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 보혜사 성령
본문
오늘의 교회력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우리 주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한 10일 동안 초대 교회 성도들은 전혀 기도에 힘쓰던 중에 오순절에 이르러 성령을 받았습니다. 성령강림절, 오순절은 사도들에게 성령이 강림하신 것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완성하시며 성화를 도우시는 성령의 강림하심을 기념하는 날이 성령강림절입니다. 주님께서 승천하신 후 제자들은 아버지의 약속하신 바 성령을 기다리며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마침내 오순절 날이 이를 때 제자들이 모인 자리에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온 집에 가득하였고, 마치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었는데 바로 이 때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주님도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구약의 예언의 말씀에 요엘2:28에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라고 하셨습니다. "그 후, 그 때" 이런 말은 메시아의 날, 여호와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날, 여호와의 날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의 의의는 이제 아버지와 아들의 보내심을 받아 성령이 강림하여 성령님이 구원의 사역을 이 땅위에 펼치게 되었습니다. 성령님이 우리를 위하여 따로 죽으시거나 우리를 대속하신 것은 아니지만,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의 의미를 모든 사람의 심령 속에 감동을 주시고, 주를 영접할 수 있도록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믿음을 심어주시고, 감동을 주시고, 깨닫는 역사를 주어서 주님을 영접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오순절 성령의 강림은 화해와 통일을 가져왔습니다.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성령의 은사를 받아 다른 언어 곧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였습니다. 성령님의 역사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막혀진 담을 헐어버리는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그동안 성령이 강림하지 않았을 때에는 사람과 사람, 민족과 민족 사이에는 의사소통이 되지 않고 막혀진 담으로 나누어져야 했습니다. 성령이 강림하므로 이제 개인과 개인, 이웃 사회에서 홀로 존재하지 않고, 교제가 일어나기 시작되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게 되어 화해와 통일을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순절은 교회와 선교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성령과 교회와 선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성령 받지 아니하고는 선교란 불가능합니다.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성도들의 삶이 변화되기 시작하였고, 교회가 시작되었고, 선교가 시작되었습니다. 초대교회에는 이 성령강림주일에 주로 세례를 받았고, 초대교회의 공동체적인 신앙을 회복하려고 힘을 기울였습니다.
오순절의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유월절이 지난 후 50일이 되는 날이 오순절입니다. 밀과 보리의 첫 수확을 여호와 하나님께 바쳤기 때문에 맥추절이라고 했고, 안식일이 7주간이 지나갔다고 하여 칠칠절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런 감사의 예전이 후기 유대교에 와서는 모세가 호렙산에서 십계명을 받은 날을 기념하는 날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심으로 성령 강림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절기로 지키게 되었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심으로 이제 교회는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진정한 생일은 오순절이라고 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영을 지칭하는데 쓰인 용어는 구약에서는 루아흐이며, 신약에서는 프뉴마입니다. 이 말은 대기, 특히 바람이라는 뜻입니다. 바람이라는 것은 때로 온화하고 우리에게 많은 이익을 주면서도 때로는 광풍을 일으켜 인간으로 저항할 수 없는 엄청난 힘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 구약의 루아흐라는 말이 인간의 숨, 호흡에도 쓰였고, 인간의 생기, 생명을 주는 기운으로 쓰이기도 하였습니다.
우리 인간이 흙으로 지음을 받았는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의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주므로 살아있는 존재- 생령이 되었습니다. 사람은 죽을 때 호흡이 끊어지는데 그 호흡은 본래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여호와 하나님에게 되돌려드리는 것입니다.
