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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성령의 역사와 믿음생활

본문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까지 40일을 사셨습니다. 40일 동안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말씀은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성령 받으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첫날에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무서워서 한 곳에 모여 문을 꼭 닫아놓고 숨어있었는데 그곳에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평강이 있을찌어다”그리고 바로 이어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4장에도 승천하시기 바로 전에 하신 예수님의 고별설교가 나옵니다. 거기서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볼찌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눅 24:49) 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을 받기위해 예루살렘 성에 유하면서 늘 성전에 있어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왜 그토록 제자들이 성령 받기를 원하셨습니까 그것은 마치 이야기로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백화점 진열장 앞에 세명의 소녀들이 서 있었습니다. 두 소녀가 다른 한 소녀에게 진열장 안의 물건을 보면서 열심히 설명해 주고 있었습니다. 너무나도 진지하게 열심히 설명하길래 한 신사가 가까이 가서 보았더니, 세 소녀 중에 한 소녀가 소경이더랍니다. 앞을 못 보는 소녀에게 두 소녀가 그렇게 열심히 진열장 안의 물건을 설명해 주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 우리 곁을 완전히 떠나십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들이 눈을떠서 영적 세계를 스스로 보고 믿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눈이 떠져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도 깨닫게 되고, 영적인 나라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계실 때는 예수님이 직접 영적인 말씀을 설명해 주시고, 영적인 세계를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떠나시면 우리 스스로 보아야 하기 때문에 성령 받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하신 성령을 받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하고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쓸 때 승천하신지 10일만에 성령세례를 충만히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성령이 오시면 어떤 역사가 일어나는지 말씀을 증거하면서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성령이 오시면 우리를 거듭나게 하십니다.
니고데모는 갈급한 마음을 가지고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금생과 내생에 대한 아무런 만족이 없어서 예수님께 소망을 얻고자 찾아왔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니고데모가 질문하기를“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다시 날 수 있습니까”라고 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나게 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거듭난다고 하는 것은 한자로는 “중생”이고, 우리말로는 “다시 한번 또 태어난다. ” 즉 “두 번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사람이 부모의 뱃속에서 태어나는 육신의 출생이 있듯이, 영적으로 태어나는 영적인 출생이 있습니다. 육신은 흙으로 온 것이기 때문에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지,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려면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이것이 중생의 비밀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은 겉으로는 같지만은, 내용적으로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 안 믿는 사람은 육적 생명만 있기 때문에 죽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은 육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있기 때문에 죽으면 영적 생명 가지고 천국에 들아 갈 수 있습니다.
 둘째로, 예수 안 믿는 사람은 육적 생명 하나만 있기 때문에 이 세상 살아갈 때 아무런 갈등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은 육적 생명과 영적 생명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두가지 성질이 상호충돌하기도 하고, 서로 싸우기도 하기 때문에 이 세상 살아갈 때 갈등도 있고, 시험도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염려할 필요 없는 것은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의지하기만 하면 성령님께서 시험과 유혹이 올 때 이기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감당 못할 시험은 주시기도 않거니와, 감당 못할 때는 피할 길을 주시는 성령님 이십니다. 예수 믿으면 모두가 다 천사가 되어야 하고, 모두가 다 100%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도 영적 생명이 이 세상의 육적 생명 안에 담겨있기 때문에 때로는 실수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고, 잘못을 범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천국에 가서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고전 12장 3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 여호와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거듭난다고 하는 것은,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을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죄를 깨닫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받아들이도록 만들어 주셔야만 가능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야 2천년 전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목수의 아들을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며, 나의 생명의 구주로 믿겠습니까 성령만이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죽으시고, 나의 모든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그 십자가로 말미암아 나의 죄가 완전히 사함을 얻었고, 예수를 믿을 때 내가 구원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 16절에“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내안에 오셔서 믿게 만들어 주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요한 웨슬레는 말하기를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하시는 일은, 내 영혼이 예수를 믿어 구원받고, 여호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을 내적으로 증거해 주신다” 고 했습니다.
존 칼빈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하는 일은 원수마귀가 성도들을 향하여 화살을 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을 정도로 치명적인 상처를 입지 않도록 막아주신다” 고 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견신(Perseverance)의 은혜라고 합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어떤 시험아니 핍박이 와도 견딜 수 있는 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마귀의 공격화살이 날라와서 맞아도 타락할 정도로 치명적인 상처를 받지 않도록 성령님이 방패가 되시고, 산성이 되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이렇게 안팎으로 역사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을래야 안 믿을 수 없도록 만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성령님이 여러분들에게도 함께 하심을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다!
2. 성령이 오시면 죄를 깨닫게 하시고 회개하게 만드십니다.
요한복음 16장 8-9절에“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오시면 먼저 여호와 하나님과 화목하게 만들려고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셔서 회개하는 마음을 주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의 용서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용서는 회개하지 않는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회개할 때 주어지는 용서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도 회개하고 믿으라 했고, 예수님도 회개하고 믿으라 했고, 베드로도 사도바울도 역시 먼저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고 했습니다.
