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 성도를 도우시는 성령님
본문
1. 수액(樹液)과 같은 성령님
성령님은 인격체(人格)이십니다. 人格이라고 할 때 사람 人자를 썼습니다만은 이 말은 성령님께서 知性과 感情과 意志를 가지신 분이시라는 말입니다. 적당하게 표현할 말이 없어서 인격체라는 말을 쓰는 것 뿐이지 사실은 사람이 이렇게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가진 존재가 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성령님은 분명히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갖춘 인격체이신데도 영으로만 오시고 어떤 형체를 갖추고 오시지 않았기 때문에 마치 전기가 기계를 돌아가게 하는 것처럼 성령님을 마치 어떤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힘이나 물질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사정을 아십니다. 고전2:11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의 사정은 여호와 하나님의 영 즉 성령님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성령님은 어떤 것에 대해서 아시는 지성을 소유하신 인격체이십니다.
또 성령님은 감정을 가지고 계십니다. 사랑하기도 하시고(롬15:30) 탄식하기도 하시고(롬8:26) 근심하기도 하신다(엡4:30)고 하셨습니다. 사랑하고, 탄식하고, 근심하신다는 것은 감정을 가지셨다는 것입니다.
또 성령님은 의지를 지니고 계십니다. 고전12:11에 보면 성령님께서 각 사람에게 어떤 은사를 줄 것인가를 결정하고 나누어 주신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성령님은 어떤 힘이나 물질이 아니시고, 아시고, 느끼시며, 결정하새고, 행동하시는 인격체이십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행하시는 일이 우리의 이성의 한계를 뛰어넘기 때문에 성령님에 대해 표현하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에 대해 말할 때 비둘기같다. 바람같다. 불같다고 했습니다. 비둘기로 임하셨거나 바람이나 불로 임하신 것이 아니라 그것들 '같이'임하셨다고 했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은 농부시고, 예수님은 포도나무시고, 우리 성도는 그 가지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비유입니다. 그래서 저는 성령님은 나무로부터 가지에 영양을 공급해 주는 수액과 같은 분이시라고 생각했습니다.
포도나무와 가지는 하나로 이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나무에서부터 가지로 가는 수액이 없으면 그 가지는 곧 시들어 죽고 맙니다. 성령님은 성도들에게 바로 이 수액과 같은 분이십니다.
2. 맺게 하시는 성령님
저희들이 지금 요15의 말씀을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14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제 이 세상을 떠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불안해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불안해 하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시면서 '내가 가면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라'하셨습니다(요14:16). 즉 당신을 대신해서 성령님을 보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곧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하셨습니다(요14:18). 여기에서 보듯이 예수님께서는 성령님이 오시는 것과 당신께서 다시 오시는 것을 전혀 구별을 하지 않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헛갈릴 수 있습니다. 제자들도 그랬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다음에 계속되는 요16:16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다시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헛갈려서 서로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냐'고 했습니다.
하나니은 3위 1체의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사도신경) 오늘 이 시간에 3위(位) 1체()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 다 설명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께 대해 자세히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같은 야구경기를 구경해도 구경하는 재미가 똑같지 않습니다. 취향에 따라 차이도 있겠지만 야구의 룰(rule) 즉 규칙을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큰 차이가 있습니다. 룰을 알고 구경을 하는 사람에게는 스릴이 있고 재미가 있는데 룰을 모르는 사람은 재미가 없습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도와 주시기 위해서 우리 가운데 와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저도 이 성령님에 대해 너무 무지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님께 대해 알았던 것에 비하면 너무 무지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주일예배 시간에 하나하나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특별한 시간을 따로 내어서 말씀 드리려고 내일부터 '성령님의 사람'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특별새벽기도회를 준비했습니다. 아무쪼록 중요한 기회를 놓치지 마시고 꼭 참석하셔서 성령님에 대해 자세히 알아 성령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우리를 돕기를 원하시는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 누리며 살으시기를 바랍니다.
