하고자 하는 정열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진실에로의 용기를 다시 되찾아야 하겠습니다. 나는 나의 양심의 소리에 진실하게 살고 있는가 나의 주님이 이렇게 살라고 가르쳐 주신 마태복음에 담겨져 있는 저 산상수훈의 가르침대로 진실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는가 나는 우리역사와 사회현실에 진실한 맘으로 대면하는가 귀찮고 골치 아프니까 대부분 외면해버리거나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은 아닌가 나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사신 교회,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신앙선배들이 피와 땀으로 일구어 온 교회에 대하여 진실하게 사랑하고 봉사하며 최소한의 교인으로서의 책임에 최선을 다하면서 긍지와 기쁨을 누리고 있는가 성령은 곧 진실하신 영이며, 진실하지 못한 사람을 진실한 사람이 되라고 끊임없이 감화시키시는 보혜사이신 것입니다. 진실의 표본은 예수 그리스도 유리 주님의 살아가신 모습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영이 우리심령을 비추어주시면, 영의 능력을 힘입어 아가페라는 사랑의 중력에 감싸이게 됩니다. 그러면 인간은 시간 속에 몸을 담그고 살면서도 홀연히 전체를 보아낼 수 있고, 온전해 질 수 있고, 저 깊은 무의식 속에 감추어져 있는 마음의 품은 생각과 의향을 가려 낼 능력을 지닐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인으로서 산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오늘 히브리서 기자가 말씀한데로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숨길 수 없다는 것, 모든 것이 그분의 눈앞에서는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다는 것,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 사람은 결국 여호와 하나님 앞에 언젠가는 모든 것을 드러내 놓아야 한다는 것을 깊이 깊이 믿고 깨달으면서 살아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