요사이 빈라덴을 옹호하고 아프카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에 우호적인 발언을 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물론 TV에 배웠다는 학자들이 나와서 잘못된 발언을 하고, 언론이 은근히 그쪽으로 유도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악을 미화하거나 정당화하면 안됩니다. 그리고 반성하고 회개할 때 용서하는 것이지, 죄를 뉘우치지도 않는데 용서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를 회개시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더러운 그릇은 여호와 하나님이 쓰실 수 없기 때문에, 깨끗한 그릇으로 우리를 만들기 위함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작은 그릇이나 큰 그릇이나 다 쓰십니다. 천한 그릇이나 귀한 그릇이나 다 쓰십니다. 그러나 더러운 그릇은 여호와 하나님이 쓰실 수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쓰시는 그릇을 만들기 위해 성령님은 우리로 죄를 깨닫게 하시고 회개케 만드시는 것입니다.
고후 5장 17절에“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믿으면 분명한 자화상을 가져야 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선언해야 합니다. 이전 것 옛것 세상것은 다 지나가고, 새것이 되었다고 선언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에서 구원함을, 저주에서 축복으로, 심판에서 상급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분명히 옮겨졌다는 사실을 우리 스스로 선언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나는 누구인가” 라는 고백입니다. “나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이다” 라는 분명한 자기 정체성이 있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벧전 2장 9절에“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선택받은 족속입니다. 왕같은 제사장들입니다. 왕은 속박을 당하지 않고 어디에 얽메이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예전에 죄의 종으로, 사단의 종으로 자유를 잃고 속박 당하고, 사단이 부리는대로 시키는대로 이끄는대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왕같은 제사장이 되었으니 사단이 떠나가고, 마귀가 떠나가고, 저주가 떠나가고, 완전히 자유한 자가 됐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5장 1절에“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했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여러분들은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아야 합니다. 사단이나 마귀의 종노릇 하면 안됩니다. 여러분들은 그리스도안에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완전히 자유한 자가 되었습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역사할 때만이 우리가 죄를 깨닫고 회개하여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모든 공장들이 탱크나 비행기, 또는 무기를 만드는 공장으로 바뀌어졌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자 다시 비누를 만들고, 옷을 만들고, 자동차를 만드는 공장으로 완전히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와같이 우리는 과거에 사단을 섬기면서 사단이 우리의 마음과 생활을 지배했으나, 예수를 믿고 회심한 다음부터는 축복받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일하도록 우리를 세상에서 완전히 구별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 사람을 벗어던지고 예수 그리스도만을 섬기는 새로운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3. 성령이 오시면 우리로 하여금 증인된 삶을 살게 만드십니다.
요한복음 15장 26절에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라고 했습니다.
성령을 부어주시는 최종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널리널리 전파하라는데 있습니다. 성령 충만함을 입어 내가 여호와 하나님처럼 행세하고, 은사나 능력 받으면 사람 앞에서 교만해지고 그것은 성령을 주신 목적이 아닙니다. 성령을 부어주시는 가장 큰 목적은 은사 받는데 있는 것도 아니고, 방언을 말하고, 병 고치면서 으스대라는 것이 아니라, 오직 땅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여 죽을 영혼들을 더 많이 구원하라는데 있는 것입니다.
웨슬레 목사님은 성령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온 세상에 진출하여 닥쳐올 진노를 피하게 하라 흑암과 죽음 속에서 무관심 한자를 일깨워 구원 받게 하라”고 강조했습니다.
감리교를 창시한 요한 웨슬레와 장로교를 창시한 요한 칼빈을 비교해 보면, 칼빈은 구원론에 많은 비중을 두었고, 웨슬레는 성령론에 많은 비중을 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 칼빈은 여호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적으로 성령론이 희미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요한 웨슬레는 우리 인간의 자유의지와 선택도 구원의 중대한 몫을 차지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므로 자연히 인간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강조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논쟁을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것이 옳은가는 하늘나라 가서 여호와 하나님께 물어보아야 합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믿고 싶습니다. 구원 받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요한 칼빈의 예정론 입장에 서서 믿고 - 그럴 때 구원에 있어서 여호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감사할 수 있다. 멸망으로 달음박질하는 안 믿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요한 웨슬레의 인간의 자유의지와 선택 이라는 입장에 서서 - 그럴 때 전도하여 그 영혼을 주님께 데려올 수 있다. 이 두가지를 종합해서 우리가 믿고 열심히 전도하고, 더 많은 영혼 구원받게 해야 합니다.
교리야 어떻든지 간에 그것은 절대 진리가 아니요, 여호와 하나님 말씀인 성경만이 절대 진리이니까,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어서 성령 충만하여 한 영혼이라도 추수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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