행16:6,7에 보면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라고 했습니다. 성령님이 바로 예수님의 영이라고 했습니다.
롬8:9-10에 보면 '만일 너희 속에 여호와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의 영이 그리스도의 영이시고 또 그 분이 바로 그리스도라고 구별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성령님은 영으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말과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말을 똑같은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갈2:20). 예수님께서 성령님으로 자기 안에 와 계신다는 것입니다.
3절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말슴으로 믿음을 갖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4절 말씀을 보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과실을 맺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믿음을 가졌더라도 성령님의 능력을 덧입지 못하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과실을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여기 맺는다는 말이 아주 중요합니다. 가지가 열매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등 성령의 열매는 가지인 우리들이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지는 나무에 붙어 나무가 공급해 주는 수액을 열심히 받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가지는 나무가 만들어 주는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과 같이 우리가 주님께 붙어 성령님의 인도를 받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을 때 성령님께서 성령님의 열매들이 나에게 맺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열매를 만들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성령님께서 만들어 주시는 열매를 맺을 뿐입니다.
3. 의지해야 할 성령님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한다는 말은 성도가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약간이나 조금 할 수 있다고 하지 않으시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신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성도를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이름만 가진 교인입니다. 주일 날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기는 드리지만 구원에 대한 확신도 없고 여호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갈증도 없이 사는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로는 늘 성령충만해서 승리하는 성도의 삶을 사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물론 성령충만한 삶이라고 해서 문제가 전혀 없이 만사가 형통하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힘들고 어려운 일들도 있지만 그 어렵고 힘든 중에서도 늘 기뻐하며 감사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열심히 믿어보려고 나름대로 애를 쓰기도 하지만 잘 안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매주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여호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하지만 실제 삶 속에 들어 가면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열심히 믿으려고 하지만 현실의 문제에 부딪히게 되면 믿지 않는 사람과 별차이가 없이 살게 됩니다.
그것은 열심히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다가 아니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만약 성도의 삶이 인간의 의지로만 최선을 다해 살면 성공적으로 살 수 있는 것이라면 성령님께서 우리를 돕기 위해 오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거듭 거듭해서 성령님을 보내 주신다고 하신 것은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우리가 참된 성도의 삶을 사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롬10장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 열심히 있었으나 바른 지식을 좇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했습니다. 그것처럼 많은 성도들이 그렇게 애를 쓰면서도 거듭 실패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이도 참된 성도의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굳센 의지를 가지고 열심히 살려고 하면 어느 정도는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지속적으로 계속되지는 못합니다. 흔들리고 넘어집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죄의식에 사로잡힙니다. 그러면 더 굳은 마음으로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다짐을 하며 기도를 하고, 때로는 금식을 해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시 넘어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렇게 자기의 의지, 자신의 최선을 다해 살면 될 줄 알았는데, 그렇게 살려고 하는데도 자꾸 넘어지게 되면 넘어질 때마다 재,재헌신을 다짐하며 바르게 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실패하는 것이 계속적으로 반복되다보면 '믿음으로 성경말씀대로 사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실제로 그렇게 산다는 것이 나에게는 불가능한가 보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는 성경말씀대로 사는 것을 아예 포기하고 적당히 믿고 적당히 사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 교회에도 교회에 나온지 얼마 되지 않는 분들이 아주 열심을 가지고 믿음생활을 하려고 애쓰는 것을 봅니다. 목회자에게는 그런 성도들을 보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이 없습니다. 그런 성도들을 보게 되면 정말 천하를 다 얻은 듯한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열심이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열심히 아니고 자기 의지에서 나온 열심이라면 그 열심은 오래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을 꼭 명심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타락한 본성을 가진 인간의 한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다른 노력과 애씀이 있어야 되는 것이 아니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절로 과실을 맺는 다고 하신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고난 받으실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이 모두 도망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혹 다른 사람들은 다 주님을 버릴 찌라도 자기는 주님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마 '주님 나를 어떻게 보시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하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네가 오늘밤 닭이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그때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주님과 함께 죽을찌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로 그 밤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씀을 드릴 때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한 것입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죽을찌언정 부인하지 않겠다'고 한 것은 진심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부인했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모습이고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살 동안은 늘 그렇게 그렇게 살다가 죽을 때 천당만 가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까 절대로 그렇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렇게 살지 않았고 사도바울도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다. 사도바울은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라고 만족하며 살았고, 생사를 가름하는 재판을 앞에 둔 감옥 속에서도 '기뻐하라'고 외치며 살았습니다.
