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 보혜사 성령님이 함께 하시면
본문
그리스도인에게 던질 중요한 세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첫째는 당신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습니까 (계3;20, 요1;12)
둘째는 당신은 성령을 받았습니까 (행19;2, 딛3;5)
셋째는 당신은 성령으로 충만하십니까 (엡5;18)
예수님은 자신이 하늘로 승천하신 후에는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셔서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는 성령을 받기 전까지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서 5장 18절에는 "술취하지 말고 성령을 충만히 받으라"고 했습니다. 때가 악하므로 세월을 아끼라고 하면서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 충만함이란 어떤 경우를 말합니까
성령 충만한 삶이란 믿음으로 가득 찬 삶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믿고 그 믿음 안에서 살아가면 됩니다. 믿음이란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좋은 믿음일수록 무조건 순종하는 성도입니다. 그런데 성령 충만을 술에 취한 것으로 비유를 하는 것을 볼 때에 성령 충만한 삶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본문을 우리가 좀 분석해 보아야 합니다.
술을 취한다는 것은 알코올의 지배를 받는 것을 의미하며 몸과 마음과 영혼을 모두 알코올에 던져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 충만을 받는 것은 자발적으로 우리 자신을 성령의 지배하에 놓는 것을 말합니다 . 술에 취한 사람이 술에 지배를 받고 통제되는 것처럼 당연히 성령 충만을 받은 사람은 성령의 지배와 통제를 받는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에게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완전히 내어 주어야 합니다. 성령 충만하다는 것은 성령으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구석구석까지 그의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지와 감정, 그리고 지적 능력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주관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충만한'이란 단어는 포화상태까지 채워진 것을 의미합니다. 가득 차서 더 이상 채울 공간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와 같이 보혜사 성령이 우리 가운데 충만하여 지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야 합니까 어떤 모습의 삶을 삽니까 보혜사를 헬라어 원어로 '파라클레토스'라고 하며 이 뜻은 "우리 곁에서 돕기 위해 부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보혜사를 헬라어의 원 뜻을 찾아보거나, 여러 번역되어 있는 영어성경 중에는 여러 가지의 뜻, 즉 변호사, 위로자, 상담자, 협조자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기독 신자로서 보혜사 성령을 받았으면 변호사, 위로자, 상담자, 협조자로서 책임을 다하여서 보혜사 성령을 받은 증거를 보여야 하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령을 받을 수도 없고 그들은 알지도 못한다고 했습니다. 성령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성도만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만이 성령을 알 수 있고 성령이 내 속에 거하게 됩니다. 성령이 내 속에 거하신다는 것은 내가 주인이 아니라 성령님이 나의 삶의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나의 주인이 성령님이라면 분명히 우리의 삶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래서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고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의 자아 의식을 가지게 됩니다.
로마서8:16에 보면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하시느니라. " 성령은 계속 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합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정상화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될 때에는 세계관이 바뀌어집니다. 나에 대한 인식이 달라질 뿐만 아니라 세계를 보는 눈도 달라집니다. 전에는 이 세계가 마귀의 손에 있고 죄악이 있고 그리고 사람의 손에 의해서 움직이는 세계인 줄 알았는데 성령을 받고 보니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가 주인이요,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하시고 진리가 다스리게 되는 세계라는 것을 알게 되고 마침내는 이 우주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함을 알게 됩니다. 신천 신지를 봅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제는 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요 이웃은 내 형제요, 모든 세계는 여호와 하나님의 아름다운 세계로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옛날 베드로는 법정을 무서워했고, 매 맞는 것을 무서워했고, 관원들을 무서워했고, 죽음과 십자가를 두려워했으나 성령을 받은 베드로는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했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두려워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묻는 그 말씀을 두려워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큰 일을 하고 선한 일을 많이 한다해도 내 속에 여호와 하나님의 영이 없으면 안됩니다. 롬8:9절에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친자소송을 하면 반드시 유전인자를 조사합니다. 