구약에 있어 여호와 하나님의 영은 창조시에 활동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영은 둥지 위에 새처럼 아직 형태를 갖추지 못한 혼돈과 공허 그리고 흑암을 덮어 감싸시고 끌어안으므로 질서와 조화를 가진 우주를 창조하게 되었습니다. "태초에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여호와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1:1-2)라고 하셨습니다. 천지 창조가 완성된 후에도 여호와 하나님의 영은 계속하여 자연계를 섭리하셨고, 생명을 주시는 영으로 인간을 인도하셨습니다. 욥기33:4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건강을 누리면 살아가는 것은 전능자의 기운 곧 성령이 우리를 살리시는 것입니다. 시33:6에서도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기운으로 이루었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이 만상의 모든 만물은 다 여호와 하나님의 입기운 성령으로 이루시는 것입니다. 시104:30에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구약에서 성령은 인간 이성의 원천이셨고, 인간에게 재능과 소질을 주셨고, 예술적인 기술을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택하신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사사를 선택하시고 그들에게 능력으로 함께 역사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의 영을 선지자들에게 부어주셔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증거하게 하셨고, 사회를 변화시키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성령의 역사는 개인적이었고, 간헐적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꾸준히 모든 사람의 영혼 속에 임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약의 성령은 예수님의 나심에서부터 구약의 유형과 아주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들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부터 우리 주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셨습니다.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나아가실 때 성령이 마치 비둘기 같이 임하시는 것을 육안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세례요한이 우리 주님을 증언하시기를 자기는 물로 세례를 주시지만 자기 뒤에 오시는 주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라고 증언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활동하신 것을 보면 모두가 성령의 역사요, 능력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나가신 후에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숨을 내 쉬시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고,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고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은 우리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환란과 핍박이 기다리는 장소였습니다. 유대의 교권자들은 예수님을 죽인 여세를 몰아 신흥 기독교를 말살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주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분부하셨습니다.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을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1:4-5)고 하셨습니다.
초대교회의 120명의 성도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마음을 같이 하여 오직 기도에 힘썼습니다. 한 열흘 동안 기도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지 50일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여 하늘로 올라가신 지 열흘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렸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구속사에 있어서 오순절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사건이요, 예수님의 성육신의 사건에 버금가는 아주 중요한 사건입니다. 성령이 어느 특정한 사람에게만 임하신 것이 아니라, 한 사람에게도 예외 없이 각 사람 위에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능력의 성령이 임하였습니다. 행2:3에 "마치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라고 하셨습니다. 고전12:11에 보면 "이 모든 것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시는 것이니라" 우리는 다 성령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오늘 짧은 시간에 성령의 역사를 다 말씀드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다락방 강화라고 하는 요한14-16장에서 성령을 보내주신다는 말씀과 그 성령의 사역에 대하여 자세히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성령은 여러 가지 이름을 가지고 있고 불려지고 있습니다. 성령, 보혜사, 진리의 영, 여호와 하나님의 영, 아버지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오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25)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여기서 "아직"이라는 말은 육신을 입고 있고, 죽음의 자리에는 가지 않은 것을 말합니다.
육신을 입고 오신 주님은 이 세상에서 떠나가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이라고 하셨습니다. 육신을 가지셨기에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영이시기에 누구에게나, 어디서나 제약을 받지 않고 역사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요16:7에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내가 가면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라고 했습니다.
1. 성령님은 아버지와 아들이 보내신 보혜사이십니다. (26)
요한복음에서 말씀하고 있는 성령, 우리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성령의 사역은 한 마디로 주님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루신 구원 사역을 펼치면서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감당하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요14장, 15장, 16장에 걸쳐서 말씀하는 성령은 보혜사가 되시고, 진리의 영이 되신다고 하셨습니다.
첫째 성령님은 보혜사 성령이십니다.
보혜사라고 하는 말은 우리 예수님에게도 붙여지는 이름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다른 보혜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보혜사는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라고 하여 "곁으로 부른 자"라는 뜻입니다. "파라"는 곁에, 옆에 "클레토스"라는 말은 부른다는 말입니다. 우리 곁에 우리를 위하여 대변인으로, 변호자로, 상담자로 위로자로, 대언자로 세움을 입으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여호와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대언의 기도를 드리시는 보혜사이십니다. 롬8:34절에서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여호와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요일2:1에서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여기서 "대언자"라는 말은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 곧 보혜사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성령님은 또 다른 보혜사이십니다.
성령은 우리의 보혜사가 되시는데, 지금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탄식하시면서 기도하시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8:26)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낙심할 때 위로가 되시고, 우리의 곤란 중에 있을 때 건져주십니다.
둘째 성령님은 우리 안에 임재하고 계십니다.