사도바울만 그렇게 살았습니까 아닙니다. 수많은 신앙의 사람들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주 안에 기쁨 누리므로 마음의 풍랑이 잔잔하니 세상과 나는 간곳 없고 구속한 주님만 보인다'고 노래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면 굳센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 이렇게 살았습니까 아니었습니다. 성령님으로 충만해서 전적으로 성령님께 의지하며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신 말씀을 명심하고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우리를 돕기 위해서 와 계시는 성령님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합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성령님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곧 말라지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은 성령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수액을 받지 못하면 말라 버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명심하고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과 늘 교제해야 합니다. 내 안에 성령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고 성령님과 늘 교제하기를 원하면 성령님께서 여러분들을 도와 주십니다.
겨울에 죽은 것과 같은 나무도 - 수액이 오르면 소생하고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가 믿음 생활에 자꾸 실패하는 가장 큰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계속적으로 믿음 안에서 승리하는 성도가 되는 길은 오직 한 길 밖에 없습니다. 나를 도와 주시려고 내 안에 와 계시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성령님 우리를 돕기 위해 우리 안에 와 계십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배제한 체 자기 힘만으로 신앙생활을 하려는 것은 나무에서 잘려나온 가지가 열매를 맺으려고 하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자기의 힘과 의지만 가지고 무엇을 하려고 하면 결국은 실패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명심하시고, 성령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시고, 성령님의 감동하심과 인도하심에 절대적으로 순종하셔서 늘 승리하는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령님은 인격체(人格)이십니다. 人格이라고 할 때 사람 人자를 썼습니다만은 이 말은 성령님께서 知性과 感情과 意志를 가지신 분이시라는 말입니다. 적당하게 표현할 말이 없어서 인격체라는 말을 쓰는 것 뿐이지 사실은 사람이 이렇게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가진 존재가 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성령님은 분명히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갖춘 인격체이신데도 영으로만 오시고 어떤 형체를 갖추고 오시지 않았기 때문에 마치 전기가 기계를 돌아가게 하는 것처럼 성령님을 마치 어떤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힘이나 물질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사정을 아십니다. 고전2:11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의 사정은 여호와 하나님의 영 즉 성령님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성령님은 어떤 것에 대해서 아시는 지성을 소유하신 인격체이십니다.
또 성령님은 감정을 가지고 계십니다. 사랑하기도 하시고(롬15:30) 탄식하기도 하시고(롬8:26) 근심하기도 하신다(엡4:30)고 하셨습니다. 사랑하고, 탄식하고, 근심하신다는 것은 감정을 가지셨다는 것입니다.
또 성령님은 의지를 지니고 계십니다. 고전12:11에 보면 성령님께서 각 사람에게 어떤 은사를 줄 것인가를 결정하고 나누어 주신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성령님은 어떤 힘이나 물질이 아니시고, 아시고, 느끼시며, 결정하새고, 행동하시는 인격체이십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행하시는 일이 우리의 이성의 한계를 뛰어넘기 때문에 성령님에 대해 표현하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에 대해 말할 때 비둘기같다. 바람같다. 불같다고 했습니다. 비둘기로 임하셨거나 바람이나 불로 임하신 것이 아니라 그것들 '같이'임하셨다고 했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은 농부시고, 예수님은 포도나무시고, 우리 성도는 그 가지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비유입니다. 그래서 저는 성령님은 나무로부터 가지에 영양을 공급해 주는 수액과 같은 분이시라고 생각했습니다.