아무리 내 자식이라고 해서 아이에게서 유전인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부모가 아니듯이 우리 가운데 보혜사 성령이 없으면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성령이 우리안에 거하면 자연적으로 우리는 변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전에는 죄악이 지배를 했으나 이제는 여호와 하나님이 지배를 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를 보세요. 베드로는 본래 갈릴리 어부입니다. 그가 얼마나 비겁한 자였으며 예수님의 제자이면서도 그를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까지 하면서 물러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성령으로 변화되자 자기가 예수를 부인했던 바로 그 법정에서 서서 담대하게 말하기를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여호와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이 옳으냐. 너희 말을 듣는 것이 옳으냐, 너희가 판단하라"고 놀라울 정도로 기탄 없이 용기 있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한마디로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모습, 새로운 인격, 새로운 성격의 새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능력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보혜사 성령이 함께 하시는 성도들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야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변회되어야 성령을 받은 사람이 됩니까
첫째로, 우리는 허물이 있는 사람의 입장을 변호해 줌으로써 보혜사 성령을 받은 증거를 보여 줄 것입니다. 보혜사를 어느 영문 성경(N. E. B)에는 변호사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연약한 여자를 끌고 예수님께 와서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요 8:3~6)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예수님을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는 심산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고 하셨습니다. 그 때에 모여든 무리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아 노인으로 시작하여 아이들까지 하나씩 떠나가고 오직 예수님과 그 가운데 있던 여자만 남았습니다. 그 때에 악한 무리들에 의해서 간음죄로 돌에 맞아 죽을 수밖에 없었던 여자는 예수의 변호로 죽을 지경에서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여자에게 "나도 너를 정제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 8:11)고 말씀하신 후, 그 여자를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분명히 그 여자는 주님이 자기를 위해서 변호해 주신 것에 감사 감격하여 일생 동안 주님의 제자로서 주님만을 정성껏 섬겼으리라고 믿습니다.
아브라함이 롯을 변호하였듯이, 모세가 백성들의 허물을 용서해 달라고 여호와 하나님께 변호하였듯이, 스데반 집사가 자기를 향하여 돌을 던지는 자들을 위해 "저들을 용서해 주옵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저들이 알지 못합니다"고 변호하듯이, 요나단이 자기 아버지에게 다가가서 다윗을 변호하듯이 우리는 변호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변론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항상 죄많은 우리를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변호하여 우리가 죄없다는 무죄판결을 얻도록 하셨듯이 우리들도 죄있는 자들의 변호자가 되어야 합니다. 허물을 들추어내는 증인의 사명이 아닌 있는 허물도 덮어주는 변호자가 되십시오. 보혜사 성령을 받은 기독 신자는 가정 식구나 이웃이나 친구나 교인들의 허물이 있으면 그 허물을 덮어 주고 잘못이 있으면 변호해 줌으로써 보혜사 성령을 받은 증거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고통을 받고 있는 분들을 위로해 줌으로 보혜사 성령을 받은 증거를 보일 것입니다. 보혜사를 다른 영문 성경 K. J. V에는 위로자, 즉 comfortter로 번역되어 있으며, 독일어 성경에도 위로자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보혜사 성령을 받은 기독 신자들은 못고칠 질병을 안고 신음하는 분들, 사업의 실패로 낙심한 자들, 자녀들의 불량한 생활, 또는 인격적으로 원만치 못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음으로 마음의 고통을 받고 있는 분들, 노인이 되어 외로움에 젖어있는 분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자들을 위로해 주어야 합니다.
토요일인 어제도 매우 바빴습니다. 오전에 동산병원에 다녀왔습니다. 김호용 전도사님의 어머님이 아주 건강했는데 그리고 지난 1년반동안 아들과 남편 때문에 병원에 오랫동안 다니면서 간호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부인병을 검사받아 보고 싶어 검사를 받았는데 수술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해서 결국 지난 금요일에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찾아가니 저의 손을 잡고 하시는 말씀이 '멀쩡한 사람이 입원해 수술을 받고 며칠 금식을 하고 누워 있느니 죽겠습니다'라고 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오후에는 창신구역 정향 집사님의 옆집에 사시는 분인데 아직 교회에 등록은 하지 않았지만 암으로 투병생활 하는 가정이 잠시 기도원에 다녀왔는데 이제 저희 교회에 등록을 하고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는데 목사님이 먼저 오셔서 기도를 해 주셨으면 한다고 해서 들렀습니다. 쉰 아홉 살 되신 가장이 환자인데 들어가니까 앉아 계시는데 힘이 너무 없어 앞에 베개를 두고 그 위에 수건을 여러 장 올려놓고 머리를 그 위에 얹었다가 들었다가 하고 계셨습니다. 환자는 이제 뼈와 가죽만 남았습니다. 누워 있으니 허리가 아프고 앉아 있자니 힘이 없고 걸을 수도 없어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발병 된지가 4년이 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친정 오빠들이 늦게 질병에 걸려서 예수를 믿고 계시면서 예수 믿으라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 다소 후회스럽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제 병이 고침 받느냐 못받는냐 하는 것은 차후의 문제입니다. 