성령님은 우리 곁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아버지를 대신하여 와 계신 영,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함께 있어 주시는 영이십니다. 요14:16-17에서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우리와 함께 거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항상 우리 곁에 함께 있어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함께 계신다, 곁에 계신다, 속에 거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우리 안에 내주 하신다는 뜻입니다. 성령님은 항상 우리 안에 우리와 함께, 우리 곁에 거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나와 함께 거하고 있는데, 어찌하여 낙심하며, 세상을 두려워할 것입니까 우리를 고와와 같이 내버려두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고아가 아닙니다. 부모 없는 고아는 힘이 없고 희망도 없고, 사기가 땅에 떨어져 낙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있는 아이들은 매사에 자신감이 넘치고, 세상을 두렵지 않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는 결코 나 혼자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셋째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사역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요16:14에 보면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요14:17절에 "그는 진리의 영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도 "성령 그가 너희에게 말할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다 성령으로 난 사람들입니다. 요한복음 3장의 니고데모라는 선생과 우리 주님이 말씀을 나누시는 중에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참으로 신비하기만 합니다. 예수님은 육신으로 나는 것과 영적으로 태어나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을 보면 신비에 속한 일입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난 자들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면 믿어지지가 않고,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 디도서3:5에 보면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행실로 살아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구원받은 것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 주님의 구속, 성령의 감동감화로 인하여 우리는 구원받았습니다.
2.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26)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요14:17에 "그는 진리의 영이라" 요15:26에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요16:13에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을 것을 말하면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고 했습니다.
보혜사 성령님의 다른 이름이 진리의 성령입니다. 성령이 온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억하게 하시고, 들고 순종하여 구원받도록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하시면서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진리의 말씀으로 인도하시고 있습니다.
세상의 진리라고 하여도 누구나 다 아는 것은 아닙니다. 하물며 영적인 일에 있어서 진리의 세계를 깨달아 안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님을 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진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은 성령의 역사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3. 성령님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십니다. (27)
우리는 예수 믿고 변화를 받은 후에 진정한 평안을 누리고 살아갑니다. 우리에게 참된 평안이 언제 들어오는 것입니까 성령님을 모셔들여야 됩니다. 주님을 영접하셨습니까 여러분 심령 안에서는 이미 성령께서 내재하고 있습니다. 27절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이라고 하면 많은 것을 소유하는데서 찾을 수 있는 평안입니다. 이것은 이기적인 평안이요, 일시적인 평안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이란 어떤 것입니까 영원한 평안, 세상과 비교할 수 없는 평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함으로 얻을 수 있는 평안이요,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을 확신하므로 얻는 평안입니다.
우리 안에 이미 성령님이 들어와 좌정하고 계십니다. 성령이 역사하지 않았다고 하면 우리는 다 멸망 받아야 하고,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조차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님에게 순종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좋은 계획을 세우시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믿어야 합니다.
어떤 크리스찬이 가족들과 함께 식당에 식사를 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식당입구에 실직당한 노숙자 한 사람이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음식을 먹으려고 앉았는데 그 사람이 자꾸 생각이 나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음성이 들립니다. 그래서 1만 원 짜리 대신 5천 원 짜리로 먹고, 나가서 빵을 사서 그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성령은 성령의 음성을 듣고 실천해 가면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역사는 계속 이루어집니다. 이 실직자가 빵을 받아서 먹으려고 하는데 바로 앞에서 신문을 파는 소년이 생각나서 도저히 혼자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반을 떼서 아이를 위해 남겨두었습니다. 나머지 반을 맛있게 먹고 있는데, 마침 길 잃은 개가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이 개가 먹고 싶어서 침을 흘리며 쳐다봅니다. 그래서 도저히 혼자 먹을 수가 없어서 그것을 조금 떼어서 개에게 주었습니다. 개가 고마웠는지 꼬리를 설렁설렁 흔들면서 그 사람 옆에 앉아 있습니다. 외로운데 잘됐다 싶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쳐다보니 목걸이가 있는데, 주인의 주소가 적혀져 있습니다. 주인을 찾아 주어야겠다는 생각으로 그 개를 끌고 묻고 물어 주인을 찾아갔습니다. 찾아갔는데 그 주인이 큰 회사를 경영하는 기업주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은총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민감하지 말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한 반응을 보여야 합니다. 세상에서 들리는 소리는 우리를 계속 불안하게 하고 어렵게 만듭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듣고 쫓아가면 역사는 일어납니다. 평안을 가져다 줍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라고 말씀해도 이들은 계속 근심하고 걱정했습니다.