포도나무와 가지는 하나로 이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나무에서부터 가지로 가는 수액이 없으면 그 가지는 곧 시들어 죽고 맙니다. 성령님은 성도들에게 바로 이 수액과 같은 분이십니다.
2. 맺게 하시는 성령님
저희들이 지금 요15의 말씀을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14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제 이 세상을 떠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불안해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불안해 하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시면서 '내가 가면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라'하셨습니다(요14:16). 즉 당신을 대신해서 성령님을 보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곧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하셨습니다(요14:18). 여기에서 보듯이 예수님께서는 성령님이 오시는 것과 당신께서 다시 오시는 것을 전혀 구별을 하지 않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헛갈릴 수 있습니다. 제자들도 그랬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다음에 계속되는 요16:16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다시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헛갈려서 서로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냐'고 했습니다.
하나니은 3위 1체의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사도신경) 오늘 이 시간에 3위(位) 1체()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 다 설명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께 대해 자세히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같은 야구경기를 구경해도 구경하는 재미가 똑같지 않습니다. 취향에 따라 차이도 있겠지만 야구의 룰(rule) 즉 규칙을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큰 차이가 있습니다. 룰을 알고 구경을 하는 사람에게는 스릴이 있고 재미가 있는데 룰을 모르는 사람은 재미가 없습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도와 주시기 위해서 우리 가운데 와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저도 이 성령님에 대해 너무 무지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님께 대해 알았던 것에 비하면 너무 무지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주일예배 시간에 하나하나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특별한 시간을 따로 내어서 말씀 드리려고 내일부터 '성령님의 사람'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특별새벽기도회를 준비했습니다. 아무쪼록 중요한 기회를 놓치지 마시고 꼭 참석하셔서 성령님에 대해 자세히 알아 성령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우리를 돕기를 원하시는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 누리며 살으시기를 바랍니다.
행16:6,7에 보면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라고 했습니다. 성령님이 바로 예수님의 영이라고 했습니다.
롬8:9-10에 보면 '만일 너희 속에 여호와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의 영이 그리스도의 영이시고 또 그 분이 바로 그리스도라고 구별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성령님은 영으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말과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말을 똑같은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갈2:20). 예수님께서 성령님으로 자기 안에 와 계신다는 것입니다.
3절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말슴으로 믿음을 갖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4절 말씀을 보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과실을 맺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믿음을 가졌더라도 성령님의 능력을 덧입지 못하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과실을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여기 맺는다는 말이 아주 중요합니다. 가지가 열매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등 성령의 열매는 가지인 우리들이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지는 나무에 붙어 나무가 공급해 주는 수액을 열심히 받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가지는 나무가 만들어 주는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과 같이 우리가 주님께 붙어 성령님의 인도를 받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을 때 성령님께서 성령님의 열매들이 나에게 맺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열매를 만들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성령님께서 만들어 주시는 열매를 맺을 뿐입니다.
3. 의지해야 할 성령님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한다는 말은 성도가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약간이나 조금 할 수 있다고 하지 않으시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신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성도를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이름만 가진 교인입니다. 주일 날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기는 드리지만 구원에 대한 확신도 없고 여호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갈증도 없이 사는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로는 늘 성령충만해서 승리하는 성도의 삶을 사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물론 성령충만한 삶이라고 해서 문제가 전혀 없이 만사가 형통하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힘들고 어려운 일들도 있지만 그 어렵고 힘든 중에서도 늘 기뻐하며 감사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열심히 믿어보려고 나름대로 애를 쓰기도 하지만 잘 안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매주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여호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하지만 실제 삶 속에 들어 가면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열심히 믿으려고 하지만 현실의 문제에 부딪히게 되면 믿지 않는 사람과 별차이가 없이 살게 됩니다.