이제는 영혼이 구원받느냐 못 받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생명은 여호와 하나님께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육신이 얼마나 오래 사느냐 못사느냐 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인생은 언젠가는 한번 가야합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의 길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으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믿음으로 뜻이 계시면 고쳐주실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어 천국 갈 것입니다'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여기에서 그친 것이 아닙니다. 이분 환자의 심방을 약속해 놓은 상태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있을 때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박상순 집사님의 전화였습니다. 구역의 황인숙 집사님의 친정 어머니도 입원해 계시고, 그 가게의 여직원 아버지가 암으로 투병하셨는데 어제 밤에 갑자기 심하여 영대병원에 입원을 하셨는데 위독하다고 하시면서 예배를 한번 드려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이 분도 고등학교때 예수를 믿었고 학생회 회장까지 하신 분이신데 장성하여서는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두시반에 가정을 심방하고 다시 병원으로 가기로 했는데 심방중에 다시 전화가 결려 왔습니다. 방금 그분이 세상을 떠났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아마도 병원에 안가셔도 될 것 같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병원에 가자고 해서 차를 타고 갔습니다. 차를 타고 영대병원으로 가면서 집사님들이 "목사님 오늘 제일 바쁘신 날인데 죄송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사실 토요일이 되면 갈등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토요일은 설교 준비하는데 모든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데 설교준비 한다고 심방을 미루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심방을 하는 것이 옳은가 이것이 고민이요, 갈등입니다. 그래서 제가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설교가 무엇인가 바로 우리의 삶의 이야기가 아닙니까 앉아서 성경책을 펴놓고 원고를 작성하는 것만이 설교가 아니고 심방을 통한 위로 받아야 백성을 위로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설교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보세요, 황집사님의 친정 어머님이 연세가 여든 셋 입니다. 예수를 제대로 믿으신지 3년쯤 되는데 얼마나 믿음이 좋은지 제가 위로를 받고 왔습니다. 황집사님의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이 '내가 왜 예수를 진작 안믿었던고'하시면서 후회스러럽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기도하는데 '아멘 아멘 '하셨습니다.
병문안 심방을 한 후에 영안실로 갔습니다. 황집사님의 가게 아가씨 아버지 영안실로 갔습니다. 아직 미혼인 남매를 두고 떠났습니다. 교사생활을 하시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사모님이 무교라고 하셨는데 남편이 그래도 병상에서 다른 목사님의 심방을 받으시고 영접하셨는데 기도라도 하고 가면 안되겠느냐고 하니까 흔쾌히 허락하셔서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기도하고 위로를 건네고 돌와 왔습니다. 그분들이 예수님을 믿는 분들이 아닌데도 아멘을 따라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는 자가 되십시오. 위로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 나타날 때 늦추지 마시고 위로하는 일에 우선 하십시오. 특히 권사님들의 사명은 목회자를 도와 성도를 위로하고 심방하는 일입니다. 위로의 은사를 받아 심방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우리 자신이 답답할 때, 모든 일이 뜻대로 되지 아니하여서 고민할 때 "여호와 하나님은 나를 돕고 위로해 주시느니라"는 시편86:17절에 있는 말씀으로 용기를 얻게 됩니다. 사40:1 "너희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셋째로, 우리는 고민이 되는 문제를 갖고 상담하려고 우리를 찾는 분들에게 소망과 용기를 줌으로써 보혜사 성령을 받은 증거를 보일 것입니다. 보혜사를 R. S. V와 N4 영어성경에는 '상담자' 즉 counselor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밤에 바리새 사람 니고데모가 예수를 찾아와서 예수 그리스도와 상담의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무슨 문제로 상담하게 되었는지 잘 알 수는 없으나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는 말씀을 하신 것만은 확실합니다. 예수님과 상담이 끝난 후 니고데모가 완전히 변화되어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예수의 제자들은 다 도망쳐 버렸으나 공의회의 의원이었던 부자 아리마대 요셉과 공의회의 의원의 한 사람이었던 니고데모, 두 분이 예수의 시신을 안장하였습니다. (요 19:38-40) 이같이 놀랄 만한 사실은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를 찾아가 상담한 결과는 니고데모가 변화되어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기독교 방송국의 생명의 전화의 담당자에게서 들은 말입니다. 전화로 상담해 오는 사람들 중에는 사랑했던 사람에게서 배신당한 사람의 사연이 제일 많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자연주의 작가인 헨리 데이빗 도로우는 "도시 생활이란 수백만의 고독한 사람들이 함께 있는 것이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성령을 받은 신자들은 고독한 사람들이, 다시 말해서 병고나 가정 문제나 자녀 문제나 취직 문제 등으로 우리에게 상담할 것을 청해 올 때, 그들에게 소망의 빛을 비춰 주어야 하겠습니다.