우리를 가르쳐 주시는 분이 성령님입니다. 스스로 똑똑한 척하지 말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의 죽으심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하여 성령님을 의지하여야 합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절입니다. 성령님은 여호와 하나님과 우리 주님이 보내어주신 신령한 여호와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대신하고 주님을 대신하며, 주님이 이루어놓으신 구원사역을 성취하시고 있습니다. 성령은 보혜사가 되십니다. 진리의 영으로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영원한 평안을 주십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주님도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구약의 예언의 말씀에 요엘2:28에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라고 하셨습니다. "그 후, 그 때" 이런 말은 메시아의 날, 여호와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날, 여호와의 날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의 의의는 이제 아버지와 아들의 보내심을 받아 성령이 강림하여 성령님이 구원의 사역을 이 땅위에 펼치게 되었습니다. 성령님이 우리를 위하여 따로 죽으시거나 우리를 대속하신 것은 아니지만,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의 의미를 모든 사람의 심령 속에 감동을 주시고, 주를 영접할 수 있도록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믿음을 심어주시고, 감동을 주시고, 깨닫는 역사를 주어서 주님을 영접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오순절 성령의 강림은 화해와 통일을 가져왔습니다.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성령의 은사를 받아 다른 언어 곧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였습니다. 성령님의 역사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막혀진 담을 헐어버리는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그동안 성령이 강림하지 않았을 때에는 사람과 사람, 민족과 민족 사이에는 의사소통이 되지 않고 막혀진 담으로 나누어져야 했습니다. 성령이 강림하므로 이제 개인과 개인, 이웃 사회에서 홀로 존재하지 않고, 교제가 일어나기 시작되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게 되어 화해와 통일을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순절은 교회와 선교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성령과 교회와 선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성령 받지 아니하고는 선교란 불가능합니다.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성도들의 삶이 변화되기 시작하였고, 교회가 시작되었고, 선교가 시작되었습니다. 초대교회에는 이 성령강림주일에 주로 세례를 받았고, 초대교회의 공동체적인 신앙을 회복하려고 힘을 기울였습니다.
오순절의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유월절이 지난 후 50일이 되는 날이 오순절입니다. 밀과 보리의 첫 수확을 여호와 하나님께 바쳤기 때문에 맥추절이라고 했고, 안식일이 7주간이 지나갔다고 하여 칠칠절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런 감사의 예전이 후기 유대교에 와서는 모세가 호렙산에서 십계명을 받은 날을 기념하는 날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심으로 성령 강림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절기로 지키게 되었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심으로 이제 교회는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진정한 생일은 오순절이라고 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영을 지칭하는데 쓰인 용어는 구약에서는 루아흐이며, 신약에서는 프뉴마입니다. 이 말은 대기, 특히 바람이라는 뜻입니다. 바람이라는 것은 때로 온화하고 우리에게 많은 이익을 주면서도 때로는 광풍을 일으켜 인간으로 저항할 수 없는 엄청난 힘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 구약의 루아흐라는 말이 인간의 숨, 호흡에도 쓰였고, 인간의 생기, 생명을 주는 기운으로 쓰이기도 하였습니다.
우리 인간이 흙으로 지음을 받았는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의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주므로 살아있는 존재- 생령이 되었습니다. 사람은 죽을 때 호흡이 끊어지는데 그 호흡은 본래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여호와 하나님에게 되돌려드리는 것입니다.
구약에 있어 여호와 하나님의 영은 창조시에 활동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영은 둥지 위에 새처럼 아직 형태를 갖추지 못한 혼돈과 공허 그리고 흑암을 덮어 감싸시고 끌어안으므로 질서와 조화를 가진 우주를 창조하게 되었습니다. "태초에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여호와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1:1-2)라고 하셨습니다. 천지 창조가 완성된 후에도 여호와 하나님의 영은 계속하여 자연계를 섭리하셨고, 생명을 주시는 영으로 인간을 인도하셨습니다. 욥기33:4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건강을 누리면 살아가는 것은 전능자의 기운 곧 성령이 우리를 살리시는 것입니다. 시33:6에서도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기운으로 이루었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이 만상의 모든 만물은 다 여호와 하나님의 입기운 성령으로 이루시는 것입니다. 시104:30에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구약에서 성령은 인간 이성의 원천이셨고, 인간에게 재능과 소질을 주셨고, 예술적인 기술을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택하신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사사를 선택하시고 그들에게 능력으로 함께 역사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의 영을 선지자들에게 부어주셔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증거하게 하셨고, 사회를 변화시키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성령의 역사는 개인적이었고, 간헐적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꾸준히 모든 사람의 영혼 속에 임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약의 성령은 예수님의 나심에서부터 구약의 유형과 아주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들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부터 우리 주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셨습니다.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나아가실 때 성령이 마치 비둘기 같이 임하시는 것을 육안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세례요한이 우리 주님을 증언하시기를 자기는 물로 세례를 주시지만 자기 뒤에 오시는 주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라고 증언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활동하신 것을 보면 모두가 성령의 역사요, 능력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나가신 후에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숨을 내 쉬시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고,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고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은 우리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환란과 핍박이 기다리는 장소였습니다. 유대의 교권자들은 예수님을 죽인 여세를 몰아 신흥 기독교를 말살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주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분부하셨습니다.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을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1:4-5)고 하셨습니다.