그것은 열심히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다가 아니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만약 성도의 삶이 인간의 의지로만 최선을 다해 살면 성공적으로 살 수 있는 것이라면 성령님께서 우리를 돕기 위해 오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거듭 거듭해서 성령님을 보내 주신다고 하신 것은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우리가 참된 성도의 삶을 사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롬10장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 열심히 있었으나 바른 지식을 좇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했습니다. 그것처럼 많은 성도들이 그렇게 애를 쓰면서도 거듭 실패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이도 참된 성도의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굳센 의지를 가지고 열심히 살려고 하면 어느 정도는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지속적으로 계속되지는 못합니다. 흔들리고 넘어집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죄의식에 사로잡힙니다. 그러면 더 굳은 마음으로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다짐을 하며 기도를 하고, 때로는 금식을 해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시 넘어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렇게 자기의 의지, 자신의 최선을 다해 살면 될 줄 알았는데, 그렇게 살려고 하는데도 자꾸 넘어지게 되면 넘어질 때마다 재,재헌신을 다짐하며 바르게 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실패하는 것이 계속적으로 반복되다보면 '믿음으로 성경말씀대로 사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실제로 그렇게 산다는 것이 나에게는 불가능한가 보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는 성경말씀대로 사는 것을 아예 포기하고 적당히 믿고 적당히 사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 교회에도 교회에 나온지 얼마 되지 않는 분들이 아주 열심을 가지고 믿음생활을 하려고 애쓰는 것을 봅니다. 목회자에게는 그런 성도들을 보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이 없습니다. 그런 성도들을 보게 되면 정말 천하를 다 얻은 듯한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열심이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열심히 아니고 자기 의지에서 나온 열심이라면 그 열심은 오래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을 꼭 명심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타락한 본성을 가진 인간의 한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다른 노력과 애씀이 있어야 되는 것이 아니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절로 과실을 맺는 다고 하신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고난 받으실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이 모두 도망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혹 다른 사람들은 다 주님을 버릴 찌라도 자기는 주님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마 '주님 나를 어떻게 보시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하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네가 오늘밤 닭이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그때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주님과 함께 죽을찌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로 그 밤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씀을 드릴 때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한 것입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죽을찌언정 부인하지 않겠다'고 한 것은 진심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부인했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모습이고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살 동안은 늘 그렇게 그렇게 살다가 죽을 때 천당만 가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까 절대로 그렇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렇게 살지 않았고 사도바울도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다. 사도바울은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라고 만족하며 살았고, 생사를 가름하는 재판을 앞에 둔 감옥 속에서도 '기뻐하라'고 외치며 살았습니다.
사도바울만 그렇게 살았습니까 아닙니다. 수많은 신앙의 사람들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주 안에 기쁨 누리므로 마음의 풍랑이 잔잔하니 세상과 나는 간곳 없고 구속한 주님만 보인다'고 노래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면 굳센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 이렇게 살았습니까 아니었습니다. 성령님으로 충만해서 전적으로 성령님께 의지하며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신 말씀을 명심하고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우리를 돕기 위해서 와 계시는 성령님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합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성령님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곧 말라지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은 성령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수액을 받지 못하면 말라 버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명심하고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과 늘 교제해야 합니다. 내 안에 성령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고 성령님과 늘 교제하기를 원하면 성령님께서 여러분들을 도와 주십니다.
겨울에 죽은 것과 같은 나무도 - 수액이 오르면 소생하고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가 믿음 생활에 자꾸 실패하는 가장 큰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계속적으로 믿음 안에서 승리하는 성도가 되는 길은 오직 한 길 밖에 없습니다. 나를 도와 주시려고 내 안에 와 계시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성령님 우리를 돕기 위해 우리 안에 와 계십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배제한 체 자기 힘만으로 신앙생활을 하려는 것은 나무에서 잘려나온 가지가 열매를 맺으려고 하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자기의 힘과 의지만 가지고 무엇을 하려고 하면 결국은 실패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명심하시고, 성령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시고, 성령님의 감동하심과 인도하심에 절대적으로 순종하셔서 늘 승리하는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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