어느 교회에 진실한 기독 신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의 아들이 교인들과 많은 사람들로부터 문제 있는 청년이란 말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 청년이 어느 날 교회의 목사님을 찾아와 상담을 하였습니다. 목사님은 그 청년과 상담이 끝난 후, 그 청년에게 "지금까지의 지내 온 얘기 중 다 들었는데 남자로 태어나 그만한 깡패짓 아니한 청년이 어디 있겠는가 청년은 한 목사님의 희망적인 권면을 듣고 난 후부터 열심으로 공부하여 서울 Y대학에 24세에 입학하였습니다. 그가 4년간의 학업을 마치고 졸업한 후에는 현재 교사로서 모 고등학교에 봉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 신자 된 우리는 상담자의 책임을 다함으로써 보혜사 성령을 받은 증거를 보일 것입니다.
넷째로, 우리는 도움을 받아야 할 분을 도와줌으로써 보혜사 성령을 받은 증거를 보여 줄 것입니다.
보혜사를 다른 영문 성경(T. E. V)에는 협조자, 돕는자, 즉 helper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보혜사를 공동 번역 성경에도 또한 일본어 성경에도 협조자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요한 복음 5장 1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에는 38년 된 병자가 주님의 권능으로 깨끗함을 받은 기사가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베데스다라는 못이 있는데 어떤 병자라도 베데스다 못의 물이 동할 때, 먼저 들어가면 병이 깨끗해짐을 받았습니다. 그 많은 병자들 중에 38년 된 병자가 있었는데 어느 누구 한 사람, 그 병자를 도와서 베데스다 못으로 인도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 광경을 보신 예수께서는 친히 그에게 가까이 가셔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말씀하시니 그는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요 5:8~9) 38년 된 병자는 예수의 도움으로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어린이들이 병들었을 때, 그리고 나면서 눈 먼 사람이나 죄인이라고 소외 된 사람들을 정성껏 도우셨습니다.
제사장과 레위 사람은 강도를 만나 있는 것을 다 빼앗기고 빈사 상태에 놓여 있는 그를 보고서 그냥 지나갔습니다. (눅 10:30-32) 이로써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 종교 지도자들에게서 사랑을 찾아 볼 수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수처럼 여기던 사마리아 사람은 길을 지나가다가 신음 소리를 듣고서 그를 도왔습니다. 치료비까지 다 부담하고 여관비까지 다 부담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 교회의 성도들은 과연 소외 된 분들과 불행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앞장을 서고 있는가를 반성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무관심은 죄라고 합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도 피해간 제사장과 레위 사람만이 아니라, 우리들도 도움을 청하는 분들의 청을 듣지 않고서 그들의 청을 거절했다면 기독 신자 된 우리도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의 지도자들과 결코 다를 바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불행에 처해 있는 분들을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도울 수 있는 대로 도와줌으로써 보혜사 성령을 받은 증거를 보여 줄 것입니다.