초대교회의 120명의 성도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마음을 같이 하여 오직 기도에 힘썼습니다. 한 열흘 동안 기도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지 50일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여 하늘로 올라가신 지 열흘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렸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구속사에 있어서 오순절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사건이요, 예수님의 성육신의 사건에 버금가는 아주 중요한 사건입니다. 성령이 어느 특정한 사람에게만 임하신 것이 아니라, 한 사람에게도 예외 없이 각 사람 위에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능력의 성령이 임하였습니다. 행2:3에 "마치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라고 하셨습니다. 고전12:11에 보면 "이 모든 것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시는 것이니라" 우리는 다 성령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오늘 짧은 시간에 성령의 역사를 다 말씀드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다락방 강화라고 하는 요한14-16장에서 성령을 보내주신다는 말씀과 그 성령의 사역에 대하여 자세히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성령은 여러 가지 이름을 가지고 있고 불려지고 있습니다. 성령, 보혜사, 진리의 영, 여호와 하나님의 영, 아버지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오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25)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여기서 "아직"이라는 말은 육신을 입고 있고, 죽음의 자리에는 가지 않은 것을 말합니다.
육신을 입고 오신 주님은 이 세상에서 떠나가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이라고 하셨습니다. 육신을 가지셨기에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영이시기에 누구에게나, 어디서나 제약을 받지 않고 역사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요16:7에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내가 가면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라고 했습니다.
1. 성령님은 아버지와 아들이 보내신 보혜사이십니다. (26)
요한복음에서 말씀하고 있는 성령, 우리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성령의 사역은 한 마디로 주님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루신 구원 사역을 펼치면서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감당하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요14장, 15장, 16장에 걸쳐서 말씀하는 성령은 보혜사가 되시고, 진리의 영이 되신다고 하셨습니다.
첫째 성령님은 보혜사 성령이십니다.
보혜사라고 하는 말은 우리 예수님에게도 붙여지는 이름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다른 보혜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보혜사는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라고 하여 "곁으로 부른 자"라는 뜻입니다. "파라"는 곁에, 옆에 "클레토스"라는 말은 부른다는 말입니다. 우리 곁에 우리를 위하여 대변인으로, 변호자로, 상담자로 위로자로, 대언자로 세움을 입으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여호와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대언의 기도를 드리시는 보혜사이십니다. 롬8:34절에서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여호와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요일2:1에서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여기서 "대언자"라는 말은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 곧 보혜사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성령님은 또 다른 보혜사이십니다.
성령은 우리의 보혜사가 되시는데, 지금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탄식하시면서 기도하시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8:26)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낙심할 때 위로가 되시고, 우리의 곤란 중에 있을 때 건져주십니다.
둘째 성령님은 우리 안에 임재하고 계십니다.
성령님은 우리 곁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아버지를 대신하여 와 계신 영,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함께 있어 주시는 영이십니다. 요14:16-17에서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우리와 함께 거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항상 우리 곁에 함께 있어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함께 계신다, 곁에 계신다, 속에 거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우리 안에 내주 하신다는 뜻입니다. 성령님은 항상 우리 안에 우리와 함께, 우리 곁에 거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나와 함께 거하고 있는데, 어찌하여 낙심하며, 세상을 두려워할 것입니까 우리를 고와와 같이 내버려두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고아가 아닙니다. 부모 없는 고아는 힘이 없고 희망도 없고, 사기가 땅에 떨어져 낙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있는 아이들은 매사에 자신감이 넘치고, 세상을 두렵지 않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는 결코 나 혼자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셋째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사역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요16:14에 보면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요14:17절에 "그는 진리의 영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도 "성령 그가 너희에게 말할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다 성령으로 난 사람들입니다. 요한복음 3장의 니고데모라는 선생과 우리 주님이 말씀을 나누시는 중에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참으로 신비하기만 합니다. 예수님은 육신으로 나는 것과 영적으로 태어나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을 보면 신비에 속한 일입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난 자들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면 믿어지지가 않고,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 디도서3:5에 보면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행실로 살아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구원받은 것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 주님의 구속, 성령의 감동감화로 인하여 우리는 구원받았습니다.