파출소 앞에 가면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도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무엇이든지 도와 드리겠습니다"라는 글을 써붙여야 하지 않을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보혜사 성령이 충만한 삶으로 성령이 충만한 삶의 증인된 모습으로 사십시오. 여러분 주위의 사람들의 단점을 변호해 주는 변호사의 책임과 , 상처받고 고민하는 교인들과 가족 식구들, 그리고 이웃에게 위로해 주는 위로자의 책임과 , 혼자서 해결하지 못해서 그 어려운 문제를 상담해 오는 자녀들이나 교우님들이나 친구들에게 상담을 잘 해서 용기를 주는 상담자의 책임과, 여러 가지 삶의 실패 때문에 도움을 청하는 분들을 정성껏 도와줌으로써 보혜사 성령을 받은 증거를 보여주는 성도님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째는 당신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습니까 (계3;20, 요1;12)
둘째는 당신은 성령을 받았습니까 (행19;2, 딛3;5)
셋째는 당신은 성령으로 충만하십니까 (엡5;18)
예수님은 자신이 하늘로 승천하신 후에는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셔서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는 성령을 받기 전까지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서 5장 18절에는 "술취하지 말고 성령을 충만히 받으라"고 했습니다. 때가 악하므로 세월을 아끼라고 하면서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 충만함이란 어떤 경우를 말합니까
성령 충만한 삶이란 믿음으로 가득 찬 삶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믿고 그 믿음 안에서 살아가면 됩니다. 믿음이란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좋은 믿음일수록 무조건 순종하는 성도입니다. 그런데 성령 충만을 술에 취한 것으로 비유를 하는 것을 볼 때에 성령 충만한 삶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본문을 우리가 좀 분석해 보아야 합니다.
술을 취한다는 것은 알코올의 지배를 받는 것을 의미하며 몸과 마음과 영혼을 모두 알코올에 던져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 충만을 받는 것은 자발적으로 우리 자신을 성령의 지배하에 놓는 것을 말합니다 . 술에 취한 사람이 술에 지배를 받고 통제되는 것처럼 당연히 성령 충만을 받은 사람은 성령의 지배와 통제를 받는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에게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완전히 내어 주어야 합니다. 성령 충만하다는 것은 성령으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구석구석까지 그의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지와 감정, 그리고 지적 능력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주관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충만한'이란 단어는 포화상태까지 채워진 것을 의미합니다. 가득 차서 더 이상 채울 공간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와 같이 보혜사 성령이 우리 가운데 충만하여 지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야 합니까 어떤 모습의 삶을 삽니까 보혜사를 헬라어 원어로 '파라클레토스'라고 하며 이 뜻은 "우리 곁에서 돕기 위해 부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보혜사를 헬라어의 원 뜻을 찾아보거나, 여러 번역되어 있는 영어성경 중에는 여러 가지의 뜻, 즉 변호사, 위로자, 상담자, 협조자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기독 신자로서 보혜사 성령을 받았으면 변호사, 위로자, 상담자, 협조자로서 책임을 다하여서 보혜사 성령을 받은 증거를 보여야 하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령을 받을 수도 없고 그들은 알지도 못한다고 했습니다. 성령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성도만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만이 성령을 알 수 있고 성령이 내 속에 거하게 됩니다. 성령이 내 속에 거하신다는 것은 내가 주인이 아니라 성령님이 나의 삶의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나의 주인이 성령님이라면 분명히 우리의 삶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래서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고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의 자아 의식을 가지게 됩니다.
로마서8:16에 보면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하시느니라. " 성령은 계속 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합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정상화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될 때에는 세계관이 바뀌어집니다. 나에 대한 인식이 달라질 뿐만 아니라 세계를 보는 눈도 달라집니다. 전에는 이 세계가 마귀의 손에 있고 죄악이 있고 그리고 사람의 손에 의해서 움직이는 세계인 줄 알았는데 성령을 받고 보니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가 주인이요,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하시고 진리가 다스리게 되는 세계라는 것을 알게 되고 마침내는 이 우주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함을 알게 됩니다. 신천 신지를 봅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제는 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요 이웃은 내 형제요, 모든 세계는 여호와 하나님의 아름다운 세계로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옛날 베드로는 법정을 무서워했고, 매 맞는 것을 무서워했고, 관원들을 무서워했고, 죽음과 십자가를 두려워했으나 성령을 받은 베드로는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했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두려워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묻는 그 말씀을 두려워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큰 일을 하고 선한 일을 많이 한다해도 내 속에 여호와 하나님의 영이 없으면 안됩니다. 롬8:9절에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친자소송을 하면 반드시 유전인자를 조사합니다. 아무리 내 자식이라고 해서 아이에게서 유전인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부모가 아니듯이 우리 가운데 보혜사 성령이 없으면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성령이 우리안에 거하면 자연적으로 우리는 변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전에는 죄악이 지배를 했으나 이제는 여호와 하나님이 지배를 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를 보세요. 베드로는 본래 갈릴리 어부입니다. 그가 얼마나 비겁한 자였으며 예수님의 제자이면서도 그를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까지 하면서 물러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성령으로 변화되자 자기가 예수를 부인했던 바로 그 법정에서 서서 담대하게 말하기를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여호와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이 옳으냐. 너희 말을 듣는 것이 옳으냐, 너희가 판단하라"고 놀라울 정도로 기탄 없이 용기 있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한마디로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모습, 새로운 인격, 새로운 성격의 새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능력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보혜사 성령이 함께 하시는 성도들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야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변회되어야 성령을 받은 사람이 됩니까
첫째로, 우리는 허물이 있는 사람의 입장을 변호해 줌으로써 보혜사 성령을 받은 증거를 보여 줄 것입니다. 보혜사를 어느 영문 성경(N. E. B)에는 변호사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연약한 여자를 끌고 예수님께 와서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요 8:3~6)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예수님을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는 심산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고 하셨습니다. 그 때에 모여든 무리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아 노인으로 시작하여 아이들까지 하나씩 떠나가고 오직 예수님과 그 가운데 있던 여자만 남았습니다. 그 때에 악한 무리들에 의해서 간음죄로 돌에 맞아 죽을 수밖에 없었던 여자는 예수의 변호로 죽을 지경에서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여자에게 "나도 너를 정제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 8:11)고 말씀하신 후, 그 여자를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분명히 그 여자는 주님이 자기를 위해서 변호해 주신 것에 감사 감격하여 일생 동안 주님의 제자로서 주님만을 정성껏 섬겼으리라고 믿습니다.
아브라함이 롯을 변호하였듯이, 모세가 백성들의 허물을 용서해 달라고 여호와 하나님께 변호하였듯이, 스데반 집사가 자기를 향하여 돌을 던지는 자들을 위해 "저들을 용서해 주옵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저들이 알지 못합니다"고 변호하듯이, 요나단이 자기 아버지에게 다가가서 다윗을 변호하듯이 우리는 변호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변론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항상 죄많은 우리를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변호하여 우리가 죄없다는 무죄판결을 얻도록 하셨듯이 우리들도 죄있는 자들의 변호자가 되어야 합니다. 허물을 들추어내는 증인의 사명이 아닌 있는 허물도 덮어주는 변호자가 되십시오. 보혜사 성령을 받은 기독 신자는 가정 식구나 이웃이나 친구나 교인들의 허물이 있으면 그 허물을 덮어 주고 잘못이 있으면 변호해 줌으로써 보혜사 성령을 받은 증거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고통을 받고 있는 분들을 위로해 줌으로 보혜사 성령을 받은 증거를 보일 것입니다. 보혜사를 다른 영문 성경 K. J. V에는 위로자, 즉 comfortter로 번역되어 있으며, 독일어 성경에도 위로자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보혜사 성령을 받은 기독 신자들은 못고칠 질병을 안고 신음하는 분들, 사업의 실패로 낙심한 자들, 자녀들의 불량한 생활, 또는 인격적으로 원만치 못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음으로 마음의 고통을 받고 있는 분들, 노인이 되어 외로움에 젖어있는 분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자들을 위로해 주어야 합니다.
토요일인 어제도 매우 바빴습니다. 오전에 동산병원에 다녀왔습니다. 김호용 전도사님의 어머님이 아주 건강했는데 그리고 지난 1년반동안 아들과 남편 때문에 병원에 오랫동안 다니면서 간호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부인병을 검사받아 보고 싶어 검사를 받았는데 수술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해서 결국 지난 금요일에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찾아가니 저의 손을 잡고 하시는 말씀이 '멀쩡한 사람이 입원해 수술을 받고 며칠 금식을 하고 누워 있느니 죽겠습니다'라고 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오후에는 창신구역 정향 집사님의 옆집에 사시는 분인데 아직 교회에 등록은 하지 않았지만 암으로 투병생활 하는 가정이 잠시 기도원에 다녀왔는데 이제 저희 교회에 등록을 하고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는데 목사님이 먼저 오셔서 기도를 해 주셨으면 한다고 해서 들렀습니다. 쉰 아홉 살 되신 가장이 환자인데 들어가니까 앉아 계시는데 힘이 너무 없어 앞에 베개를 두고 그 위에 수건을 여러 장 올려놓고 머리를 그 위에 얹었다가 들었다가 하고 계셨습니다. 환자는 이제 뼈와 가죽만 남았습니다. 