2.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26)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요14:17에 "그는 진리의 영이라" 요15:26에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요16:13에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을 것을 말하면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고 했습니다.
보혜사 성령님의 다른 이름이 진리의 성령입니다. 성령이 온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억하게 하시고, 들고 순종하여 구원받도록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하시면서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진리의 말씀으로 인도하시고 있습니다.
세상의 진리라고 하여도 누구나 다 아는 것은 아닙니다. 하물며 영적인 일에 있어서 진리의 세계를 깨달아 안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님을 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진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은 성령의 역사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3. 성령님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십니다. (27)
우리는 예수 믿고 변화를 받은 후에 진정한 평안을 누리고 살아갑니다. 우리에게 참된 평안이 언제 들어오는 것입니까 성령님을 모셔들여야 됩니다. 주님을 영접하셨습니까 여러분 심령 안에서는 이미 성령께서 내재하고 있습니다. 27절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이라고 하면 많은 것을 소유하는데서 찾을 수 있는 평안입니다. 이것은 이기적인 평안이요, 일시적인 평안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이란 어떤 것입니까 영원한 평안, 세상과 비교할 수 없는 평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함으로 얻을 수 있는 평안이요,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을 확신하므로 얻는 평안입니다.
우리 안에 이미 성령님이 들어와 좌정하고 계십니다. 성령이 역사하지 않았다고 하면 우리는 다 멸망 받아야 하고,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조차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님에게 순종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좋은 계획을 세우시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믿어야 합니다.
어떤 크리스찬이 가족들과 함께 식당에 식사를 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식당입구에 실직당한 노숙자 한 사람이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음식을 먹으려고 앉았는데 그 사람이 자꾸 생각이 나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음성이 들립니다. 그래서 1만 원 짜리 대신 5천 원 짜리로 먹고, 나가서 빵을 사서 그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성령은 성령의 음성을 듣고 실천해 가면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역사는 계속 이루어집니다. 이 실직자가 빵을 받아서 먹으려고 하는데 바로 앞에서 신문을 파는 소년이 생각나서 도저히 혼자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반을 떼서 아이를 위해 남겨두었습니다. 나머지 반을 맛있게 먹고 있는데, 마침 길 잃은 개가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이 개가 먹고 싶어서 침을 흘리며 쳐다봅니다. 그래서 도저히 혼자 먹을 수가 없어서 그것을 조금 떼어서 개에게 주었습니다. 개가 고마웠는지 꼬리를 설렁설렁 흔들면서 그 사람 옆에 앉아 있습니다. 외로운데 잘됐다 싶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쳐다보니 목걸이가 있는데, 주인의 주소가 적혀져 있습니다. 주인을 찾아 주어야겠다는 생각으로 그 개를 끌고 묻고 물어 주인을 찾아갔습니다. 찾아갔는데 그 주인이 큰 회사를 경영하는 기업주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은총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민감하지 말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한 반응을 보여야 합니다. 세상에서 들리는 소리는 우리를 계속 불안하게 하고 어렵게 만듭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듣고 쫓아가면 역사는 일어납니다. 평안을 가져다 줍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라고 말씀해도 이들은 계속 근심하고 걱정했습니다.
우리를 가르쳐 주시는 분이 성령님입니다. 스스로 똑똑한 척하지 말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의 죽으심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하여 성령님을 의지하여야 합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절입니다. 성령님은 여호와 하나님과 우리 주님이 보내어주신 신령한 여호와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대신하고 주님을 대신하며, 주님이 이루어놓으신 구원사역을 성취하시고 있습니다. 성령은 보혜사가 되십니다. 진리의 영으로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영원한 평안을 주십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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