누워 있으니 허리가 아프고 앉아 있자니 힘이 없고 걸을 수도 없어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발병 된지가 4년이 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친정 오빠들이 늦게 질병에 걸려서 예수를 믿고 계시면서 예수 믿으라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 다소 후회스럽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제 병이 고침 받느냐 못받는냐 하는 것은 차후의 문제입니다. 이제는 영혼이 구원받느냐 못 받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생명은 여호와 하나님께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육신이 얼마나 오래 사느냐 못사느냐 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인생은 언젠가는 한번 가야합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의 길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으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믿음으로 뜻이 계시면 고쳐주실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어 천국 갈 것입니다'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여기에서 그친 것이 아닙니다. 이분 환자의 심방을 약속해 놓은 상태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있을 때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박상순 집사님의 전화였습니다. 구역의 황인숙 집사님의 친정 어머니도 입원해 계시고, 그 가게의 여직원 아버지가 암으로 투병하셨는데 어제 밤에 갑자기 심하여 영대병원에 입원을 하셨는데 위독하다고 하시면서 예배를 한번 드려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이 분도 고등학교때 예수를 믿었고 학생회 회장까지 하신 분이신데 장성하여서는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두시반에 가정을 심방하고 다시 병원으로 가기로 했는데 심방중에 다시 전화가 결려 왔습니다. 방금 그분이 세상을 떠났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아마도 병원에 안가셔도 될 것 같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병원에 가자고 해서 차를 타고 갔습니다. 차를 타고 영대병원으로 가면서 집사님들이 "목사님 오늘 제일 바쁘신 날인데 죄송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사실 토요일이 되면 갈등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토요일은 설교 준비하는데 모든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데 설교준비 한다고 심방을 미루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심방을 하는 것이 옳은가 이것이 고민이요, 갈등입니다. 그래서 제가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설교가 무엇인가 바로 우리의 삶의 이야기가 아닙니까 앉아서 성경책을 펴놓고 원고를 작성하는 것만이 설교가 아니고 심방을 통한 위로 받아야 백성을 위로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설교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보세요, 황집사님의 친정 어머님이 연세가 여든 셋 입니다. 예수를 제대로 믿으신지 3년쯤 되는데 얼마나 믿음이 좋은지 제가 위로를 받고 왔습니다. 황집사님의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이 '내가 왜 예수를 진작 안믿었던고'하시면서 후회스러럽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기도하는데 '아멘 아멘 '하셨습니다.
병문안 심방을 한 후에 영안실로 갔습니다. 황집사님의 가게 아가씨 아버지 영안실로 갔습니다. 아직 미혼인 남매를 두고 떠났습니다. 교사생활을 하시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사모님이 무교라고 하셨는데 남편이 그래도 병상에서 다른 목사님의 심방을 받으시고 영접하셨는데 기도라도 하고 가면 안되겠느냐고 하니까 흔쾌히 허락하셔서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기도하고 위로를 건네고 돌와 왔습니다. 그분들이 예수님을 믿는 분들이 아닌데도 아멘을 따라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는 자가 되십시오. 위로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 나타날 때 늦추지 마시고 위로하는 일에 우선 하십시오. 특히 권사님들의 사명은 목회자를 도와 성도를 위로하고 심방하는 일입니다. 위로의 은사를 받아 심방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우리 자신이 답답할 때, 모든 일이 뜻대로 되지 아니하여서 고민할 때 "여호와 하나님은 나를 돕고 위로해 주시느니라"는 시편86:17절에 있는 말씀으로 용기를 얻게 됩니다. 사40:1 "너희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셋째로, 우리는 고민이 되는 문제를 갖고 상담하려고 우리를 찾는 분들에게 소망과 용기를 줌으로써 보혜사 성령을 받은 증거를 보일 것입니다. 보혜사를 R. S. V와 N4 영어성경에는 '상담자' 즉 counselor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밤에 바리새 사람 니고데모가 예수를 찾아와서 예수 그리스도와 상담의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무슨 문제로 상담하게 되었는지 잘 알 수는 없으나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는 말씀을 하신 것만은 확실합니다. 예수님과 상담이 끝난 후 니고데모가 완전히 변화되어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예수의 제자들은 다 도망쳐 버렸으나 공의회의 의원이었던 부자 아리마대 요셉과 공의회의 의원의 한 사람이었던 니고데모, 두 분이 예수의 시신을 안장하였습니다. (요 19:38-40) 이같이 놀랄 만한 사실은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를 찾아가 상담한 결과는 니고데모가 변화되어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기독교 방송국의 생명의 전화의 담당자에게서 들은 말입니다. 전화로 상담해 오는 사람들 중에는 사랑했던 사람에게서 배신당한 사람의 사연이 제일 많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자연주의 작가인 헨리 데이빗 도로우는 "도시 생활이란 수백만의 고독한 사람들이 함께 있는 것이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성령을 받은 신자들은 고독한 사람들이, 다시 말해서 병고나 가정 문제나 자녀 문제나 취직 문제 등으로 우리에게 상담할 것을 청해 올 때, 그들에게 소망의 빛을 비춰 주어야 하겠습니다.
어느 교회에 진실한 기독 신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의 아들이 교인들과 많은 사람들로부터 문제 있는 청년이란 말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 청년이 어느 날 교회의 목사님을 찾아와 상담을 하였습니다. 목사님은 그 청년과 상담이 끝난 후, 그 청년에게 "지금까지의 지내 온 얘기 중 다 들었는데 남자로 태어나 그만한 깡패짓 아니한 청년이 어디 있겠는가 청년은 한 목사님의 희망적인 권면을 듣고 난 후부터 열심으로 공부하여 서울 Y대학에 24세에 입학하였습니다. 그가 4년간의 학업을 마치고 졸업한 후에는 현재 교사로서 모 고등학교에 봉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 신자 된 우리는 상담자의 책임을 다함으로써 보혜사 성령을 받은 증거를 보일 것입니다.
넷째로, 우리는 도움을 받아야 할 분을 도와줌으로써 보혜사 성령을 받은 증거를 보여 줄 것입니다.
보혜사를 다른 영문 성경(T. E. V)에는 협조자, 돕는자, 즉 helper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보혜사를 공동 번역 성경에도 또한 일본어 성경에도 협조자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요한 복음 5장 1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에는 38년 된 병자가 주님의 권능으로 깨끗함을 받은 기사가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베데스다라는 못이 있는데 어떤 병자라도 베데스다 못의 물이 동할 때, 먼저 들어가면 병이 깨끗해짐을 받았습니다. 그 많은 병자들 중에 38년 된 병자가 있었는데 어느 누구 한 사람, 그 병자를 도와서 베데스다 못으로 인도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 광경을 보신 예수께서는 친히 그에게 가까이 가셔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말씀하시니 그는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요 5:8~9) 38년 된 병자는 예수의 도움으로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어린이들이 병들었을 때, 그리고 나면서 눈 먼 사람이나 죄인이라고 소외 된 사람들을 정성껏 도우셨습니다.
제사장과 레위 사람은 강도를 만나 있는 것을 다 빼앗기고 빈사 상태에 놓여 있는 그를 보고서 그냥 지나갔습니다. (눅 10:30-32) 이로써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 종교 지도자들에게서 사랑을 찾아 볼 수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수처럼 여기던 사마리아 사람은 길을 지나가다가 신음 소리를 듣고서 그를 도왔습니다. 치료비까지 다 부담하고 여관비까지 다 부담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 교회의 성도들은 과연 소외 된 분들과 불행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앞장을 서고 있는가를 반성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무관심은 죄라고 합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도 피해간 제사장과 레위 사람만이 아니라, 우리들도 도움을 청하는 분들의 청을 듣지 않고서 그들의 청을 거절했다면 기독 신자 된 우리도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의 지도자들과 결코 다를 바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불행에 처해 있는 분들을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도울 수 있는 대로 도와줌으로써 보혜사 성령을 받은 증거를 보여 줄 것입니다.
파출소 앞에 가면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도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무엇이든지 도와 드리겠습니다"라는 글을 써붙여야 하지 않을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보혜사 성령이 충만한 삶으로 성령이 충만한 삶의 증인된 모습으로 사십시오. 여러분 주위의 사람들의 단점을 변호해 주는 변호사의 책임과 , 상처받고 고민하는 교인들과 가족 식구들, 그리고 이웃에게 위로해 주는 위로자의 책임과 , 혼자서 해결하지 못해서 그 어려운 문제를 상담해 오는 자녀들이나 교우님들이나 친구들에게 상담을 잘 해서 용기를 주는 상담자의 책임과, 여러 가지 삶의 실패 때문에 도움을 청하는 분들을 정성껏 도와줌으로써 보혜사 성령을 받은 증거를 보여주는 성도님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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